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과 중국의 합의

L’ACCORDO TRA CINA E SANTA SEDE1)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이진현 라파엘 S.J. 옮김

  2018년 9월 22일 교황청 공보실은 성좌와 중화인민공화국이 잠정합의문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이 합의는 실상 화음을 잡아 놓는 단계로 이해하는 편이 유익하다. 다시 말해 앞으로 더 전개해야 할 전체 작곡의 도입부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합의서는 한 과정의 완결이 아니라 실상 출발점으로서, 합의문을 검증하고 개선하면서 실행해야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중국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면서 또한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대화를 위해 장애물을 극복하고 싶다는 소망을 거듭 표명해 온 프란치스코 교종의 최근 행보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소망이 전임자들의 활동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진정 프란치스코 교종은 전임 교종들이 닦아 놓은 사항들을 진전시키는 데 열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다음 필자는 합의문의 의미와 그 논리 및 합의문을 뒷받침하는 태도를 평가한 후, 마지막으로 이 합의문 체결이 촉진할 긍정적 도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을 향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염원

  2014년 8월 14일, 사도적 순방을 위해 한국을 향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태운 알리탈리아 항공기가 중국 상공을 통과했다. 교종의 중국 영공 진입이 허가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교종은 시진핑 주석에게 이렇게 전문을 보냈다. “중국 영공으로 들어가며 주석 각하와 인민 여러분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중국에 평화와 안녕을 위한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2016년 2월 2일 『아시아 타임스』(Asia Times)에 실린 중국학자 프란체스코 시시와의 역사적 대담에서 교종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중국 상공을 처음 통과할 때 [수행원들이]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0분 후에 중국 영공에 진입합니다. 저희가 [중국 측에] 성하의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고백하건대 그때 상당히 벅찼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자주 올라오지 않는 감정입니다. 풍요로운 문화와 지혜의 땅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로마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교종은 중국 영공을 지날 때 느낀 감정을 되살려 중국 주석에게 두 번째 전문을 보냈다. “주석 각하와 인민들께 다시금 축원을 전하고자 합니다. 중국 땅에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중국 영공을 세 번째로 통과한 것은 2015년 1월 18일 필리핀 방문을 마치고 귀국할 때였다. 이때 교종은 중국 주석에게 전문을 보내 인사했다. “주석 각하와 모든 중국 인민을 위한 기도를 약속드리며, 여러분 위에 화합과 번영의 축복이 풍성하게 내리기를 염원합니다.” 전문을 보내고 몇 분 뒤에 시작된 기내 기자회견에서 교종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 가고 싶으냐고요? 물론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기꺼이 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중국인을 존중합니다. 다만 교회는 선교와 활동을 위한 자유를 추구할 뿐입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리고 중국 문제에 관한 핵심 문헌, 바로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중국인들에게 보낸 서한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서한은 지금도 시의성을 띱니다. 다시 읽으면 유익할 것입니다. 성좌는 중국과의 만남에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항상입니다. 중국인들을 진정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교종은 이렇게 너무나 상징적인 ‘공중 교량’(ponte aereo)에 그치지 않고 중국과 외교적으로 교섭하려는 열망을 여러 번 밝혔다. 그는 중국을 방문하고 우호 관계를 재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교종은 2015년 9월 27일 미국에서 돌아오는 기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세계에 훌륭한 문화와 여러 좋은 것을 선사하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저는 전에 한 번 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중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중국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해 왔고 대화하고 있으며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화가 풍성하고 또 유익이 될 가능성이 있는 중국 같은 나라와 친선하게 지낸다면, 저라면 기쁠 것입니다.”

