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분(激忿)의 영(靈)을 거슬러

CONTRO LO SPIRITO DI «ACCANIMENTO»

디에고 파레스 (예수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옮김 (성삼의 딸들 수녀회)

  “격분의 영”(lo spirito di accanimento)1)은 인류 역사 안에 늘 있어 왔다. 형태는 바뀌지만 다른 이들을 향해 격한 분노를 터뜨리는 어떤 사람들의 역동은 동일한 것이다. 이는 형제를 죽이도록 카인을 몰아붙인 분노 안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바 있고, 이어서 교회의 표상인 여자를 죽일 수 없자 “그 후손들”(il resto della sua discendenza) 에 맞서 싸우는 악마의 분노 안에서 폭발한다.2) 오늘날의 새로운 형태는 “집단 따돌림”(bullismo)과3) “미디어 박해”(persecuzione mediatica)라는 이름을 취한다.

  산타 마르타에서 행한 최근의 어떤 강론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집단 따돌림의 “가장 약한 사람을 공격하는”(aggredire la persona più debole) 행위에서 드러나는 악의 신비에 대해 묵상했다. “심리학자들은 훌륭하고 심오한 설명을 내놓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저 어린이들까지도 […]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는 원죄의 흔적들 가운데 하나이고, 이는 사탄의 활동이라는 것만 말하겠습니다.”4)

  사탄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 행위의 순전히 영적인 특성을 알려 주는데, 이 행위는 그것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몇 가지 표현들 ― 이탈리아어로 ‘accanimento’이며 스페인어로 encarnizzamiento’ ― 에 기초하여 동물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육적인 차원과 뒤섞이고 혼동되어 광폭함과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잔인성의 추가요소”(un plus di ferocia)는 숨어 버리는데,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낙담과 정신적 혼돈상태를 낳는다. 예컨대 자신의 내밀한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결국에는 입소문이 나 버린 것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청소년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격분의 영은 자연의 법칙에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악마적이다. 곧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염성이 있고, 버림받은 느낌, 낙담과 갈 곳이 없는 느낌, 혼돈 등 사회적 차원에서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다른 현상들 안에 숨고 뒤섞이기 때문에 그에 저항하는 방식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영적 식별의 빛 아래 드러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의 몇 가지 결과와 투쟁하면서도 그 왜곡된 역동성에 전염될 수가 있는 것이다.

  명백하게 파괴적인 격분 곁에 “세련된”(educato)5) 또 다른 격분이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격분은 몰래 숨어서 활동하지만 동일하고 체계적인 잔인성으로 활동한다. 우리가 “인간적이 아닌”(inumano)과 “비인간적인”(disumano)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종종 그로써 “동물적인”(animale) 것을 의도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다른 본성을 가진 어떤 것을 의도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쩌면 의미심장한 징후이지 않을까?

  “격분의 영”(lo spirito di accanimento)의 현상학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에 저항하려는 욕구, 그것을 배척하려는 욕구, 우리 마음과 그것이 구체화하는 사회구조로부터 그것을 몰아내려는 욕구가 생겨나서 그 악의를 해석할 수 있기 위해 그것을 더 잘 알아보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우리 원수를 멀리 쫓아주소서”(Hostem repellas longius) 하고 “오소서. 성령님이여”(Veni Creator Spiritus)의 기도가 말하고 있듯이 말이다.

  어떻게 전염되지 않고 격분의 영에 저항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종이 최근의 라틴아메리카 사도적 방문 중에 페루의 예수회원들을 만났을 때 준 권고를 참고하고자 한다. 그 기회에 교종은 『시련의 편지들』 (Lettere della tribolazione)6)이라고 하는 소책자 하나를 언급하면서 “이 편지들은 제도로 인한 황폐함에 먹히지 않기 위한 식별의 기준들과 행동의 기준들을 담고 있는 놀라운 것”7)이라고 말했다.8) 이는 또 “역사적 문화적 사건들에서 박해와 시련과 의심 등의 먼지구름이 일어날 때 […] 따라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 위한 기준들이다. […] 이 순간을 특징짓는 여러 유혹들이 존재하는데, 곧 사상에 대해 토론하고, 사실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박해자들에게 지나치게 집중하고 […], 마음의 불안과 슬픔을 불평하는 것이다”.9)

  시련의 시기에 나타나는 여러 유혹들 중에서 “격분의 영”(lo spirito di accanimento)이라는 유혹을 짚어 보고자 한다. 이 영을 통해 악령은 은총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유혹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우리를 끌어들여 우리의 육신 자체를 파괴하려는 자신의 욕망의 공범자로 삼는 것이다.

