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의 다양성과 친교: 신약성경의 탄생

DIVERSITÀ E COMUNIONE TRA I PRIMI CRISTIANI
La genesi del Nuovo Testamento1)

마르크 라스투앵 S.J. (교황청립 성서대학 교수)
최원오 빈첸시오 옮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1세기 종교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며, 적어도 ‘종교’(religione)라는 용어가 당시 사람들과 우리에게 늘 똑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별 볼 일 없는 집단이었다. 큰 나무가 되는 작은 씨앗에 관한 복음서 비유는 초세기 그리스도교를 묘사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그리스도교는 엄청난 가지들이 쑥쑥 뻗어 나오는 작다란 나무에 비길 수 있다.

  매우 종교적인 세계

  첫째, 종교적 요소들이 곳곳에 스며든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한쪽에는 분명하게 개념 잡힌 종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정치적 자율 구조를 지닌 국가들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로마 제국은 당대 모든 국가들처럼 강력한 종교적 구성요소를 지녔으며, 황제숭배는 특히 동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황제는 “자기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 있는”(묵시 13,15) 권력을 쥐고 있었다. 백성들은 저마다 고유한 신심을 지닐 수 있었지만, 동시에 종교 형태를 갖춘 로마 제국 프로파간다의 확산을 수용해야 했다. 사회와 연관된 이러한 종교적 차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에 더욱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당시 세계는 이교가 대다수였다. 여러 주요 신들이 도시 공간과 언어와 정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이 특별히 숭배되었고, 사도행전이 알려주듯 에페소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이 숭배되었다.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설교할 때 그 지역 장인들이 들고 있어 났는데,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일에 바오로의 설교가 큰 위협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고, 마침내 온 아시아와 온 세상이 숭배하는 이 여신께서 위엄마저 상실하실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하고 외쳤다”(사도 19,27-28).

  일정한 위계를 갖춘 다양한 다신론 속에서 모든 지역마다 제 입맛에 맞는 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교 세계는 부유하고 풍요로웠으며 쉽사리 혼합되었다. 마술과 미신이 거의 철학과 같은 신비적 경향을 지닌 채 공존하고 있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를 의미심장하게 일깨워준다.

  셋째, ―이것이 근본 요소인데― 당시 세계에는 수천 명의 동조자들이 생길 정도로 유다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유다교에 가입한 ‘개종자들’(proseliti)이 있었고, 드러내 놓고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timorati di Dio)이 있었다. 사도행전은 이들을 가리켜 장차 다가가서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무리라고 한다. “카이사리아에 코르넬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부대라고 불리는 군대의 백인대장이었다. 신심이 깊은 그는 온 집안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하며, 유다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늘 하느님께 기도하였다”(사도 10,1-2).

  지배적인 헬레니즘 문화

  역사학자 에릭 그루언에 따르면, 유다교는 전형적인 헬레니즘 종교이다.2) 이 말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을 단순하게, 그러나 그릇된 방식으로 대립시키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다교는 고유한 보편주의와 핵심 윤리를 통해 당대 헬레니즘 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종교이다. 유다교는 많은 이들을 매료하면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수많은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서양 사회에서 이슬람의 상황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유다교는 (수많은 개종자들이 증명하듯)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는 종교였다. 전형적인 반(反) 유다주의의 대부분은 ‘마네톤’(Manetone)과 같은 이집트 사제들이 퍼뜨렸는데, 그 후 세기를 거듭하며 (세계주의, 비유다인 증오 등의 형태로) 이어진다.3)