  예수회원 교종이 중국에 대해 갖는 관심의 뿌리는 앞서 소개한 『아시아 타임스』(Asia Times)의 시시 교수와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은 제게 언제나 위대함의 기준점이었습니다. 대단한 나라죠. 그러나 한 국가이기 이전에 무진장한 지혜를 간직한 위대한 문화의 보고입니다. 어린 시절에 중국에 관해 읽은 내용은 무엇이든지 제게 경이를 선사했습니다. 저는 중국에 대해 경탄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마테오 리치의 삶을 배웠고 그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경탄이지요. 그가 어떻게 이 거대한 문화, 오랜 세월의 지혜와 대화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리치는 중국 문화를 ‘만날’(incontrarla)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12월 교종의 미얀마 및 방글라데시 방문에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국제 관계에서 중국이 원하는 그리고 이미 행하고 있는 새로운 역할을 교종이 누구보다 처음 명시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이는 다카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기내 기자회견에서 교종이 직접 밝힌 내용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북경은 이 지역에 큰 영향력을 갖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중국과 접한 미얀마 국경이 몇 킬로미터인지 알지 못하지만,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중국인들이 와 있었습니다. 중국과 국경이 닿은 나라들과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주변국도 우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웃이니까요. 진전을 바란다면 이 방법이 현명하고 외교적으로도 건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이 전 세계에도 강한 세력을 행사한다는 점은 엄연한 현실이며, 이 관점에서 보면 풍경이 바뀔 수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이 기여하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세계 평화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상업 전쟁과 분노한 영혼이 만연한 이 시대에 이 성찰은 더욱 큰 가치를 띤다.

  중국도 교종의 미얀마 및 방글라데시 방문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언론, 특히 인민일보가 발간하는 영자신문 『글로벌 타임스』(The Global Times)도 교종의 방문을 보도했다. 또한 『글로벌 타임스』는 최근에 교종에 관하여 여러 기사를 냈고, 2017년 2월 18일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진을 이례적으로 크게 실었다.

  다카에서 돌아오는 기내 기자회견에서도 교종은 언젠가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염원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로 중국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다들 알고 있지요. 중국과는 문화 분야에서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대화에 관해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 번에 한 단계씩, 지금처럼, 섬세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천천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마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제가 중국을 방문하면 모두에게 유익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방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중국에 관해 이야기할 때 교종은 ‘다른 관점에서 풍경을 보면 인식이 바뀔 수 있다’는 흥미로운 표현을 들어 말했다. 교종은 ‘정치적으로 건설적인’(politicamente costruttive) 국제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베르골료의 ‘자비의 외교’(diplomazia della misericordia)에서 핵심을 이루는 이 표현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황청과 중국의 복잡한 관계

  가톨릭교회와 중국의 관계는 그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중국에 전해진 것은 천 년도 더 전이었는데 오래가지 않았다. 시리아 수도승 알로펜(Alopen, 阿羅本 Āluóběn)이 7세기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전했고 수도원과 교회를 여럿 세웠다. [경교景敎라 불렸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은 13세기 몽골이 다스리던 시기에 재등장하지만 14세기 전반기 중국에서 위기를 겪는다. 프란치스코회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주교가 북경에 있는 몽골인들에게 복음 선교를 시작했으나 1368년 몽골의 원나라가 멸망한 뒤 선교 활동이 중단됐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82년 명나라 시기였다. 마테오 리치와 동료들이 청나라 초기(1644)에까지 활동했다. 그런데 제사 논쟁이 불거지면서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중국에서 추방했고 그 상태가 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제사 논쟁 이전에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적 평판이 높았고, 조정 관리, 황실 가족, 학자들을 포함한 중국 사회 대다수로부터 대단히 존경받았다. 그 결과 신자 수가 늘었다.

  곧바로 근대로 넘어가면,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이후 중화제국의 세력이 약해지고 서구 열강들에게 유리한 ‘불평등조약’(i trattati ineguali)을 맺고 있을 때, 가톨릭 선교지에 대한 프랑스 보호권이 설정되어 외국인 신자들과 중국인 신자들 모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톨릭과 프랑스의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외세의 종교라는 생각이 강해졌고 그리스도인들을 외국인처럼 여겨 증오 정서가 일어났다. 이 증오가 결국 1900-1901년 ‘의화단운동’(la rivoluzione dei Boxer)과 함께 비극적으로 폭발하여 가톨릭 신자 약 3만 명이 학살당했다.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난 뒤 1860년에 베이징조약으로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이 더 확대될 수 있었고 예수회는 두 번째로 중국에 진출했다.

