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
이주민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MIO PADRE ERA UN FORESTIERO
L’insegnamento biblico sui migranti1)

피에트로 보바티, S.J. (교황청 성서위원회 사무총장)
윤성희 이냐시오 옮김 (구약성서학 박사)

  현자 코헬렛은 이렇게 말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코헬 1,9-10) 그러나 먼 옛날 일은 누구나 다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특이하고 예외적이며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또다시 놓이게 된다. 그리고 비정상으로 보이는 그런 상황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그렇게 놀랍고 불편한 사건들 중에서 최근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동유럽에서 밀려드는 이주민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막을 수 없는 물결처럼 우리가 소유한 희망의 땅 해안에 밀려든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사람들이 무리 지어 대형 마차를 타고 이주하는 일, 또는 심지어 민족 전체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땅을 도피의 오아시스로 여겨 그곳에 정착하려고 이주하는 일이 늘 있어왔다. 역사적으로 이주민의 유입을 겪지 않은 지역이나 나라가 거의 없다. 특히 유럽은 수천 년 동안 일어난 침략과 재정착, 그리고 융합의 결과물이다. 한편 유럽도 다른 대륙, 주로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에, 그리고 아프리카와 심지어 아시아에까지 상당수의 이주민들을 보내기도 했다. 떠난 이들은 자신의 이주가 모든 이가 누리는 살아서 행복할 권리를 존중하는 길이라 확신했고, 때로는 노동하고 자기 문화를 나눔으로써 인류 문명 진보에 기여를 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대 역사의 지혜도 현재를 제대로 해석하고 합당하게 판단하는 데 기여했음을 의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과거를 잊으면 현재의 윤리적 지성적 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데 부족함이 있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야곱의 가족 일흔 명(신명 10,22)은 지속되는 기근을 피하려고 이집트 땅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번성했고, 자기들을 받아들인 나라의 경제 성장에도 기여했다.(창세 46,31-34; 47,1-10) 하지만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탈출 1,8) 시간이 흐르자 새 임금은 이 이주민들이 고유의 지혜로 자기 백성을 풍요롭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과거의 망각은 부정적인 감정과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이어진다.

  과연 이집트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게 되었다. 한때 손님(hospes)이라는 신성한 지위를 지니고 존중받았던 이들이 이제는 적(hostis)의 얼굴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외국인이 증가하면 위험하다는 생각과 언젠가 그들에게 압도되리라는 두려움이다. 확인되지 않은 두려움은 우리를 비이성적인 결정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자국민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쓰는 걸 현명하고 합당한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파라오는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더 강해지지 않도록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탈출 1,10)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유다 백성의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새로운 조치가 점점 이민자들을 종속시키고 가혹하게 대하여 능멸하는 상황을 가져오는 법규 형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이런 움직임은 유아 살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탈출 1,11-22) 나일강은 유다 신생아들의 집단 무덤이 되었고, 이는 오늘날 지중해가 아이들을 포함한 난민 수천 명의 ‘거대한 묘지’(diventato un immenso cimitero)2)가 되어버린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3)

  성경은 ‘비망록’(aide-mémoire) 역할을 한다. 성경에 담긴 이야기들을 통해 부당한 공포가 국민의 이익을 위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비인간적이고 터무니없는 보호 조치 시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기억하게 된다. 이 기억을 되살리는 데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를 유대 백성과 영적으로 동일시하도록 요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땅이 없는 이들과 한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을 읽는 이는 누구나 이렇게 말하도록 초대받는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신명 26,5)

  성경은 이주민들의 영적 상태를 기억하고 그들과 같은 상태에 있도록 초대한다. 왜냐하면, 은총이라는 신비는 그런 상태에서 주어지고, 그것에서부터 현명한 정의의 길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성경 이야기의 안내를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이주민이라는 우리의 기원

