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신학 스릴러

UN THRILLER TEOLOGICO DI YI MUNYOL1)

페르디난도 카스텔리 S.J.

김민철 요한 S.J. 옮김

김유진 카타리나 감수

  이문열2)의 이 소설을 읽게 되는 이유로는 첫째 ‘제목’, 둘째 제목에 대한 ‘설명’, 마지막으로 작가의 ‘국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제목을 보자. 『사람의 아들』, 성서적 풍미가 느껴진다. 예수는 그 칭호를 취함으로써 예수 자신이 된다. 한편 ‘신학 미스터리’라는 설명은 매혹적이다. 미스터리는 오늘날 유행하는 장르로,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을 떠올리게 하며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국적을 보자면 작가 이문열은 서울 태생의 한국인이다. 2005년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이 바로 한국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울의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최근 출판된 그의 책은 한국에서 이미 이백만 부 가량 판매된 바 있다. […] 그 책은 작가 자신이 말하듯 ‘신학 스릴러물’로 1979년 초판이 나온 이래 몇 차례 개정 작업을 거쳐 현재 판본이 나왔다.”3) 현재 이 소설은 작가의 이전 작품들처럼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장편소설로, 읽기가 지적으로 만만치는 않다. 작가는 액자소설 기법을 사용할 뿐 아니라 액자 안에 그럴듯하고 진중한 신학 논설로 동방 고대 종교들의 교리를 풀어 놓고 있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식 표피적 성격으로, 소설은 때때로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혼합이 되곤 한다. 작가의 생각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탄탄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묵직하고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자유, 악, 고통, 사탄의 존재 및 공관복음 속 신비로운 인물 예수에 관한 딜레마를 다룸으로써 도스토옙스키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탐정물 같은 도입부

  소설의 첫 문장들은 독자에게 탐정소설의 분위기를 풍긴다. 산길을 가던 행인 한 사람이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서른 두셋 정도로 뵈는 길고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 예리한 흉기로 난자를 당한 듯 가슴 부분에 피가 두껍게 굳어 있었다.”4) 희생자는 근처 기도원에서 목격되었다. 기도원의 황 전도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이름은 민요섭, 명석한 신학생이던 그는 복음의 가르침을 자신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양말 한 켤레 속옷 한 장 여분으로 지니는 법이 없었고, 또 방학이면 고아원에서 무료 봉사를 하거나 나환자촌에서 지낼”5) 정도였다. 그러다가 교수들과 신앙 문제로 언쟁하고 신학대학을 중퇴했고 결국 “하나님과 교회(Dio e la Sua religione)”, 즉 그리스도교를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사를 담당하는 남 경사는 이 살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민요섭은 누구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는가? 누가 그를 죽였나? 그의 종교적 모험은 어떤 것이었나?’ 마지막 질문은 민요섭이 성경 표지에 적어 놓은 라틴어 문구에서 떠올랐다. “Desperatus credere potes, mortuus vivere potes(이제 너는 신앙할 수 있다. 절망했으므로, 살 수 있다. 죽었으므로).”

  남 경사는 민요섭의 신학대학 시절 교수들을 탐문하면서 그가 일본 실천 주의 신학자 가가와 도요히코의 추종자가 되어 고대 그리스도교 이단인 오피테스에 동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피테스는 성경의 뱀을 지혜의 사도로 숭배하고 사탄을 지혜의 영 또는 신의 또 다른 속성으로 믿는 이단이었다. 또한 남 경사는 수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몇 가지 불편한 사실을 인지한다. 민요섭은 한편에서는 “치부(致富) 수단”으로 변한 교회와 싸우며 가난한 이를 돕는 데 헌신하는, 급진적인 신자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장로의 부인과 간음하고, 교회 신축을 둘러싼 해명을 요구하며 결국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 “사탄의 자식(figlio di Satana)”이라는 평판 또한 따라다녔다.