  1세기 그리스도교는 이른바 유다교라는 나무 그늘 아래 있는 작디작은 한 그루 나무처럼 등장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극도로 ‘종교적인’(religioso) 세계 안에서 자라났다. 많은 이들은 미신과 얄궂은 제례로 가득한 세상을 비판하면서, 잔인한 희생제와 엮이지 않고 합리적인 예식을 지닌 더욱 철학적인 종교를 원하고 있었다. 제국의 동쪽에서 강력하고 역동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유다교는 성서 메시지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을 전파했는데, 이 성경은 널리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유다교는 공통분모를 지니면서도 매우 다양한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공통 원리도 있었지만, 장소와 종교 관행과 사회 계층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그의 형제는 이집트 세관을 총괄했고 그의 조카는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이 됐다―집안과 시리아나 아라비아의 시골 히브리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문화 환경 속에 퍼져 나갔다. 크게 두 부류의 언어가 있었다. 그리스어를 쓰는 헬레니즘 세계에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타르수스, 에페소, 아테네가 있었고, 유대아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아람어를 쓰는 세계는 갈릴래아를 지나 더 동쪽으로, 심지어 로마제국 국경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유대아와 갈릴래아에 사는 많은 주민들이 그리스어를 썼고, 아람어를 쓰는 많은 이들도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다. 비록 같은 도시에 살아가더라도 언어문화에 따라 무리가 형성되었다. 람페의 연구는 로마에 살던 유다인들이 라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끼리는 그리스어로 즐겨 말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4)

  루카는 예루살렘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사도 6,9)이 있었다는 정보를 준다. 그리스어를 쓰던 그 회당 사람들이 스테파노로 대표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들 역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에게 맞섰다. 스테파노는 루카가 전하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중요한 직무를 어렵사리 떠안았다(사도 6,1-5 참조). 첫 봉사자(부제)들의 이름은 그리스어이고, 안티오키아는 사도행전 6장 5절에서 처음 언급된다. 루카는 나중에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고 전한다. 안티오키아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을 비그리스도교 유다인이나 이교도와 구별하기 위해 그리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경배하는 이었이지만, 그 용어는 그리스어로 일컬어진다.

  이렇게 동방의 대도시들과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같은 시골에서도 몇몇 공동체들이 서서히 생겨났다. 이처럼 다양한 공동체와 언어들은 상이한 신학과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담고 있는 다양한 문헌들과도 연관된다. 이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서, 모세의 율법 준수―할례와 음식 규정은 그것을 지키는 이들과 지키지 않는 이들 사이에 ‘장벽’(barriera)을 만드는 결정적 요소였다―를 주장하는 문헌들과 믿음의 우위를 강조하는 문헌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다. 마르코와 루카는 예수님에게서 유래하는 전통을 전해주는데, 이 전통에 따르면 남자는 자기 아내를 (어떤 이유로든) 버려서는 안 된다. 반면 마태오 복음을 알았던 공동체들은 해석하기 어려운 한 대목으로 예외를 인정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19,9).

  이러한 예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끝이 없다. 혹시 유다 율법에 비해 이교도들에게 더 관대했던 근친상간 규정일까? 단정하기는 어렵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개종한 남녀 이교도들에 관한 또 다른 예외 규정을 덧붙인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에게 신자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부인에게 신자 아닌 남편이 있는데 그가 계속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 그러나 신자 아닌 쪽에서 헤어지겠다면 헤어지십시오. 그러한 경우에는 형제나 자매가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2-15).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전통을 새로운 경우에 적용했다.5)

  또 다른 전형적인 문제는 로마 제국을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무리는 로마 제국이 하느님께 맞서 극단적인 증오를 쏟아낸다고 여겼다. 예컨대 로마 제국을 모질게 공격하는 요한 묵시록은 로마를 피에 굶주린 사나운 짐승에 빗댄다. 쿰란 문헌은 로마인들(Kittim)을 더러운 권력인 자기 군대의 독수리들을 떠받드는 인간으로 표현한다. 이런 문헌들은 로마 세계를 하느님께 맞서는 죄악과 증오 자체로 여긴다. 그러나 다른 문헌들은 로마의 지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제도이며, 하느님께서는 질서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로마의 힘을 키워주셨다고 강조한다. 바오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재판관들을 존중하고 세금을 내라고 편지를 썼다(로마 13,3-6 참조). 이는 반역 전과자요 반란 선동가라는 비난에서 벗어나려는 바오로의 자구책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묵시록은 로마와 장사꾼들을 심하게 비판한다. 그 장사꾼들은 로마의 국가 시스템을 활용하여 이권을 챙기는 자들로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았습니다. … 그 이마에는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 대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의 신비였습니다. 내가 보니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묵시 17,3-6).

