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영적 가르침과 윤리적 원칙에 대한 소고

CRISI UMANITARIE E RIFUGIATI: Prospettive religiose e princìpi etici1)

데이비드 홀렌바흐 S.J.
이정혜 젤뚜르다 옮김 (인류학박사, 국제이주기구 한국대표)

  오늘날 인도주의 시스템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살던 곳에서 쫓겨나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의 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 때보다 많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현 상황을 일컬어 ‘전대미문의 연대’(solidarietà monumentale)를 기반으로 대처해야 할 ‘전대미문의 위기’(crisi monumentale)라고 했다.2) 우리는 비참한 상황으로 위협받는 이들의 인간성을 보호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세계 종교와 영성 전통의 가르침 가운데 이 위기 상황에 대한 응답이 될 만한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난민3)의 필요에 응답하는 그리스도교 영감을 살펴본 뒤, 그다음에는 정책 입안에 더 중점을 둔 윤리적 관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종교 및 영성의 접근들

  근래 들어 정치 철학자 조셉 카렌스(Joseph Carens)나 난민 연구자 필립 마프릿(Philip Marfleet)과 같은 학자들은 박해, 내전, 재난을 피해 도망하는 모든 난민에게 국경을 완전히 개발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4) 비슷한 정신에서 현대 인권 운동에서도 이 학자들과 생각을 같이하며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 존엄성을 확언한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기본 조건을 위협받는 사람들을 두고 누구는 들어올 수 있고 누구는 안 된다면서 갈라놓는 장벽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다.

  세계 주요 종교 전통들도 이 방향성을 굳게 뒷받침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둘 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국경을 초월하는 존엄성을 공유한다고 여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리스 레스보스섬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 이야기했다. 교종은 시리아 난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느님은 인류를 한 가족으로 창조하셨다’고 확언하면서, 유럽 사회가 ‘벽을 세우기’(erigere muri)보다는 ‘다리를 건설’(costruire ponti)하도록 초대했다.5)

  유일신 전통을 가진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의 경우, 다소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 근원이 성조 아브라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온 이주민이었다. 유대민족의 정체성은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하느님이 약속한 땅에서 누리는 자유를 향한 이주, 곧 탈출기 이야기를 통해 형성된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도 출생 직후 박해를 피해 어쩔 수 없이 마리아,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간 난민이었다. 무슬림은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헤지라(hijra), 다시 말해 ‘이주’했던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 신앙 공동체들은 각각 그들의 종교 및 윤리적 투신을 마치 국경을 초월하여 도달할 목표로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1963년에 성 요한 23세 교종은 “특정한 정치 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사실로 인해 같은 인간 가족의 일원임이 상실되지 않는다.”6)고 하며, “난민들은 자기들이 소속해 있던 정치 공동체의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인간으로서의 권리까지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7)라고 말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 또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에는 연민과 자비의 정신으로 난민들을 포용할 책임도 들어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정책 입안을 위한 윤리적 우선순위

  몇 해 전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국적이란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무의미한’(moralmente irrilevante) 특성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열린 국경을 지지하는 윤리적 입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8) 물론, 실제 난민 문제에서 국가체계와 국경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에게는 전 인류를 이웃처럼 사랑할 의무도 있지만, 가족이나 국가 구성원처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이들에 대한 의무도 있다. 그러므로 이 의무들 간의 윤리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이러한 우선순위를 토대로 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정책 지향적 접근을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멀리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보다 우선이어야 하지만, 멀리 떨어진 이들의 필요가 더 클 때는 그들이 우선이다.

  가톨릭 사회 교리는 이 개념을 ‘보조성의 원리’(principio di sussidiarietà)에 담아 표현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더 작고 가까운 공동체에 특별한 의무를 띤다. 그렇지만 멀리 떨어진 공동체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거나 지역 공동체가 이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할 때 더 큰 지역 공동체 또는 국제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도와야(subsidium) 한다.9) 보조성의 원리는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발전했지만 유엔도 이 개념을 채택했다.10) 즉 난민에 대한 일차 책임은 그들이 속한 국가에 있지만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의무는 인접 국가와 국제기관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우리는 동료 시민과 강제이주민 양쪽 모두에게 의무를 지고 있다. 어느 쪽의 의무도 절대적이지 않다. 같은 국가 시민에 대한 의무가 난민에 대한 의무보다 항상 우선하지도 않고 그 반대가 늘 우위를 점하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의무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제안하려 한다. 우선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 행하지 말아야 하는 소극적 의무를 살펴보고, 이미 발생한 위기 상황에서 행해야 하는 적극적 의무를 살펴보겠다.