  남 경사가 입수한 그의 노트 중 한 권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어찌하여 선악을 불문하고 인류에게 재난은 닥쳐오는가’, ‘부유한 자, 힘센 자, 권세 있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무(無)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세상에서는 전부인가.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어찌하여 무(無)인가’, ‘세상은 믿기 위한 미신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종교야말로 그 같은 미신의 가장 기교로운 형태가 아닐는지.’6)

  이 구절은 민요섭의 모반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 현재의 신앙은 이성에 반하며, 예수가 행한 가르침은 실패했고, 종교는 미신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속 확신은 굳어진다. 새로운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 새 종교에서는 아는 것이 최우선이 되고, 죄와 악의 개념은 수정되고, 미신은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한 계획은 여러 권의 노트로 구성된 ‘쿠아란타리아서(書)’에 드러나 있었다. 남 경사는 민요섭의 노트들을 읽으며 살인자를 찾는 단서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바람에 더해 종교 논의 전개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흥미를 느낀다. 소설의 상당 분량은 이 노트들을 옮겨 오는 형식과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헛된 연구

  민요섭의 어떤 노트에는 이런 언급이 있었다. 동방에서 온 세 사람―마법사들―이 구유에 누운 아기에게 경배한 후 어떤 별 하나를 보게 되는데 그 별이 헤로데와의 조우를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오직 재앙의 별로만 받아들인 것은 그들 세 동방인의 맹목이나 다름없는 편견과 무지였을 뿐, 그 별에게는 또 하나 비추어야 할 위대한 섭리가 있었다. 그 시각 벧엘 부근의 한 샴마이 학파 율법사 집에서 진정한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가 태어나고 있었음이 바로 그랬다.”7) ‘쿠아란타리아서(書)’는 신인(神人) 아하스 페르츠의 모험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그 소년은 천재적인 지적 능력과 뛰어난 용모를 지녔다. “야훼의 말씀과 율법에 대해, 선지자의 가르침과 예언에 대해 …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기억하는 젊은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어를 배우는 능력 또한 남달라서 … 많은 방언(方言)을 익힐 수 있었다.”8) 신비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인간의 불행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급기야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대해 다른 비전을 선포한다. “그는 결코 말씀의 단순한 육화(肉化)여서는 아니 된다. 오는 그는 무엇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오는 그는 반드시 세 개의 열쇠를 가지고 와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가엾은 육신을 주림에서 구해 줄 빵이며, 둘째는 우리의 나약한 정신을 죄악에서 지켜 줄 기적이며, 셋째는 명목과 잔혹의 역사에 의와 사랑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는 지상의 권세다. 이 셋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그는 결코 우리들의 메시아일 수가 없다.”9)

  청년이 된 아하스 페르츠는 대부호 아삽의 아내인 사라와 성적 모험을 즐기는데 이는 그의 영혼을 어지럽힌다. 그녀는 희열에 사로잡히나, 그는 죄의식에 고뇌한다. 왜 죄인가?

  “그녀는 … 말했다. … 그까짓 계명, 그것은 늙은이와 제관들의 것이지 우리들의 것은 아니에요. 무엇이든 우리가 기뻐할 것과 즐길 수 있는 것은 무턱대고 금지하는 호렙의 심술궂은 망령이 내린 것이지.”10) 아하스 페르츠는 사라와의 관계를 끝내지만 이후 그는, 다른 이와 불륜을 계속한 그녀가 투석형에 처해지고 “말씀의 돌무덤(le pietre del Verbo)”에 깔리는 걸 목격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좌절에 빠진다. 사라의 말이 맞았다. 죄는 인간이 발명한 것일 뿐이다. 카인은 잘못이 없다. 단지 죄를 범하도록 강제당한 것이기에. 오히려 야훼가 그를 도구로 이용한 것일 뿐이다. “모두 야훼 하나님의 의지 안에(ogni cosa dipende dal volere di Jahvè)” 있다면 카인이 저지른 행위의 탓도 결국 그에게 돌려야 한다.11) 아하스 페르츠는 아버지와 신학적으로 격한 논쟁을 하게 되는데 그의 말이 더 일리가 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우리 이성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야훼가 당신의 계획으로 “우리의 나약한 의지(la nostra debole volontà)”에 책임을 물으려 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운명에 빠지게 한 것이라고.