  아마도 같은 지역 상황에서 동일한 토대를 지녔을 이 두 갈래 흐름이 그리스도교 전체 역사에서 긴장을 유지해온 두 개의 커다란 신학적 전망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 하나는 창조질서를 높이 평가하는 창조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에 영향을 받은 묵시신학이다. 이 두 신학의 긴장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세상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악의 근원을 물리치려는 경향과, 동시에 세상의 아름다움이 더욱 충만하게 드러나도록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겸허하게 수용하려는 경향이다.

  신학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는다. 경험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반드시 교의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관행과 실천들에 연관되어 있다. 제아무리 열성적인 작은 공동체를 꾸렸다할지라도―또는 아마도 열성적인 작은 공동체를 꾸렸기 때문에―그리스도인들은 분열을 겪게 마련이다. 신약성경 대부분은 이러한 크고 작은 분열의 표지를 보여준다.

  개인적 다툼

  의례 규정들로 말미암은 분열 외에 개인적 다툼들도 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생긴 분열을 알려주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이런저런 지도자에게 속한다고 내세우고 있었다.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1코린 1,11-13).

  요한계 그리스도교―로마의 아시아 식민지인 소아시아 지역(에페소)에서 똘똘 뭉친 작은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도 분열과 파문을 겪고 있었다. 더러는 스스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더러는 공동체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사실 그리스도교 문헌들―예컨대 쿰란 문헌들―은 불화를 일으키는 이단들과 맹신자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 이 가르침을 내놓지 않으면, 그를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인사하지도 마십시오.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의 나쁜 행실에 동참하게 됩니다(2요한 9-11).

  이 경우 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분열의 인간적 측면은 이어지는 요한 서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곳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디오트레페스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면 그가 하는 행실을 지적하겠습니다. 그는 나쁜 말로 우리를 헐뜯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이들까지 방해하며 교회에서 쫓아냅니다(3요한 9-10).

  바오로도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을 거슬러 단호한 표현을 쓰는데, 그들의 인격뿐 아니라 가르침도 반박한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3-14). 바오로는 공동체에 속한 죄인들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렇게 쓴 뜻은, 교우라고 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는 자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거나 우상 숭배자거나 중상꾼이거나 주정꾼이거나 강도면 상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와는 식사도 함께 하지 마십시오”(1코린 5,11). 또 바오로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죄인을 사탄에게 넘겨버리라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권고하기도 한다.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1코린 5,5). 이런 말의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파문 형식을 일컫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분열들 가운데 순수하게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측면과 신학적 측면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분열이나 문화적 문제들이 전혀 없는 어떤 특권적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초기 문헌들은 이러한 분열의 존재와 심각성을 풍부하게 증언하고 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의와 실천에 관한 분쟁, 지역 공동체들 사이의 분열과 공동체 내부 분열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풍요로운 종교적 세계에서 살고 있었고,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이 바로 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유다교 관행에 젖어 있었고, 어떤 이들은 이교 관습에 익숙했다. 고대 세계의 우정 관계와 사회생활은 그들에게 근본 결단을 내리도록 끊임없이 강요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들에 관한 물음을 계속 던졌다.

  상호 인정

  이런 상황에서 신약성경은 어떻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런 분열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2세기에 ‘큰 교회’(la grande Chiesa) 또는 ‘가톨릭’(la Catholica)이라고 불리게 될 교회를 서서히 건설할 수 있었을까?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오로와 요한의 제자들은 어떻게 서로를 인정할 수 있었을까? 분열의 힘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공감대를 깰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한 가지 단순한 이유를 대자면, 적어도 분열의 원심력만큼이나 강한 친교의 구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신앙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깊은 공감으로 서로 연결된, 일치를 향한 커다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가 사도행전을 요약할 때(사도 2,42-47; 4,32-37; 5,12-16 참조)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를 분명히 이상적으로 묘사했지만,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켰던 강렬한 친교 감각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일치를 위한 장엄 기도를 쓰면서(요한 17장 참조) 친교를 향한 커다란 열망을 증언한다.

이 일치는 특별히 두 가지 요소의 도움을 받아 실현됐다. 첫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이 가진 수위권과 그들 가운데 베드로의 수위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고, 둘째는 대부분 신학적 극단주의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 기인하는 사도들의 권위와 전통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실천과 신앙 행위의 다양성에 한계를 둔 것이다.