  1912년에 청 제국이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개국했다. 1922년에는 비오 11세가 첼소 콘스탄티니를 초대 교황사절로 지명하여 중국에 파견했다. 그는 1924년에 상하이 지방공의회를 열어 최초의 중국인 주교 성품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926년 로마에서 중국인 주교 여섯 명이 성성되었다. 1946년 비오 12세는 세계대전 종전 후 첫 추기경 회의에서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 톈겅신(田耕莘) 토마스를 최초의 중국인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중국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교황청 연감에 지금도 실린 내용에 따르면 대교구 20개, 교구 85개, 지목구 34개가 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새 공산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51년 1월 종교국이 설치되었고 1950년대 전반기에 외국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1957년 ‘중국 천주교 애국회’(Associazione patriottica dei cattolici cinesi. 이하 ‘애국회’)가 창설되고, 1957년 말에서 1958년 초 교종의 위임을 받지 않은 주교 서품식이 처음 거행되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일으켜 종교 예식과 활동을 전부 금지하고 경배 장소를 모두 폐쇄했다. 애국회 회원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78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교종이 되었다. 이는 덩샤오핑이 부상하여 개혁을 시작하던 시기와 겹친다. 1979년 종교 분야에서 개방의 첫 징후들이 나타났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새로운 상황을 맞은 많은 ‘애국’(patriottici) 주교들이 드러나지 않은 경로를 통해 로마의 승인을 요청했다. 2007년에 바티칸 중국위원회는 회의를 하고, 최종 언론 보도문에서 “거의 모든 주교와 사제가 로마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확인했다.

  2000년에 성좌와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새로운 어려움들이 떠올랐다. 특히 중국에서 불법 주교 서품식이 있었고 로마에서는 10월 1일에 의화단 운동 때 순교한 120명에 대한 시성식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10월 1일은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절이었다. 나중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2001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열린 마테오 리치에 관해 학회를 맞아 발표한 메시지가 노력 중 하나였다. 큰 반향을 일으킨 이 메시지에는 ‘과오들’(errori)에 대한 인정과 머잖아 ‘성좌와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통과 협조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희망이 담겼다.

  2007년 5월 27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가톨릭교회의 주교, 사제, 봉헌생활자,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베네딕토 16세의 서한이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풍부한 사목 지침이 담겼다. 그는 교회 일치를 강조하며 정부 당국과 대화하려는 바람을 드러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1년 10월 24일 요한 바오로 2세가 전한 메시지를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저는 중국 국민 전체에 진심 어린 존중과 우정의 마음을 지니고 그들이 겪는 사건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지켜보며, ‘교황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의사소통과 협력을 위한 구체적인 형태들이 곧 수립되기를’ 바라는 뜻을 밝힙니다. “우정은 자주 만나고, 모든 상황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연대와 상호 도움을 실천함으로써 길러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의 존경하는 선임 교종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교황청은 전체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또한 제가 확신하듯이 온 인류 가족의 유익을 위하여, 중국 당국과 어떠한 형태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단 과거의 오해를 극복하고 나면, 그러한 대화로 우리는 중국인들의 선익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양쪽의 선의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

  중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주교들이 자기 지역 교회에서 선출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정해졌다. 많은 경우 이 후보자들은 로마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 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합법화 과정을 시작하여 2000년부터 지금까지 약 40명의 주교들이 심사 대상에 올랐다. 이들은 변칙적으로 지명되었고, 마찬가지로 바티칸의 승인이 없는 채 지명되었던 주교들에게 서품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자동 파문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수십 년에 걸쳐 이 주교들과 로마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큰 문제가 전혀 없었다. 이 주교들과 성좌는 이들의 임명을 인정하고 교구 재건과 교회 생활 재개를 계속 진행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교황청과 중국의 관계가 더욱 선명한 형태를 띠리라는 희망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종의 직분을 맡았을 때부터 중국인들에게 생생하고 따뜻하게 관심을 보이면서, 교황청과 중국 당국이 효과적으로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새롭고도 완화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서로 접촉이 늘었고 더 안정되고 효율적인 연락 경로를 갖게 된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성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와 같은 길을 걸었다. 현재 체결된 합의문은 베네딕토 16세 당시에 정교하게 작성된 본문에서 최소한의 변화만 있다. 물론 이는 미래 발전을 위한 견고한 기초이다. 또한 공식 외교 관계와 상관없이 체결된 합의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황청과 중국의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은 처음에 언급한 『아시아 타임스』(Asia Times)에 실린 시시 교수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역사적인 대담에서 비롯되었다. 교종은 무엇보다 대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는데, ‘반드시 타협을 맺고야 말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를테면 이런 의미라고 말했다. “‘자,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서로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함께 계속해 봅시다.’ 이것이 쌓아 나감의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9월 22일 합의문에 담긴 논리이다. 과거의 오해를 극복하며 진전을 이루고 서로 경청하며 함께 전진하겠다는 분명한 결정이 담긴 단계이고, 작지만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나아가는 방식은 시간을 두고 검증해야겠지만 방향은 올바로 취한 듯이 보인다.