  “사탄의 추종자(un uomo di Satana)”가 된 아하스 페르츠는 회당에서 쫓겨나고, 부모의 집을 떠나 방탕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끝내는 여러 종교의 교의를 직접 보고 알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도는데 이집트, 페니키아, 시리아, 페르시아, 인도, 로마 등 이역만리를 방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례의 여정에서 그를 지탱한 건 “젊은 날의 일부를 위악(僞惡)의 수렁 속에서 비틀거리게 한 종족의 오래된 신에 대한 실망을 달래줄 새로운 진리와 신”12)을 찾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문열의 소설은 그 당시 종교 일반에 대한 “르포(reportage)” 형식으로 변모한다. 복잡하게 얽힌 교의와 의식, 마술적 관습과 미신, 우매와 사기 등에 대한 최근 지식을 작가는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는 결국 아하스 페르츠가 신성으로 만연한 우주 앞에서 피로와 환멸을 느끼고 마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년간 “새로운 신(nuovo Dio)”을 찾는 모험 끝에 결국은 “처참한 실패(miserabile fallimento)”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인 로마에서 그는 해를 알려고 관찰하다 눈이 멀어 버린 한 사람을 만난다. 아하스 페르츠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저 장님이 두 눈을 잃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눈을 잃어버렸음에 분명하다. 내가 지난 십 년 동안 세계의 끝까지 떠돌며 그렇게도 많은 신들을 만난 것은 해를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오래 쳐다본 저 장님의 노력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뜨거운 햇볕이 그의 눈동자를 태워버린 것처럼 내가 본 그 수많은 신들의 교의와 신화는 내 마음의 눈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제는 나 또한 신의 존재를 인간의 관념이 빚어낸 어떤 추상 이상의 것으로 의심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은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저 태양이 분명한 실체로 불타고 있는 것처럼, 신의 섭리도 실존의 숭고한 빛으로 이 무한한 시공을 관통하고 있다….”13)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내가 신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니라 신이 나를 찾아올 때이며, 신을 쫓을 때”14)이다.

  사탄으로서의 아하스 페르츠, 예수를 만나다

  고향에 돌아와 한 달을 보낸 후, 아하스 페르츠는 신을 만나기 위해 ‘쿠아란타리아’라고 하는 광야에 은거한다. 그는 “세속의 먼지와 지식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단식과 묵상에 잠긴다. 40일째 되던 새벽 그는 한 외침 소리에 깨어난다. “사람의 아들이여, 이제 때가 왔다. 그대의 길고 애절한 부름은 드디어 나를 무위와 무명에서 끌어냈다.”15) 그에게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시작이요 끝이며, 영원이요 찰나며, 완성이요 개연이며, 절대요 상대이다. … 나는 [야훼]이며, 또한 그의 부정(否定)이다.”16) “그 이름 없는 위대한 신성(Il Grande Spirito senza nome)”은 “왜곡되고 와전된 창조의 진실로부터 우주의 시원과 궁극을, 인간의 숙명 및 그 지향과 당위를” 아하스 페르츠에게 전한다. “일찍이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멸된 고대의 어떤 밀의 종단의 교의 속에 그 대강이 살아남은 가르침이었다.”17)

  ‘위대한 신성’과 헤어져 광야를 벗어나던 아하스 페르츠는 묵상에 잠긴 한 젊은이를 만난다. 하지만 그 청년이 “십팔 년 전 어린 자신이 테도스에게 이끌려 인간의 비참을 샅샅이 돌아보고 있는 동안 성전에서 제관들과 말씀을 다투어 그들을 놀라게 했던 야훼의 아들 예수란 것을 알지는 못했다.”18) 아하스 페르츠의 내면에서 어떤 변모가 일어난다. 히브리 율법 학자의 아들이자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섰던 순례자인 그는, 이제 사탄의 사자(使者)로 변신 아니, 사탄의 육화가 된 것이다. 그러한 ‘옷’을 입고서 그는 예수에게 다가가 제안한다. 돌을 빵으로 만들고, 기적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를 모든 해악에서 구해 줄 것이니 절벽에서 몸을 던져 보고, “옛 다윗의 영광을 재현(per far rifulgere l’antica gloria di Davide)”하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쟁취하라고.

