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의 복음화와 성경의 역할

LA BIBBIA NELL’EVANGELIZZAZIONE DEL MONDO MODERNO1)

사베리오 코라디노 S.J. ­ 잔카를로 파니 S.J.

임숙희 레지나 박사 옮김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입니다.”2)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 선포에 할애한 장을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이 페이지에서 말하는 내용은 단순한 동시에 복잡하다. 성경이 없으면 참된 복음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하니 단순하다. 그러나 교회가 긴 역사 동안 왜 성경을 ‘상실’(perso)했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교종은 단언한다. “하느님 말씀으로 길러야 하는 것은 강론만이 아닙니다. 모든 복음화는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행하고 증언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끊임없이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복음화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점점 더 온전하게 모든 교회 활동의 중심이 되게’3) 하여야 합니다. … 성경 연구는 모든 신자에게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하느님을 눈먼 채로 찾지 않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없기’4)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기를 기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74-175항)

사목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우선적 위치

  성경의 우선적 역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미 권고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는 그 역할을 새로운 정신으로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화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사목은 성경을 첫자리에 놓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움직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더 넓은 인류와의 관계 안에 성경을 놓아야 한다.6)

  성경을 우선시하는 것은 제도 교회를 과거보다 덜 중요시하는 경향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분 말씀을 듣는 곳은 바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임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회라는 두 단어 사이에는 어떠한 긴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경과 교회는 한데 수렴되고 뿌리부터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둘을 동시에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된다. 교회의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경 읽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함께 경청하지 않고서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난다. 그곳에서 주님이 당신 백성과 대화를 나누시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일상의 몰이해와 오해의 위험에서 벗어나 교회 안에서 진실하게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7) 이런 신앙의 움직임에 꼭 교회에 대한 과소평가가 담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움직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인 하느님 말씀을 교회를 통해 알게 되는 상호작용이 저절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하느님의 백성이 교회의 진정한 신원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발전할 수 있는 열린 주제다. 성경과 교회, 하느님의 강생인 성경 말씀(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과 강생하신 말씀의 확장인 교회 사이에는 유사성과 보완성이 있다. 성경은 요시야 임금 때에 종교 개혁의 계기가 된 책으로 처음 기록에 등장한 이후로 구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8) 또한 구원 역사 전체에 걸쳐 말씀과 사건 사이에 중요한 관계가 형성되어 왔다. 사건은 말씀을 증명하고 구체화했고, 말씀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의 영속성을 보여 줬다. 교회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적절한 장소라는 확신이 그런 체험에 내재하여 있다.9)

성경의 현 위치

  우리 신앙 감각에 따르면 성경이 복음화의 첫자리를 차지한다. 왜 그럴까? 이 질문에 응답하려면 수고스럽지만, 현대인의 양심에서 성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 주는 노력을 피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본보기들을 제시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우리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그 본보기들이 지녔던 설득력을 그대로 유지하기 힘들더라도 그러하다.

  신약성경은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많이 제공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은 남몰래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들과 실마리가 없다고 생각되던 해결책들을 뜻밖에 신약성경에서 인식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시작 부분(1,18-32)에서 종교적 타락이 윤리적 방종의 결과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읽게 된다. 무분별한 성생활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인간의 타락이 종교적 배반의 결과다. 그 타락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선에 대해 인간이 불충했기에 받은 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흔치 않은 진술을 맞닥뜨린다. 그 내용은 과거에 우리가 들었던 것과 전혀 다르지만,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겪는 경험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체감되는 주제다. 즉, 신앙 체험이 우선이며 그 체험을 윤리 규범을 준수하는 일로 축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윤리 규범은 신앙 체험의 결실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윤리 양심에서 신앙 체험이 우선한다는 점은 아브라함, 야곱, 다윗 이야기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윤리 관습에 대한 준비되지 않은 자세 또는 미성숙을 그 충실성으로 상쇄한다.

  사실 구약성경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늘날에도 온전히 읽히며 매우 유용하다. 구약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주도성이 발휘된다. 그분의 주도성은 (이집트 탈출 서사에서만 예외적으로 드러난) 기적 행위가 아니라 역사 전체를 통해 드러난다.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도 아주 친숙하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인간의 나약함, 권태, 헛된 열정,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을 기꺼이 떠맡으려다가도 시들어 버리는 모습이 표현된다. 이 안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인간 집단으로서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발견한다.