합의의 의미

  중국과 교황청의 대화는 1986년부터 30년 이상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진전들이 최근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는 오히려 양측이 신중하게 한 발짝씩 걸어온 여정 중에 이루어진 중요한 일보 전진이다. 이 진전 사항들은 성좌의 위임 없이 서품받았던 중국 주교들에게 온전한 일치를 인정해 주고 앞으로 사목자를 어떻게 임명할지 합의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중국 영토에 교구를 신설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과 교황청이 만나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주교 임명 권한을 중국 정부에 양도하는 것이 허용되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교회는 주교 임명 권한을 넘기지 않았다. 교회의 역사는 오히려 주교 임명 문제를 두고 정치권력과 합의를 추구해 온 역사로 볼 수 있다.

  일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맺은 협정에는 임명된 주교를 정부가 거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지금도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시민 정부가 주교 임명에 관해 조언하거나 심지어 임명할 권한까지 갖는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독일 바덴주와 바이에른주, 볼리비아, 에콰도르, 프랑스, 아이티, 이탈리아, 모나코, 페루, 폴란드 등이 그러하다.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수 세기 동안 워싱턴이 아니라 교종에게 충성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경멸적 의미에서 ‘교황주의자’(papisti)라고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는 의심을 받았다. 교황청은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주교 지명에 관해 합의했고 큰 문제나 반대는 없었다. 지금은 중국과 교황청 모두 호의적이다. 장기적 안목과 균형을 갖추고 지역 공동체에 잘 융화되는 후보를 찾는다면 분명 양쪽 모두에 선익이 될 것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교황청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801년 정교조약을 돌아보자. 이 협정은 근대국가와 가톨릭교회, 시민사회와 종교 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더 굳건하게 일치를 이루었고, [대혁명 후] 가톨릭 신자들을 고통스럽게 갈랐던 헌법하 교회 분열이 종식되었다.

  중국과 교황청의 이번 합의를 따로 떼어 생각하거나 협상 과정의 최종 결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되고 검증될 점진적 대화의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향후 오해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어려움 때문에 중국 가톨릭 신자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교종과 일치를 누리는 데 방해를 받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중요한 단계이다. 2018년 2월 3일자 『바티칸 인사이더』(Vatican Insider)에 실린 잔니 발렌테와의 인터뷰에서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거듭 말한 바와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상반되는 원칙과 구조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갈등을 지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살아가고 중국 고유의 맥락에서 복음화 사명을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는 현실적인 사목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애국회가 반세기 넘게 중국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조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 조직이 특정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났고 다시 변화를 겪을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 그들 자신도 이를 이해하는 듯하다.

