‘저는 그저 아이일 뿐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보며 청년을 생각하다

“IO SONO SOLO UN RAGAZZO”
Meditando sui giovani con i re Davide e Salomone*

빈첸초 안셀모 S.J.**
윤성희 이냐시오 옮김 (구약성서학 박사)

  젊은 친구들을 믿고 의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직 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게 책임을 맡기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젊은이를 믿는 건 엉뚱한 일이 아닐까? 코헬렛은 이런 질문들에 이렇게 답하는 듯 보인다. “어린아이na‘ar가 임금이 되어 다스리[는] … 나라, 너는 불행하다.”(코헬 10,16) 심지어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사명을 주시자 어린 나이를 이유로 버티고 저항한다.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na‘ar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어린 나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지도 않고 미숙하다고 느낀 것이다. 두 구절에 모두 나오는 히브리 말 ‘나아르’na‘ar는 보통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젊은이나 청소년을 가리키지만, 어린아이와 유아를 가리키기도 한다.1)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부족하고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의 걱정에 하느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 1,7)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선택 기준이 나이를 넘어선다는 걸 보여주신다. 하느님은 다양한 경험을 했음을 드러내는 ‘자기소개서’를 보고 싶어 하는 인사 담당자처럼 선택하지 않으신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청년 시노드의 준비 모임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의 수많은 일화에서 알 수 있듯 하느님은 교회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에 가장 어린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어려운 순간에 주님께서는 젊은이와 함께 역사의 발걸음을 내딛으십니다.”2)

  실제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운명을 젊은이들에게 맡기길 두려워하지 않으심을 보게 된다.

  이사이의 막내아들 다윗

  이스라엘 왕정은 말썽 많고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랜 판관 시대를 거친 뒤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와 같이 자신들을 다스릴 임금을 정해달라고 청한다.(1사무 8,5 참조) 급기야 사울이 선택되는데, 시작은 멋지지만, 곧 그가 불순종하고 저항하는 군주임이 드러난다. 특히 필리스티아 사람들,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다.(1사무 13—15 참조)

  임금이 당신 말씀을 어기자 하느님은 그를 이스라엘 어좌에 앉히신 걸 후회하신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주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으시어,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임명하셨습니다.”(1사무 13,14) 하고 선언한다. 나중에도 예언자는 이 말에 못지않게 가혹하고 분명한 말로 사울에게 도전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1사무 15,28) 이렇게 사무엘이 하느님께서 새로운 선택을 하셨음을 선언함으로써 이야기 속 긴장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독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가 누구일지, 사울 임금보다 더 나은 이가 누구일지 궁금해 하게 된다. 그 역시 사울처럼 용맹한 전사일지, 훌륭한 집안 배경을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일지 궁금해 하는 것이다.(1사무 9,1-2 참조)

  주님께서 사울을 내치신 일에 슬퍼하던 예언자는 다른 사람을 임금으로 정해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는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기 때문’이다.”(1사무 16,1)3)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임금을 보아 두신다. 주님의 이러한 사적인 고백은 새 임금 다윗을 선택함이 사울을 선택할 때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울의 경우 임금의 임무는 ‘백성을 위해’ 다스리는 것이었다.(1사무 8,22 참조)4) 반면 다윗을 선택함은 하느님과 새 군주 사이의 인격적 관계와 특별한 친밀감에 기반을 둔다.

  이어서 사무엘은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임금을 보고자 베들레헴으로 갔다. 이 장 내내 ‘보다’vedere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 어근 ‘라아’r’h가 동사형으로 여섯 번 나오고 명사형으로 두 번 나오면서 서사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5) 그리고 하느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을 오가면서 미묘한 게임이 진행된다. 사무엘은 무엇을 볼까? 주님은 무엇을 볼까? 다른 인물들은 또 무엇을 볼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사무엘은 엘리압을 눈여겨본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 말씀 앞에 무너진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히브리 원문에서 이 문장은 복잡해서 해석하기 어렵다. 마지막 부분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대략 이렇게 된다. 사람들은 ‘눈을’agli occhi, ‘눈으로’negli occhi, ‘눈에 드는지’secondo gli occhi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al cuore, ‘마음으로’nel cuore, ‘마음에 드는지’secondo il cuore 보신다.6) 히브리어에서 ‘마음’cuore이라는 단어는 생각과 의지의 처소7)이자 선택하는 능력이 놓인 장소8)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느님은 마음을 보실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신다. 다시 말해 그분의 시선은 피상적으로 겉모습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은 곳에 이른다. 그리고 당신의 예언자도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도록 초대하신다. 사울은 힘과 혈통, 외모와 키 때문에 선택된 바 있다.(1사무 9,1-2 참조) 어쩌면 그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임금은 분명 아니었다.9)