  흥망성쇠, 충실성의 도약과 배신, 열렬한 충실성과 배신이 담긴, 그리고 기다림, 속죄, 기쁨, 실망의 세월이 담긴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느 시대에나 해당되는 영속적인 모델을 구성한다. 이 안에서 우리 삶과의 유사점, 대조, 우리 내면에 속삭이는 제안, 희망이나 환희의 이유, 위로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길고도 촘촘한 계약의 역사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충실하시며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백성은 일어나라는 부르심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 역사는 하느님과 우리 관계가 갖는 상반된 본질을 생생하고 지금보다도 더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한편에는 죄의 신비, 시험을 당하면 실패하고 마는 타고난 인간 불안정성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하느님의 신비, 선한 이에게도 악한 이에게도 베푸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분 사랑의 신비,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충실성의 신비가 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는 욥기 저자에게 큰 고뇌를 안겼다. 불경한 자들 가운데서도 오만한 자들에게 풍성하고도 눈에 띄게 보상하시고, 충실을 충실로 갚으려는 이들은 가차 없이 내려치시는 듯이 보이는 하느님의 스캔들이 있다.

그 밖의 특별한 주제들: 고독과 거짓 안전

  일반적인 주제들을 다룬 후에 곧바로 더욱 조밀하고 특정한 주제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는 주제로 인간의 고독과 직결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눠 본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종교적인 사람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위로도 안전도 찾지 못한다. 그 대신 더 깊은 고독의 원천, 혼란과 모순을 느끼게 하는 원인, 전적인 소외로 이끄는 길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뒤에 동족과 떨어져 낯선 지방에 던져져 자기 땅 한 조각도 없이 이리저리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그를 따라다녔지만, 자손도 없이 방랑한다. 오로지 하느님을 만난 결과로 아브라함은 철저히 혼자 남았다. 주님과 나누는 우정이 깊어질수록 고독도 더욱 처절해졌으며 고독에서 빠져나올 방법도 없었다.

  같은 상황이 모세에게도 벌어진다. 성공적이고 안정된 삶을 살던 모세는 궁중의 일원으로서 누리던 안전과 기반을 버리고 동족을 만나러 떠났을 때에야 자신의 참된 존재를 살기 시작한다. 모세는 충실함의 대가로 사형을 선고받고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모세의 정식 사명은 더 나중에, 그가 이미 늙고 지쳤을 때, 모든 인연을 다시금 끊고 가족도 포기할 때서야 시작된다. 이는 자손들에게 유산을 넘겨야 할 나이에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는 역사적 인물이다. 반면 욥과 토비야는 상징적인 인물로서 몰이해, 배척, 고립이 그들 안에서 표상된다. 주님의 종,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들의 보편 구원 계획을 도울 수 있는 그 인물상은 침묵을 강요받고 아무 데도 쓸모가 없게 되고 완전히 부서진 뒤에야 더욱 명확해진다.10)

  행복 선언은 가난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다고 가르친다. 고독은 가난이다. 특히 뿌리를 잃는 데서 오는 고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난 체험이다. 아브라함, 모세, 토비야의 고독이 그러했고, 우리 주위에 살지만, 우리가 관용 없는 시선을 보내는 이민자들의 고독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 버려야 할 뿌리를 이야기할 때, 현대인의 정신에 생생하게 와 닿는 또 다른 주제가 있다. 바로 거짓된 안전의 포기이다. 신학적 측면에서 이 주제는 로마서와 갈라티아서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 손으로 만든 신, 자기에게 익숙하고 제 입맛대로 만든 신들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이교도들의 거짓 안전이 있다. 또한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내적 충실을 정확한 행동 규범으로 바꾸어 수많은 항목을 세심하게 준수하는 유다인들의 거짓 안전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거짓 안전도 있다. 사죄를 받았다고 만족하고, 아홉 달 연속으로 첫 금요일에 영성체를 했으니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고 확신하는 이들의 거짓 안전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제, 수도자의 거짓 안전도 있다.

  우리더러 겸손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방식이 언제나 진실하지는 않은 이들의 태도가 거슬리는 것처럼, 이런 태도도 슬슬 불편해진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맡는 책임들 가운데 한 가지 특정 측면만 충족하면서 책임 전체를 떠맡는 사람들의 잘못을 꼬집기는 쉽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항상 진지하게 맞아들여야 한다. 바깥에서 이방인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만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기 때문이다.