세계 지도에 담긴 사고방식

  중국과 교황청의 합의는 기본적으로 철저히 사목적 성격을 띤다. 그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내부 갈등에 휩쓸리지 않고, 관계된 모든 이의 선의로 그 갈등을 극복하여 복음을 더 잘 전하게 하는 것이다. 분명 이 합의는 갈등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7년 2월, 『치빌타 카톨리카』 이탈리아판 제4000호에서 중국을 온전히 사랑했던 마테오 리치[利瑪竇, 1522-1610]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권고했다. 서른 살 때 중국으로 파견된 이 예수회원은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대륙과 섬을 묘사한 훌륭한 세계지도3)를 제작했다. 지명과 간략한 설명이 들어간 이 지도 덕분에 중국인들은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리치의 세계지도는 다른 문명과 중국 민족을 이어 주는 역할을 했다. 사실 세계지도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와 문명들을 이어 주는 다리와 같다. 지금처럼 벽과 장애물로 분열된 세상에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땅의 이상이 우리 행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4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지구 상 ‘인류 문명들의 여정을 장대한 유전자 지도’(magnifica mappa genetica del cammino delle civiltà umane)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다채로운 빛깔이 담긴 팔레트처럼 여러 문명이 ‘더 넓은 교류와 상호 학습’(maggiori scambi e apprendimento reciproco)으로 풍성해지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이 연설은 이른바 ‘문명 충돌론’(scontro di civilt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시 주석은 공자 시대의 인물인 안자(晏子)를 인용하면서 장단, 리듬, 정감, 곡조, 양식 등을 결합한 음악 이미지를 사용했다. “같은 곡조를 한 가지 악기로 계속 연주한다면 누가 참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인종, 피부색, 종교, 사회 체제들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으며 지구 상의 모든 민족들은 서로 긴밀하게 결속되어 공동 운명으로 살아가는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팔레트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야만적인 충돌’(inciviltà dello scontro) 대신 ‘만남의 문화’(civiltà dell’incontro)를 제시했다. 교종은 시시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서양과 동양, 중국 모두 평화로운 균형을 유지할 능력과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종이 생각하는 균형이란 얄타회담처럼 타협과 분할의 결과가 아니라 대화의 결실이다. 게다가 교황청과 중국이 합의하기까지의 여정은 국제 정세 그리고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얽혀 있음은 더욱 분명하다. 이 역사적 여정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목적 태도는 지정학적 역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에는 종종 우려되던 파국적 전망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있다.

  한편, 9월 22일 합의서는 ‘보증인’(protettori) 없이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사실 교황청이 강력한 서구 세력에 서기를 바라는 이들의 소망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이런 방식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있고 그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은 비오 11세가 교황사절로 지명했던 첼소 코스탄티니의 교훈을 암묵적으로 따른다. 첼소 추기경은 외국 선교 보호권 형식으로 중국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은 전부 사양했다.

  교종과 시시 교수의 대담은 중국 주석을 향한 중요한 소망으로 마무리되었다. 거기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인류의 선익을 위해 모든 정치인에게 줄곧 표명하던 소망이 드러난다. “저는 여러분이 계속 전진하기를, 우리 공동의 집과 민족들을 돌보기 위해 모든 이와 서로 돕고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뢰 구축

  또한 서구와 중국 간 관계의 역사에 식민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로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생각하면 역사 속 이 상처로 인해 문제와 불안 및 서로 간의 두려움이 야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과 교황청 간의 신뢰 관계를 구축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신뢰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마테오 리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는 ‘우정’(amicizia)을 염두에 뒀다. 1601년 리치는 중국과 서양의 지혜를 한데 엮어 우정에 관한 소고4)를 썼다. 이 저술은 명 황실 관리들과 학자들이 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를 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른 한편 예수회 신부들에게도 중국의 위대한 지적 전통을 이해하고 대화할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신뢰는 대화의 실존적 힘에 기초를 둔다. 대화를 통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때로는 큰 헌신이, 또 때로는 고통도 요구된다.

  리치는 이렇게 썼다. “벗을 자기 자신처럼 여길 때, 멀어진 이와 가까워지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불행한 이가 행복해지고, 병든 자가 치유된다.”5) 신뢰로 우리가 가까워지고 신뢰로 힘을 얻는다. 신뢰가 상처를 치유한다. 박해가 초래한 아직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마저도 치유한다. 신뢰는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은 ‘목적지’(meta)라기보다 ‘길’(via)이다. 일치가 갈등보다 우월하다고 깨달아 가는 길이다. 이 변화의 여정이 파괴적이고 이겨 내기 어려운 갈등으로 막혀서는 안 된다. 신뢰는 또한 자전거를 탈 때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알맞은 속도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올바른 수단이다.