  결국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하지만 주님은 그중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으신다. 일곱 명의 젊은이가 사무엘에게 소개된다. 이 숫자는 이사이의 아들이 전부 사무엘 앞에 줄줄이 선보였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선택받은 이가 아니었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1사무 16,11) 예언자, 그리고 그를 따라가던 독자들은 아들이 하나 더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아이는 아비의 눈에 너무 하찮아서 형들처럼 제사하는 데 초대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가장 어린 그를 보시고 바로 그를 당신 자신을 위해 뽑으셨다.10)

  다윗은 ‘남은 자식’il figlio che rimane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resto di Israele과 연결된다. 다윗이라는 인물은 주님께 변함없이 충성을 다하며 구원받아 약속의 땅에 돌아가 주 하느님을 섬기게 될 남은 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사용된 ‘남은’resto 이라는 단어는 민족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미소하지만, 주님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생각하게 한다.(신명 7,7-8 참조)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1사무 16,12) 사무엘의 눈은 계속해서 외모를 본다. 하지만 다윗의 감춰진 마음은 오직 하느님만이 보고 아신다. 그래서 그분은 어린 목동을 당신 마음에 드는 임금으로 선택하셨다.(1사무 13,14 참조)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 이사이의 집에서 가장 어린 아이가 형들이 둘러싼 가운데서 으뜸이 된다. 양떼를 돌보던 이가 이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기름부음이 있은 후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들이닥치고, 이로써 가족들은 그를 공공연히 인정하게 된다.

  다윗에게 내려앉은 영은 사울을 떠난 영에 상응한다.(1사무 16,14참조) 그리고 사울은 이제 악한 영에게 괴롭힘 당하며 겁에 질린다. 그의 신하 가운데 하나가 다윗이 비파 소리로 임금을 편안해지게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그런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비파를 잘 탈 뿐만 아니라 힘센 장사이며 전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1사무 16,18) ‘보다’vedere라는 동사가 여기에서도 나온다. 보는 이는 사울의 젊은 신하12)이며, 그는 이사이의 아들 중에 임금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있다고 본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신하의 묘사는 이야기 뒷부분에 다시 나오게 될 이사이의 어린 아들의 여러 면모를 미리 드러낸다.

  이 신하의 묘사에서 사울은 다윗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에게 데려오게 한다. 이야기가 흐르면서 이렇게 불려온 다윗에게 힘과 용기, 무기를 다루는 기술과 지혜가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것도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하느님과 한 신하의 시선만이 소년의 모습 안에서 장차 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를 드러내는 표징들을 볼 수 있다.

  거인과 소년

  1사무 17장에서 다윗은 다시 한번 이야기에 등장한다.13)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이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다. 필리스티아 군대에서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지닌 장수 하나가 등장한다. 키가 3미터에 50킬로그램 정도 되는 갑옷을 입은 거인이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의 장수 하나와 일대일 대결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병사뿐 아니라 사울 임금도 그 앞에 나서지 못하고 두려워 떤다.(1사무 17,11.24 참조) 이제 어떻게 될까? 누가 나서서 골리앗과 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수 있을까?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 무렵 나이가 어린 양치기 다윗이 이스라엘 군영에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던 형들에게 먹을거리를 전달하러 왔다. 하지만 도착한 뒤 그는 아버지가 시킨 일만 하지 않고 필리스티아의 거인을 쓰러뜨린 이에게 주어질 상이 무엇인지 묻고 다닌다.