  오늘날 전 세계 강제이주는 대부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남수단, 예멘의 내전과 같은 전쟁에 의해 발생한다. 이러한 이주에 관한 소극적 의무에서 핵심은 ‘정의로운 전쟁의 윤리’(etica della guerra giusta)라는 전통에 있다. 이 전통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 자유, 안전에 대한 권리 및 국가의 자결권과 영토에 대한 권리를 지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력 사용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집어 말하면 소극적 의무는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려고 또는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하려고 무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윤리이다. 이런 소극적 의무를 위반하는 것은 부도덕할 뿐 아니라 범죄행위이다.

  1994년에 르완다에서 발발한 처참한 집단 살해가 소극적 의무를 위반한 예이다. 그 당시에 무력이 동원되어 투치족을 거의 전부 학살했다. 이 의무는 또한 스레브레니차에서 잔학 행위가 일어났을 때도 위반되었다. 그곳에서는 보스니아 무슬림 수천 명이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인종 청소’(pulizia etnica)라는 명목으로 살해당했다. 따라서 인도주의적 위기를 예방하고자 애쓸 때, 더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당한 무력 사용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또한 ‘정의로운 전쟁’(guerra giusta)의 규범은 민간인을 고의로 공격하거나 민간인에게 부당한 이차 피해를 끼치는 것도 금한다. 이는 국제법으로 금지되었고 특히 제4차 제네바협약과 1차 추가의정서에 명문화되어 있다. 최근에 발생한 강제이주 몇 건은 이 조항을 어긴 데서 비롯했다. 2013년 12월에 발발한 남수단 내전이 일례이다.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는 남수단 정부와 반군 세력 모두 “전쟁범죄에 가까운, 몇몇 경우에는 반인도적 범죄에 견줄 참혹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했다.11) 이런 대혼란으로 2018년 1월까지 약 250만 명의 남수단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내이재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또한 200만 명 가까이 달했다.12) 시리아에서는 민간인에 대한 기본 인권 침해로 인해 근래 들어 최대 규모의 강제이주가 발생했다.

  이 상황을 보며 이재민을 돕기 위한 우리의 적극적 의무에 대한 물음이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국민에 대한 의무도 고려해야 한다. 이 주제를 다루려면 지난 세기 7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종족과 인종에 따라 국민을 가르고 격리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을 두고 일어났던 논쟁에서 발전한 윤리적 분석 방식을 빌릴 수 있겠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논쟁에서 일부는 이 제도를 해결할 의무가 제도를 만든 당사자, 즉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집단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일 대학교의 몇몇 학자들은 전혀 다른 윤리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해악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해악을 치유하는 데 기여할 적극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었다.13) 그들은 뉴욕 큐가든스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이 접근 방식을 큐가든스 원칙(Kew Gardens Principle)이라고 불렀다. 1964년에 키티 제노비스라는 젊은 여성이 잔인하게 공격당하고 칼에 맞아 살해당했는데 가까이서 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고만 있을 뿐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은 사건이었다.14) 이 사건으로 유발된 대중의 분노는 많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방관이 범죄행위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큐가든스 원칙에 따르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할 때 타인을 도울 적극적 의무가 생긴다. (1)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2) 필요 상황에 근접해 있다, (3) 도울 역량이 있다, (4) 그 상황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나 말고는 없다고 판단된다. 추후 논의에서 (5) 도움을 주는 이가 심각한 해를 입지 않을 조건이 추가되었다. 개인과 국가가 이 원칙을 실행하는 데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을 토대로 오늘날 이재민들에 대한 적극적 의무의 범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도움의 필요. 오늘날 시리아와 남수단의 많은 민간인에게 보호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기로 분열된 나라에 머무는 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에 놓여 있으며, 이런 취약함 때문에 피난길에 오른다. 이들을 보호할 의무는 가장 먼저 이들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잘 이해하는 이들에게 있다. 바로 분쟁이 발생한 국가의 정부와 지역 공동체가 기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남수단과 시리아에서는 정부와 반군 세력 모두 잔혹 행위를 멈출 소극적 의무와 고통을 당하는 이들의 짐을 덜어줄 적극적 의무를 띤다.

