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크리스천 문화에서 신앙을 식별하기

*DISCERNERE LA FEDE IN UNA CULTURA POSTCRISTIANA**

파올로 감베리니 S.J.***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옮김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교종 프란치스코는 2017년 4월 28일 이집트 카이로의 알아자르(Al-Azhar)에서 열린 국제 평화 컨퍼런스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국제 사회의 대화는 다음 세 가지 근본 규칙을 지킨다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의 정체성을 존중할 의무, 둘째, 다름을 받아들일 용기, 셋째, 다른 이들의 의향에서 진심을 보려는 의지이다.1)

  교종은 그의 권고 문헌 『복음의 기쁨』(EG)에서 “참다운 개방은 분명하고 기쁨에 찬 정체성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신념을 확고하게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신념을 이해하고자 하는’a comprendere quelle dell’altro, 그리고 ‘대화는 모두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sapendo che il dialogo può arricchire ognuno 열린 마음을 내포합니다.”(EG 251)2)라고 상기시킨 바 있다.

  신앙의 ‘로고스’logos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는 처음부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리스 문화, 중세 스콜라철학, 종교개혁, 계몽주의, 근대주의, 원천으로 돌아가기Resourcement3), 다원주의가 그것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세계화된 우리 환경에서 여러 종교의 신앙에서 뻗어 나오는 문화적 과정에 열려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베네딕토 16세가 2006년 9월 12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했던 연설을 참고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연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폭력’violenza이 하느님의 본성 및 이성(理性)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확신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에 반대된다. 교종은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신적인 하느님은 당신을 로고스로 드러내셨고 우리를 위하시는 사랑이 충만하여 로고스로 행동하셨으며 지금도 그렇게 행동하시는 분이다.” 교종은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로 로고스logos아가페agapē를, 이성과 비폭력을 결합하고자 했다. 이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 항상 요구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적 조건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Non intratur in veritatem nisi per caritatem.”(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면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4) 아가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가 세상에서 교회가 겪는 변화들에 열려 있되, 여러 형태의 근본주의에 굴하지 않고 또 모든 형태의 ‘베네딕토의 선택’Benedict Option5)을 피하게 한다.

  이탈리아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첫 대담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역사적 계시 안에서, 시간 안에서 드러나십니다. 시간은 어떤 것이 흘러가는 과정을 시작하고 공간은 그 과정을 고정시키지요. 하느님은 시간 안에, 곧 진행되는 과정 안에 계십니다.”6)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는 모든 형태의 고정과 경직성을 즉시 한쪽으로 밀쳐놓을 준비가, 항상 더욱더 세상과 인간문화의 역사 안에서 ‘식별 과정’processo di discernimento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과정을 ‘철학적, 신학적, 사목적 사상의 다양한 노선’(EG 40)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로고스는 ‘미묘한 차이도 없이 모두가 옹호하는 단일한 교리’가 아니라 ‘복음의 다함없는 풍요로움이 지닌 여러 측면을 더 잘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데’(EG 40)7)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다수성(多數性)과 다양성에서 형태를 취한다.

  이 식별 과정에서 교회일치의 과제로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고 그리스도교 교회들 사이에 신앙의 교리를 화해시키도록 도와줄 수 있는 세 가지 원리를 구성해 보자. 첫째는 ‘진리의 위계(位階)’gerarchia delle verità라는 원리이고, 둘째는 ‘교리의 진화’evoluzione della dottrina라는 원리이며, 셋째는 ‘살아 있는 신앙’fede vivente이라는 원리이다.

  우리 논의의 목적을 보건대, ‘교의’dogma를 ‘교리’dottrina와 구분하는 요소인 권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교리’dottrina와 ‘교의’dogma라는 용어는 동의어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신앙과 윤리에 관한 모든 교리가 교의가 되지는 않았으며 단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것으로, 혹은 가장 높은 교회 권위(공의회, 교종의 무류적 교도권)에 의해 본질상 계시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인정된 교리만이 교의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도 교의도 모두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insegnamenti으로 간주된다.