  마르티노 마르티니(1614-1661)가 자신의 『구우편』(逑友篇, Trattato sull’Amicizia)에서 바다와 항해, 난파의 은유를 사용하여 우정이라는 주제를 다룬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우정에는 미와 고통이 있다. 화해와 대화가 장애와 과오를 극복하는 신뢰에 기초할 때 이것이 ‘회심’(conversione)의 심오한 형태가 된다. 우리는 모두 여기로 부름을 받고 있다.6)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정이라는 주제에 기대어 중국을 언급했다. 중국인들을 향해 교종이 느끼는 공감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점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중국 교회의 상황은 과거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최근 10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것은 오늘날 여정을 계속하기에 가장 적절하고 알맞은 방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수많은 도전들

  지금껏 [중국] 교회 논쟁의 상당 부분이 내부 분열과 긴장으로 초래되었다면, 이 최초 합의 덕분에 이제 우리는 현실적인 사목 과제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당면한 사목 과제를 전부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 주제와 관련한 중요한 사항들과 지난 2년간 『치빌타 카톨리카』에서 스무 편이 넘는 기사를 통해 다뤘던 주제 중 몇 가지를 살피면 유용할 것이다. 적어도 깨어 있는 정신과 희망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영적 도전: 중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과거보다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알기로 중국은 최근 수십 년 동안 경제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국제 사회의 시선을 끌었다. 이 경제 변화 속에서 중국 사회와 국민들은 다양한 전통과 영역에 걸쳐 실존적 의미 부여를 모색하고 있다. 이 모색의 ‘그리스도교적 방식’(via cristiana)은 현재 중국 내 사회 정치 및 교육적 논의의 실질적인 주제이다. 사실 발전과 경제 성장은 영적 필요를 채우지 못했다. 신앙과 영성은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그리고 그 가치와 열망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모든 분야에서 삶은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실용적으로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서 멀어졌다. 더구나 많은 중국인의 생각과 행동은 전통 관습과 영적 가치와 상충하고 있다.

  중국 가톨릭교회는 어떠한 복음화와 봉사 형태로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교회는 이 도전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치적’ 도전: 중국 가톨릭교회는 또한 공산당과 그 이념과 관련해 자신의 역할과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가 항상 당의 정치와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중국에서 선교와 사도직을 계속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시 교수는 이탈리아 일간지 『일 수시디아리오』(Il Sussidiario)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핵심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이상적인가 악한가가 아니다. 교종이 말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렸다. “당연히 위험을 감행한다면 잘못될 수 있다. 그러나 잘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교종이 늘 말한 대로 선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나쁘다.”

  요컨대 중국의 문화적·전통적 가치와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 가치에는 공통점이 많다. 중국 사회와 교회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며 공동선을 모색하는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내부 분열의 도전: 우리는 이른바 ‘공식 교회’(ufficiale)와 ‘비공식 교회’(non ufficiale) 공동체를 둘러싸고 많은 긴장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양쪽 다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고통이 미래에 화해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영영 과거에만 얽매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복음이 중국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전파되려면 양쪽 모두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사목적이고 선교적인 회심이 필요하다. 공동체들 간의 구별과 관계는 여전히 각 지역 상황에 따라 다르다. 특히 대도시 젊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런 구별과 관계가 금방 지나가는 일이고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 가톨릭 신자들은 정부 당국과 관계에서 생기는 이러한 분열과 어려움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이 분열과 어려움은 여전히 중국 가톨릭교회의 앞길에 난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개신교 공동체는 분명히 더 적극적이고 내부 긴장의 부담이 덜하다.

  ‘공식 교회’(ufficiale)와 ‘비공식 교회’(non ufficiale)로 불리는 두 공동체는 과거의 증오와 상처가 자신들의 삶을 제약하고 앞에 놓인 사명을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된다. 긴장과 오해를 극복해야 한다. 주교들과 사제들은 권력과 특권을 위해 충돌하기보다 중국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단합하고 협력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 가톨릭교회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교회 화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파롤린 추기경은 잔니 발렌테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도전 과제를 요약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많습니다. 상처들을 치유하려면 자비의 향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크든 작든 희생을 요구받는다면, 정치적 거래의 대가가 아니라 더 큰 이익, 곧 그리스도 교회의 선익이라는 복음의 관점을 따랐음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목표는 “중국 교회에서 이 주교들이 ‘합법적’이냐 ‘비합법적’이냐, ‘지하 출신’이냐 ‘정부 공인’이냐에 관해 더 왈가왈부할 필요 없이, 형제들 서로가 만나서 협력과 일치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미 거쳐 온 단계와 앞으로 이어질 단계들에 수반되는 목표와 희망으로 남아 있다.