  하지만 적극적 행동을 취할 의무는 분쟁 당사국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접 국가 또는 멀리 떨어진 국가에서라도 분쟁 사실을 인지하면 ‘지적 혹은 심리적 근접성’(prossimità intellettuale o psicologica)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러면 고통을 받는 분쟁 지역 사람들에 대해 ‘윤리적 근접성’(prossimità morale)까지 갖게 된다. 남수단의 경우에 인접 국가들이 조직한 동아프리카정부간개발기구(Intergovernmental Authority on Development, IGAD)가 남수단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외교적 중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타깝게도 동아프리카정부간개발기구 회원국들의 중재 노력이 자국의 정치 경제 이해 때문에 왜곡되기도 하는데, 특히 우간다와 에티오피아가 그랬다. 이 때문에 동아프리카 지역을 넘어선 몇몇 국가도 참여하는 확대 동아프리카정부간개발기구(IGAD Plus)가 생겼다. 여기에는 아프리카연합, 유엔, 중국, 미국, 영국, 노르웨이, 유럽연합이 가입했다. 분쟁 상황을 인지함으로써 형성된 근접성이 멀리 있는 국가들에도 윤리적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지역의 노력과 세계의 노력이 결합했어도 지금까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도움을 제공해왔으며 멀리서라도 행동을 취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역량의 기준 또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응답할 적극적 의무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준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할 의무가 없지만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아이를 구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현재 레바논, 터키, 요르단은 이미 시리아 난민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고 있으며 추가로 난민15)을 수용할 여력이 없다. 반면에 북유럽, 북미, 중동 산유국 등 부유한 국가들은 난민신청자16)를 더 많이 수용함으로써 이미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는 시리아 인접 국가들의 짐을 덜어줄 수 있다. 경제 정치적 역량이 더 큰 국가들은 그에 비례하여 인도주의적 지원의 책임도 진다. 더 많은 난민에게 입국을 허용하고, 재정착할 기회를 더욱 확대하고, 특히 이미 과도한 짐을 지고 있는 터키, 레바논, 요르단을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적극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17)

  이런 적극적 의무는 ‘보호책임’(responsabilità di proteggere, R2P)이라는 윤리 및 정책 준거의 기반이 됐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보호책임을 논할 때는 비단 국가가 기본으로 책임을 지는 인권 존중, 공공질서 유지, 사회적 화합과 국민과 그 가족, 소유물에 대한 안전보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호책임은 다음 세 가지 기본 원칙을 따른다. (1) 국가는 중대한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하면 집단 살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의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가치인 강행법규(ius cogens)에 해당하는 권리가 침해될 때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2) 국가가 보호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는 국가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 (3) 국가가 보호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위의 범죄를 막지 못했을 때 국제사회는 외교적 인도주의적 수단과 평화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 국가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맡는다. 끝으로 국제사회가 취하는 모든 행동은 국제법과 유엔헌장에 입각해야 한다.18)

  보호책임은 2005년 유엔총회에서 국가수반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열띤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유엔헌장과 비교했을 때 보호책임에는 기술적, 법적 어려움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원칙과 셋째 원칙은 국제관계에 중대한 의문들을 일으킨다. 국제사회의 보호책임과 유엔헌장 1장 2조 7항에 명시된 국내 관할권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는 점, 같은 헌장 7장에 규정된 형태 이외의 연합군 이용을 허가하는 국제법 조문이 아직 없다는 점 때문이다. 보호책임 원칙을 법제화하려면 적어도 39조를 개정해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개입을 허용하는 상황에 보호책임에서 언급하는 범죄들도 포함해야 한다. 또한 보호책임에서 언급하는 범죄가 발생했을 때 유엔이 개입할 권한을 정의하려면 2조 7항을 개정하거나 적어도 유권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느 국가가 보호책임을 빌미 삼아 타국에 무력간섭할 권한을 스스로 부여한다면, 이는 20세기 국제법의 근간을 부정하는 데로 이어질 것이다.

