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성의 역설

I PARADOSSI DELLA VULNERABILITÀ1)

디에고 파레스 S.J.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옮김 (광주대교구, 임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2017년 11월 19일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현대 세계에서 가난을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며 가난은 ‘우리에게 날마다 수만 가지 방식으로, 곧 고통의 … 모습으로 도전’한다고 강조했다.2)

  취약성과 가난, 인간 개발에 관한 지수들을 근거로 한 평가들―지수 조사와 평가가 필요하지만, 유엔 개발 계획(il Programma delle Nazioni Unite per lo sviluppo)3)도 인정하듯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의 추상성을 보완하면서, 교종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도록 초대한다. 숫자만이 아니라 얼굴을 보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삶 속으로 직접 섞여 들어가, 그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통합적인 인간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진 요구와 포부를 듣고 이에 참여하며,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 가난한 이들이 주인공이며 수혜자가 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4)

  가난을 정의하기 위해 유행처럼 쓰이는 표현 중 하나가 ‘취약성’(vulnerabilità)이다. 이 용어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사용된다는 사실은 이점인 동시에 위험 요소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공동의 지평 위에서 대화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주제가 지닌 복잡함 속에 담긴 다양한 관점을 한데 모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위험 요소는 인간적 취약성의 영역을 마땅한 식별 없이 기술과 관련된 취약성이나 물리적 취약성의 특징들로 덮어 버리는 데 있다. 그러면 ‘취약성’(vulnerabilità)은 추상적 개념에 머물며, 취약한 이들이 감내하는 ‘각각의 소외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filo invisibile che lega ciascuna delle esclusioni)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든다.5)

  이 글에서는 우선 ‘취약성’(vulnerabilità)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다양한 학문에서의 활용을 살펴보고,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명확히 정리하고자 한다. 그다음에 이 용어가 불러일으킨 역설들을 고려한 뒤, 마지막으로 취약성 예방, 이미 상처 입은 이들의 치유, 가장 취약한 이들의 돌봄을 행할 때 우리의 사회적 품위는 어떤 영향을 받는지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성찰을 제안하겠다.

상처와 타격으로서의 취약성

  어원학적 관점에서 ‘취약성’(vulnerabilità)이라는 단어는 상처, 베기, 절단, 타격, 손상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 vulnus에서 온다. 라틴어 사용자들은 피동의 의미를 능동태와 결합하곤 했다. Una manus vobis vulnus opemque feret.6)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그 손이 여러분을 치료할 것이다.” 이는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가 발레아레스 제도(Baleari)의 고등법원에서 Vulnus opem feret. “상처는 그를 상처 입힌 존재(행위와 행위자)를 향한다.”(la ferita rinvia a chi l’ha inferta)표현으로 바뀌었다. 법의학에서는 검시할 때 “시신이 말한다.”(il corpo parla)고 한다.

  상처가 신체에 드러나지 않을 때, 상처를 수량화하기가 불가능할 때, 그리고 특정 개인에 기인하지 않는 요인으로 상처받게 될 때, ‘상처의 원인이 무엇인지’(che cosa l’ha causata) 그리고 이 타격이 삶의 다른 영역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특정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신체 건강을 해치는 바이러스를 막지 못하는 허약한 방어 능력이나 가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저임금을 측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전쟁, 미흡한 사회보장제도, 한 가장이 고향을 등지고 타국으로 이민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미약한 희망 등이 일으키는 극도의 취약성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행위가 지닌 심각성만 봐도 이 사회가 실재적이고 심각한 상처를 겪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상처와 원인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부지불식중에 가시적이고 수량화되는 상처에만 집중하게 되고, 더 심한 경우 그런 상처가 생길 가능성에만 집중할 수도 있다. 그러면 취약성의 사회적 차원과 실질적 원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권리와 존엄성이 입은 구체적인 상처를 보고하는 일과 그 사람 또는 사회 집단의 취약성 정도를 분석하고 측정하는 일은 같지 않다.7)

  이 용어를 바라보는 두 번째 관점은 결국 새로운 정체성, 즉 취약한 이들이라는 신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상처를 준 존재를 책임에서 면하게 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8)