  요나서는 이 거짓 안전을 명쾌하고도 너그럽게 조롱한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특히 필요한 성질이다. 요나서는 날카로운 풍자로 표현되었지만 매혹적인 이야기이며, 과장된 표현을 썼지만 진실을 정확하게 짚는다. 예언자 요나는 하느님 말씀의 진정한 선포자이다. 요나서 이야기 전체에서 모든 사람은 그의 증언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요나는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굽히지 않는 완고함과 거의 사탄처럼 변화가 불가능한 태도로 하느님 말씀에 저항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 이교도 선원들,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아시리아인들, 동물들, 심지어 요나를 삼키는 바다 괴물하며, 요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다가 순식간에 말라붙은 아주까리 같은 식물들, 폭풍이 몰아치다가 갑자기 잠잠해지는 바다 등 전부, 요나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하느님 말씀에 신속하게 순종한다.

기원의 책

  창세기 시작 부분은 그 문화적 거리가 우리와 극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인의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이다. 창조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창세 1,1-2,3)는 두 번째 이야기(창세 2,4-25)와 마찬가지로 인간 소명의 두 가지 차원을 다룬다.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여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인간의 손으로 다스리라는 부름을 받았다(창세 1,22.29-30; 2,8.15).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느님을 경배하고 자신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인식하며 다른 피조물들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기능을 맡고(창세 1,26-27; 2,1-3)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부름도 받았다(창세 2,16-17).

  인간의 소명에는 이처럼 기능의 차원과 경배의 차원이 있다. 두 차원 가운데 하나만 띤다면 그는 반쪽짜리 인간일 뿐이다. 나아가 현대를 사는 우리가 하느님 경배를 제쳐 놓을 정도로 기술적 성취만을 찬양한다면, 이는 인간의 승리가 아닌 인간의 패배, 인간의 실패, 인간의 훼손을 찬양하는 것이다.11)

  부부라는 주제도 설교만이 아니라 영적 지도에서 활발하게 다뤄진다. 이 주제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우리를 곤혹스럽고 당황스럽게 하고 있다. 이 뜨거운 이슈에 관해 신앙의 양심은 현대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인간 존재의 본질이 달려 있다고 모두가 느끼는 주제이다. 예수님은 이혼에 관해 바리사이들에게 대답하셔야 했을 때(마태 19,4-6; 마르 10,6-9 참조) 그분은 인간 기원을 다룬 그 책에 담긴 가르침으로 돌아간다. 체험에서 나오는 그 가르침의 풍요로움은 쉽게 고갈되지 않는다. 여러 번 그 책으로 돌아가 아주 많은 것을 긷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12)

  현대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예로 산업 사회의 대대적인 실패를 바벨탑 이야기와 연관 지을 수 있다(창세 11,1-9 참조). 바벨탑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산업 사회도 하느님을 모독하고 인류를 분열시킨 원인이라고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원을 건설하고 분열을 메우려는 인간의 환상을 볼 수 있다. 인간은 겉으로는 무한해 보이는 사회의 힘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서 자율적인 미래를 계획한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몫을 나눠 받을 뿐(이 ‘탑’은 원래 신성한 건물로 계획되었다) 만드는 분이 아니시다.

성조 이야기

  하느님의 주도 없이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우리는 그분께 응답하도록 부름을 받으며 그분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에덴에서 인간 부부에게 처음 주셨던 것부터 우리의 교회 체험에 이르는 구원 역사 전체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주도에 관해 당황스러운 예로 성조사에 등장하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이 두 번(창세 12,10-20; 20,2-18), 이사악이 한 번(창세 26,7-11), 아내를 희생시켜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이야기다. 이 구조가 세 번 반복된 의도는 성조들의 행동을 칭찬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인간의 실수, 어리석음, 불충을 넘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구원하심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세 번 모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성조들에게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 주신다. 즉, 구원 역사라는 앞날의 거대한 책임을 맡을 후계자를 주신다는 약속이다.

  하느님의 주도에 전적으로 토대를 둔 신앙 체험은 오늘날 해방 체험으로 여겨지며, 반드시 필요하다고 간주된다. 현대인은 인간의 수다, 인간의 요구, 인간이 만든 상품에 지쳤다. 그는 추측으로 가린 무능력에 지쳤다. 종교 개혁과 그것이 우리를 포함한 인류에 미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 하느님의 주도성 안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성조사라는 맥락에서 창세기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확장되고 완전한 것은 요셉 이야기다. 요셉 이야기는 성경 문학을 잘 모르는 데서 생기는 만성적 편견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구약의 종교가 용서라는 감정에는 닫혀 있고 복수와 원한을 신성시하는 세계라는 편견이다. 요셉은 형제를 구하도록 부름을 받은 인물이다. 성경 문학에서 모든 구원 사명은 죽음을 거침으로써 받는 생명의 선물이다. 이 패러다임은 나중에 주님의 종을 통해 분명하게 고정될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죽음은 형제들의 시기와 증오의 결과만도 아니었고, 원한을 품은 귀부인13)에게 느낀 두려움의 결과만도 아니었다. 그가 부수고 넘어가야 할 죽음의 장벽은 그의 죽음을 바란 이들에 대한 요셉의 원망이었다. 이 원망이야말로 참 죽음이며 완전한 용서를 통해 물리쳐야 했다.