  보호책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여러 분쟁 상황에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일례로, 케냐에서 2007년 대선 논란 이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유엔, 아프리카연합, 미국을 비롯한 기타 여러 정부가 나서서 분쟁을 중단시키는 데 기여했다. 결국 케냐 내 정치세력들이 권력 공유에 합의했고,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19) 보호책임은 폭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또한 보호책임은 잔혹 행위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 예로 2012년 말리 사태가 벌어졌을 때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와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가 유엔의 승인하에 취한 군사행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중앙아프리카에서 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 대한 잔혹 행위와 이재민 발생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아프리카연합의 부대가 움직였다.20) 이 두 사태는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보호책임이라는 기조가 위기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리비아와 시리아의 경우, 현재 보호책임이 얼마나 적절하게 작동하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리비아에서는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잔혹 행위를 저지르려 한다는 공포가 일었을 때 유엔은 민간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처’(tutte le misure necessarie)를 취하도록 승인했다.21)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공군을 투입하였고, 카다피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리비아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당사국이 청하지 않은 인도주의적 목적을 이루려고 애쓸 때 선익보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도 있었다.22) 하지만 리비아에 대한 개입이 실패한 것은 개입이 지나쳤기 때문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미국은 개입 이후에 후속 조치를 취하고, 정권 붕괴 이후에 발생한 혼돈을 막고 사회를 재건할 행동을 취했어야 했다.

  보호책임이 무용하다고 주장할 때도 시리아가 예로 언급된다. 시리아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아주 모호하다. 하지만 잔혹 행위를 당하기 직전인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보호할 수도 있는데, 상황이 복잡하다고 해서 보호의 의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리아 사람들을 보호할 의무는 그들을 보호할 길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정치적 외교적 노력을 요청한다. 아사드 대통령과 반군은 물론, 그 외 국제사회의 관계국들 역시 시리아 사태 해결을 지연시키고 있다.23) 그러므로 전 세계가 이 세력들을 외교적 차원에서 설득하여 위기에 처한 시리아 사람들을 보호할 길을 찾아야 한다.

  유럽과 몇몇 선진국에서 피신처를 찾는 많은 시리아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 최소한,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다는 1951년 난민협약은 실행에 옮겨야 한다. 유럽과 북미 국가들에는 시리아 난민을 지금보다 더 많이 수용할 역량과 자원이 있다. 실제로 유럽으로 피신한 시리아 사람의 수는 시리아 인접국으로 피신한 사람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적다.

  2015년 가을, 당시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5년 동안 시리아인 2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을 때, 국제 여론은 이미 레바논이 지난 2주 동안 그만큼의 시리아인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 난민의 84퍼센트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전 세계 피신처의 25퍼센트를 극빈국가가 제공하고 있다.24)

  북반구 선진국에서 시리아의 인접국들에 보내는 지원금을 대폭 늘리는 것이 지금의 우선순위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종이나 종교를 기반으로 한 외국인 혐오증, 난민들이 신분을 감춘 테러리스트라는 잘못된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최근 일부 학자들이 윤리 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인권 옹호 활동이 현대 국제 정치의 여러 영역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25) 예컨대 난민 보호에 대한 국제법적 기준, 무력 분쟁 규제에 대한 기준은 국제적십자위원회 같은 조직들이 지난 세기 동안 펼쳤던 인권 옹호 활동의 결과이다. 최근에는 ‘규범 주창자들’(imprenditori normativi)이 도덕적 규범을 위반한 정치 지도자들을 국제재판소에 세워 책임을 묻고자 노력을 더욱 기울였다. 이는 윤리적 기준이 국가의 행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노력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몫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톨릭 공동체는 물론 선의를 지닌 모든 이에게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도록 지속해서 촉구하고 있다. 종교 공동체를 포함한 다양한 비정부기구들이 규범적 압력을 가한다면, 이 글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가 단지 일부만 행했던 책임을 실행하는 데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이 일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이 긴급하다. 응답 또한 지체 없이 나와야 한다.