다양한 분야에서 고려되는 취약성

  ‘취약성’(vulnerabilità)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어느 때보다 더욱 널리 사용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9) 1970년대에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에는 ‘사회적 취약성’(fragilità sociali)10)에 대해 성찰하면서 1990년대에 유행했던 ‘소외’(esclusione)개념을 대체했다. 오늘날 이 용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개인, 사회, 종교 문제뿐 아니라 물질 문제까지 다루는 일종의 ‘지표’(cifra)처럼 사용된다.11)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이 용어가 지닌 유연성을 살필 수 있다. 취약성은 보편적이며 개별적이다. 즉 모든 피조물이 취약하지만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취약하다. 취약성은 또한 관계적이며 맥락 안에 자리한다. 즉 역사적 맥락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또한, 취약성의 원인과 그 맥락 모두에 관여하는 가역성을 갖는다.12)

  이제 자연적 차원과 기술적 차원에서 활용한 두 가지 예를 살펴보겠다. 토목 공학에서 ‘지진 취약성’(vulnerabilità sismica)은 땅에서 특정 강도를 지닌 파동이 일어났을 때, 구조물이 입게 되는 특정 정도의 손상을 뜻한다. 여기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비례가 명확하며, 이 결과는 어떤 점에서는 피할 수는 없고 물리적 차원에서 예측 가능하다.

  기술 분야에서 ‘보안 취약성’(vulnerabilità informatica)이란 시스템을 손상시키기 위해 악용될 수 있는 시스템의 허약성이다. 이 분야에서 취약성은 해커 즉 타격을 가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주체들과 연관을 지어 봐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이런 영역에서 취약성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자연 영역에서보다 더 근원적으로 전체 시스템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취약성의 역설

  실생활의 차원에서 취약성은 그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특성이 드러난다. 물리적 회복력13)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어느 선까지는 취약성의 요소였던 것이 어느 수준부터는 긍정적인 힘으로 바뀌거나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데서도 취약성의 특성이 드러난다.

  취약성의 역설적인 특성은 자율성과의 대조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14) 권리와 의무에 관한 우리의 확신과 주장 중 많은 부분이 자율성에 기반을 두는데, 자율성은 하나의 과제이다. 우리는 자율성에 도달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취약성과 내적 유한성은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확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마치 과제이며 구성해 나아가야 함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동일한 사상계 안에서 취약성과 자율성이 서로 반대되면서 또한 서로 보완하는 역설은 주목할 만하다.15)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율성은 인간을 부서지기 쉽고 취약한 존재가 되게 하고, 동시에 인간의 취약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율성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취약성의 역설적 성격이 취약성의 풍요로움을 드러내고, 인격적이고 사회적이며 초월성을 향해 열린 우리 존재의 신비를 향한 입구가 된다.

타인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자율적 존재

  개인적-가족적 차원에서 보면, 한편으로 신생아보다 더 취약한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엄마의 품에 안겨 가족의 사랑과 보호와 격려를 받는 환경에서 지지를 받는다면, 신생아보다 더 강하고, 발전할 능력을 갖춘 피조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신생아를 이야기할 때,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신생아를 구체적이고 급박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신생아와 ‘취약’(vulnerabile)이라는 단어를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타인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은 취약성 이전에 ‘포용력’(abbracciabilità)과 연관된다.16) 그러므로 취약성은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 신생아를 보호하고 쓰다듬도록 이끄는 엄마의 사랑(그리고 모든 사람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의무감과 자유를 한데 모으며, 우리를 관계적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세상에 와서 다른 이들 덕분에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노출되어 있으며 이것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인위적 취약성이 자연적 취약성보다 더 크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인류는 가장 취약한 종(種)17)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취약한 종’(tanto vulnerabile)은 아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개인이 종(種)과 세계와 맺는 근본적 관계가 개방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개별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특화되지 않았고, 인간끼리 맺는 본능적이며 결정적인 유대감도 없기에,18) 개개인으로서는 더 취약해지는 동시에 (이성적이고, 자유로우며, 정치적이고 초월적인) 발달을 이룰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갖춘다.

