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와 성경: 어떤 말을 믿을 수 있나?

FAKE NEWS E BIBBIA: Quale parola è credibile?*

빈첸초 안셀모 S.J.**
장재명 파트리시오 신부 옮김 (부산교구 우정성당 부주임)

  인터넷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다량의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정보들은 웹과 소셜네트워크에서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교환된다. 인터넷 사용자는 그렇게나 많은 뉴스와 데이터들이 그만큼 수많은 관점을 띠고 저마다 진실이라고 자처하는 앞에서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이 혼란 속에서 말거리를 더 많이 만드는 뉴스들, 공감과 ‘좋아요’like를 더 많이 얻는 의견들이 진실인 양 여겨진다. 이렇게 풀어내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에서 어떻게 진정으로 참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을까? 현 상황은 최대한 좋게 말해도 엉킨 실타래와 같다. 오도하는 거짓 정보가 인터넷에 도사리고서 시민들의 의식을 조종하고 있다.1)

  교종은 제52차 홍보주일 담화에서 ‘가짜뉴스’false notizie 현상을 다루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따르면,

  가짜 뉴스의 효력은 무엇보다 실제 뉴스를 ‘흉내 내는 본성’natura mimetica, 그럴싸해 보이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두 번째로, 이 가짜지만 진짜 같아 보이는 뉴스는 꼬투리를 잡아 비난하는 성향이 있어서, 고정 관념이나 공통된 사회적 편견에 호소함으로써, 또한 불안, 멸시, 분노, 좌절과 같은 손쉽고도 즉각적인 감정을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습니다.2)

  가짜뉴스 혹은 조작된 뉴스는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튀어 다니며 바이러스나 유행병처럼 퍼지는 성질이 있어서 진실을 식별하고 인식하기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 가짜뉴스는 최근에 처음 생긴 현상이 아니다.

  성경의 설화 모델

  성경의 이야기들은 시작부터 독자로 하여금 왜곡된 진실과 거짓되고 위조된 정보들로 대표되는 큰 위험을 경고한다. 언제나 진실한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를 두지 않고, 가짜뉴스에 의지하며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이 얻는 결과는 비극적이다. 성경 이야기는 독자가 저속한 것에서 값진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는 참되고 적절한 식별 훈련이 될 수 있다.(예레 15,19 참조) 성경의 설화를 읽을 때 우리는 정보의 원천에서 믿을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하여 오도되지 말라는 부름을 받는다.

  설화의 세계에서 서술자는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3) 이것은 서술자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술자를 실제 저자와 혼동하지 말고 본문 속에 있는 문학적 요소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탈출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탈출 1,1) 이것은 서술자의 목소리다.

  일단, 성경 속 서술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설화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하느님의 내적 삶을 포함하여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생각에까지 접근한다. 서술자의 또 다른 특징은 신빙성이다. 그는 독자에게 정확하고 합당한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성경의 서술자는 익명으로, 텍스트 뒤에 머물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그가 인물이나 상황에 관해 판단을 표현하거나 평가를 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성경 안에서 설화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믿을 수 있는 서술자가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관점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관점은 부분적이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거짓과 속임수(‘가짜’)가 있을 수도 있다.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폭이 넓기 때문에 관점도 다양해지며, 독자는 다양한 관점이 다투는 가운데 이야기 속을 향해 들어간다.

  독자가 생명을 주는 말씀과 죽음으로 이끄는 거짓말을 알아보고 다양한 관점과 그 신빙성 정도를 판단하는 데 성경이 어떻게 유익한지, 몇 가지 예를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뱀의 말

  창세 1장과 2-3장의 두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으면, 두 텍스트의 기원이 달라서 생기는 긴장도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보완하면서 창조 이야기를 이룬다. 서술자의 목소리는 전지적 시점에서 심지어 세상 창조에 관해서까지 이야기하는 특권을 갖는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2) 서술자는 하느님의 말씀인 “빛이 생겨라.”(창세 1,3)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속으로 느끼신 것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창세 1,4)까지 서술한다.