  이스라엘은 ‘독특한’(diverso)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허영심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죄와 미약함을 잘 알고 있다.(신명 7,7; 9,6) 그들은 단순히 존재할 권리만 주장하길 원하지 않는다. 모든 소수자를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들로 존중하라는 이상적 윤리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민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하느님이 드러내신 진리를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또한 자기와 다른 이들과 이방인들, 또는 나와 생김새가 다르고 다른 언어로 말하며 다른 전통을 지키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을 환영할 때 생기는 실질적 이로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경은 각 민족이 자기 영토에만 머무는 창세기 10장의 정적인 관점뿐 아니라, 역동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관점도 제시한다. 이것이 보편적 조화를 위한 진정한 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한 참혹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획일화를 실현하려 했던 바벨(창세 11)의 제국주의적 이미지를 확실히 반대한다. 대신 국경을 넘어 다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제시하며 그의 다양한 경험이 보편적 축복의 원천임을 강조한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하신다. “네 고향[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주를 시작한 건 그의 아버지 테라(창세 11,31)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주 절차가 ‘부르심’(vocazione)이 된 건 우리 신앙의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이 선을 위한 선택으로 이주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을 때이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건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가축과 금이 많은 부자였다.(창세 13,2) 원래 살던 곳에서 학대나 위협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분쟁 지역에서 도망쳐온 난민이 아니다. 그는 우상숭배에서 탈출하려고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가 가려고 하는 땅은 자신이 섬기는 주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따르는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창세 12,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주민으로 제시된다. 모든 이주민은 각자의 동기와 상관없이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비참한 상태가 아니라 선택과 축복을 받았다. 그러니 모든 이가 그와 같은 이를 받아들이도록 권고받는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2-3) 성경은 세상의 운명이 아브라함이라는 이 이주민에게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그는 시민권을 포기하고 대신 이주민 신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목숨을 내어놓기로 했고, 하느님은 바로 그런 이와 계약을 맺으셨다.(창세 15,7-20; 17,1-8) 사실 그를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났고, 그를 통해 주님이 수많은 민족에게 생명을 주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조들은 끊임없이 목초지를 찾아 나서고, 가축이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계절의 리듬을 따라야 하는 목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들은 유목민이 아니라 이주민으로서 낯선 땅(가나안, 시리아, 이집트)에 정착하려는 외국인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서 시작하여 이집트에서 430년간 살았던 그들의 후손까지 이어진 이스라엘의 기원이다.(탈출 12,40) 사실 레위기는 하느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때조차 하느님께서 그들을 ‘손님’(ospite)으로 여겼음을 밝힌다. 그들이 사는 땅은 하느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 ‘이방인이고 거류민’(immigrati e locatari)으로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레위 25,23)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기도 전통을 따른 기도문을 되풀이하며 이렇게 말했다.(시편 39,13; 119,19) “당신 앞에서 저희는 저희의 모든 조상처럼 이방인이고 거류민입니다.”(1역대 29,15)

  이스라엘의 영적 유산을 받은 이는 누구나, 그리고 이러한 신앙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는 누구나(로마 11,17) 부르심을 받아, 다른 사람들의 환대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주민이 된다.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문을 두드리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에 자신이 살 곳을 요청한다. 기대감 없이 청한 뒤에는 이미 살고 있는 이들이 인간적 연민 때문에 그들에게 약간의 공간을 허락하고 그 나라의 시민들과 함께, 또는 그들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허락해주길 기다린다. 하느님은 이런 이를 일으키신다. 성읍 경계 안에 살거나, 때로는 심지어 자기를 고용한 이의 집 안에 사는 이주민은 모든 이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주님의 특사이다.(마태 10,5-15; 루카 10,1-12)

  아마도 고대는 이 모든 게 쉬웠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환대는 당시에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는 보편적 관습이자, 모든 사람이 같은 필요를 경험하는 때에 생겨나는 즉각적 연대의 결과물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당시 환경이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이러한 주장을 부정한다.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는 성조들이 거듭 괴롭힘 당했음을 들려준다. 지역의 임금이 그들의 아내를 차지했고(창세 12,11-20; 26,1-14) 원래 거주자들이 우물을 차지하고는 그것을 판 이주민들을 쫓아냈으며(창세 21,25; 26,15-25), 소돔과 같은 도시에 들어간 이들은 폭력으로 굴복시키려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모욕을 견뎌내야 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손님을 환대하는 대신 모욕했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가나안 도시들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신명 23,4-7)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다른 지파에서 온 형제들에게 그렇게 했다.(판관 19,11-30) 이집트의 히브리 이주민들은 더 큰 고통을 경험했다.(지혜 19,13-16) 그리고 (다니엘서와 에스테르기와 토빗기가 전하듯이) 유배 시기 디아스포라에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고통과 슬픔을 경험했다. 한때 ‘거룩한 역사’(storia sacra)라 불렸던 이 역사는 수많은 이주민의 비극을 기억하고, 환영받지 못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목도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졌다.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는 환대할 수 있는 실제 능력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환대하는 능력은 당연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지닌 윤리적 양심의 표현이며 자유롭고 용기 있는 결정의 결과물이다. 성경은 외국인이자 이주민이라는 우리의 신원을 일깨워 우리가 모두 평등함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땅에 있는 이주민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마태 22,39)는 규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땅에 살고자 하는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 무시하는 듯하다. “주 너희 하느님은…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7-19)