  여기서 별도로 눈길을 끄는 점을 덧붙이겠다. 다른 성경 본문만큼 성조사에서도 내면을 암시하기보다 외적인 행위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함으로써 언어의 현대성이 드러난다.14) 또는 전개의 단계나 전환의 순간들을 생략하고 공간과 시간상으로 떨어진 장면들을 곧장 대조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메시지, 묘사, 서술이 반복되어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는 역할을 하고, 반복에서 보이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이야기 전개의 완성과 점진적인 진전을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늘 하는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이미 고정된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서술된다.15)

성경의 언어

  앞서 제시한 모든 사례, 그리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밖의 많은 사례를 보고 사람들이 성경 메시지가 우리 삶에 현실적으로 적용된다고 납득하더라도,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현대인이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끄는 데 성경은 거의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성경 이야기 각각에서 현대에 적합한 중심 의미를 파악하려면 한눈에 봐도 낯선 요소로 만들어진 두껍고 단단한 껍질을 통과해야 한다. 언어가 다를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다르고 관습도 우리와 전혀 다르며 비유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고 이야기는 혼란스럽다.

  그 두꺼운 장벽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수단은 번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휘나 문법을 옮기는 것 이상의 번역이 필요하다. 현대 수많은 문학 장르 중에서 성경 본문마다 어울리는 장르를 찾는 문화적 전이도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구세사의 어느 단계에 담긴 종교적 분위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느님의 ‘오늘’(oggi)로 가져오고, 신약의 초기 교회 경험에 담긴 분위기를 복잡한 현대 교회의 삶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이스라엘 역사의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읽는 번역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 ‘하느님 말씀’(Parola di Dio)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본문,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본문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 언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여기게 되는 이유들은 더 늘어난다. 창세기에 나오는 열 개의 족보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고에서 족보는 과거만을 가리키며 유목 사회에서 신분증명서를 대신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족보는 획득된 상황의 고정성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긴장을 의미한다. 앞을 향한 전진은 두 가지 방향으로 표현된다. 한 방향은 다른 모든 족보처럼 역사를 증진하는 것이다. 다른 방향은 각 족보에 나름의 어조, 곧 기념하고, 명시하고, 행렬하는 등의 어조를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 눈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롯의 딸들, 야곱의 간교함, 다윗의 사생활 등이다. 구원의 역사로 읽어야 할 성경에서 하느님의 주도성보다는 인간 역사를 읽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연혼(逆緣婚, levirato)16)이나 고엘(go’el, 구원자)17) 같은 제도들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제도들은 룻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고 따라서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전형적인 하느님 말씀인 신탁들이 점진적으로 움직인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상호 성장과 영향을 수렴함으로써 종말론적 결론, 즉 그리스도의 도래를 향해 그리고 그 너머 최종적인 파루시아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성경의 언어를 현대에 맞게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해답은 없다. 우리는 성찰, 묵상, 연구와 기도로 그 과업에 직면하고 성경 본문의 접근에서 만나는 저항을 새로움을 낳는 도전으로 여겨야 한다. 이 새로움은 특히 처음에 성경 말씀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 말씀은 진실하고 무궁무진한 보화와 같으며, 현대인으로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백배로 갚아 줄 것이다.

성경과 저항

  성경이 현대인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이 논쟁을 위한 논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노력을 오로지 논쟁에 국한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교회 안에서 이편은 저편을 상대로, 저편은 이편을 상대로 논쟁한다. 우리는 세상, 곧 이방인들에게 증언하라는 부름을 받았는데 마치 그 증언은 하지 않고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 우리끼리만 아는 이슈들로 논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은 짓눌린 이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으로 억압당하는 이들이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하느님 말씀은 크나큰 위로를 주며 (그리고 성경 일부는 특별히 여기에 목적이 있다.) 충만한 미래의 전망을 열어 준다. 그 전망을 보며 ‘주님의 가난한 이들’(il povero del Signore, 이사 61,1-2; 57,15; 66,1-2)은 그들이 품은 원망에서 벗어나 그들이 건설하도록 부름 받은 미래를 희망을 품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신앙에서 나오는 참된 저항을 하는 이들, 분열 상태에서 친교를 회복하기 위해 사랑으로 노력하고 죄로 기울어진 불균형을 하느님만이 역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이들만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18)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반대를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지,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이를 단죄하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은 아니다.