격분의 현상학

  격분이 일어날 때는 모두가 “본능대로”(d’istinto) 반응한다. 여러 언어들은 다양한 측면에 강조점을 두면서 이 현상을 표현한다. 이탈리아어에서는 “개”(cane)라는 “주체”(soggetto)를 언급하는 “격분”(accanimento)이라는 표현이 쓰이며, 광폭함의 주관적 측면을 드러낸다. 스페인어에서 encarnizamiento은 분노가 폭발하는 대상(객체)를 고려하면서 “고기”(carne)를 언급한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행위 자체의 광폭함을 부각시키면서 각각 fierceness 와 ferocité라고 말한다. 독일어에서 Hartnäckigkeit는 “완고함”(testardaggine)을 의미하며,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무자비하고 꺾일 줄 모르는 결단을 표현하는 신체적 요소를 강조한다.

  예컨대, “집단 따돌림”(bullismo)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그것을 하나의 범주 안에 집어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비록 드러나는 어떤 특징들을, 이를테면, 공격에 대해 미리 숙고하기, 체계성, 힘의 비대칭과 같은 개별적인 경우들을 집단 따돌림의 맥락 안에 포함시킨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10) 하지만 이론상 공통되는 몇 가지를 묘사하는 것은 이 현상의 핵심을, 곧 외견상으로는 동기가 없어 보이는데 어느 시점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강되고 전염성을 가지게 되는 그 사악함이라는 현상을 꿰뚫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특징들로 인해 우리는 그것이 순전히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염”(contagio)은 격분의 영을 해석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변별적 요소이다. 모두가 모든 시대에 동일한 대상에 격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된 요소가 하나 있는데, 격분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는 공격자의 격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서든 그와 유사한 역동에 따라 피해자를 방어하는 사람들에게서든 아주 강력한 “모방의 충동”(un impulso mimetico)이 깨어난다는 것이다. 격분이 일어날 때는 복수의 씨앗이 뿌려진다. 곧 전염이 시간 안에 퍼져가는 것이다.

  고려할 다른 요소 하나는 비록 인간의 잔인함이 항상 같은 것으로 보이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제 어떤 것들은 더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곧 점차로 기술이 복잡 정교해질수록 격분의 영은 그 결과에서는 날마다 더욱 잔혹해지고 방식에서는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mente corretto) 것이 된다. 우리가 몸과 몸으로 싸우는 치열한 투쟁보다 원격조정되는 미사일이 덜 잔혹하다고 판단하는 쪽으로 기우는 사실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피가 덜 보인다는”(si veda meno sangue) 사실이 잔혹성이 덜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엄밀해지고 더 체계적으로 되며 더 비인간적이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역설이 있다. “격분”(accanimento)을 불러일으키고 떠받치며 악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육신의 나약함과 구체적 저항이다. 쇠와 같이 견고한 어떤 것에는 “격분할”(accanire) 수 없으며, 물이나 공기처럼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어떤 것에도 격분할 수 없다. 이 역설이 우리에게 하나의 모순을 발견케 한다. “육신에 맞서 분노하기”(accanirsi contro la carne)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데, 일정한 한계가 지나면 육신은 더는 과도한 격노의 적절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격분을 제어하라는 호소가, 불쌍히 보라는 호소가 “자연스럽게 나온다”(viene naturale). 하지만, “귀를 막고 새로운 분노로”(a turarsi le orecchie e aggredire con furia rinnovata) 무방비인 희생자를 공격하게 유도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이것이 격분의 영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순전히 본능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악 자체를 위해 악을 행하기를 좋아하는”(fare il male per il male stesso) 명료하고 자유로운 결정의 산물인 것이다.