  종(種)으로서, 우리는 단지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증식(增殖)했으며 자연재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단을 수없이 많이 고안해냈다. 여기서 역설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구조물들 안에서 더 취약해졌다는 사실이다.19)

양적 가치가 아니라 질적 가치가 상처를 남긴다

  사회적 취약성을 성찰할 때, 고려해야 할 커다란 역설은―자유, 개인 의견의 가치, 사회적 공인 등과 같이―양적 관점에서 보면 덜 측정되는 면들이, 질적 관점에서 존중받지 못했을 때, 한 개인이나 혹은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취약함을 느끼는 데 더 많은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인간개발지수(IDH)와 사회적취약성지표(IVS)20)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복잡해졌다. 기대수명지수, 교육지수, 소득지수의 항목에 성(性-genere) 등 다른 항목들이 추가되었고, 지금은 생애주기의 다양한 단계21)와 취약성이 발전, 안전 그리고 인권과 맺는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22) 인간발전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통계는 수집 가능한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신뢰할 수 없거나 모든 국가에서 얻을 수 없는 자료는 제외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23) 질적 현실의 무게를 드러내기 위해, 한편에서는 체계적 접근을 통해 성찰을 확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취약한 이들의 주관적 의견을 듣고 자료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취약한 집단에 관한 연구에서 자연재해보다 거대한 정치, 경제 위기들과 전쟁들을 더 많이 언급하며, 개인들이 ‘취약성’(vulnerabilità)을 ‘불안정성’(insicurezza)과 어떻게 동일시하는지 볼 수 있다.24)

  그뿐만 아니라, 얼핏 봐서는 측정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만 한다. 바로 희망이다. 가장 가난한 이들은 ‘당장 이곳’(qui e ora)의 상황과 생존 문제에 직면하기 위해 정신적 노력을 쏟아붓는다. 그 결과 “전략적으로 장기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감퇴한다.”25) 이렇게 ‘희망’(speranza)이 취약하면 다른 모든 것에 치명상을 입힌다.

인간 삶의 본질은 연약함에서 경험된다.

  인간 삶에서 본질은 연약함에서 경험된다. 사랑, 아름다움, 민주주의, 평화, 생명과 같은 가치들은 연약한 동시에 강하다. 한 사회나 문화를 아는 데 열쇠가 되는 요소는 기술력, 부(富), 군사력 등의 척도가 아니라, 그 사회가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보여주는 존중과 돌봄이다. 한 국가를 알려면 그 국가가 ‘약한 이들의 정책’(politica della fragilità)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알아봐야 한다.26)

  공동선을 연구하고 제도적으로 실현할 때 정치가 그 외 모든 권력을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가정에서도 그러하듯, 가장 취약한 이들이 가장 잘 보호받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특별히 인간적 가치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상처가 주는 치유

  신학적 차원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서를 인용한 역설적인 주장을 볼 수 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27) “상처들이 낫게 해준다.”(le ferite guariscono)는 말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습관처럼 이 말을 하지만,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다는 말이 그렇게 분명하게 와닿지 않는다. 이 주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면서 그리스도교 교의 전체를 종합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언급되듯이, 악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이 없다.”28)

  만일 취약성의 주제를 신학적 수준에서 적합하게 배치하려면, 적어도 그리스도교 교리의 세 가지 대원칙을 논리 정연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피조물은 선하고, 죄는 결말이 열려 있는 드라마이지 비극이 아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관찰하실 때, 보시니 ‘좋았다’(buone).29) 성경은 악의 신비를 유혹에 넘어가 자유를 남용한 결과로 보고,30) 원래부터 있었던 결함(악)의 결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약함은 역설적으로,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되고자 한 영혼과 그 욕망에 있었다. 자유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살인자’(omicida fin da principio) 혹은 ‘상처 입히는 자’(vulneratore)’31) 라고 부르신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죄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취약하게 만들며, 질병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했지만, 우리의 본성을 온전히 부패시킨 것은 아니어서, 우리의 본성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선한 상태로 남는다.32)

  둘째, 그리스도교 교리에서는 육화를 언급하면서, 주님께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신 것을 구원하신다고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죄 없으신 육신 안으로 육화하시면서 ‘창조의 선성’(la bontà della creazione)을 재확인하시고,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가족의 사랑(예수님의 경우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이었다)이 품고 지켜준다면 긍정적인 것이라고 확인해 주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것’33)은 모든 몸이 자기 연약함 안에 가진 긍정성과 본질적인 선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연약함이 ‘지지받아야 함’(essere sostenuta)을 뜻한다. 그러나 이는 내부에서 지지받아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레네오가 말하듯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구원받지 못하기’(ciò che non è assunto non è redento) 때문이다.