  성경 첫 페이지부터 독자는 서술자가 하는 모든 이야기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두는 일종의 계약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 26절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27절에서 서술자가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서술자에게 나오는 정보와 하느님에게 나오는 정보는 신뢰할 만하며, 두 관점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2장과 3장은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창세 2-3장은 인간, 즉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관해 줌으로 확대해 살펴본 설화로 이해할 수 있다. 얀 P. 포켈만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창세 2,2ㄴ-3,24의 낙원 이야기는 창조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된 인간, 인간의 기원과 인간이 하느님 그리고 세상과 맺는 근본적 관계를 더욱 주의 깊게 탐구한 이야기이다.”4)

  창세 2,8-9에서 서술자는 독자에게 하느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꾸미시고 거기에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두셨다고 언급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두 가지 과제를 맡기신다.(창세 2,15 참조) 하느님은 여기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선물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명령에 관해 앙드레 웨냉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명령은 둘로 나뉘는데 우리는 그 점을 종종 잊는다. 명령의 앞부분은 금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람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과실을 따 먹으라고 명하는 긍정적 계명이다.”5) 사람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고 사람이 동산을 지배한다. 그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가 있다.(창세 2,9 참조)

  명령의 뒷부분에서 하느님은 제한을 두시고 사람에게 경고하신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7)6)
하느님의 명령 앞에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 사람은 그 말씀을 깊이 들을 줄 알까? 아니면 오해할까?

  창세 3장에서 뱀이 처음 한 말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분의 선한 의도에 대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뱀은 여자에게 진실을 왜곡하는 도발적이고 기만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뱀은 이러한 말로 독재자 폭군 하느님의 이미지를 전하고, 당신이 직접 만드신 피조물이 연명하는 데 필요한 음식을 빼앗아 굶겨 죽이려는 분이라는 듯이 말한다.7)
그러나 독자는 뱀의 말이 진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그런 명령을 하신 적이 없으며 오히려 전혀 다른 식으로 말씀하셨다. 즉, 인간에게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그것을 먹고 죽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 우선시하신 것은 인간이 생명 안에 머무는 것이지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는 일이 아니었다.

  여자는 뱀의 말을 소심하게 부정하려고 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3,2-3) 하와의 관점 또한 왜곡되었음이 드러난다. 여자가 뱀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녀 또한 선물보다 금지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곡해한다.

  그뿐만 아니라 먹지 말라는 금지가 만지지도 말라는 금지로 바뀐다. 하와의 시각에서 금지는 더욱더 엄격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여자의 관점에서는 금지된 나무 하나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두 나무 모두 거기에 두셨다.8)
웨냉에 따르면, “금지된 나무가 그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있는 숲을 바로 그 나무 하나가 가려 버린다.”9)

  뱀은 관점을 흐려 여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독자는 다양한 관점이 경합하는 가운데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다. 다양한 관점의 무게를 재고 서술자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아 무엇이 진실인지 식별해야 한다. 뱀이 놓은 가짜뉴스의 덫은 하와의 식별을 흐리고 혼란스럽게 하는 데만 국한되지 않는다. 뱀에게는 하와를 조종하고 꾀어 하느님 말씀을 거스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뱀이 주입한 최후의 독은 남자와 여자가 당신보다 낮게 복종 상태에 있기를 원하시는, 시기하는 하느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다음의 말이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이 말 또한 거짓이다. 벌써 하느님과 서술자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사람, 즉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했다.(창세 1,26-27) 남자와 여자는 이미 이룬 상태에 도달하려고 분투할 필요가 없다. 뒤집어엎어야 할 계급도 없고 끌어내려야 할 적대자도 없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덫에 걸려 더 이상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폴 리쾨르가 했던 말처럼, “의심의 시대가 열렸다. 언어의 가장 근본적 조건, 다시 말해 언어학자들이 ‘성실성 조항’clausola sincerità10)이라고 부르는 신뢰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11)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 3,6) 여자의 생각과 갈망의 중심에는 오직 금지된 열매만 남고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다른 나무들(창세 2,9 참조)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과 선물의 선함에 대해 남자와 여자에게 의심을 주입하면서 그들의 적이며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거짓된 하느님 이미지를 만들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적었다.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 본질적 요소를 강조합니다. 곧, 해롭지 않은 허위 정보는 없고, 오히려 거짓에 대한 신뢰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왜곡은 아무리 경미해 보일지라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12)

  다수가 항상 옳은가?(민수 13-14장)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읽으면 가나안 땅을 향해 힘들고 불확실한 여정을 걷는 이스라엘 민족이 나온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에 신뢰를 둘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두려움과 걱정에 기댈지 결정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어느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을까? 거짓되고 패배주의적인 말에 넘어갔을까 아니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까? 여기서는 뱀처럼 외적 요소가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자신의 거짓말로 약속의 땅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여정 중인 백성의 정신을 지치게 만든다.