1) La Civiltà Cattolica, 4033 (7/21 luglio 2018), 27-37.
2) Ban Ki-moon, “Remarks on Forced Displacement: A Global Challenge,” Speech at UN News Centre, Washington, D.C., (2016. 4. 16). https://www.un.org/sg/en/content/sg/speeches/2016-04-15/remarks-forced-displacement-global-challenge (접속일: 2018.11.20).
3) 역자 주: 이 글에서 ‘난민’[(이)rifugiato, (영)refugee]은 유엔 협약과 같은 국제 규범이나 난민 수용 국가가 정책 대상으로 정의한 난민만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을 폭넓게 지칭한다. 기술적으로 구분해 사용하는 난민(refugees), 이주민(migrants), 국경 내 이재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을 포괄한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난민 개념을 따른 것이며, 날로 복잡해지는 이주 또는 생존을 위한 이주(survival migration) 현실을 반영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유럽 내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정치 담론과 이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최근 논의는 Heaven Crawley – Dimitris Skleparis, “Refugees, migrants, neither, both: categorical fetishism and the politics of bounding in Europe’s ‘migration crisis’”, Journal of Ethnic and Migration Studies, Vol. 44, Issue 1 (2018), 48-64를 참조하기 바란다. 가톨릭교회의 난민 개념에 대해서는 Pontifical Council for the Pastoral Care of Migrants and Itinerant People, “Refugees: A Challenge to Solidarity” (1992), nn.4-5,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orunum/documents/rc_pc_corunum_doc_25061992_refugees_en.html (접속일: 2018.11.20); John Paul II, “Address to the Diplomatic Community in Nairobi”, (6 May 1980), n. 8,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speeches/1980/may/documents/hf_jp-ii_spe_19800506_nairobi-diplomatici.html(접속일: 2018.11.20); 교종 바오로 6세, 「팔십 주년」, (1971), 17항, http://www.cbck.or.kr/book/book_list5.asp?p_code=k5150&seq=400180&page=35&KPope=&KBunryu=&key=&kword=(접속일: 2018.11.20); Giovanni Paolo II, “Discorso al Corpo Diplomatico Accreditato Presso la Santa Sede”, (15 gennaio 1983), n. 6, https://w2.vatican.va/content/john-paul-ii/it/speeches/1983/january/documents/hf_jp-ii_spe_19830115_corpo-diplomatico.html(접속일: 2018.11.20)을 참조하기 바란다.
4) 참조: Jospeh Carens, “Aliens and Citizens: The Case for Open Borders”, Review of Politics, 49/2 (1987), 251-273; Philip Marfleet, Refugees in a Global Era,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6), 288-290.
5) 참조: Francesco, “Discorso al Moria refugee camp di Lesbo (Grecia)”, (2016.4.16),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6/april/documents/papa-francesco_20160416_lesvos-rifugiati.html (접속일: 2018.11.20); Francesco, “Incontro con la cittadinanza e con la comunità cattolica. Memoria delle vittime delle migrazioni”, (2016.4.16),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6/april/documents/papa-francesco_20160416_lesvos-cittadinanza.html (접속일: 2018.11.20); 참조: Antonio Spadaro, “Roma e Costantinopoli si incontrano a Lesbo. L’ecumenismo delle frontiere”, La Civiltà Cattolica, 3981 (14 maggio 2016), 237-248.
6) 교종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 (1963), 25항, http://www.cbck.or.kr/book/book_search.asp?p_code=k5110&seq=400215&page=1&Cat=A&key=Title&kword=%C1%F6%BB%F3%C0%C7%20%C6%F2%C8%AD. (접속일: 2018.11.20).
7) Ibid., 105항.
8) 참조: Martha Nussbaum, “Patriotism and Cosmopolitanism”, in For Love of Country, ed., Joshua Cohen (Boston: Beacon Press, 2002), 5. 누스바움은 후에 민족 국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바꿨다.
9) 참조: 교종 비오 11세, 「사십주년」, (1931), 35항.
10) 참조: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of Refugees, South Sudan emergency, www.unhcr.org/en- us/south-sudan-emergency.html (접속일: 2018.11.20).