  전쟁터에 이런 소년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짜증과 불신, 분노와 같은 갖가지 반응을 보인다. 특히 그의 맏형 엘리압은 화가 나 다윗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너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1사무 17,28) 엘리압은 전쟁터에 다윗이 와 있는 걸 못된 짓, 이를테면 짜증스러운 침입 정도로 이해한다. 사실 그의 눈에 다윗의 마음은 교만하고 고약하다. 하지만 독자는 다윗이 사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전쟁터에 왔지 야망이나 허영심 때문에 오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골리앗과 싸우고 싶어 하는 다윗을 보자 사울마저 믿지 못하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na‘ar이 아니냐?”(1사무 17,33) 사울은 다윗에게서 오로지 소년의 모습만을 본다. 그래서 경험 없는 소년이 훈련을 받아 젊은 시절부터 전투에 나선 경험 많은 성인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한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다윗은 낙담하지 않고 사울의 무거운 갑옷을 마다한다. 그러고는 자신만의 무기, 곧 무릿매 끈과 개울가에서 고른 돌멩이를 가지고 전투에 나선다. 그는 임금의 갑옷을 입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자유롭고 가벼운 몸가짐으로 자신의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도움에 기댄다.

  어린 다윗을 보자 골리앗 또한 조롱과 경멸이 가득한 반응을 보인다.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1사무 17,42) 거인이 보기에 다윗의 어린 나이와 예쁘장한 외모, 그리고 불그스름한 머리카락은 다윗을 업신여기고 내려다봐도 되는 충분한 이유이다. 골리앗의 판단 기준은 오롯이 겉모습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피상적이다.14)

  하지만 이사이의 막내아들은 낙담하지도 기분 나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 비밀을 드러내며 필리스티아의 거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사무 17,45-47)

  어린 소년은 자기의 진정한 장점을 활용하려 한다. 그의 무기는 그를 선택하여 임금으로 임명하신 분이시다. 어른인 엘리압, 사울, 골리앗과 달리 주님은 다윗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백성을 해방시킬 사람으로 어린 소년에게 내기를 거셨다.

  다윗의 힘이 주님에게 있다면, 그가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골리앗을 쓰러뜨린 무릿매였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버린 그의 통찰력과 지적 능력이 으뜸가는 도구였다. 다윗이 똑똑하고 지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골리앗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주님에게 선택받았음을 알았지만, 이런 깨달음은 그의 능력과 짝을 이루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무모한 바보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택은 당신께서 주신 다윗의 재능과 짝을 이루었다.

  다윗은 대단한 기술과 명민함을 지니고 움직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골리앗에게 승리를 거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적 작용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며 이스라엘의 신이신 하느님의 작용 또한 드러난다. 다윗은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1사무 17,37.45-47 참조)15)

  솔로몬, 너무 어린 임금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질 권한을 부여받은 젊은이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성경에 다윗 선택 이야기(1사무 16—17장 참조)만 있는 게 아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도 아버지의 왕국을 어린 자신의 어깨에 지게 되었을 때 스스로 ‘작은 소년’na‘ar qāṭōn일 뿐이라고 느낀다.

  다윗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유언을 남겨야 할 순간이 왔다.16) 그는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1열왕 2,2-4)

  어떤 이들은 후대의 편집자가 다윗의 유언 첫 부분(2-4절)을 끼워 넣었다고 생각한다.17) 다윗이 아들에게 자신의 통치 기간에 반대했던 이들에게 앙갚음하도록 피의 복수를 지시하는 잔혹한 뒷부분(5-9절)을 순화하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사실 서사 관점에서 볼 때 이 첫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늙은 임금이 다음 세대에게 여기 언급된 주님의 약속(2사무 7 참조)과 모세 율법을 넘겨줌으로써 아버지 역할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다윗은 아비로서 책임을 다한다.18)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받은 법과 그 자신이 받은 약속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명기에 묘사된 부모(6,1-9 참조)처럼 율법을 아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임금답게 늘 주님의 법을 가까이한다.(신명 17,18-20 참조)

  후에 성경의 화자는 솔로몬이 주님을 사랑하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명한 바를 따르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앙은 여전히 불확실함을 말해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주님을 섬기면서도 산당에서 제물을 바치기도 했는데, 산당은 온갖 우상 숭배가 벌어지는 곳이었다.(1열왕 3,3 참조)19)