  민수 13-14장을 보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긴 여정 끝에 가나안 땅 문턱까지 왔다. 여정 내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보살피시고 먹여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려는 당신의 뜻을 확고히 하시면서, 사람들을 보내 가나안 땅을 정찰하도록 모세에게 명하신다.(민수 13,1-2 참조) 주님의 말씀은 신뢰할 수 있으며 백성을 향한 당신 호의도 모호하지 않고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각 지파에서 대표를 보내 정찰대를 꾸리되 지파의 수장을 보내도록 명령하신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 앞에서 신뢰와 권위를 지닌 이들로 구성되었다.

  그러고서 모세는 세세한 지시를 내리면서 정찰대를 보냈다. 40일 뒤에 그들이 돌아와서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과일을 보여 주면서 거기서 보았던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고했다. 여기서 이 이야기는 몇 가지 발언을 보여 주는데 공공연하게 대립하는 상반된 관점이 드러난다. 백성은 어느 쪽의 말을 믿을 것인가? 어느 진술이 참이고 어느 진술이 거짓인가? 전지적 서술자와 하느님의 말씀이 독자에게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정찰대의 보고에서 앞부분은 긍정적이었다. “우리를 보내신 그 땅으로 가 보았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곳 과일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힘세고, 성읍들은 거창한 성채로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곳에서 아낙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민수 13,27-28, 작은따옴표는 저자의 추가) 사실 이 보고는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잘 궁리한 내용이었다.13)
정찰대는 그들이 본 땅이 좋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지만, 그 땅에 사는 이들은 더욱 힘세고 무장을 갖췄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대항할 수 없다고 넌지시 말한다. 정찰대의 보고는 그 행간에서 백성을 조종하고 그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정찰대는 진실을 말하고서(“좋은 땅이다.”) 도달하기 쉽고 접근 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반박하는 말을 한다.(“‘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백성은 강하다.”) 그 결과,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가 약해지고 그들이 용기를 잃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이때 정찰대의 한 사람인 칼렙이 개입을 시도하여 다른 정찰대원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가나안에 들어가겠다는 의향을 고수하도록 백성을 격려한다. “칼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말하였다.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올라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민수 13,30-31) 하였다. 칼렙 편에는 아무도 없던 반면에, 다른 정찰대원들은 백성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낙담시키는 데 공공연하게 힘쓰고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관점의 충돌에서 신빙성 있고 전지적인 서술자가 개입한다. 독자는 대립하는 견해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방향을 잃을 위험이 있지만, 서술자가 개입하여 방향을 바로잡고 정찰대의 다음 발언에 대해 명백하고 확실하게 판단을 내린다.

  우리가 가로지르며 정찰한 그 땅은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땅에서 본 백성은 모두 키 큰 사람뿐이다. 우리는 또 그곳에서 나필족을 보았다. 아낙의 자손들은 바로 이 나필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눈에도 우리 자신이 메뚜기 같았지만, 그들의 눈에도 그랬을 것이다.’(민수 13,32-33, 작은따옴표는 저자의 추가)

  정찰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하는 땅(민수 13,1-2 참조)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 서술자는 정찰대의 보고 가운데 근거가 없고 왜곡된 정보들을 알려준다. 정찰대의 보고는 터무니없으며 과장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금방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땅이 이제는 주민들을 삼켜 버리는 땅으로 바뀐다.14)
정찰대는 다시 아낙의 자손들을 언급하는데, 이번에는 거인족에 속한 사람들처럼 묘사한다. 그 땅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답고 좋은 곳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심연이나(창세 1,2 참조) 가꾸지 않은 황무지처럼 적대적이고 해로운 신화적인 곳으로 제시되고,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은 땅 위에 떨어진 반신(半神), 원시의 기이한 존재로(창세 6,4 참조) 묘사된다.15)