  교리를 식별함, 교리 안에서 식별함

  『복음의 기쁨』 36항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리 식별의 첫째 원리를 명백히 밝힌다. 교회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 11항을 인용하면서 교종은 진리의 ‘위계’gerarchia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신앙의 교의들 및 윤리적 가르침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와 맺고 있는 연계는 각기 ‘다르다’diverso. 교종은 같은 권고 문헌에서 특히 교회일치의 대화를 다루면서 이 식별의 원리를 다시 취한다.

  진리의 위계라는 원리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선포와 봉사와 증언이라는 공통의 형태를 향해 신속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은 많고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자유롭고 풍성한 활동을 실제로 믿는다면 우리는 서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EG 246)8)

  둘째 원리는 ‘교리의 진화’evoluzione della dottrina로서, 존 헨리 뉴먼이 제시했던 바와 같다.9) 교리의 발전은 단순히 핵심과 본질은 그대로 두고 교리의 표현공식만 바뀌는 데 있지 않다. 그러한 유형의 진화라면 교리 안에 암시적으로 이미 들어 있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 이 진화를 일으킨 외적 요인들에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건너가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국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을 진리의 계시에 안으로부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전통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유통되지 않는 동전에 비유될 수 없다. 전통은 그저 반복하기만 해야 하는 죽은 표현공식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전제들의 발전도 아니다. 하나의 전통이 지니는 생명력은 변화하는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하지만 똑같은 내용을 유지하는 어떤 다른 표현공식에 있지도 않다. 유일하고 동일한 전통이 새로운 역사적 상황 앞에서는 또 다시 토론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역사성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10)

  신앙의 교리를 식별하기 위한 셋째 원리, 곧 ‘살아 있는 신앙’fede vivente의 원리는 『복음의 기쁨』의 한 대목에서 나온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들이 온전히 정통교리적인 언어를 듣게 된다면 그들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언어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것을 받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과 인간 존재에 관한 진리를 전한다는 거룩한 지향으로도 어떤 경우에 우리는 거짓 신이나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 아닌 인간적 이상을 그들에게 줍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교리조문에 충실하면서도 실체를 전달하지 못합니다.(EG 41)11)

  신앙 표명이 실행되려면 의지의 동의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명백함은 이성적 명백함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2) 의지의 외적 기능에 의해 움직이는 신앙의 명백함과 이성적 명백함 사이의 역동적 긴장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종종 그러한 긴장은 어떤 신앙의 교리에 충실한 지성과 논의의 여지가 없는 진리에 충실한 지성 사이에 불협화음 상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불일치로 인해, 멈추거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충실성 안에서 연구와 조사와 탐구가 일어난다. 신앙 표명은 믿는 내용의 명백함을 향해 나아가는 지성의 움직임을 없애지 않으며, 따라서 ‘믿기’credere와 ‘생각하기’pensare 사이의 차이를 없애지 않는다. 방금 말한 긴장은 양심과 신앙 사이 ‘믿음의’credente 유대를 ‘살아 있는’vivo 유대로 정의한다. 그런가 하면 죽은 신앙은 ‘교리’dottrine를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믿기’credere와 ‘생각하기’pensare 사이의 차이를 흐린다. 신앙의 진리에 대한 그러한 왜곡은 신앙의 교리를 경직된 공식으로 바꾸어 버린다.