  우리의 육신을 받아들이면서, 주님께서는 구원 사업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창에 찔리는 치명적 타격에 이르기까지, 수난 가운데 상처를 입도록 당신을 내어 맡기시며 죽음의 공포와 온갖 소외를 이겨내신다.34) 주님께서 수난을 자유롭게 끌어안으시며 증거하신 사실은, 어느 누구도 삶의 일부에 입힌 상처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거두지 못하며 오히려 생명을 온전히 건네주시는 분이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연약함이 지닌 본질적인 긍정성은 ‘취약성’(박해, 십자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성으로 강화된다. 이는 주님께서 취약성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원칙은 성령의 은총과 하늘나라와 연관된다. 우리는 다른 이의 취약성을 돌보고 치유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설명이다.

  예수 성심의 열린 상처로부터 성사들이 나오고 교회가 탄생한다. 부활하신 분이 당신 상처를 보여주시며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는데, 그 성령은 ‘죄의 상처를 낫게 해주시어 우리의 영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에페 4,23 참조)’35) 분이시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취약성의 봉인을 유지하는 당신의 왕국을 세우시며,―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당신을 ‘상처 입은 이들’(i feriti)과 동일시하시며―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최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마태 25장 참조)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역동 안에서, 주인공이 상처 입은 이에게 개입하는 과정들은 주님의 육화와 구원을 위한 수난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이를 책임지며, 그를 치료하기 위해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이를 ‘지불’(pagare)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자비의 특별한 행동처럼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상처에 고통을 주지 않고 싸매어 주는 것, 소외시키거나 버려두지 않고 사회에 포함시키고 편입시키는 것, 그리고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우리 존재가 무상으로 받은 은총을 ‘되갚는’(ripagare) 방식을 의미하고 있다.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존재가 받은 은총을, 그에 상응하는 ‘되갚을 만한’(ripagherebbe) 가치를 지닌 다른 선물로 되돌려드릴 수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존재가 받은 은총과 등가의 무언가로 응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성(他者性)을 존중하는 것’(onorare l’alterità)36)이다.

  타자성을 존중하는 일, 특히 상처받은 이들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일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은총에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품위(dignità, 라틴어 dignus, 그리스어 axios에서 왔다)는 사람이 인격체라는 사실 자체로 지니는 권위와 존경과 존중을 포함하는 가치이다. 다른 이들이 지닌 품위를 인정하면,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피조물’(creaturale)로서 다른 이들과 동등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동등함은 우리가 갖는 모든 차이보다 훨씬 본질적이다.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다른 이의 품위를 훼손하면 우리가 공동으로 가진 평등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이를 품위 없이 대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품위 없는 (권위도 없고,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된다.

  품위에 담긴 이 존재론적 의미는 윤리적 의미를 토대로 한다. 품위를 잃으면 우리는 모순에 빠지며, 인격체인 우리를 구성하는 가치와 권위를 상실한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Gorgia)에서, 누군가 상처를 입으면 발생하는 일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칼리클레스(Callicle)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 칼리클레스, 불의하게 따귀를 맞거나 상처를 입는 일, 혹은 도난을 당하는 것이 가장 불쾌한 일이 아니고, 더 불쾌하고 더 나쁜 것은 나와 나의 물건들을 부정하게 때리고 모욕하는 행위이다. 노예로 전락시키고 물건을 부수는 일, 요약하면, 나 자신이나 나의 물건에 반해 불의를 저지르는 행위 등은 그 일을 당한 나보다 그렇게 행동한 사람에게 더 악하고 불쾌한 것이다.”(Gorgia, 508 D-E)37)