  정찰대는 이스라엘을 속이고 그들의 판단을 조종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채색하고 강조한다. 그들은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말한 표현을 왜곡하여 근거 없는 정보를 퍼뜨리고 거짓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백성의 수장들이 스스로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권한을 방패 삼아 거짓 정보를 전하고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낙담을 주입하는 것이다. 정찰대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나와 다르고 알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이용한다. 마침내 그들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그들의 관점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투사한다. 이스라엘의 수장들은 자신들이 작다고 느꼈고, 상대도 자신들을 똑같은 눈으로 보리라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정찰대가 전한 말과 두려움에 영향을 받고, 그들의 거짓된 말을 신뢰한다. 수장들 다수의 견해가 칼렙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우세했다. 그렇게 해서 패배주의적이지 않은 유일한 견해는 무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하면서 울부짖고 통곡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불만과 조바심을 드러내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미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러 번 불평을 터뜨렸다. 마라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탈출 15,24 참조), 그 뒤에는, 이집트에서 먹던 빵과 고기 냄비를 회상하면서(탈출 16,2-3.7-8 참조) 그리고 다시 한번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였다.(탈출 17,3 참조) 하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도에 새로운 뭔가가 있다.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민수 14,4) 전에는 ‘이집트에 대한 향수’nostalgia dell’Egitto 였던 것이 이제는 돌아가려는 열망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해 주실 때 하신 모든 일을 뒤집어엎고, 모세의 권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권위를 반박한다.

  칼렙과 여호수아가 용기를 가지고 이 ‘쿠데타’colpo di stato 시도에 대항하면서 이스라엘이 희망을 두는 하느님의 이름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16)
“다만 여러분은 주님을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저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을 덮어 주던 그늘은 이미 걷혀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민수 14,9) 두려워하지 말라는 초대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온 공동체가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무감각을 일깨우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두려움을 초래했고 두려움은 폭력의 문턱까지 그들을 데려갔다. 그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백성의 광기에 방벽을 놓으셨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으로의 진입은 다음 세대로 미루어졌고,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땅을 밟기 전에 또다시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민수 14,29-30 참조)

  이야기 서두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에 속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가볍지만 믿을 수 있는 이 목소리는, 떠들썩하게 외치는 정찰대의 장광설에 귀를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미하게만 들렸다. 이렇게 두려움이 신뢰를 능가했다. 서로 다른 관점의 대립 때문에 독자도 혼란스러워질 수 있었지만, 믿을 만한 판단을 지닌 서술자가 개입하여 정리한다. 서술자의 목소리는 다수가 지지하는 거짓과 칼렙과 여호수아 단 두 사람이 말하는 진실을 식별하도록 독자를 안내한다.

  결론

  설득력이 있고 그럴듯한 이야기일수록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더 힘세고 당당한 소리가 그만큼 더 믿을 수 있는가? 다수가 지지하는 의견이면 저절로 진실이 되는가? 창세 3장과 민수 13-14장의 이야기는 진실에 대한 왜곡이 어떻게 독자에게 식별 문제를 제기하는지 보여 준다. 어떤 말의 편에 서야 하는가? 어떤 말이 진실이며 생명으로 이끄는가?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매혹적인 약속과 함께 설득력 있고 마음을 빼앗는 말로 뱀이 슬며시 심은 의심은 여자를 속인다. 그러나 서술자는 참되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독자에게 전하면서 거짓과 음모의 가면을 벗긴다. 민수기 이야기에서 속임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과 좌절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의 착각과 공포를 조장하며, 새로운 것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위험으로 여겨지는 낯선 민족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긴다. 주의 깊은 독자는 이야기의 역동 속에서 하느님의 약속과 서술자에게 의지하는 한편, 상반된 관점들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들은 진실임을 내세우는 많은 말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욱 신뢰할 만한지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며, 손쉬운 감정에 집중해서 실재를 왜곡하고 판단을 조종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것을 내뱉는다.”(잠언 15,28) 뉴스와 의견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성경은 우리가 거기 압도되지 않도록 초대하며, 공포를 이용하거나 헛된 약속을 날리는 구호들의 즉각성에 휩쓸리지 않고 멈춰서 생각하고 숙고하게 한다.

  ‘진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emet’mn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굳건하다essere fermo, 영속하다essere stabile, 안정되다essere solido, 충실하다essere fedele’이며 따라서 ‘믿어도 되다essere sicuro, 확실하다certo, 참되다vero’는 뜻이 된다. 이러한 확신은 오직 하느님께만, 당신 백성에게 신실하시고 참된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시는 하느님께만 둘 수 있다.