  이스라엘의 신앙인이 이방인을 사랑하는 건 하느님의 감정을 모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비슷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시편 146,9) 이것은 레위기 19장에 ‘동포’(레위 19,18)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구절 얼마 뒤에 거침없이 표현되어 있다.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레위 19,33-34) 본토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조된다. 하지만 그런 구분은 인심 좋게 환영하는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나와 비슷하게 만드는 높은 단계의 사랑을 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이주민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이방인의 모습을 취했다. 아브라함은 당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으라고 요구하시는 주님을 대표하는 이주민이다. 그러니 그를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황폐와 죽음이다. 신약성경도 이런 흐름을 이어간다. 특히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환영받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하는 이방인과 당신을 동일시하신다.(마태 25,35.43) 그리고 환영하는 이에게는 축복이(마태 25,34) 거부하는 이에게는 영원한 저주(마태 25,41)가 내릴 거라고 하신다.

  다른 한편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고 땅 없는 이가 되기로 동의했기에, 자신을 지나치는 길손을 환영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었다. 소돔이 피할 곳을 찾는 이들을 모욕했지만(창세 19,1-11), 아브라함의 천막은 외국인 몇 사람을 선물처럼 받아들이도록 개방된다.(창세 18,1-8) 이렇게 신비로운 등장인물들은 천사, 곧 인간을 방문하는 하느님의 사자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들은 그들을 환영한 가정에 출산의 축복을 가져다주고(창세 18,9-14) 그들을 환영하지 않은 도시에는 재앙을 가져다준다.(창세 19,15-29)

  성경은 마음이 연민의 신호를 보이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기원과 고통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과 열망이 섞여 있는 눈을 지닌 이주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이방인에게 형제가 된다.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마음]을 알지 않느냐?”(탈출 23,9) 각 세대가 자신에게 맞게 영적으로 받아들인 이 근원적 체험에 근거해서, 다양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땅에 잠시라도 살러 온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풀라는 규정을 부과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 어린 지혜는 이주 체험을 하게 했고, 그런 뒤에 외국인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한 조치들을 율법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성경의 법은 고대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조차 그것은 이주민들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실천하도록 초대한다. 사실 즉흥적으로 연민을 나타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성경 말씀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규정에 복종하고 이스라엘의 법전이 제공하는 이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완전히 이루도록 부름을 받았다.(마태 5,17-19)

이주민 배려 규정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이주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주민 문제는 항상 어려운 문제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 거주민 수는 적고, 히브리 성읍과 마을로 특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정착하러 오는 외국인 수는 많았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에 불균형이 생겨났다. 물론 이에 관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스라엘 율법에 이주민 배려 규정이 많고 또 그것이 다양한 걸 보면서 이 문제가 중요했음을 짐작할 뿐이다.

  각 법규는4) 이방인을 최대한 도와줄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각 규범이 제시하는 환대의 정신을 진심으로 소화하도록 초대한다. 법규에 담긴 사랑의 정신은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제재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자 당신 뜻에 따라 관대하게 행동하는 이들에게 축복을 쏟아부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이 유일한 보증인이시다.

  우리는 외국인에 관한 수많은 규정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분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고대의 입법자가 무엇을 증진하길 바랐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영역에서의 나눔

  구약성경 법규에서 이주민은 (부양과 보호가 필요한 이들의 상징인) 과부와 고아와 함께 경제적 약자 범주에 포함된다. 또한 (땅을 소유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보조를 받는 사제 지파인) 레위인과 연관된다.(신명 16,11.14; 24,11-14; 26,12 등) 율법은 이방인을 약자들의 목록에 넣는다. 이 목록에는 유다 구성원도 들어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가난한 이를 똑같은 개별 권리를 지닌 이들로 보고 동등하게 대우한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약자로서 한 가족 같다. 기원이나 풍습이 다르더라도 똑같이 가난하기 때문에 형제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율법이 자선을 권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자선은 고대 세계에서 전통적이고 관습적이었으며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빠지지 않았다.(시편 112,9; 집회 3,30; 29,12; 토빗 12,9; 마태 6,1-4; 로마 15,26; 1코린 16,1-5; 1베드 4,8) 매우 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즉시 돕는 게 당연하다.(잠언 3,28) 하지만 모세오경은 조금 더 상시적이고 그들의 품위를 지켜줄 수 있는 형식으로 가난한 이에게 연민을 갖길 요구한다.