  심지어 성경은 정치에서 벗어날 구실도 내놓지 않는다. 정치적 헌신은 그리스도인의 임무다. 정치적 의무를 피하려고 종교적 의무로 도피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정치적 상황으로 도피하여 종교적 회심을 저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저것을 통해 해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주워들은 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성경에는 자체적으로 제시하는 정치적 모델이 없다. 성경에는 학문적 진보 또는 역사적 문헌학적 방법론에 유용한 지침도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 자기 능력 안에서 말하는 수고를 면하게 하려고 선포되지 않았다. 인간은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평정과 열정으로 매일의 투쟁에 맞설 준비를 한다.

왜 성경을 ‘상실’했는가?

  처음에 제기한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교회에서 성경을 잃은 이유를 언급하지 않고는 마무리할 수 없다. 최소한 종교개혁 시기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교회의 삶에서 성경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은 현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 논란에 반응할 때 발생한 심리적 원인 또는 종교적 원인만도 아니다. (논쟁 상대에 대한 반응이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 줄 수는 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으며 복음화를 쇄신하려면 이것을 들여다봐야 하므로 이 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들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현존한다. 성경은 혼자 떨어져 있지 않다. 교회의 가르침 또한 모든 차원에서 존재한다. 중대한 교도권의 가르침에서부터 교계제도의 공식 결정, 신학에서 가르치는 공통 교리, 교리교육과 신앙인들을 위한 현실적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느님 말씀의 이중 현존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19)에 나오는 유명한 말처럼 기록된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 질문하는 이들에게 대답할 수 없고 그 내용의 정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두로 하는 말도 안정적으로 기록된 참고 자료가 없다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기록된 말은 어느 정도 확실한 전개, 업데이트,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당연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록과 구두 사이에는 경쟁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인들은 성경이라는 하느님의 말씀(la Parola di Dio)과 그들 자신의 말(la propria parola) 사이에 경쟁을 느낀다. 만일 이 숨은 불일치를 분명하게 밝혀 진술하지 않고 극복하지 않으면 복음화에 대한 어떤 논의도 초점을 놓치게 된다.

몇 가지 사목 제안

  마지막으로 복음화에 성경을 사용할 때 사목적으로 유용할 제안을 몇 가지 하겠다. 특히 구약성경을 사용할 때 어려움이 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친숙도는 전반적으로 중간 정도이다. 주일 말씀의 전례에서 읽는 중요한 성경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주일에는 대개 중요한 구절을 읽는다. 그런데 복음 이외의 독서는 이해를 돕는 유용한 자료와 해설서들이 있는데도 미사 집전자에게조차 거의 와닿지 않는다. 설교자의 단계적인 준비가 필요한데 성경 연구만이 아니라 경청, 성찰, 무엇보다도 기도를 동반해야 한다.

  첫째 단계는 설교자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거기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 복음화하지 않는다면 복음화하지 못합니다.”20)

  둘째 단계는 성경을 내면화(personalizzazione)하고,21) 형제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도우며 그들의 삶으로 말씀을 살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다. 신앙인은 홀로 또는 그룹으로 하느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고, 내적 삶의 지주로 삼으며, 가정과 직업과 세상에서 말씀을 사는 힘을 발견하도록 초대받는다. 증언은 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길이다.22)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인들이 주일 전례에 모여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선물을 양식으로 삼을 때, 믿는 이들의 공동체 전체가 맡는 과업이다. 주일 전례는 성경을 통해 회심하라는 진정한 초대이며, 전체 교회에 성찬례 안에서 전달되는 초대이다. “활기차고 효과 있는 말씀의 선포는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하고 성사 안에서 그 말씀은 최대의 효력을 발휘하게”23) 되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 이미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에서 결코 멈추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경청자의 역할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회심하며, 근본적인 것을 난생처음 체험하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24)