  식별하기 위해서는 “본능”(istinto)보다는 “격분의 영”(spirito di accanimento)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옳다고 명백하게 말해진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실, “살인의 본능”(istinto assassino)이나 “피에 굶주린 동물”(animale assetato di sangue)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동물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의 악함을, 그 자체가 목적인 악함을, 명료함과 끈기로 선택한 악함을 동물 세계에 투사하고 있는 것인데, 동물 세계에는 명료함과 끈기가 없다. 만약 명료함과 끈기가 있다면 그것은 충동과 본능의 만족이 부과하는 리듬을 따르는데, 그 만족은 매번 직접적이고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격분이 대화를 망칠 때

  이는 “미디어의 박해”(persecuzione mediatica)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분석하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격분의 영이 말의 영역에 머문다는, 그리고 폭력은 손에까지 이르지 않고 기껏해야 어조와 몇몇 동작에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격분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문명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완전히 그 반대이다! 바로 언어폭력에서, 거짓말에서, 모함에서, 명예훼손에서, 비방에서, 험담에서 격분의 영은 제 소굴로 들어가 거기서 지배하는 것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몇 가지 유혹들의 가면을 가차 없고 철저하게 벗겨낸다. 어떤 이는 이를 언급하면서 그가 봉쇄 수녀들에게 그들이 험담한다면 “테러리스트”(terroriste) 수녀들이라고11) 말한 사실에 대해―교종이 “과장”(esagera)한다는 듯이―비아냥댄다.

  말은 그 역동으로 인해 “실현되는”(realizzarsi)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격분하여 토론하는”(discutere accanitamente) 것이 얼마나 모순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화에서 격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대화의 본질은 말해지는 단어들이나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설명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한 대화상대들의 상호동의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판단을 내릴 때는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고자 제시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관점으로 그 판단을 보완하도록 말이다. 대화라는 외관 뒤에서 오로지 동의를 얻어내는 것을 겨냥하고 자신의 관점을 부과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멸시한다면 대화는 없다. 격분은 본능의 산물이 아니고 논리의 산물, 곧 “거짓의 아비”(요한 8,44)의 논리의 산물이며, 다른 논리로, 곧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증언하시고 성령께서 모든 상황에서 가려내시는 바와 같이 진리의 논리로 그것에 맞선다. 육화의 논리는 격분의 논리에 대립한다.

『시련의 편지들』 안에 들어 있는 격분의 해법

  서두에서 인용한 『시련의 편지들』 안에서 베르골료는 이 악한 영에 오염되지 않고 그 영에 저항하기 위한 몇 가지 해법을 찾아낸다. 이 편지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시련에 대한 가르침이다. [편지들은] 시련과 이를 견디어내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다.”12)

  2014년 9월 27일 예수 성당(chiesa del Gesù)에서 저녁기도를 바치면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었다. “리치 신부님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한 가지가 저에게 아주 깊이 와 닿았는데, 그것은 이 시련들이 자신에게 재갈을 씌우도록 하지 않고 시련의 때에 회원들을 예수회의 영성에 더욱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그분의 능력이었습니다.”13)

  편지들을 맥락에 따라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서 덧붙일 점은 유혹을 견디어내고 그에 저항하는 방법에 대해 베르골료가 『편지들』의 간략한 서문에서 제시하는 가르침은 다른 두 개의 글들과 보완되어 하나의 삼부작을 이룬다는 사실인데, 그 두 가지는 앞서 존재하던 글로 1984년에 처음 출판된 «La acusación de sí mismo» (자신을 탓하기)14)와 코르도바(Córdoba)의 거주지로 이사한 후 처음 몇 달 동안 «Silencio y palabra» (침묵과 말)15)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편지들』 (Cartas)은 영적 기준에 대한 추상적인 글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회 전체로 하여금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교회에 대한 순종으로 그 해산을 (그리고 많은 예수회원들의 죽음을 일으킨) 받아들이도록 이끌어간 태도의 원천이자 열매라는 것을 말해야겠다.

  “커다란 박해” (grande persecuzione)에서의 이러한 모범적인 태도는 다른 어떤 박해라도 대면하기 위한 하나의 영적 틀을 제공한다. 이러한 태도는 박해를 당할 때 시련의 불길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 (non meravigliarsi)는 베드로1서의 정신을 따른다(1베드 4,13 참조).16) 이 태도는  우리는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히브 12,4)는 것을 상기시키는 히브리서의 태도이다.