  성경은 무엇보다 대출을 통해 궁핍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라고 초대한다. 이것은 무상 원조보다 덜 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대출은 이득 없는 행위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대출을 해주는 사람은 이득을 얻지 못한 채 자기 재화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이자 받는 일을 고리대금과 동일시하며 이자를 면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탈출 22,24; 레위 25,35-38; 신명 23,20-21; 에제 18,8.13.17; 22,12; 잠언 28,8) 더구나 대출은 이웃의 능력에 신뢰를 보임으로써 이웃이 돈을 갚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웃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으로 대우받아, 현명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하여 정직하게 돈을 벌도록 자극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신이 받은 선물을 디딤돌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출을 통해 은총의 사이클은 한 바퀴를 다 돈다. 대출을 받은 가난한 이조차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언젠가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주고, 바로 그러한 상환을 통해 자신이 이익을 보았음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율법은 채무자에게 대출금 상환의 보증으로 담보를 요구하는 게 합법적이지만, 채권자는 여전히 약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채권자는 가난한 이의 집에 들어가서 그를 체포하듯이 해서는 안 되고,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신명 24,10-11)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또한 담보로 맡긴 외투는 해 질 녘에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가난한 이에겐 이불이기 때문이다.(탈출 22,25-26; 신명 24,12-13) 채권자는 집에서 쓰는 맷돌을 압류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생명을 담보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신명 24,6)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관대한 대출(신명 15,10-11)은 관대한 채무 탕감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빚을 갚을 수 없으면 자기 아들이나 자신을 종으로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거듭 일어났기에 입법자는 정기적으로 채무를 탕감하라는 규정을 세웠다. 그에 따르면 7년마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어(신명 15,1-3), 빈곤이 뿌리 뽑히고 하느님의 축복이 모든 이에게 이르게 해야 한다.(신명 15,4-6)

  율법의 다른 규정들은 재원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 특히 이주민에게 쓰도록 요구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밭에서 나는 열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부의 형태로, 자기 노동과 하느님 축복의 결과물로서 ‘모아들인’(raccoglie) 모든 것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율법은 땅 소유자가 그 모든 것을 독점하지 말고, 밭의 일부는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남겨두어 가난한 이들과 이주민들이 가져갈 수 있게 하라고 한다.

  성경은 추수할 때 모든 걸 거둬 가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밭에 남겨진 곡식을 주우려고 되돌아가지 말라고도 한다. 올리브를 수확할 때나 포도밭에서나 마찬가지다.(신명 24,19-22; 레위 19,9-10; 23,22) 이런 규정은 그것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이들에게 매우 상징적인 가치를 지닌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규정은 너무 사소해 가난한 이들을 모욕한다고 볼 수 있다.(마치 그들이 부유한 이들의 식탁에서 남긴 음식을 받아먹어야 하는 짐승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해석한다면 하느님께서 땅 주인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신중하게 가난한 이와 나눠야 함을 의미한다.

  이주민들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신명기는 추수 때 나눠야 한다는 규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를 들어 주인이 땅의 열매이자 자기 노동의 열매를 자기 집에 원래 가지고 있던 소유물과 함께 저장한다고 상상하자. 이때 가난한 이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입법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맏물의 봉헌 규정은 땅에서 거둔 모든 것의 맏물을 바구니에 넣고 사제에게 가져가, 그것을 레위인과 이방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하라고 한다.(신명 26,1-11) 맏물의 가치를 이해할 때에만 이 규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용감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약속의 상속자는 자기 땅에서 가장 훌륭한 산물을, 일단 거두고 나누어 주면 유일하게 남는 그것을 외국인에게 주라고 요구받는 것이다. 사실 어떤 재앙이 닥쳐 작물의 나머지를 모두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주민은 밭에서 남아 있는 것으로 대충 때울 필요가 없다. 그는 주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준 맛난 음식들과 똑같은 것을 ‘대접받기’(servito)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수입에서 정해진 만큼 바치는 십일조 규정이 있다. 십일조 전체에서 상당한 부분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3년마다 바치는 특별한 세금도 있는데 이것은 레위인과 이방인,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이다.(신명 14,28-29; 26,12-13; 토빗 1,8도 보라.)