  ‘객관적’oggettiva 신앙의 실재(fides quae)13)와 ‘주관적’soggettiva 신앙의 실재(fides qua) 사이에는 ‘상호침투’pericoresi의 운동이 있다. 그래서 교의적 언표(言表, il credo)14)의 ‘객관성’oggettività은 신앙의 표명(il credere) 내부에 있으며, 밖에 있지 않다. 믿는 행위(il credere)의 실존적 참여가 없다면 신앙의 교리(il credo)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의 표현공식의 ‘진리’verità는 그것을 고백하는 주체의 믿는 행위와 자유로운 동의의 과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oggettivo이고 ‘동떨어진’distaccato 어떤 것이 아니다. 어떤 교의 표현공식이 믿는 사람 안에 신앙의 표명을 일깨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효력을 상실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Actus credendi non terminatur ad enuntiabile sed ad rem.”(신앙의 표명은 표현공식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실재에서 끝난다.)15) 2015년 11월에 피렌체에서 열린 이탈리아 교회 전국 대회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상기시켰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질문, 의심, 의문을 낳지 못하는 폐쇄적인 체계가 아니라, 살아 있으며 동요를 일으킬 줄도 알고 활력을 돋을 줄도 압니다.”16)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L)에서 교종은 평신도들에게 ‘모든 도식이 깨지는 상황 앞에서 자신들의 개인적 식별을 실행’17)할 결정적 과제가 있음을 집어 말한다. “우리는 양심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가꾸라고 요청받고 있습니다.”(AL 37)18) 식별은 단순히 교리나 규율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성장의 새로운 단계에 그리고 더욱 충만하게 이상(理想)을 실현하게 해 주는 새로운 결정에 늘 열려’(AL 303)19) 있는 일이다.

  ‘가톨릭교회와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공동 선언’(1994)과 ‘의화(義化) 교리에 관한 합동선언’(1999) 등 가톨릭교회와 다른 교회들 사이의 공동 선언 몇 가지는 식별이 단지 사목적,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교의적, 교회일치적 차원에서도 교회의 삶에 깊이 관여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가톨릭교회와 아시리아 동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서는 대화와 식별의 과정이 교회들로 하여금 과거의 교리적 차이가 ‘현재에는’nel presente 더 이상 ‘상반되는’contraddittorie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 차이들은 대개 오해에서 기인했고 정통교리가 아니라고 간주될 만한 것은 아니다.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선언’에서는 루터교회들과 가톨릭교회가 “이제는 공통된 이해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교리를 다듬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차이가 더 이상 단죄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의화 교리의 근본 진리들에 대한 동의’(5항)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차이를 식별하고 화해시키는 일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의 본질에 속한다. 2016년 10월 31일 룬드의 루터교 대성당에서 행한 강론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종교개혁 당시에 가톨릭 편에서도 루터교 편에서도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옹호하려는’professare e difendere la vera fede 진실한 의지가 있었음을,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다른 강세와 다른 언어로 고백하는 신앙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견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었음’을 인정했다.20) 2017년 4월 28일 이집트 순방에서 콥트정교회 타와드루스 2세 교종의 연설에 답사하면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더 이상 해석상의 차이라는 핑계 뒤에 숨을 수 없으며, 우리를 서로 낯설게 만든 수 세기의 역사와 전통 뒤에 숨을 수도 없음’21)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용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양자택일적’tertium non datur 동일성 원리로 정의되는 ‘호교적’apologetica 로고스를 넘어서 ‘대화적’dialogica 로고스, 즉 ‘십자가 이야기’ho logos tou staurou를 받아들이도록 부추긴다. 대화적 로고스에서는 ‘케노시스’kenotica, 다시 말해 로고스의 자기 비움에 의해 오히려 ‘논증’elenchus에 힘이 실린다. 진리를 소유물로 여기는 태도를 버리고, 어떠한 소유권도 내려놓기로 마음먹으며, 제3의 길이 주어지지 않는 ‘이분법적 사고방식’modo duale을 거부할 때 비로소 신앙의 로고스는 하느님을 입고 그리스도를 입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달리 이해하는 것은 지적 엄격함을 피하려고 타협하거나 손쉬운 설명을 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변적 특성이며 역설적 사고방식으로서 삼위일체적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이는 ‘이것 아니면 저것’aut-aut의 변증법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et-et의 변증법을 따라 진행된다. 여기에 성령이 주어진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로고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도 저것도’의 포괄성과 ‘가톨릭성’cattolicità을 되찾는다.