  예수회의 그 두 총장의 “영적 부성(父性)” (paternità spirituale)의 태도에서 베르골료는 박해를 과장하는 피해의식에 빠지는 위험에 대해 가장 효력 있는 해법을 본다. 곡식알을 돌보는 데 헌신하며 미리 가라지를 뽑아 버리지 않는 부성이 “낙담과 영적 뿌리 뽑힘에서 몸을 지키는” (proteggere il corpo dalla disperazione e dallo sradicamento spirituale)17) 해결책인 것이다. 그렇지만 외부의 공격들을 방어하는 데 끼어들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녀들이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도록 해 주는 “식별의 태도를 보이도록” (assumere un atteggiamento di discernimento)18) 돕는 아버지와도 같다.

  가장 약한 육신에게 분풀이를 하는 “격분의 영”(spirito di accanimento)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 안에 생겨난다. 곧 이 분노가 가장 약한 자녀들을 향해, 또 자주 가장 착한 사람들을 향해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포기와 낙담과 뿌리 뽑힌 느낌을 체험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작은 이들에게 그 결과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성적 태도는 가장 작은 이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한없이 너그럽게 대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당신 수난의 때가 왔을 때 주로 가장 염려하신 바였다. 곧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신 제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악에 저항하기 위한 낮춤

  격분의 영에 대한 해결책은 “악을 악으로 이기려고” (vincere il male con il male)하지 않는다. 악을 악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악의 역동에 전염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대신 힘 빠지는 일 없이 시련을 견디어내는 방법들을 찾으면서 “악에 저항하는” (resistare il male) 우리의 능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악에 대한 이 저항은 성령에 관해서는 악령이 격분으로 부추기면서 실행하고 도발하는 그 다른 형태의 저항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자.

  어떤 경우에는 박해에 대한 저항이 아기 예수님과 그 어머니를 구하고자 성 요셉이 했던 것처럼 “이집트로 달아나는” (fuggire in Egitto)일일 것이다. 우리를 박해하는, “과도한 불신을 보이는 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이집트’를 가까이 ― 우리 마음속에도 ― 두어야 한다”.19) 그러니까, 첫 번째 저항은 물러나는 것, 공격하거나 직접적인 반대의 본능에 따르면서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헤로데가 우리를 추적할 때 항상 자신을 망명시킬 수 있는 이 마음속 자리에 의지하는 것은 베르골료가 자신이 교종으로 선출될 것을 알아차렸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평화의 원천이다. 자신이 이 평화를 절대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를 청하면서 교종 자신이 이 이야기를 한 것은 한번만이 아니었다.20)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저항이 부드러움과 단호함으로 진리를 공공연하게 증언하면서 악한 영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베르골료-프란치스코는 특별한 은총을 드러내는데, 이는 쉽게 말하자면 “악한 영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far venir fuori il cattivo spirito) 것으로, 그렇게 해서 그 악한 영이 드러나는 것이다.21) 유혹이 어떤 절반의 진실에 기초할 때는 빛을 비추어 지성을 통해 밝히기가 몹시 어렵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가?” (Come essere di aiuto in tali circostanze?)하고 베르골료는 ‘침묵과 말’에서 자신에게 묻는다. “사악한 영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할 필요가 있으며” (Bisogna fare in modo che si manifesti lo spirito malvagio), 이렇게 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fare posto)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이 스스로 나타나도록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방법이 존재하는데, 이 방법은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 곧 낮춤, 케노시스이다(필리 2,5-11). 침묵하고 기도하고 낮추는 것.”22)

  베르골료는 이렇게 말한다. “‘빛’(luce)보다는 오히려 ‘시간’(tempo)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를 설명하자면 악령의 빛은 강하지만 오래가지 못하는(사진기의 플래시처럼) 반면, 하느님의 빛은 부드럽고 겸손하며 압도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내놓으며 오래 간다. 그토록 강렬한 그 빛의 때가 지나가도록 성령의 개입을 기도하고 청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23)

격분의 영에 맞서는 투쟁의 정치적 차원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Fare posto) 위해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하고 주관적인, 순전히 “신심적인”(religioso)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낮춤을 받아들이면서 “시간을 주시”(puntare sul tempo)하고 “스스로 약함을 드러내 보이는”(mostrarsi deboli) 대화적 태도에서 “하나의 다른 차원”(un’altra dimensione)이 열린다.24)