  우리는 재화를 거두어 부를 재분배하는 이러한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운용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얼마나 강제적이었는지, 관련 당국이 이와 관련하여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가난한 이를 위해 따로 챙겨놓은 것들을 ‘거룩한 것’(신명 26,13)으로 여겼고, 이러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 크나큰 죄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필요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입이 없는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요구에 응답하고자 하는 면에서, 오늘날 사회복지법은 성경 입법자의 의도와 일치한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회 운동가들의 자유롭고 용기 있는 선제적 노력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이들은 신뢰 어린 관대함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영적 유산을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규정의 원천이 신앙이라는 것은 이 규정을 만들게 된 동기와 규정이 적용되는 맥락을 고려한다면 쉽게 알 수 있다. 규정은 하느님 신앙과 그분 섭리를 전제로 한다. 성경의 입법자는 신앙의 세계와 나누려는 마음 사이를 분명하게 연결시키는데, 성소에서 그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전례 행사를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훌륭한 기회로 만듦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리는 성소가 고대의 신앙인들이 모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께 청원하는 장소였음을 안다. 봉헌물과 희생 제물은 기도의 구체적 표현이자, 예배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는 사제들과 성소를 찾아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기초 식량이었다.(신명 12,12) 성전은 삶을 기념하는 중심이었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실 주요 농경 축제에서 거룩한 공간은 빵과 고기, 포도주와 독주를 나누어 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모든 공동체가 주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이 주시는 축복을 함께 나누며 기뻐했고, 그곳에는 분명 이주민들이 함께 있었다.(신명 16,11-14) 자기 가족과 함께 봉헌을 하는 이는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이자 이방인들의 형제가 되었다.

법적 보호

  이방인을 배려하는 대단히 매력적인 경제 대책도 성경의 법전에 이주민의 살 권리를 보장하고 그들의 다양한 상황을 인정하는 다른 중요한 규범들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이 맥락에서 이주민은 시민으로 대우받는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너희에게는 법이 하나일 뿐이다.”(레위 24,22) 특히 두 가지 영역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하나는 a) 일터에 관한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b) 법정에서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권리이다.

  a) 우리는 이주민들에게는 소유지가 없어 고정 수입도 없기에 빈곤 계층에 속함을 살펴본 바 있다. 다른 한편 소득이 가장 높은 직업은 외국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법은 이주민들이 하는 노동에 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부분을 법적으로 다룰 구체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품삯을 보장하고 때에 맞춰 품삯을 주도록 요구한다. “너희는 너희 동족들 가운데에서나, 너희 땅, 너희 성안에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품팔이꾼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그의 품삯은 그날로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하여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므로,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품삯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너희를 거슬러 주님께 호소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이다.”(신명 24,14-15)

  이주민들의 삶이 위태롭다는 것과 합당한 품삯이 없을 때 그들은 엄청난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이 구절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곧, 내국인과 이방인은 법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모세 율법은 피고용인의 휴식도 보호한다. 안식일 규정은 이주민에게도 해당되며 십계명에 소중히 간직된다.(탈출 20,10; 신명 5,14; 탈출 23,12도 보라.)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affinché si riposino come te) 한다는 공식에서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노예들의 해방자이신 주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할 때,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 본토인과 외국인을 모두 동등하게 보는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 이주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존중은 이런 부분에만 제한될 수 없다. 법의 정신은 가능한 곳에 평등과 박애의 원칙을 도입하고, 이방인 억압이라는 중죄를 피하는 일이다.

  b) 관습을 통해 인정되었다 하더라도 사법 기관을 통해 승인받지 않는다면 권리는 실제로 보호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정한 품삯을 받고 주간 휴식을 누릴 권리뿐 아니라, 자유롭게 이동하며 자기 사업을 하고 결혼을 할 권리, 그리고 법정에서 변호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이스라엘 법에 기본으로 전제되고 법규들에 여러 차례 언급된다.

  여기에서도 신명기가 이주민의 권리를 가장 분명하게 강조한다. 사법 제도에 관해 이야기하던 모세는 판관들이 재판을 할 때 철저하게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희 동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잘 듣고 의롭게 재판하여라. 동족뿐 아니라 동족과 이방인 사이도 그렇게 하여라.”(신명 1,16)

  재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옳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호받는다. 왜냐하면 ‘재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판관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낮은 자의 말이나 높은 자의 말이나 똑같이 들어’ 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신명 1,17) 신명기는 ‘이방인[의] 권리를 왜곡’하는 일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 점에 관해 심지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맹세를 하게 한다.(신명 27,19)

문화적 통합

  히브리 사람(내국인)의 지위와 이주민(이방인)의 지위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러한 불평등을 완화할 목적을 지닌 규정들을 이야기하고 평등과 박애를 증진시킬 보완 원칙들을 도입한다.