1)  La Civiltà Cattolica, 4035-4036 (4 ago/1 set 2018), 209-222.
2)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74항.
3) 베네딕토 16세, 『주님의 말씀』, 1항.
4) 베네딕토 16세,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 제1차 전체 회의 묵상 자료」, 2012.10.8., Acta Apostolicae Sedis 104(2012), 896.
5) 참조: 『하느님의 말씀』, 21-22항.
6) 참조: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27항; 문화와 관련해서는 132항 참조.
7) 참조: Ibid., 137항. 교종은 성찬례의 맥락에서 이를 단언한다. 모국어로 자녀를 가르치는 어머니로 교회를 설명하는 139-140항도 참조.
8) 참조: 2열왕 22,3-23,30. 예레미야서 11장도 요시야 개혁을 암시한다.
9) 참조: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Enzo Bianchi, Nuovi stili di evangelizzazione, (Cinisello Balsamo, Milan: San Paolo, 2012).
10) 참조: Benito Marconcini, Il libro di Isaia (40-66), (Rome: Città Nuova, 1996), 139-161.
11) 이 점과 관련해서, 신앙에의 의존(하느님만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관점)을 인간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인간의 성장 노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여기 내포된 자기 확신은 창조된 양심의 절대적 타율성과 양립하지 않는 듯 보인다)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 양극단은 성경에서 ‘가난’이라고 부르는 체험을 통해서만 실제로 일치할 수 있다. 자신의 근본적인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 때 비로소 인간은 원래 부름받았던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온전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마태 16,25, 마르 8,35 참조)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 참조: Johann Baptist Metz, Povertà nello spirito, (Brescia: Queriniana, 1966).
12) 참조: Saverio Corradino, Chi è l’uomo?, (Palermo: Vittorietti, 2012); Jean Daniélou, In principio, (Brescia: Morcelliana, 1965).
13) 역자 주. 이집트 사람 포티파르의 아내를 가리킨다.
14) 예를 들어 창세 13,10-11에서 롯의 결정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소개되는지를 보라. 또는 창세 22,3-10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고뇌를 보라.
15) 예를 들어, 우리는 묵시 언어에 대한 몇 가지 실마리만 알게 되면 묵시록을 순전히 개념적인 담화로 옮겨 버리지만, 원래 묵시록의 내용은 이미지의 생생한 발전을 통해 표현된다. ‘환시’의 언어가 꼭 이 해석만 의미하는 양 성급히 개념화해 버리면 의미는 거기서 고갈되고 만다. 그러나 환시의 새로움과 효과는 바로 시각적 이미지와 신학적 개념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
16) 편집자 주. 역연혼(逆緣婚)에 따르면 “형제들 가운데 하나가 후사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다른 형제가 형수(또는, 제수)와 혼인하여 죽은 이의 자손을 대신 낳아 주어야 했다.” 창세 38,6-8, 신명 25,5-10, 그리고 룻기 4,5-6을 참고할 것. 참조: 『주석 성경 구약』, (서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0), 150, 491, 660.
17) 편집자 주. “‘구원자’(히브리 말로는, 고엘)는 한 가정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 가정의 가족들을 보호하고(경제적 이유로 가족 중 누군가 종으로 팔렸으면 그를 속량한다.), 그 가정과 가문의 재산이 남이나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며 (토지 등이 다른 가문에 팔렸으면 이를 도로 사들인다.), 누가 살해되었을 경우에는 복수를 대신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이다(레위 25,25-26,47-49; 민수 35,19; 신명 25,5-10). 나오미와 룻의 경우, 이들의 구원자는 나오미가 매각하려는 땅을 매입하고 룻과 혼인하여 룻의 남편에게 후손을 마련해 줄 의무를 지녔다.” Ibid., 658.
18) 그러니 개신교 신자들이 ‘개혁’하고 ‘신앙으로 저항’한 사람들로서 성경을 전유물처럼 말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친교와 일치의 책이기도 하므로,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는 저항과 개혁은 전혀 성경을 대표하지 않는다.
19) 참조: Platone, Fedro, § 275-276; Platone, Tutti gli scritti, ed., Giovanni Reale, (Milan: Bompiani, 2001), 579-581.
20)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74항.
21) Ibid., 149-159항. ‘내면화’ 또는 ‘인격화’(personalizzazione)라는 표현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사제들이 어떻게 말씀 선포를 준비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
22)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이 캄포바소 사목 방문에서 한 강론, 2014년 7월 5일, w2.vatican.va.
23)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74항; 참조: 135-139항.
24) 참조: Ibid., 16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