  “하느님을 거스르는 반역인, 우리의 오장육부에 박혀 있는 원초적 잔인함에 저항하는”(credeltà primordiale, insita nelle nostre viscere, che è ribellione contro Dio) 대화방식에서 전쟁의, “하느님의 전쟁”(guerra di Dio)의 정치적 차원이 드러난다. 베르골료는 그러한 차원을 묘사하기 위해 한 수도자의 증언을 이용한다. “언젠가 한 수도자가 특별히 힘든 어떤 구체적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은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 인간들이 무기를 집어 들면 우리는 파멸로 운명지어진다.’”25)

  격분의 영에 맞서는 투쟁의 이 “정치적 차원”(dimensione politica)에 대한 인식은 프란치스코가 교회 내의 갈등이든 교회 밖의 갈등이든 모든 갈등을 대면하는 명료함으로 이끈다. 그에게 평화의 갑옷을 입히고 인내로 그를 강하게 하며 “밖으로 나가서”(uscire) 계속 전진하도록 그를 이끄는 것은 하느님의 전쟁이라는 인식이다.

“온유는 우리를 더욱 약한 모습으로 드러낼 것이다.”

  오스틴 아이버레이(Austen Ivereigh)26)는 이렇게 썼다. “마침내는 십자가가 악마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다. 악마는 약함을 친절로 맞바꾸기 때문이다.”27) 베르골료는 이렇게 쓴다. “‘엉킨 실타래’(i grovigli)와 ‘매듭들’(i nodi)이 풀릴 수 없고 상황도 분명하게 밝혀질 수 없는 어둠과 커다란 시련의 순간에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 곧 침묵의 온유는 우리를 더욱더 약한 모습으로 드러낼 터인데, 그때에는 악령은 직접 용감하게 나서면서 환한 빛 속에 드러날 것이며, 빛의 천사로 가장하지 않고 명명백백한 방식으로 자신의 진짜 의도를 드러낼 것이다.”28)

  이 “더욱더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기”(mostrarsi ancora più deboli)는 악한 영의 계략을 이기는 태도이다. 이는 또 복도에서 나누는 나쁜 말,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조, 심지어는 스스로 “가톨릭”이라 규정하는 타이틀까지 달고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에서 쉽게 확산하는 공격들에 맞서는 가장 좋은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침묵으로 저항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베르골료 신부가 ‘침묵과 말’에 인용한 고백자 막시모(Massimo il Confessore)의 묵상이다. 그 묵상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수난 중에 약해져 가실 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 보이시는 동안 제자들은 달아나고 사람들은 그분을 홀로 남겨둘 때, 악령은 숨을 가다듬는 것으로 보이며 뻔뻔스럽게 힘이 나고 승리자로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바로 그 나약한 그리스도의 육신이 악령이 분노하면서 무는 낚싯바늘이 된다. 바로 그렇게 해서 악령은 그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독이 묻은 미끼를 삼키는 것이다.29)

  프란치스코가 의로운 사람들을 “방어하면서”(difendendo), 그리고 죄인들을 “단죄하면서”(condannando), 규정들을 “부과하면서”(imponendo), 일종의 철조망처럼 교종의 무류권으로 “여기까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안 돼”(fin qui si può, da qui in poi non si può)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면서 전투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그를 분명치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가 그들을 움직이는 악한 영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과 종교인들이 트윗을 날려가며 논쟁하고 서로 모욕하는 세상에서 프란치스코는 대화에서의 격분에 자기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굳건히 머무르는데(에페 6,13), 바로 예수 자신의 태도로 그렇게 하며”(resta saldo, ma con lo stesso atteggiamento di Gesù)3), 자기 주변에 좀 다른 “정치적 공간”(spazio politico)을, 곧 하느님 나라를 여는데, 그 나라에서는 전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우리 중 아무도 그 주인공이 아니다.

  “악에 대한 이 수동적 저항”(resistanza passiva al male)은, 베르골료가 민족들이 가진 은총으로 항상 강조했던,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그 민족들이 끈기 있고 지혜롭게 자신들의 문화를 건설했던 바로 그 수동적 저항은31), 무엇보다도 “격분의 정치”(politica di accanimento)에 고유한, 그리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든 정치의 토대가 되는 세 가지 태도를 바로잡는다. 베르골료는 이 태도들을 주님의 수난에 나타나는 대로 묘사한다. 첫째는 “더 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si accanisce contro chi considera più debole)32) 사람들의 태도이다. 힘 있는 사람들은 백성이 예수를 따를 때는 감히 예수를 대적하지 못했으나, 당신 제자 중 하나에게 배반당하여 약해진 것을 보고는 용기를 냈다. 두 번째 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모든 잔혹함의 뿌리에는 자신의 탓과 한계를 타인에게 전가할 필요성이 자리한다. […] 속죄양의 메커니즘이 반복되는 것이다.”33) 세 번째 태도는 빌라도처럼 격한 분노 앞에서 손을 씻고 돌아서서 “내버려 두는”(lascia fare) 사람의 태도이다.34)