11) Human Rights Watch, “South Sudan’s New War: Abuses by Government and Opposition Forces”, (2014. 8. 7), https://www.hrw.org/report/2014/08/07/south-sudans-new-war/abuses-government-and-opposition-forces(접속일: 2018.11.20); 참조: UN, “Interim Report of the Panel of Experts on South Sudan established pursuant to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206 (2015)”, www.southsudanhumanitarianproject.com/reports/docr-532 (접속일: 2018.11.20).
12) 참조: www.unhcr.org/en-us/south-sudan-emergency.html/ (접속일: 2018.11.20); Andrew Rusatsi, “Il Sud Sudan. A sei anni dalla travagliata indipendenza”, La Civiltà Cattolica, 4019 (2 dicembre 2017), 466-474.
13) 이는 가톨릭 윤리 신학에서 오랫동안 확실히 자리 잡은 개념이다.
14) John Simon–Charles Powers–Jon Gunnemann, The Ethical Investor: Universities and Corporate Responsibilit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2), 22-25. 이 사건으로 얻은 다른 통찰을 보려면 다음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Nicholas Lemann, “A Call for Help: What the Kitty Genovese Story Really Means”, New Yorker, (2014. 3. 10), 73f.
15) 편집자 주: 이 글에서 [(이)asilo, (영)asylum]은 ‘난민’으로 번역하였다. 이 표현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 ‘망명’이나 ‘피난처’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주 용어 사전』에서는 ‘비호’로 옮겼다. 국제이주기구, 「비호 신청자」, 『이주 용어 사전』, 이상림 편, (고양: 이민정책연구원, 2010²), 49.
16) 편집자 주: 이 글에서 [(이)richiedenti asilo, (영)asylum seekers]은 ‘난민 신청자’로 번역하였다. 『이주 용어 사전』에서는 ‘비호 신청자’로 옮겼으나 이는 난민법 전공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에 문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난민 신청자’로 번역하였다. Ibid., 50.
17) 참조: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of Refugees, “Greater support in countries of first asylum needed to stem refugee outflows”, (2015, 8, 26), http://www.unhcr.org/55ddd2c86.html/ (접속일: 2018.11.20).
18) 유엔 총회에서 승인한 보호책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World Summit Outcome Document”, nos. 138-139. http://www.globalr2p.org/media/files/wsod_2005.pdf (접속일: 2018.11.20).
19) The International Coalition for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The Crisis in Kenya, II. International Response to Halt the Spread of Violence”, http://www.responsibilitytoprotect.org/index.php/crises/crisis-in-kenya (접속일: 2018.11.20).
20)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유엔의 활동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 “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 2127 (2013), http://www.un.org/en/ga/search/view_doc.asp?symbol=S/RES/2127(2013)&referer=http://www.un.org/en/sc/ documents/resolutions/2013.shtml&Lang=E (접속일: 2018.11.20).
21) 참조: “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 1973 (2011)”, nos. 4&6, http://www.un.org/en/ga/search/view_doc.asp?symbol=S/RES/1973%282011%29 (접속일: 2018.11.20).
22) 참조: Alan. J. Kuperman, “Obama’s Libya Debacle: How a Well-Meaning Intervention Ended in Failure”, Foreign Affairs, 94 (2015), 66-77.
23) 참조: Giovanni Sale, “Il ‘martirio’ di Aleppo”, La Civiltà Cattolica, 3937 (1 gennaio 2017), 34-45; Sale, “La Turchia e le ‘enclave’ curde in Siria”, La Civiltà Cattolica, 4025 (3 marzo 2018), 476-490; Sale, “The War in Syria”, La Civiltà Cattolica English Edition, 1808 (26 July 2018).
24)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of Refugees, “Global Trends: Forced Displacement in 2016”, 2, http://www.unhcr.org/globaltrends2016 (접속일: 2018.11.20).
25) 참조: Martha Finnemore-Kathryn Sikkink, “International Norm Dynamics and Political Change”, International Organization, 52 (1998, Autumn), 887-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