  주님께서 당신을 솔로몬에게 드러내시는 건 바로 그가 기브온에서 이렇게 제사를 바치던 때이다. 아비가 자식에게 신앙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솔로몬도 반드시 자기 아버지의 하느님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

  “기브온에서 주님께서는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1열왕 3,5) 주님의 말씀은 놀랍다. 그분은 솔로몬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단죄하지도 않으시고 꾸짖지도 않는다. 그저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솔로몬의 태도도 놀랍다. 역설적으로 그가 겸손하고 분별 있는 마음으로 지혜이신 주님을 맞아들일 때 처음으로 지혜를 얻게 된다.20) 그는 무엇을 청하는 것이 합당한지를 알고 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na‘ar qāṭōn에 지나지 않아서 나가고 들어오는 법21)을 알지 못합니다 …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1열왕 3,7-9)

  솔로몬은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일컬으며 어린 나이 때문에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반응은 하느님에게서 사명을 받았을 때 예레미야와 비슷하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na‘ar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솔로몬은 아이이기 때문에 공직을 맡거나 군사 통수권을 쥘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22) 그래서 솔로몬은 “나가고 들어오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께 ‘듣는 마음’을 청한 걸 보면 이 어린 임금이 이미 지혜로움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에게 귀는 사실 가장 중요한 지각 기관이다. 성경에서 ‘듣는다’ascoltare라는 동사는 천 번이 넘게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쉐마 이스라엘Šema‘ Yisrā’ēl,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6,4)라는 말로 매일 기도를 시작한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백성은 토라에 순종하며 생명에 이르는 길을 택한다.

  솔로몬은 경험이 없고 여전히 인생에 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젊은 임금이 분별하는 마음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려면 듣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솔로몬도 아버지인 다윗처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임금이 될까? 그의 말 속에서 빛나는 군주의 모범은 희망을 준다. 솔로몬은 자기 이익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임금(1사무 8,11-18에 있는 사무엘의 연설을 보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섬기길 원하는 임금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님은 솔로몬의 요청을 기꺼워하신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1열왕 3,11-12)

  솔로몬이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걸 청했으니 주님은 그에게 모든 것, 특히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하신 적 없는 부와 영광을 주신다.

  잠에서 깨어난 솔로몬은 새로운 깨우침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밖으로 드러나, 이제 그는 산당에서 제물을 바치지 않고 주님의 궤 앞에 설 것이다.23)

  결론

  잠언에서 젊다는 건 경험 미숙과 분별의 부족과 연결된다. “어수룩한 자들 속에서 누군가를 보게 되었다. 청년들 속에서 지각없는(직역하면, ‘마음이 없는’) 젊은이 하나를 지켜보게 되었다.”(잠언 7,7) 하지만 하느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을 선택하신 일은 이런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어 보던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사도 13,22) 하느님의 시선은 먼 곳에 이르시니, 그분은 장차 이스라엘과 세상 모든 백성을 위한 메시아를 후손으로 갖게 될 한 젊은이에게 장기 투자를 하신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역시 임금이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로만 보인다. 꿈에서 하느님이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여린 어깨에 너무 무거운 책임이 놓여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걱정하면서도, 듣는 마음을 청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구원사에서 주님은 젊은이를 믿으시고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는 당신 백성의 운명을 맡기신다. 이것이 미래를 믿고 생명을 믿으시어 내일이 가져다줄 새로운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주신 계시이다.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