자신을 탓하기

  반대로, 예수를 모방하여 “약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mostrarsi deboli)은 아주 구체적인 태도에 있다. 베르골료는 “예수께서는 [악령에게] ‘드러나 보이라고’(mostrarsi) 명하시고 ‘그를 밖으로 나오게 하신다’(lascia venire)”35) 라고 말한다. 물론, 주님께서 그 결백으로, 그리고 모든 이를 구하시기 위하여 원수들까지도 용서하시면서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드림으로써 얻으신 바는 모방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약함을 결백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 ― 죄인인 우리에게도 가능한 방법 ― 이 있다. 이는 곧 “자신을 탓하기”(accasa di se stessi)로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막연하게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어떤 것에서 자신을 탓하는 것은 “파라클리토(변호자)의 옹호”(difesi dal Paraclito)를 받을 수 있도록 “실제로 약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mostrarsi in effetti deboli)이다. 변호사가 고소인들 앞에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자기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베르골료는 자신의 에세이 “자기 자신을 탓함에 대하여”(Sobre la acusación de sí mismo)에서 가자의 도로테오(Doroteo di Gaza)를 해설하면서 이 논지를 잘 전개한 바 있다.36) 사실 그런 사람은 이 “자기 탓하기”(accasare se stessi) 수련을 통해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암시해 준다. “비록 작긴 하지만 이 수준의 제도적 체제에 파급력을 가진 내적 태도”37)이기 때문이다.

  “수도공동체 안에서 ― 분원 공동체건 관구 공동체건 ― 자기 생각과 자신의 선호의 주도권을 부과하기 위해 다투는 파벌들을 만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이러한 일은 이웃에게 사랑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대신 각자의 생각을 내세울 때 발생한다. 가족의 전체(il tutto)를 더 지키지 않고 나에게 연관된 부분(la parte) 을 지키는 것이다. 더 이상 일치(l’unità) 에 […] 충실하지 않고 갈등에 동조하는 것이다. […] 자신을 탓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에 자리를 내준다.”38)

  『편지들』에서 베르골료는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단순히 “진실을 말하기”(dire la verità)라는 것과는 아주 다른 어떤 것임을 보여 준다. 예수회의 해체로 이끌어간 시련 속에서는 “사랑을 포기하고 진리를 옹호하는 것도, 진리를 포기하고 사랑을 옹호하는 것도, 둘 다 포기하고 균형을 잡는 것도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었다. 진실한 파괴자나 사랑이 많은 거짓말쟁이로, 혹은 당혹스러운 중풍 병자로 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식별을 해야 했다.”39)

  “격분”에는, 특히 그 격분이 진실을 이용하면서 “교양 있는”(educata) 형태로 드러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악령이 늘 거짓말로 유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유혹의 기초에는 충분히 진실이, 하지만 악한 영으로 체험된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성 베드로 파브르의 태도이다.”40) 베르골료는 이념적 진리는 “항상 그 내용으로가 아니라 그 내용을 받쳐 주는 영(의지)으로 판단되어야 하는데, 그 영은 정확히 말해서 진리의 성령이 아니다.”41)

  격분에 대한 해결책, 가장 확실한 해독제로서 베르골료는 예수회 총장들이 했던바 “예수회원들의 고유한 죄들에 의지할 것”(il ricorso ai peccati propri dei gesuiti)을 강조하는데, “그 죄들은 식별의 관점이 아니라 순전히 담화적 관점에서 볼 때 박해에서 촉발된 혼란의 외적 상황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그 기저에는 식별의 상황성이라는 고유한 변증법이 놓여 있는데, 외적 상태와 유사한 것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가 그것이다. 이 경우 자신들을 그저 박해받는 자들로만 보는 것은 ‘자신을 희생자로 (sentirsi vittima)’, 불의의 대상이나 그런 것으로 느끼는 악한 영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는 박해로 인해 혼란이 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예수회원은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당황하는 마음’(vergogna e confusione di me stesso)42)을 청한다. 이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식별을 위한 더 나은 준비를 하게 된다.”43)