  이 다른 로고스의 예 하나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는 답변에서 볼 수 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1-24)

  그리짐 산과 시온 산(예루살렘) 두 산의 대립은 ‘이분법적 사고방식’modo duale을 상징한다. 이 사고방식에서는 한편이 승리하고(‘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다른 편이 패배한다(‘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비이분법적 사고방식’modo non duale은 여인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답변에 잘 드러난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산으로 상징되는) 누가 더 큰지 따지는 논리를 떠나 그리스도의 논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루카 9,46-50 참조) 이 논리는 ‘이분법적이지 않고’non duale 심지어 대립적 요소들을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o e verità 끌어안아, 신앙의 교리를 ‘다른 이들과 함께’con gli altri 그리고 다른 이들을 반드시 참여시켜 규정하기에 이른다. 교리의 식별, 교리 안에서의 식별 과정이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루카 9,50)이기 때문이다.

  2015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저녁기도 강론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산 편에 서거나 성전 편에 서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르는 모든 벽을 허무시며 더 멀리 본질로 나아가십니다. 그분은 예배의 진리를 인용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수많은 논란은 논쟁적이거나 호교적인 태도를 모두 옆으로 치워 놓고, 그 대신 우리를 결합시키는 부르심을 깊은 데서 포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성령을 통해 성자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성부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상대에게 자기 의견을 입증하려고 하는 세련된 이론적 토론의 결실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 오셔도 여전히 토론 중인 우리를 보게 되시겠지요. 하느님 신비의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만나고 서로 대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다름을 조화시키시고 갈등을 극복하시며 다름을 화해시키시는 분입니다.22)

  가톨릭교회만의 하느님이 아니시다

  교리를 식별하고 교의적 차이들을 화해시키려면 두 가지 조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가톨릭 신자들은 진리가 온전히 소유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진리에 관한 지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에 좌우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믿지 않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Lettera a chi no crede 에서 『라레푸블리카』 신문의 전 편집장이자 언론인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믿는 이들에게 “진리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곧 자신의 역사와 문화, 자신이 살아가는 상황에서 시작하여 그 안에서 진리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23)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는 ‘관계’relazione 로서의 진리와 ‘더, 더욱’magis 으로서의 하느님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기초한다. 둘 다 교리의 ‘대상’oggetto인 ‘초월자’il Tra-scendente를 결코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로 여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항상 더 크시다.”Deus sempre maior. 또, 교리의 ‘길’via은 ‘오르내리며’tra-scendere, 파악한 신비를 계속 초월해 가는 지속적 과정으로 여긴다. 진리는 하나의 표현공식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는 ‘어떤 이’Qualquno,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을 만나라고 요청하는 ‘어떤 이’Qualquno이다.

  교리와 교의의 표현공식들을 초월할 필요는 『복음의 기쁨』의 두 구절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교회는] 계시된 말씀의 해석과 진리의 이해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 미세한 차이도 없이 모두가 옹호하는 단일한 교리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불완전한 분산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교리조문에 충실하면서 실체를 전달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위험입니다. “진리의 표현은 여러 형태일 수 있으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는 의미를 지닌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표현 형태들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합시다.(EG 40-41)24)