  베드로의 권위와 베드로에게 기댄 교회들의 권위는 그리스도교에 소속되기 위한 ‘필수’(sine qua non) 조건으로 서서히 자리 잡았다. 1세기 내내 케파, 곧 베드로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졌다. 두 가지 커다란 그리스도교 운동이―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베드로 공동체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곧, 타르수스의 바오로 또는 그 추종자들이 감히 ‘사도 바오로’(l’apostolo Paolo)라고 부르던 인물과 직결된 공동체(바오로 몸소 분명히 알고 있었듯이, 그는 열두 사도단에서 한몫을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육적으로 뵙지 못했다)와, (2세기의 파피아스 주교에 따르면) ‘원로 요한’(Giovanni l’anziano) 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il discepolo che Gesù amava)라고 불린 신비에 싸인 인물과 직결된 이른바 ‘요한 공동체들’(comunità giovannee)이다.

  베드로의 수위권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바오로와 요한의 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비슷하다. 바오로 전통에서는 비록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서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갈라 2장 참조) 바오로가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기둥들과 친교를 이루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들과 합의를 이루었다.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7-10).

  또한 바오로는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도들의 인정(認定) 없이는 자신의 선교가 헛일이 되리라고 밝힌다(갈라 2,2 참조).

  바오로는 친교의 사람이었으니, 교회들 사이의 친교, 사람들 사이의 친교,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다계 그리스도인 사이의 친교를 추구했다. 그리스도께 직접 사적 계시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결코 케파-베드로와 친교를 깨려하지 않았다.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케파가 그 복음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헛된 달음질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처음에는 몇 해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모금을 위해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 작정이었지만(1코린 16,3-4 참조), 마침내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로마 15,25).

  바오로는 친교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와 공동체들이 예루살렘에 뿌리를 둔, 곧 사도들이 세운 공동체들로 이뤄진 큰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기를 원치 않았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적 은사가 그리스도 몸소 (당신 부활 전에) 베드로에게 주신 권위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바오로 서간들이 마침내 모든 이에게 두루 받아들여진 것도 바오로의 이러한 자발적 교회 행위 덕분일지도 모른다. 자기 확신이 매우 강했던 바오로가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겸손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가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거침없이 지적했다. 그러나 바오로의 자유로운 발언은 깊은 친교를 동반하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유효한 현재형 가르침이다.

  베드로 수위권에 관한 인정은 요한계 문헌들에 더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베드로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요한 복음에는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이라고 말씀하시는 일화(16,13-19)가 없다.6) 그럼에도 제4복음서인 요한 복음은 두 차례나 베드로의 수위권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늦게 도착했던 베드로가 맨 먼저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구성이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4). 두 번째는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목적 임무를 강조한 부분이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그러나 21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한 사명을 받는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0-22).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중 작업을 완수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il discepolo che Gesù amava)의 가르침이 갖는 적법성과 가치를 주장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와 그 제자들)가 베드로의 으뜸 역할을 인정했다. 이 이중 작업 덕분에 요한 복음은 큰 교회에 받아들여졌고, 요한 공동체들도 다른 공동체들에 받아들여졌다.

  배제와 경계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말고도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내린 두 가지 위대한 결정을 따름으로 실현된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사도 15,28-29). 신약성경은 이 결정에 맞섰던 공동체와 집단들에 대한 선명한 흔적을 지니고 있다. 교회가 점진적으로 떨쳐낸 두 가지 흐름 가운데 하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인데,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른 민족들이 히브리 백성 안에 편입되어 관행적 계명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2세기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원(原)영지주의적(protognostica) 흐름인데, 그들은 형제적 친교보다는 완고한 윤리 실천에 토대를 두고서 황홀하고 신비적인 인식과 실천의 특성을 지닌 밀교(密敎) 교설을 그리스도교 안에서 읽어냈다.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례 받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적법성과 그들과 친교를 나누도록 요구받았다. 이 어려운 선택은 사도행전의 중심부에서 폭넓게 전해지는데, “예루살렘 사도 회의”(il Concilio di Gerusalemme)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열매를 거둔다(사도 15 참조).