  ‘중국화’의 도전: 중국이라는 고유한 특성 때문에, 중국 가톨릭교회는 그 교리와 복음의 가치를 토착화시킴으로써 온전히 가톨릭적이면서 또 온전히 중국적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중국적 특성을 취하면서 토착화 과정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교회는 풍부한 미술과 음악, 문학과 시의 역사를 가지고, 중국 문화와 전통과 대화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앞서 인용한 유네스코 연설에서 중국 역사에 종교가 기여한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00년 동안 불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등 중국에 여러 종교가 전래되어 중국의 음악, 그림, 문학에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무수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거장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에서는 랑쉬닝(郎世寧)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의 공헌만 언급해도 충분하다. 그는 1688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766년 북경에서 사망했는데, 그를 대단히 높이 샀던 건륭 황제로부터 황실 장례식의 예우를 받았다.

  최근 한 가지 특별한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몇 년 동안 중국 지도부에서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종교들에 ‘중국화’(Zhongguohua)를 수차례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2015년부터 시진핑 주석의 연설에서 나타나지만, 2017년 10월 제19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전후로 더 많이 언급되었다. 주석은 전대 개막식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종교 문제에 관한 당의 기본 정책을 온전히 이행할 것이며 중국에서 종교는 중국 지향성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고 당은 종교가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도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종교가 정치기구의 단순한 수단이 되는 데 그칠 수 없듯이, 정부가 종교 단체들과 신자들에게 바라는 의무도 그 내용을 명확하게 규정하여 이행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변화하는 맥락 속에서 아마도 서로가 대면하며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과거에 대한 성찰이 유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처음의 유대교적 체험과 문화를 뛰어넘어 보편 사명을 받아들이고 그리스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 근본적 변화였다. 이것은 나중에 로마제국의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교회의 삶과 선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로마제국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로마에서부터 당시 넘을 수 없었던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적 범주로 사고했다. 그리스도교를 중국적 범주로 사고한다면 어떤 의미일까?

  이 주제에 관해서는 요제프 라칭거가 추기경 시절에 쓴 『지상의 소금』(Il sale della terra)이라는 대담집 중국어판 서문에 적은 내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단지 소수 종파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체를 변화시킬 원동력이 되어 오래 지속되는 응답이 될 수 있는가? 유대교에서 이교 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와 라틴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것처럼 언젠가 아시아 또는 중국식 그리스도교가 생겨날 것인가? 또는 고대 후반기 때 게르만과 슬라브식 유럽 그리스도교처럼 등장할 것인가?”

  신학적 도전: 중국 땅에서의 신학적 성찰은 의미가 있다. 전통 유교와 도교의 맥락에서 신학은 중국 사상과 정서의 위대한 전통을 그리스도교와 긴밀하게 연결하고자 한다. 중국의 위대한 지혜와 철학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교 또한 중국식 용어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에 형성된 고대 도교의 철학적이고 신비한 교리를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책 『도덕경』에서 중국 사상으로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데 적절한, 그리고 반대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심화시키는 데에도 아주 적절한 몇 가지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60년대 말 예수회 클로드 라르 신부가 그리스도교에 입각해서 쓴 도덕경 주석을 생각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특정 논리나 단일한 철학 비전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해방하신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단순하고 강렬하면서도 분별 있는 도덕경 영성의 핵심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써 나가야 할 미래

  9월 22일의 합의에 따라 중국 교회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쇄신하는 데 힘쓰고 종교적 메시지와 열심한 자선 활동을 통해 중국인의 선익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가톨릭 신앙 고유의 보편성을 고려하여, 토착화 과정을 거쳐 현지화하고 온전히 중국화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온전히 중국적이면서 온전히 가톨릭적으로 된다. 이것은 첼소 코스탄티니 대주교가 교황사절로 중국에 파견되어 지낸 시기(1922-1933)부터 줄곧 교회가 제안해 왔던 목표이다.

  우리는 이 합의를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간주해야 한다. 합의를 맺었다고 해서 중국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저절로 향상된다는 보장은 없다. 과제는 남아 있지만, 양측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은 분명 중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긍정적인 일이다.