  교종 프란치스코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 제2주간의 영의 식별 여덟째 규칙(336번)에서 설명하는 ‘이유 없는 위로’consolazione senza causa의 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는 이 ‘이유 없는 위로’consolazione senza causa를 하느님만을 대상으로 하는 주제가 없는 체험이라고 말한다. ‘하느님’Dio이라는 말로 의도하는 것은 하나의 정의(定義)나 개념이 아니고 모든 개념과 정의 너머에 있는 지평이다. ‘이유 없는 위로’consolazione senza causa는 다른 모든 것을 상대적이 되게 하는 비판적이고 초월적인 전제이다. 이냐시오는 ‘초월적’trascendentale 순간과 ‘범주적’categoriale 순간을 주의 깊게 구분한다. 초월적 순간은 하느님께서 제1원인으로 활동하시는 순간이고, 범주적 순간은 인간 응답이 하느님의 직접 행동을 취해다가 생각, 표상,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순간이다.25) 이 구분으로 인해 교리의 모든 표현 공식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마지스라는 이냐시오적 개념에 함축된 하느님의 역동적 초월성에 종속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 라너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한 건전하고 적절한 이해를 주장한다.26)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대담에서 신비에 대한 예수회의 전통을 상기시킨다. “예수회원은 완성되지 않은 생각, 열린 생각의 사람이어야 해요. 예수회 안에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생각, 신비적이기보다는 더 교육적-수행적인 사상을 살아왔던 시대들이 있었습니다.”27) 이 ‘신비적’mistico 사고의 ‘넘어서는’trasgressivo 특성은 하느님 신비에 대한 모든 체험과 이해를 규정하고 ()형성한다. ‘넘어서는’이라는 의미의 ‘trasgressivo’라는 말은 ‘너머로 건너가다’라는 의미의 transgredior’에서 왔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불확실성이 커짐을 인정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적으로 확실하게 하느님을 만났고 일말의 불확실성도 스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좋지 않아요. 저에게 이건 중요한 열쇠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종교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의미이지요. 모세와 같은 하느님 백성의 위대한 안내자들은 항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지요. 우리의 확실성에가 아니라 주님께 자리를 남겨드려야 하지요.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 위로의 확인으로 열려 있는 모든 참된 식별에는 불확실성이 들어 있습니다.28)

  이 불확실성이 열어 놓은 비어 있음, 혹은 ‘아직 완성되지 않음’il non-ancora은 대화의 광장인 ‘아레오파고’areopago를 가능케 하는데 이곳에서 신앙 공동체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식별’discernimento를 행한다.

  이렇게 식별에는 신비적 차원이 있다. “하느님은 정의될 수 없다.”deus definiri nequit라는 부정을 통해29) 하느님을 아는 것만이 초월의 과정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스칼파리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가톨릭교’cattolico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가톨릭교에 속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교 하느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실 뿐입니다.”30) 그리고 이탈리아 『치빌타 카톨리카』 편집장과의 대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걸어가면서 길에서 만나는 것이지요. … 식별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복고주의자요 법률주의자라면,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찾지 못합니다. 전통과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하느님께 새로운 자리를 열어드리는 용기를 가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항상 규율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는 사람, 지나치게 교리적 ‘확실성’sicurezza을 중요시하는 사람, 잃어버린 과거를 고집스럽게 회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고정된 퇴행적 시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은 수많은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저에겐 교의적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삶 안에 계신다는 것, 하느님은 각자의 삶 안에 계신다는 것이지요.31)

  위에서 말한 ‘믿지 않는 이에게 보낸 편지’Lettera a chi no crede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14장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Io sono la via, la verità e la vita라고 하신 말씀을 이렇게 해설한다.

  결정적으로 사랑과 온전히 하나인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개방성이 요구됩니다. 그러니까 용어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어쩌면 절대적 대립이라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평온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32)

  문헌 「대화와 선포」(1991)에서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진리에 대한 이해는 ‘하나의 끝없는 과정’un processo senza fine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존하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을 통해서 그들 전통의 긍정적인 가치들을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서 그들은 깊이 박힌 편견을 뿌리 뽑고 이미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재검토하도록, 때로는 자신들의 신앙 자체에 대한 이해를 정화하도록 재촉 받는다.(49항)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sentimenti di Cristo Gesù(필리 2,5)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를 형성하고 변모시킨다.