  사도 바오로가 서간에서 유다계 선교사들에게 반대하며 증언하는 바와 같이, 분명 수많은 유다계 공동체가 아랍 세계에 존재했다. 이 공동체들은 2세기 초부터 주변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가 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오만방자해져서 바오로가 로마 9-11장에서 경고하는 바를 망각한 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한 행위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또 다른 커다란 유혹은 특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일어났지만, 히브리 세계와 아랍 문화권에 확산됐다. 이른바 ‘영지주의’(gnosticismo) 또는 ‘영지’(gnosi)의 문제다. 물론 ‘좋은’(buona) 영지도 있지만, 이레네우스가 반박한 나쁜 영지는 지식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내세운다. 영지주의가 언제 생겼는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1세기 말에 나타났다고 여긴다.

  요한계 문헌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의 존재를 증언하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영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화(神話)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1요한 4,2-3).

  이러한 흐름은 이집트에서 크게 발전했고, 수많은 문헌들을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토마스 외경 복음과 유다 외경 복음이 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문헌들은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로마의 클레멘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 그러하다. 이때부터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어떠한 일치도 이룰 수 없다. 수위권의 정확한 경계를 두고 지중해에 있는 큰 교회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서방의 한 교회―로마 교회―가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에 대한 특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같은 도시에서 똑같이 순교로 인정받은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법적 화해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열두 사도가 전해주었고 케파-베드로가 대표하는 그리스도교가, 지상의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타르수스의 바오로가 전파한 더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도교와 긴밀하게 일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중해 동쪽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화와 언어가 하나인 교회 안에서 통합되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와도 구별되고 유다교와도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다양성은 그리스도교 본질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기원부터 문화, 언어, 인종, 신학에서 다원적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제국 안팎에 있던 공동체들에서 형성되었고, 그리스 전례 언어와 아람어 전례 언어를 사용하던 공동체들에서 형성되었으며, 사도들의 전승을 엄격하게 따르던 공동체들과 그렇지 않은 공동체들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실제로 대립을 불러일으켰고, 때로 파문과 열교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은 친교를 향한 강한 열망과 예수님에 대한 공통된 기억과 공동 전례, 특히 세례와 성찬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이 열망은 다양한 문헌들과 전통들이 신약성경 안에서 동류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해주었다. 이스라엘의 토라가 사제계 흐름과 신명계 흐름을 통합하였듯이, 신약성경은 유대아-갈릴래아 그리스도인들의 유산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소아시아 공동체의 유산을 통합한 것이며,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들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il discepolo che Gesù amava)가 세운 공동체들의 유산을 아우른 것이다.

  다양한 공동체에 뿌리를 둔 서로 다른 신학 학파들과 학문들 사이의 친교와 상호 인정에 대한 강한 열망 없이는 신구약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1세기에도 똑같은 긴장이 죽 이어졌다. 서로 다른 신학들과 전례 문제들―예컨대, 부활절 날짜 문제7)―이 빚어낸 분열의 힘은 언제나 더욱 유기적인 친교의 움직임과 대립해 왔다. 공의회들의 시대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친교 운동이었다. 이제 이 운동은 또 다른 역사를 맞고 있다.


1) La Civiltà Cattolica, 4030 (19 maggio/2 giugno 2018), 313-326;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 Erich S. Gruen, Heritage and Hellenism: The Reinvention of Jewish Traditi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3) Yves Chevalier, L’antisemitismo. L’ebreo come capro espiatorio, (Milano: IPL, 1991).
4) 참조: Peter Lampe, Die stadtrömischen Christen in den ersten beiden Jahrhunderten: Untersuchungen zur Sozialgeschichte, (Tübingen: Mohr-Siebeck, 1987).
5) 참조: John P. Meier, Un ebreo marginale. Ripensare il Gesù storico. 4: Legge e amore, (Brescia: Queriniana, 2009), 80-184.
6) 마태 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은 요한 6,68-69와 통한다.
7) 참조: Enrico Cattaneo, “La data della Pasqua nella Chiesa antica”, Civ. Catt., 4026 (2018, 3), 52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