  정의란 각자에게 적합한 몫을 주며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사람을 지도하는 덕으로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우리 존재의 근본이다. 정의를 훼손하는 행위는, 비록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불의를 행한 사람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다른 이에게 상처 입히지 말라는 명령은 단지 사회적 약속이나 평화적 공존의 문제가 아니며,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의 차원은 더욱더 아니다. 이는 외적인 정의의 문제이며, 우리의 인격적 존재에 근거를 둔 문제이다. 대부분의 ‘내 것’(mio)을 ‘우리’(noi)로 보는 곳에서는 다른 이에게 상처 입히는 행위는 나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행위이다. 만일 다른 이를 때려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면―사회적 존재인 우리가 ‘우리’(noi)에게 상처를 준다면―다른 이를 품고 돌볼 때, 사회 구조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바로잡게 된다. 내밀한 부분은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간적 가난을 인식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38)

상처 입은 이들을 돌볼 의무

  이렇게 우리는 이익으로 변하는 최종 역설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는 상처 입은 이를 돌보는 행위가 비록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에 근거해 심판을 받을) 일종의 의무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돌보는 행위가 정의나 의무를 넘어설 수 있고, ‘더 많이 되돌려드릴’(pagare di più) 수 있는 행복이며, 특별한 선택권으로 제안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인 vulnus(상처)로부터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의 취약성 정도를 측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없는 완전한 포용성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준비하면서, 취약성이 요구하는 조건 없는 포용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바오로 6세 복자께서 즐겨 말씀하셨듯이, 모든 가난한 이가 ‘복음적 권리’(diritto evangelico)39)로써 교회에 속하며, 우리에게는 가난한 이를 위한 근본적 선택이 요구됩니다(1963년 9월 29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 개막 연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을 포용하고 도와주려고 내미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이는 희망을 가져다주는 손길입니다. 모든 문화적 종교적 장벽과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의 상처에 향유를 뿌리며 위로하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만약’(se) ‘그러나’(però), ‘혹시’(forse) 하는 마음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미는 손길은 행복합니다. 이 모든 손길은 형제자매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40)

  이처럼 취약성을 복음적 권리로써 어머니인 ‘교회에 속하는’(che appartiene alla Chiesa) 속성으로 여긴다면, 누가 ‘취약한 집단들’(gruppi vulnerabili)인지 확인하거나 ‘취약 정도’(gradi di vulnerabilità)를 측정하며 외부에서 취약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근원적으로 넘어선다.

  상처받은 이를 인격체로 받아들이며 치료해주고 회복할 때까지 돌보는 것이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이런 행동이 사회 집단을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게 한다.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의 경제 군사 기술 역량이 우리 자신을―단지 개인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고 믿게 만들어도, 품위를 잃고, 사회적 ‘권위’(peso)를 잃어버리며, 실체 없이 모순에 빠진 존재가 된다.

상처 입은 치유자

  둘째 역설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설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 “스스로를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오류입니다. 최근에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만난 어느 소녀가 말한 것처럼 취약성은 인간의 본질에 속합니다.”41)

  소녀와의 만남은 빡빡했던 일정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교종이 교황대사관에 돌아왔을 때, 많은 군중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교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멈춰 섰고, 지적장애가 있는 소녀 세 명이 읽는 연설을 듣던 중, 한 아이가 말한 내용에서 감명을 받았다. 교종이 소녀의 이름을 묻자, 소녀는 ‘리나 마리아’(Lina María)라고 답했다. 교종은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취약성에 관한 부분을 다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감격한 소녀는 그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끊어 읽을 때마다 눈을 들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취약성이 인간다움의 본질로 인정받는 곳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약해지는 마음을 버리면, 우리는 강해지며, 품위를 얻게 됩니다. 함께 만나는 장소가 있으면, 우리는 인간다워집니다.” 그 아이는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고(그전 며칠 동안 도전하고 또 도전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복음의 힘으로 자신의 개인적 취약성 안에서, 취약성에 대해 발언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취약성이 인간다움의 본질로 인정받는 세상’(un mondo in cui la vulnerabilità venga considerata l’essenza dell’umano)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였다. 그는 이것을 ‘하느님의 지지를 받아야 할 필요성’(la necessità di essere sostenuti da Dio)으로 묘사하였다. “우리는 모두 취약합니다. 우리 모두가요. 이 취약성은 존중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며, 최대한 배려 받아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어느 누구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성장시켜주시도록 하느님께 봉헌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교종은 언제나처럼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왜냐하면, 나도 역시 매우 취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42)