  예수는 이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l’uomo non vive di solo pane, ma anche delle parole di Dio)”이라고 말하며 세 가지 제안을 거절한다. 또한, 하느님을 ‘감히 시험해서는’ 안 되고, 지상의 권세, 자부심, 육체적 쾌락 및 자아의 헛된 영광은 자신의 관심이 아니며, 자신은 아버지께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야훼(il Dio di Abramo e di Isacco: Javè, il creatore dell’Universo)” 아버지께서 세상을 구원하도록 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혹자에게 말한다.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고 이만 물러나시오. 지금 당신을 부추기고 있는 그 악마의 가르침을 따라 사특한 지혜의 길이나 가시오. … 뒷날 예수를 통해 그 만남을 전해 들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아하스 페르츠를 사탄으로만 그려내고 있다.”19)

  민요섭은 이 외경 텍스트―언제나처럼 그의 노트―에 기반해 아하스 페르츠가 예수를 다섯 번 더 만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소위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기적(miracolo dell’indemoniato”20)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여, 왜 또 우리를 간섭하려 드는가요? […] 나는 당신을 아오. 당신은 거짓 ‘사람의 아들’이며, 거대한 독선의 육화요, 그러잖아도 그을리고 있는 이 대지에 더 큰 불을 지르러 왔고, 피땀으로 일구어놓은 우리의 포도원에 케케묵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의 상속자로 왔소. … 그러나 제발 이대로 돌아가시오. 가서 당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시오. 이 땅에는 그분이 받아야 할 아무런 빚도, 주장할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을. 우리를 지금 이대로 놓아두는 것이 오히려 그분을 스스로 높여주는 사랑이며 축복이라는 것을.”21)

  한편 또 다른 만남에서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사탄의 교리로 “인도하려고(convertire)” 시도한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생각해 보시오. “죄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오. 고통스러운 자유를 회수하는 것이오.”22) 죄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그것은 말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관념일 뿐이지 않소?”23) 아버지의 사랑을 들먹이며 속이려 들지 말라. 신은 귀가 먹었고 저 멀리에 있소. 사람들을 죄책감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말씀으로부터의 자유(libertà dal Verbo)”를 주시오.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24)을 지우지 마시오. “진리도 은혜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가르침]”을 그들에게 주시오.25)

  예수는 아하스 페르츠 안의 “사탄의 아들(figlio di Satana)”을 알아보고 대답한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거짓 예언자나 사악한 지혜의 입을 빌려 수없이 반복된 사탄의 주장일 따름이오. 한 분이신 내 아버지에 대한 시기와 인간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속임수이며, 공의(公義)로 띠를 삼는 그분의 크신 사랑과 인간의 영적인 발전을 부정하려 드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그래, 결국 당신의 주장에는 저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와 불신 이상 무엇이 있소? 또한 저들의 존재를 무의미와 맹목 속에 방치하자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사탄의 길을 열고 그것을 고르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26)

  태초에 ‘커다란 존재’가 있었다

  민요섭의 노트는 십자가 위 예수의 죽음으로 끝난다. 아하스 페르츠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하스 페르츠의] 모습도 당신의 천한 화공(靴工) 그대로 전해졌다. 곧, 맨발에 가죽 무릎받이를 하고, 손에는 깁다 만 로마군의 군화(샌들)와 실 꿴 바늘을 든 채, 기약 없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끝없이 이 세상을 떠돈다는 것이었다.”27)

  글을 다 읽은 남 경사는 당혹스러워한다. 그리스도교 신의 대립 항으로서 초월적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하스 페르츠가 사막에서 조우한 “위대한 신성(Grande Spirito)”과 “말씀(Verbo)”에 반대되는 그의 가르침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침묵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두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민요섭과 수년간 뜻을 같이하며 지내온 조동팔의 집에서 남 경사가 발견한 노트로부터 찾을 수 있다. 조동팔은 민요섭의 글들을 엮어 성경을 새로 쓴 후 ‘쿠아란타리아서’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하는 일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신학 논설은 일종의 교의적 혼합으로, 그 안에는 여러 종교와 우주론의 요소가 들어가 있었다. 일부 내용은 이러하다.

  “태초에 커다란 존재가 있었으니 우주의 모든 것은 그 속에서 하나였다.”28) 그것은 두 개의 원리로 이루어졌는데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즉 정의와 자유, 선과 악. “쿠아란타리아서의 화자로서 ‘위대한 지혜’라고 지칭되는 악이 이렇게 말한다. “원래 우리는 일체이며 동격이었고, 우리를 연결하는 원리도 저 태초의 존재를 혼돈이 아니라 한 완성으로 설 수 있게 한 그 조화와 질서였다. 지혜 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죄는 지혜 없는 선의 딴 이름이며 악은 선 없는 지혜의 딴 이름에 다름 아니다.”29)