  신앙의 로고스에 대한 표현의 발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한 하나의 예를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유다교적 성경 해석에 대한 문헌에서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성경 본문의 유다교적 독해가 가능하고 합당하다고 인정하며 메시아에 대한 유다교적 희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로고스가 ‘다른 이들과 함께’con gli altri ― 이 경우에는 유다인들과 함께 ― 신앙의 교리를 정의하게 될 때 자신의 교리 개념을 어떻게 재검토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예가 된다. 그렇게 해서 ‘대체’sostituzione라는 개념, 혹은 ‘새로운 것’il nuovo으로서의 그리스도교가 더 나은 것으로서 ‘낡은 것’il vecchio으로서의 유다교를 대신한다는 개념을 거부하게 되었다.

  교리의 식별, 화해, 변모는 교종 프란치스코가 알아자르(Al-Azhar) 연설에서 상기시켰듯이, 일종의 우상처럼 신성한 것인 양 여전히 교리 안에 자리 잡고서 절대자를 향한 참된 개방을 막는 ‘폭력의 민낯을 드러낼 수’smascherare la violenza 있게 할 것이다.33)


* 역자 주: ‘cultura postcristiana’를 여기서는 ‘포스트크리스천 문화’로 옮긴다. 오늘날 서구는 문화 전반이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영향을 받던 시대를 지나 그리스도교 문화의 지배적 영향을 벗어난 문화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참고하자면 이미 대중화된 표현 ‘postmodern’의 번역어로 쓰이는 ‘근대 후의’, ‘후기 근대의’, ‘탈근대의’, ‘하위 근대의’ 등이 의미가 부정확하다고 여겨 역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하지만 굳이 한국어 번역어를 선택한다면 ‘근대 후의’가 원래 의미에 가장 가깝다고 본다, 그럼에도 여기서 그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교 후의’라고 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근대처럼 일정한 시기 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시대 구분을 넘어 이어지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4022 (20 gen/3 feb 2018), 116-126.
*** Paolo Gamberini S.J.
1)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a Conferenza internazionale per la pace, Al-Azhar Conference Centre, Il Cairo, 28 aprile 2017; 참조: Antonio Spadaro, “Egitto, terra di civiltà e di alleanze. Il viaggio drammatico, terapeutico e profetico di Francesco”, La Civiltà Cattolica, 4005 (6 maggio 2017), 285-299.
2) 편집자 주: 본문에 인용된 교종 문헌의 번역은 역자의 번역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번역은 각주에 싣는다. “참다운 개방성은 자신의 가장 깊은 신념을 확고히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기쁘게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의 신념을 이해하려 하고’ ‘대화가 서로를 부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열린 마음입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역)
3) 역자 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원리의 한 단계.
4) Agostino, s., Contra Faustum Manichaeum, l. 32, n. 18.
5) 세상에서 물러나는 선택. ‘베네딕토의 선택’은 서방 수도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6세기 중엽 사망)에게서 나온 표현이다. 참조: Andreas Gonçalves Lind, “Qual è il compito dei cristiani nella società di oggi? ‘Opzione Benedetto’ ed eresia donatista”, La Civiltà Cattolica, 4022 (20 gen/3 feb 2018), 105-115.
6) Antonio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La Civiltà Cattolica, 3918 (19 settembre 2013), 468. 우리말 번역본은 교황 프란치스코,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집』, 국춘심 옮김, (서울: 솔 출판사, 2014), 150-151. 역자 주: 여기서 이탈리아어의 ‘공간’lo spazio은 시간적 개념으로서 ‘일정한 길이로 한정된 단위의 기간’을 가리킨다. 특정한 권력의 자리, 곧 어떤 직책의 임기처럼 권한과 함께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한다. 『복음의 기쁨』 222-223항의 “시간이 공간보다 중요하다.” 참조.
7)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철학과 신학과 사목의 다양한 사상의 흐름’, ‘어떠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옹호하는 단일한 교리’, ‘그지없이 풍요로운 복음이 지닌 여러 측면들을 드러내고 펼쳐 가는 데’이다.
8)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이렇다. “진리의 서열이라는 원칙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공통된 표현으로 선포하고 봉사하고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를 일치시키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활동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9) 참조: John H. Newman, Lo sviluppo della dottrina cristiana, (Milano: Jaca Book, 2003).
10) Walter Kasper, Wahrheit und Freiheit. Die «Erklärung über die Religionsfreiheit» des II. Vatikanischen Konzils, (Heidelberg: Carl Winter – Universitätsverlag, 1988), 37.