1) La Civiltà Cattolica, 4032 (16 giugno/7 luglio 2018), 533-545.
2) 교종 프란치스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17년 11월 19일.
3) 참조: 유엔 개발 계획, 「2015년 인간 개발 보고서」(Rapporto sullo sviluppo umano 2015), www.unric.org/it/attualita/30954-ecco-il-rapporto-sullo-sviluppo-umano-2015-il-lavoro-per-lo-sviluppo-umano
4)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 incontro promosso dalla Fondazione Centesimus Annus – Pro Pontifice, 20 maggio 2017. 인용 가운데 이탤릭체는 저자의 표시.
5)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끈을 ‘세계화된 체계가 갖는 파괴적인 현실들’이라고 정의했다. Francesco, Discorso al II Incontro Mondiale dei Movimenti Popolari, Santa Cruz de la Sierra, Bolivia, 9 luglio 2015.
6) Ovidio, Remedia amoris, 4, 44.
7) 참조: A. Madrid Pérez, “Palabras que piensan: ¿soy ‘vulnerable’ o me ‘vulneran’?”,www.mientrastanto.org/boletin-129/notas/palabras-que-piensan-soy-vulnerable-o-me-vulneran.
8) “모든 힘의 관계들과는 다르게, 근대의 조종은 ‘자유의지’로서의 인간을 그냥 무시해 버린다.” H. U. von Balthasar, Teodrammatica, vol. IV, (Milano: Jaca Book, 1986), 147.
9) 참조: A. Brodiez-Dolino, 「Le concept de vulnéabilité」, www.laviedesidees.fr/Le-concept-de-vulnerabilite.html. 이 용어에 대한 언급이 2000년에서 2014년 사이에 현저하게 증가했다.
10) 참조: A. Brodiez-Dolino, ed., Vulnérabilités sanitaires et sociales. De l’ histoire à la sociologie, (Rennes, Pur, 2014).
11) 참조: R. Maiolini, “Tra ferita e cura. Per una riflessione sulla vulnerabilità dell’esistenza umana alla luce del pensiero occidentale”, Credere oggi, 37 (2017), 27.
12) 참조: M.-H. Soulet, “Vulnéabilitéet enfance en danger. Quel rapport? Quels apports?”, in Vulnéabilité identification des risques et protection de l’enfance, ed., L. Lardeux (Paris: ONED, 2014), 128-139.
13) 회복력에 관해서는 처음에는 선천적인 특성으로 해석되었는데 지금은 공동체적이고 문화적인 면들과 긴밀하게 연결된 과정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우세하다.
14) 이하 내용은 참조: P. Ricoeur, “Autonomía y vulnerabilidad”, (Paris: Esprit, 1995), 85-105, 이 글은 여기서 볼 수 있다. https://documents.tips/documents/paul-ricoeur-autonomia-y-vulnerabilidad.html
15) Ibid.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모순 안에서, 한 명제는 윤리적 세계(자유)에서 나오고, 반대 명제는 물리적 세계(결정론)에서 나온다. 철학은 이들을 구별하고, 각 주장을 자신의 질서 안에 한정해야 할 뿐이다.
16) vulnus의 어근인 vel은 신생아의 피부와 같이 외부에 노출되고 보호막이 없는 피부와 같다.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고 쓰다듬어 주기를 원한다.’ 참조: S. Vázquez, “Inclinaciones políticas: vulnerables e inermes”, laUhttp://la-u.org/inclinaciones-politicas-vulnerablese-e-inermes/, 5 luglio 2017.
17) 인류는 기후적 변화에 위협받는 가장 중요한 종(種)이다. 참조: M. Chan, presidente OMS, www.elnortedecastilla.es/20080122/vida/destaca-especie-humana-vulnerable-20080122.html.
18) 참조: R. Fayos Febrer, “Vulnerabilidad e indigencia de la condició humana”, in Vulnerables. Pensar la fragilidad humana, ed., A. Cayuela (Madrid: Encuentro, 2005), 15ss.