  ‘커다란 존재’는 영원한 고요와 정지의 상태에서 오는 무한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의 도구인 말씀은 자신의 생명조차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창조를 완성하는 순간 자신은 소거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은 독단의 의지에 따라 육화했고, 모든 존재를 압도하여 전창조계를 선과 연결했다. 이 사건은 시원적 ‘커다란 존재’의 합일성을 파괴하여 두 개의 구성 원리를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선이 만물을 지배하고 악을 억제하게 하였다. 하지만 악을 통제하려는 선의 시도는 실패했고, 인류 최초의 조상은 악의 사자인 뱀의 유혹에 따라 금지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은 데 대한 징벌로 에덴에서 추방된다. 말씀의 “자기도취”와 “독선”으로 모든 인간 본성이 심판과 단죄를 받은 것이다.

  “광기 어린(obnubilati dalla follia)” 예언자들과 해설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원래의 조화를 복원시킬 것으로 보았다. 그는 ‘위대한 지혜’의 ‘알테르 에고’(alter ego: 또 다른 자아)―‘선’―에 편재해 있던 위격이자 “그 독선과 말씀의 육화”였다. ‘위대한 지혜’는 이 ‘사람의 아들’은 거짓되었다며 제 이들인 아하스 페르츠-사탄을 보내면서 말한다. “너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 … 너는 그저 한 무력한 사람의 아들로 그와 싸워야겠지만, 그래도 이 대지와 인간들은 언제나 네 편에 있음을 잊지 마라. 보다 높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너의 동류를 위해 네 힘을 다 쏟고, 멀리 하늘에 있는 왕국이 아니라 너희가 발 딛고 선 대지를 위해 네 슬기를 다 펼쳐라.”30)

  예수는 죽고 땅에 묻혔다. “설령 그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는 너희 각성의 돌팔매에 쫓겨 또 한번 울며 그를 보낸 이에게로 되돌아가야 하리라.”31) 조화와 태초의 질서 회복은 그런 식으로 가능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진정으로 믿고 섬겨야 할 신이 있다면 그는 바로 그때의 하나로 된 우리이다.”32) 그리하여 인간들은 완전하고, 자유롭고, 오직 이 땅에만 충실한 이들이 될 것이다. 하늘을 우러르는 믿음과 섬김에서 해방될 것이며, 선과 악 모두가 ‘커다란 존재’로부터 나옴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건이 해결되다

  노트를 다 읽은 남 경사는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선과 악이 신적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가 보기에 어불성설이었다. 아하스 페르츠의 모든 반그리스도교적 이론들이 결국 모호하고 애매한 신을 발견하고 끝나고 만 게 그에겐 실망스러웠다. 의심 한 줄기가 그의 마음을 스쳤다. 민요섭은 자신의 논리가 지닌 불투명함을 자각하고서 원래의 종교적 비전을 바꾼 것 아닐까? 결과적으로 그것이 조동팔의 분노를 불러온 게 아니었을까? 추적 끝에 하나씩 조동팔의 실제와 대면했을 때 남 경사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조동팔은 분명 그들의 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민요섭을 살해했다고.

  여러 해 동안 그들은 같이 살면서 사상과 실천 계획, 열정을 공유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돕기 위해 절도와 강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거룩한 책―쿠아란타리아서―을 직접 쓰며 그것을 ‘성경’으로 삼으려고 했다. 조동팔은 동지 민요섭의 지성과 전망에 압도되어 그를 따랐다. “그는 내가 섬기던 우상을 산산이 깨뜨리고 소중히 품고 있던 믿음과 가치 체계를 송두리째 허물어버린 사람이었소. 그리하여 그 폐허 위에 이제 막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다가 홀연히 나를 떠났던 것이오….”33)“옛 하나님과 그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서 떠난 것이다.

  사실 민요섭은 여러 형태의 신학으로 뒤섞인 교의들이 주는 도취에서 깬 후 새로운 신을 창조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기껏해야 조잡한 형태의 무신론을 제시하는 것에 그쳤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이 제단 위에 세우려 했던 “이성신(Il Dio della Ragione)”은 의심스럽고 딱하기 그지없는 도덕성에 대한 신적 재현이라기보다 “광기의 현현(manifestazione di follia)”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추종자인 조동팔에게 말한다. “과장된 참회와 더불어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겠다고.”34)

  조동팔은 눈물로써 무릎 꿇고 부탁한다. 당신이 창조한 신을 부수지 말아 달라고. 자기에게 전수한 비밀을 없던 것으로 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용서 역시 불가능했다. 민요섭은 그들의 실패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회개는 하나의 죄였다. 그가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이상 새로운 신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꿇어앉아 빌며 … 눈물로 애원했소.”35) 원래 자리로 돌아와 달라고. 하지만 헛된 부탁일 뿐이다. 결국, 그는 칼을 든다.