* La Civiltà Cattolica, 4033 III (7/21 luglio 2018), 3-13.
** Vincenzo Anselmo S.J.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참조: Luis Alonso Schökel – Marco Zappella, Dizionario di ebraico biblico,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2013), 554. 성경에서 성인기의 시작을 언제로 보는지는 불확실하다. 어떤 구절에서는 20살이 되면 청소년기가 끝난다고 본다(탈출 30,14; 민수 1,3.18; 14,29). 하지만 어떤 구절에서는 25살까지(민수 8,24), 어떤 구절에서는 30살까지 청소년기가 지속된다고 본다(민수 4,3.23; 1역대 23,3).; 참조: Hans F. Fuhs, “na‘ar” in Grande lessico dell’Antico Testamento V, eds., Gerhard J. Botterweck – Helmer Ringgren, (Brescia: Paideia, 2005), 926-940.
2) Francis, Pre-Synodal Meeting with Young People, March 19, 2018,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18/march/documents/papa-francesco_20180319_visita-pcimme.html (접속일: 2019. 1. 25)
3) 이는 본문을 직역한 것이다.
4) 참조: Jean-Pierre Sonnet, L’alleanza della lettura. Questioni di poetica narrativa nella bibbia ebraica, (Rome: Gregorian & Biblical Press, 2011), 146.
5) 참조: Robert Alter, The David Story. A Translation with Commentary of 1 and 2 Samuel,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99), 85.
6) 여기 쓰이는 히브리 전치사 르le를 해석하는 여러 방법에 관해서는 Schökel – Zappella, Dizionario di ebraico biblico, 408-411를 참조하라.
7) 참조: Richard D. Nelson, I e II Re, (Turin: Claudiana, 2010), 40.
8) 유대 사고방식에서는 감정이 내장이나 어머니의 자궁에서 일어난다고 여긴다. 참조: Adalberto Sisti, “Misericordia,” in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eds., Pietro Rossano – Gianfranco Ravasi – Antonio Girlanda, (Cinisello Balsamo (Milan): Paoline, 1988), 978-984.
9) 히브리어에서 ‘톱’ṭôb이라는 단어는 ‘잘생겼다’는 뜻과 ‘좋다’라는 뜻을 모두 지닌다. 메이어 스턴버그는 사무엘기에서 ‘잘생긴’이라는 표현에 담긴 양면적 의미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다룬다. Meir Sternberg,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Ideological Literature and the Drama of Reading,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354-364.
10) 창세 4장에서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굽어‘보시지만’ 카인의 제물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야곱과 에사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더 어린 사람을 선택하신다. 후에 요셉은 형제들 가운데 으뜸이 되고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는데, 이들도 모두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어렸다.(판관 6장 참조)
11) 참조: Massimo Gargiulo, Samuele. Introduzione, traduzione e commento, (Milan: San Paolo, 2016), 175.
12) ‘나아르’na‘ar라는 단어는 젊은이를 뜻할 수도 있고, 하인, 시종, 심부름하는 소년을 가리킬 수 있다. 참조: Schökel – Zappella, Dizionario di ebraico biblico, 554.
13) 이스라엘 역사에 다윗이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가 둘 있다. 아마도 이 두 이야기 바탕에는 성경에 보존된 두 가지 서로 다른 전승이 깔려 있을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다윗이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로버트 알터는 1사무 16장은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어린 다윗을 부르시는지에 초점을 두는 반면, 1사무 17장은 수평적 관점을 제공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17장은 이사이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말하고 싸우는지 보여주며, 주님의 직접적 관여는 보이지 않는다. 참조: Alter, David Story, 110f.
14) 참조: Gargiulo, Samuele, 189.
15) 성경 이야기 속 인간의 작용과 하느님의 작용 사이에 있는 연관성에 관해서는 Yairah Amit, “The Dual Causality Principle and Its Effects on Biblical Literature,” Vetus Testamentum, 37 (1987) 385-400을 참조하라.
16) 참조: 창세 28,1-4; 49,29; 2열왕 20,1.
17) 참조: Alter, David Story, 374.
18) 참조: Fabrizio Ficco, “‘Sii forte e mostrati uomo.’ La paternità di Davide in 1 Re 1-2,” Rivista Biblica, 57 (2009), 257-272.
19) 참조: Jerome T. Walsh, 1 King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6), 72.
20) 열왕기 상권에 있는 솔로몬의 기도는 지혜서에 등장하는 다윗의 아들이 하는 말과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7-10)
21) 역자 주: ‘나가고 들어오는 법’은 원문을 직역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백성을 이끄는 법’이라고 옮겼다.
22) 참조: Mordechai Cogan, I King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New York: Doubleday, 2001), 186.
23) 참조: Cogan, I Kings,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