  지위의 차이는 율법이 이주민을 자기들만의 공간에 갇혀 있는 ‘소외된 이들’(marginale)로 여기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로 여긴다는 사실에 영향을 준다. 여기에 담긴 중요한 함의는, 환대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이방인을 받아들여 그들이 사회에 통합되도록 돕고 그들을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길 때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제되는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인도 언어를 배우고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풍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나라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외국인들이 가을 축제에 참여하고 주간 노동 주기를 따름으로써 노동 리듬과 휴식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입장을 받아들였음을 살펴보았다.

  분명 이주민들, 특히 관대하게 받아들여진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인 나라의 법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자기를 받아들인 이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열망했던 윤리적 이상이 그들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신뢰해도 좋을 하느님을 ‘알게’(conoscere)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시대에 개종을 위한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개종자를 찾지 않아도 유다인들과 함께 사는 이들 가운데 더 큰 연대감을 느끼며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오랜 세월 ‘이주민’(immigrato)을 가리키는 데에만 쓰였던 ‘게르’(gēr)라는 말이 후대의 문서에서는 ‘개종자’(proselito)로 이해되었다. ‘개종자’(proselito)는 율법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완전히 녹아든 이들이다.

  할례를 받은 이주민들을 파스카 축제에 참여시키게 한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탈출 12,47-49; 민수 9,14)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회로, 민족 고립주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이 받아들여야 했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주민이 자유와 존엄의 법을 만드신 하느님이 이루신 노예 해방을 기념하는 축제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주민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것은 이주민이었던 아브라함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표징이었기 때문이다.(창세 17) 오히려 유다인들이 자신에게만 주어졌던 계약과 그에 따른 특별한 축복의 표징을 이방인과 나누기로 했다는 점이 놀랍다.

  파스카의 공동 기념은 한 사람의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다.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공동의 계약, 지속되는 생명의 친교이다. 점진적 종교 통합은 신명기 가운데 나중에 쓰인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은 외국인을 새 계약의 백성으로 온전히 인정한다는 점에서 시나이 계약을 넘어선다.(신명 28,69) “너희는 오늘 모두 주 너희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너희 지파의 우두머리들과 원로들과 관리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 너희의 어린것들과 아내들, 그리고 장작을 패 주고 물을 길어 주는 이에 이르기까지 너희 진영에 있는 이방인들이 다 나와 섰다. 이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오늘 너희와 맺으시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약과 맹세에 너희가 참여하려는 것이다.”(신명 29,9-11; 31,12)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은 참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 율법에 담긴 지혜와 그에 따르는 축복을 얻고자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온 이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결론을 내리자면, 성경이 제시하는 이상은 모든 이가 선한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제공된다. 가족 내에 조화를 이루고 각 개인을 합당하게 존경하게 하려고 아버지가 자식에게 율법을 전하듯이, 같은 방식으로 유다인들은 외국인들에게 자기 율법을 친교의 수단으로 전달한다. 거꾸로 이런 식으로 환영받고 대접받은 이들이 환영의 이익을 다른 이들에게 중개하는 이가 될 수 있다.


1) La Civiltà Cattolica, 3984 (26 giugno 2016), 548-562.
2) 참조: Giovanni Sale, “I profughi in Europa e la ‘Via Crucis’ dell’accoglienza”, in Civiltà Cattolica, 3981(2016), 251.
3)참조: “La tragedia dei bambini migranti” in Civiltà Cattolica, 3982(2016), 314.
4) 구약성경에는 학자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서로 다른 시기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법전이 있다. 가장 오래된 법전은 계약의 책(탈출 20-23)으로 여겨지고, 그다음이 신명기 법전(신명 12-26), 그리고 가장 뒤 유배 후에 꼴을 갖춘 법전이 성결법(레위 17-26)이다. 이들 법전은 규칙의 문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서로 다르고, 법 조항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직해 놓았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입법 작업으로 규정을 바꾸고 다듬어야 했고, 가난한 이주민들에 대한 관심이 이스라엘의 주요 의무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