  가톨릭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합의를 바라면서 무엇을 요청했는가? 파롤린 추기경은 앞서 언급한 대담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는 정직하고 현실적인 태도로 평온하게 고유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 외에는 다른 무엇을 요청하지 않으며, 오랜 대립의 시기를 확실히 끝냄으로써 더 큰 신뢰의 공간을 열고 가톨릭 신자들이 중국 사회 전체의 선익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과제는 또한 2016년 5월 22일 주일 삼종기도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전한 말로 잘 요약된다. “중국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고귀한 종교 전통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자비와 화해의 구체적인 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진정한 만남의 문화와 사회 전체의 조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이 조화는 중국인들이 무척 애호하는 정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합의라는 새로운 단계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임무는 무엇인가? 우리 편에서 보면, 파롤린 추기경이 최근 총회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모두 친밀감, 존경심과 겸손, 무엇보다 기도로, 중국 교회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의 한 장을 작성하는 문제이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와 건전한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 천주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앙을 깊이 느낄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되기를 고대한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정하시어 반석이 된 베드로에게 더더욱 확실하게 고정되기를 고대한다. 그들이 온전히 중국인으로서, 참되고 고귀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로운 모든 것을(필리 4,8 참조)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을 부인하거나 얕보지 않기를 고대한다.


1) La Civiltà Cattolica, 4039 (6/20 ottobre 2018), 8-21.
2) 편집자 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서한, 「중화 인민 공화국 가톨릭 교회의 주교와 신부 봉헌된 이들과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교황 서한」, (2007.5.27.), 4항, http://www.cbck.or.kr/book/book_list5.asp?p_code=k5150&seq=401655&page=7&KPope=%BA%A3%B3%D7%B5%F1%C5%E416%BC%BC&KBunryu=&key=Title&kword= (접속일: 2018.11.30).
3) 역자 주: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4) 역자 주: 『교우론』(交友論, Trattato sull’Amicizia).
5) 역자 주: 마테오 리치, 『교우론』(交友論, Dell’Amicizia), 43항: “벗을 자기 자신처럼 여길 때, 멀어진 이와 가까워지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불행한 이가 행복해지고, 병든 자가 치유된다.” (親友如己者, 則遐者邇, 弱者强, 患者幸, 病者愈). 주해는 다음을 참조: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우정, 종교간 대화의 토대 – 중국 유학자들과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 『치빌타 카톨리카』, 제2권 (2017, 여름), 63.
6) 역주: 마르티노 마르티니, 「우정에 관한 소고」, 『구우편』(逑友篇, Trattato sull’Amicizia): “우정은 사랑의 바다이다. 항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파도가 잔잔할 때에는 배들 이 조용히 전진하지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면 수많은 배들이 뒤집히고 비참하게 가라앉는다. 바다의 모습은 한결같지 않다. 항해하는 이들은 그래서 조심스럽고 주의 깊고 신중하다. 사랑의 바다를 건너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友者愛之海, 最難遊也. 浪恬按平, 舟怡然入海洋; 狂風快起, 拱濤浦浩, 多覆 溺憂. 海性無恒, 航海者固兢兢戒謹也. 渡愛海者亦然); “영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 사랑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을 줄 알고 이 사랑을 받는 이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그 래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상황이 호의적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이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감행한다.” (愛旣全得於心, 無事複强也. 善奪愛者之心, 而獻之於己 所愛焉. 故眞愛無懼, 不顧事勢難易, 莫不奮身以就所愛, 而拯其急也); 우정은 다른 무엇보다 탁월한 “덕과 정의로부터 기인하는 한계들을 지니고 있다.”(交有疆域, 惟德惟義. 求非義者, 越其界矣);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고 나의 벗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 육신을 사랑하지만 나의 벗은 내 영혼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정은 덕을 돕지 육신을 돕지 않는다.”(有愛我者, 有友我者. 愛我者, 好我之身; 友 我者, 好我之心. 故友者, 德之助, 非身之助); 리치와 마르티니가 겪은 우정과 대화, 고통과 회심을 스파다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회심으로서의] 고통의 경험은 마테오 리치에게도 마르티노 마르티니에게도 자신의 삶 자체를 뒤엎고 뒤바꾸는 (con-vertire) 것이면서 또한 유학자들의 마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예수회원들은 타인과의 화해와 대화의 태도를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채 자신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뒤흔들고 바꾸어가면서 중국인들의 전통을 향해서 자신을 돌려 세웠다.” 주해는 다음을 참조: 안토니오 스파다로 S.J., 「우정」, 6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