* La Civiltà Cattolica, 4041 (3/17 novembre 2018), 213-223.
** Vincenzo Anselmo S.J.
성경·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 이 주제에 관해서는 또한 Francesco Occhetta, “Tempo di post-verità o di post-coscienza?”, La Civiltà Cattolica, 4005 (6 maggio 2017), 215-223를 참고하라.
2) 교황 프란치스코,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13246 (접속일: 2019. 1. 5).
3) 성경의 설화 모델의 광대한 고찰을 보려면, Jean-Pierre Sonnet, “L’analisi narrativa dei racconti biblici”, in Manuale di esegesi dell’ Antico Testamento, eds., Michaela Bauks-Christophe Nihan, (Bologna: EDB, 2010), 45-85를 참고하라.
4) Jan. P. Fokkelman, Come leggere un racconto biblico, (Bologna: EDB, 2015), 132.
5) André Wénin, Da Adamo ad Abramo o l’errare dell’uomo. Lettura narrativa e antropologica della Genesi. I. Gen 1,1–12,4, (Bologna: EDB, 2008), 45.
6) 메팅거에 따르면, 창세 2,17의 텍스트는 단죄의 형식을 담은 문장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위험에 대한 주의 경보이다. 참조: Tryggve N. D. Mettinger, The Eden Narrative: A Literary and Religio-historical Study of Genesis 2–3, (Winona Lake, I.N.: Eisenbrauns, 2007), 22.
7)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9) 이 점에 대해서는, Wénin, Da Adamo ad Abramo. 30-32를 참고하라.
8) 폴 주옹에 따르면,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는 표현은 두 나무가 동등하다는 술어의 연결을 포함하는데, ‘동산 한가운데에는’이라는 문구를 삽입하면서, 둘로 나뉜 것이다. 그러므로 두 나무 모두 에덴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참조: Paul Joüon-Takamitsu Muraoka,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Roma: Gregorian and Biblical Press, 2011²), 117t.
9) Wénin, Da Adamo ad Abramo. 69.
10) 편집자 주: 성실성 조항이란 화자가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신뢰와 전제이다. Shlomo Biderman, Crossing Horizons: World, Self, and Language in Indian and Western Thought, trans. Ornan Rote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8), 42. 혹은 계약 당사자 간에 내용을 변경할 필요가 생기면 양 당사자가 ‘성실하게’ 논의하여 개정하겠다고 계약서상에 밝히는 짧은 진술을 말한다. Bruce Barnes, Culture, Conflict, and Meditation in the Asian Pacific,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7), 54.
11) André LaCocque-Paul Ricœur, Come pensa la Bibbia. Studi esegetici ed ermeneutici, (Brescia: Paideia, 2002), 60. 편집자 주: 우리말 번역은 다음을 참고하라. 앙드레 라콕·폴 리꾀르,『성서의 새로운 이해』,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0, 김창주 옮김, (파주: 살림출판사, 2006), 74.
12) 교황 프란치스코, 「제52차 홍보 주일 담화문」, 2항.
13) 올슨에 따르면, 정찰대의 첫 보고는 편향되지 않았고 판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이 백성에게 전한 두 보고 사이에 차이와 대립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참조: Dennis T. Olson, Numeri, (Torino: Claudiana, 2006), 93.
14) 참조: Ibid., 94.
15) 그리스어 성경은 ‘거인족’giganti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히브리어 성경은 nefili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동사 nfl(떨어지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떨어진 자들’i caduti이라는 뜻이다. 창세 6,4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한자리에 들어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신화적 존재이지만, 본문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 반신의 존재들은 홍수 때에 사라졌다고 하므로 정찰대의 보고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nefilim에 관하여는, Ronald S. Hendel, “Of Demigods and the Deluge: Toward an Interpretation of Genesis 6:1-4”,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06 (1987), 13-26을 보라.]
16) 칼렙과 여호수아는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고 다수가 신봉하는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사회 심리학에서 일컫는 ‘아쉬 효과’effetto Asch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쉬 효과는 다수가 잘못된 확신을 지지할 때, 다른 주체의 견해에도 영향을 미쳐 다수와 유사한 관점을 따르는 현상이다. 아쉬 효과에 대해서는 Robert Kreitner-Angelo Kinicki, Comportamento organizzativo, (Milano: Apogeo, 2004), 402-404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