  “그는 별로 놀라지도 피하려 들지도 않았고. 내가 잘못 본 것인지 모르지만, 오히려 입가에 엷은 웃음까지 띠는 것 같았소. 눈길도 온갖 신비함을 다 끌어모은 듯한 그런 어떤 것이었소…. 갑작스런 증오로 눈먼 나의 칼이 그의 가슴을 난자할 때까지도….”36) 남 경사에게 자신의 범죄를 실토하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한다. 상체를 아래로 푹 숙여 복부를 찢는 듯한 고통에 꿈틀거린다. 남 경사가 심문하기 전 그는 술과 함께 독극물을 삼켰다. 서서히 죽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전에 그는 민요섭이 부정한 새로운 신에 대한 신앙을 선포한다.

  결말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은 구성과 내용에 있어서 야심 찬 소설이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첩된 서사가 깔려 있다. 위대한 여러 종교의 세계에 대한 민요섭의 편력, 비극으로 끝나게 될 조동팔과의 관계,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사탄의 사막에서의 만남. 이 세 개의 서사는 서로 빛을 비추며 작품의 중심 의미와 운동으로 수렴된다. 다소 장황한 묘사에서 작가의 자만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건은 경찰 조사뿐 아니라 두 젊은이의 종교 사상 변화로 역동적인 생명력을 얻고 있으며 심오한 의미가 있는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 또한 포함하고 있다.

  이문열은 소설가로서 사실을 서술하고, 심리와 관념을 분석하며, 몇몇 종교적 윤리적 개념의 발전을 묘사하는 데 집중할 뿐, 작품 전면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섬세한 독자라면 작가가 민요섭이란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있으며, 민요섭의 최종 선택에 대한 의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민요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종교를 배반하고, 종교를 영리적 제도로 격하하고 영적 움직임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필요에서 유리된 어떤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자들과 그 움직임에 반항하는 사람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점에서 분명 의미심장하다.37) 자유가 결핍된 채 추상적이고 율법적인 신학이 지배하는 현실은 이 젊은이를 원래의 (개신교) 신앙고백에서 멀어지게 하며, 만족할 만한 종교를 다른 곳에서 찾도록 이끈다.