  베르골료는 예수회 총장들이 박해에 잠복해 있는 이념이 예수회원들의 마음 안에 가져오는 “당황에 대한 묵상에 집중한다”(incentrano la loro riflessione sulla confusione)는 사실을 주목한다. “당혹감이 마음 안에 둥지를 튼다. 곧 여러 영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44) 또 이렇게 덧붙인다. “관념들이 서로 논쟁하면서 상황이 식별된다.” 상황은 당황하는 마음이라는 상황이며, 당황하는 마음의 원인은 격분의 “역동”(dinamismo)에, “목이 뻣뻣한(완고한) 사람”(testardo)45)에게 고유한 끈질기고, 지속적인 분노로 자신이 공격당하는 것을 볼 때 솟아나는 생각들의 교차에 뿌리를 내린다.

  성령의 은총과 그 진리의 광채에 대한 거역은 자신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육신을 향해 격렬한 분노가 폭발하는 전형적으로 악령 들린 충동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이 비난의 역동 앞에서의 내적 태도는 역설적으로 진실하고 단순하며 꾸밈없고 남의 탓에 대한 분노가 없이 자신을 탓하기이다. 하느님과 공동체의 자비 앞에서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련의 편지’

  이러한 태도의 구체적인 예 하나를 프란치스코는 최근에 일종의 새로운 “시련의 편지”(Lettera della tribolazione)를 쓰면서 제공한다. 교종이 칠레의 성직자가 행한 성추행의 피해자들을 “마음과 겸손으로”(di cuore e con umiltà) 경청했던 챨스 J. 쉬클루나(Charles J. Scicluna) 몬시뇰의 보고서를 읽고 나서 지난 4월 8일 칠레의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의 “형제 주교들”(fratelli nell’episcopato)에게 교종이 보낸 편지의 정신은 자신들이 부모이기도 한 자녀들에게 말하는 아버지의 영이다. 이것이 편지의 “심오한 의미”(il senso profondo)인데, 이는 또한 베르골료가 예수회 총장들의 편지들에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한 바로 그 부성애의 영이다.46)

  부성애의 영은 격분의 영에 맞선다. 이 부성적 여정의 핵심에 교회의 죄로 인해 피를 흘리는 그 나라 칠레의 피해자들이 있다. 영적 아버지의 도구는 식별이다. 교종은 “채택되어야 할 단기와 중장기 방책을 식별하면서 여러분의 협력과 원조를 겸손하게 독려하고” 싶다고 주교들에게 쓴다.

  프란치스코는 “추문을 최대한 기워 갚고 정의를 다시 세운다”(riparare il più possibile lo scandalo e ristabilire la giustizia)는 목표를 가지고 “기도의 상태”(in uno stato di preghiera)로 들어가라고 교회 공동체를 초대한다. 교종이 말하는 악은 “우리의 영혼을 손상하며, 약하고, 겁먹고 우리의 안락한 겨울 궁전 안에 보호된 우리를 세상 안에 내던진다”. 악은 하느님 백성 안에 “절망과 뿌리의 상실”(disperazione e perdita di radici)47)을 낳는다. 따라서 상처를 보상할 수 있고 치유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위로받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낙담이 대단히 깊을 때 취해야 할 근본적인 태도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탓하고 낮추는 것으로서,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가장 먼저 이를 실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시도하듯이 탓을 다른 속죄양에게 둘러씌우지 않고 자신이 둘러쓰면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저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충실하게 전달해 주시길 바라는데, 상황을 평가하고 알아차리는 데 있어, 특히 참되고 균형 잡힌 정보의 부족으로 중대한 오류를 범했음을 인정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제가 불쾌하게 했던 모든 사람에게 사죄하며, 다음 몇 주 동안, 인터뷰했던 분들의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개인적으로 사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48)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 신비체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하면서 악과 죄가 사회에 남긴 상처를 낫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신을 탓하고 낮추는 태도이다.49)