19) “경제적 재앙도 또한 자연재해처럼 파괴적이다.” J. Stiglitz, “Molti vinti pochi vincitori”, in L’Espresso, (2017, 10, 21), 38-41.
20) 사회적취약성지표(IVS)는 다음 공식으로 계산된다. IVS = a ★ 문맹률 + b ★ 만성 영양실조 + c ★ 빈곤발생률 + d ★ 유아사망위험 + e ★ 인종 + Fc.
21) 참조: 유엔 개발 계획, 「2016년 인간 개발 보고서」(Rapporto sullo sviluppo umano 2016), http://hdr.undp.org/en/2016-report.
22) 참조: Ibid., 「2015년 인간 발달 보고서」.
23) 유엔 개발 계획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뢰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 세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지표를 가지고 품위 있는 삶의 상실 정도를 측정했다. 음용에 적합한 물의 수원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이 보장되지 않는 국민의 비율, 정상 체중에 미달하는 아동의 비율을 지표로 삼았다.” Ibid., 「2016년 인간 개발 보고서」(Rapporto sullo sviluppo umano 2016), http://hdr.undp.org/en/content/human-development-report-2006.
24) 참조: J. Stiglitz, “Ampliar nuestra reflexió sobre la vulnerabilidad”, www.undp.org/content/dam/undp/library/corporate/HDR/2014HDR/HDR-2014-Spanish.pdf, 92-93.
25) Ibid.
26) 참조: F. Poché, Une politique de la fragilité, (Paris, Cerf, 2004).
27) 1베드 2,23-25; 이사 53,4-5.
28)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 제309항.
29) 참조: 창세기 1,12.
30) 참조: 『교리서』, 제397항.
31) 요한 8,44. 베드로는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니는 으르렁거리는 사자’(1베드 5,8)의 형상을 이용한다. 영신수련에서는, 이냐시오 성인이 ‘성의 군사력이나 위치들을 관찰하며, 가장 약한 부분부터 공격하는’(영신수련 327항) 지휘관의 형상을 이용한다.
32) 『교리서』, 제405-406항. 원죄가 남긴 상처는 영혼의 네 가지 취약성인 무지, 악의, 허약, 욕정 안에 드러난다. 이 네 가지 취약성은 각각 네 가지 육신의 덕에 반대된다(참조: Tommaso d’Aquino, s., Sum. Theol., I-II, q. 85, a. 3).
33) 요한1서 4,2.
34) 하느님의 은혜에서 ‘소외됐다’는 느낌이 바로 카인이 그의 동생을 죽이도록 유혹했다.(참조: 1요한 3,12-14)
35) 『교리서』, 제1695항.
36) 참조: P. Gilbert, La pazienza d’essere. Metafisica. L’analogia e i trascendentali, (Roma: Pontificio Istituto Biblico, 2015), cap. 13.
37) 참조: Platone, Tutti gli scritti, a cura di G. Reale, (Milano, Rusconi, 1991), 916; J. Pieper, Las virtudes fundamentales, (Madrid, Rialp, 2010), 86.
38) 참조: P. Gilbert, “Paul Ricœur: reflexión, ontología y acción”, in Algunos pensadores contemporáneos de lengua francesa, (México, Universidad Iberoamericana, 1996), 123-176.
39) Paolo VI, Discorso di apertura della II sessione de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I, 29 settembre 1963.
40) Ibid., 교종 프란치스코, 제1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41) 교종 프란치스코, Discorso ai partecipanti al Convegno per la promozione della Nuova Evangelizzazione, 21 ottobre 2017.
42) 교종 프란치스코, Parole davanti alla Nunziatura di Bogotá, 7 settembre 2017. 3일 후 교종이 전용차량에서 한 어린이에게 인사하려고 몸을 숙이다가 받았던 충격으로, 오른쪽 눈썹과 오른쪽 광대뼈를 다친 사건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고백한 이 ‘취약성’에 대한 확인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