  하지만 추구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 사람들의 더 깊은 필요에 응답하는 새로운 신을 창조한다? 이러한 전망은 그의 젊은 추종자 조동팔을 열의에 불타게 했다. 하지만 민요섭 본인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그 계획의 부조리와 위험을 깨닫고 원래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복귀한다. 이문열 자신은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 신앙은 자유를 박탈하거나, 엄격하고 억압적인 규율을 제시하지 않으며, 우울하고 징벌적이며 강박적인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요와 형제애와 나눔의 전망을 일깨우는 신앙이다. 예수의 신은 성경 저자들의 절박한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신이어야만 했다. 사랑과 구원의 신이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예수와 아하스 페르츠-사탄이 서로 만나는 장면과 이어지는 부분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이문열은 복음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여 의욕적으로 그 부분을 지면 위에 재구성한다. 도스토옙스키적 분위기가 명백히 드러나면서도 적지 않은 부분이 독창적이다. 두 명(예수와 아하스 페르츠) 모두 진리와 구원의 전령 역할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지만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 서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하느님 나라에 정향 되어 있는 반면 아하스 페르츠-사탄은 인간과 이 땅으로 향해 있다. 전자가 영원성에 대해 말하는 반면 후자는 시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가 선포하는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며 아하스 페르츠-사탄은 인간의 뜻을 지지한다. 예수의 명징함은 그 반대자의 모호함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진정한 ‘사람의 아들’은 과연 누구인가? 다시 한번 작가 본인의 대답은, 선포가 아닌 암시의 방식으로,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예수는 단지 ‘사람의 아들’이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육화한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한 것인가? 이문열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가 아니며 스스로 그러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본질적인 문제를 제시하여 성찰로 이끌면서 종교적 선택의 여정에 있어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할 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인의 관점에 따라 그의 신학적 결핍과 부정확을 지적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 대신에 그가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존중과 경탄의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한국인 작가에게 이러한 요소는 분명 사소한 일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1) 편집자 주. Ferdinando Castelli S.J., “Thriller Teologico di Yi Munyol”, La Civiltà Cattolica, 3744 (2006, 6), 549-559. 한국을 주제로 한 치빌타 카톨리카 특별판에 이 글을 소개하는 목적은 안토니오 스파다로가 발간사에서 밝히는 것처럼 여전히 지혜를 주는 이전의 글들을 다시 소개하여 한국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기 위함이다. 원서의 인용문은 이문열,『사람의 아들』, (서울: 민음사, 20184)을 사용한다.
2) 이문열은 1948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조국의 분단이 일어난 해다. 3년 후, 한국전쟁 중에 그의 아버지는 월북한다. 이에 어머니와 아들은 수모와 차별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의 아들’로 보았다. 그 후 독학으로 어려운 시험을 통과,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문학에 투신해, 나중에는 한국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의 작품들―소설과 수필―에는 자유와 정치 그리고 형이상학을 주제로 한다는 특징이 있다. 피렌체 출판인연합(L’editore Giunti di Firenze)은 그의 책 네 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시인』,『그해 겨울』,『금시조』 등을 번역, 출판하였다. 2005년 10월 21일 『전령(Messaggero)』지에서 루치아 포치(Lucia Pozzi)가 이문열을 인터뷰한 내용을 다시 보자. 질문: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대답: “키워드는 ‘자유’다. 정치적 자유만 말하는 게 아니다. 더 넓은 의미의 자유인데, 바로 인간 본성의 심부에 뿌리내리고 있다. 어째서 독재정권이나 경직된 사회 구조만이 아니라 이념이나 종교에서도 억압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위한 것으로 불가분하게 첫 번째와 연결되어 있다. 즉 인간의 존엄성과 그 조화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질문: 당신의 책은 6~70년대 한국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출판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추가로 네 권의 책이 이탈리아어로 출판인연합회에서 출판되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특히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대답: “자신들 삶의 중심 주제를 성찰하는 것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나는 수많은 텍스트를 읽고 또 읽었다. 그중 성경은 다섯 번 읽었는데, 내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으며,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텍스트다. 내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한국 개신교는 급속한 성장을 보였는데, 엄격하고 억압적인 규율이 그 당시 개신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삶의 표징을 주고자 하였다. 우울하고, 판단하고, 강박적인 신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자유와 내적 고요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상황은 많이 나아졌지만, 내가 제시하고자 한 원리는 영원하며, 모든 극단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질문: 당신의 작품은 종교 일반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나? 대답: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충만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은 신앙인인가? 대답: “나는 실존주의자다.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처는 가톨릭이지만.” 질문: 당신이 보기에 신앙이란 무엇인가? 대답: “인간이 깨달음을 얻고, 더 잘 살고, 세상과의 조화 속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종교는 긍정적이다. 반대로, 정신과 행동을 속박하는 것이 된다면, 부정적인 영향만을 줄 것이다.” 참조. Yi Munyol, Il figlio dell’uomo, trans. A. De. Benedittis, (Milano: Bompiani, 2005).
3) 루치아 포치(Lucia Pozzi)의 이문열 인터뷰에서 인용함.
4) 이문열, 『사람의 아들』, 14.
5) Ibid., 21.
6) Ibid., 56.
7) Ibid., 60.
8) Ibid., 74-75.
9) Ibid., 71.
10) Ibid., 80-81.
11) Ibid., 89.
12) Ibid., 125.
13) Ibid., 243.
14) Ibid., 243.
15) Ibid., 258.
16) Ibid.
17) Ibid., 259.
18) Ibid., 260.
19) Ibid., 268.
20) 마르코 복음(1,23)에는 이렇게 나온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1) Ibid., 271.
22) Ibid., 287.
23) Ibid., 286.
24) Ibid., 277.
25) Ibid., 274.
26) Ibid., 278.
27) Ibid., 300.
28) Ibid., 328-329.
29) Ibid., 328.
30) Ibid., 345.
31) Ibid., 346.
32) Ibid., 347.
33) Ibid., 358.
34) Ibid., 367.
35) Ibid.
36) Ibid., 369-370.
37) 참조. 41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