11)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이렇다. “신자들이 완전한 정통 교리의 언어를 듣게 된다면, 그들이 사용하고 이해하는 언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과 부합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과 인간 존재에 관한 진리를 전한다는 거룩한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거짓 신을 주거나 참으로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인간적인 이상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교리 조문에 집착한 나머지 본질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2)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II-II, q. 2, a. 1, ad 3um
13) 역자 주: fides quae는 믿음의 객관적 대상과 내용으로서 계시, 성전, 교도권의 가르침 등을 의미하고 fides qua는 신앙의 유산을 스스로 받아들여 믿는 주체의 개인적 행위로서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을 포함한다.
14) 역자 주: 이른 바 신경(信經)이라고 말하는 신앙고백문.
15) Ibid., II-I, q. 2, a. 2. 역자 주: 여기서 “실재”(res)는 하느님을 가리킨다.
16) Francesco, Discorso, nell’Incontro con I rappresentanti del V Convegno nazionale della Chiesa italiana,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5/november/documents/papa-francesco_20151110_firenze-convegno-chiesa-italiana.html (접속일: 2018. 12. 28)
17)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복잡한 상황 안에서도 자신만의 식별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이다.
18)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우리는 양심의 대체가 아니라 양심의 함양을 요청받습니다.”이다.
19)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역동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식별은 성장의 새로운 단계와, 이 이상을 더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정에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이다.
2) Francesco, Omelia, nella Preghiera ecumenica comune nella cattedrale luterana di Lund,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16/documents/papa-francesco_20161031_omelia-svezia-lund.html (접속일: 2018. 12. 28). 참조: Giancarlo Pani, “Il viaggio del Papa in Svezia”, La Civiltà Cattolica, 3994 (26 novembre 2016), 381-392.
21) Francesco, Discorso, nella Visita di cortesia a S.S. Papa Tawadros II,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7/april/documents/papa-francesco_20170428_egitto-tawadros-ii.html (접속일: 2018. 12. 28). 참조: Spadaro, “Egitto, terra di civiltà e di alleanze”.
22) Francesco, Omelia, nella Celebrazione dei Vespri nella solennità della Conversione di san Paolo apostolo,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15/documents/papa-francesco_20150125_vespri-conversione-san-paolo.html (접속일: 2018. 12. 28).
23) Francesco, Lettera a chi non crede,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it/letters/2013/documents/papa-francesco_20130911_eugenio-scalfari.html (접속일: 2018. 12. 28).
24) 역자 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은 이렇다. “[교회는]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 어떠한 차이도 용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옹호하는 단일한 교리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바람직하지 않고 혼란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교리조문에 집착한 나머지 본질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려면 이러한 표현 형태들이 반드시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5) 참조: William H. Longridge, Gli esercizi spirituali di S. Ignazio di Loyola, (Roma: Paoline, 1965).
26) 참조: Karl Rahner, “Justifying Faith in an Agnostic World”, in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XI, (New York: Crossroad, 1988).
27)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455;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42.
28) Ibid., 469;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153.
29) 역자 주: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와 같이 긍정적으로 하느님을 정의하는 긍정신학과 달리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 묘사될 수 없고 포착될 수 없다”와 같이 부정의 방식으로 정의하는 신학 방법론.
30) Eugenio Scalfari, “Papa Francesco a Scalfari: così cambierò la Chiesa. ‘Giovani senza lavoro, uno dei mali del mondo’”, http://www.repubblica.it/cultura/2013/10/01/news/papa_francesco_a_scalfari_cos_cambier_la_chiesa-67630792/?refresh_ce (접속일: 2018. 12.28).
31)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469;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155-156.
32) Francesco, Lettera a chi non crede.
33) 참조: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a Conferen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