1) 편집자 주. accanimento의 여러 가능한 번역 중에서 공격성을 더 드러내는 격분을 선택한다. 다른 가능한 번역으로는 격노, 분격, 분노, 광분, 광포함 등이 있다.
2) 참조. 창세기 4,6; 요한 묵시록 12,17.
3) 편집자 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왕따를 “따돌리는 일 또는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그밖에 “집단 괴롭힘”과 “모서리 주기”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집단 따돌림”으로 번역한다.
4) 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 숙소 강론, 2018년 1월 8일.
5) 하지만 또한 “많이 말해지지 않는 또 다른 박해”가 있다. “문화의 옷을 입고 현대성으로 가장 하며 진보로 가장한” 박해이다. “그것은 하나의 박해입니다. 저는 좀 역설적으로 말해서 ‘세련된’ 박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세련된’ 박해의 우두머리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라고 명명하셨지요”(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 강론, 2016년 4월 12일).
6) L. Ricci – J. Roothaan, 『Las cartas de la tribulación』 (시련의 편지들), Buenos Aires, Diego de Torres, 1988. 로마노 과르디니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던 독일에서 1987년 초 돌아온 후 당시의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 신부는 라틴학자인 예수회 신부 단 오브레곤 Dan Obregón에게 『le Cartas』 (편지들)을 출판하게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예수회가 박해를 받던 – 결국, 1773년부터 1814년까지 41년 동안 예수회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 시기에 예수회의 두 명의 총장 (Lorenzo Ricci 신부와 Jan Roothaan 신부)이 예수회원들에게 쓴 편지들이다. 베르골료 신부 자신이 쓴 이 책의 서문은 치빌타 카톨리카 이탈리아판에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Civ. Catt. 2018 II 209-215).
7) 교종 프란치스코, “우리 백성이 어디에서 창조적이었나? 칠레와 페루의 예수회원들과의 대화”, Civ. Catt. 2018 I 324. 편집자 주. 이 글은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6권에 수록되었다. 교종 프란치스코, “우리 백성이 어디에서 창조적이었나? 칠레와 페루의 예수회원들과의 대화”, 황정연 신부 옮김,『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6권 17호(2018, 여름), 98-117.
8) 편집자 주. 교종 프란치스코는 2014년 9월 27일 제수 성당에서 거행된 예수회 재건 200주년 기념 저녁기도 및 사은 찬미예식의 연설에서 예수회의 해산을 겪으며 혼동과 혼란의 시기에 보여 주었던 리치 총장 신부의 식별에 관해 주목하며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회 해산에 관해서는 이냐시오 영성연구소에서 출판된 책을 참조할 것. 줄리오 체사레 코르다라, 『예수회의 해산』 , 윤성희 옮김, (서울: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4).
9) 프란치스코, 사제들, 남녀 수도자들, 축성생활자들, 그리고 신학생들과의 만남, 칠레의 산티아고, 2018년 1월 16일.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0 참조.
10) G. Cucci, «Bullismo e cyberbullismo: due fenomeni in aumento» (집단따돌림과 사이버따돌림, 증가하는 두 현상들), in Civ. Catt. 2018 I 25 참조.
11) 프란치스코, 관상생활 수녀들과 함께 바친 낮 기도에서의 강론, 리마, 2018년 1월 21일.
12)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Lorenzo Ricci 신부의 편지 7통과 Jan Roothaan 신부의 편지 한 통이다.
13) 프란치스코, 저녁기도와 사은 찬미예식, 로마 제수 성당, 2014년 9월 27일.
14) J. M. Bergoglio, «Reflexiones espirituales» (영적 성찰), Buenos Aires, Diego de Torres, 1987 참조. 여기 들어 있는 «La acusación de sí mismo» (자신을 탓하기)라는 글은 원래는 이미 1984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 영성지 Boletín de espiritualidad 제87호에 실렸었다, 이 글은 «Umiltà. La strada verso Dio» (겸손. 하느님을 향한 길)이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Bologna, EMI, 2013. 여기서는 이 책에서 인용한다.
15) 같은 이, «Ensañamiento» (가르침), in Reflexiones en esperanza (희망 안에서의 성찰), Buenos Aires, USAL, 1992. 여기서는 이탈리아어 번역 «Silenzio e parola» (침묵과 말)에서 인용한다. 이하 이 글은 약자 SeP로 표기한다. 이 글이 실린 책은 다음과 같다. Non fatevi rubare la speranza (희망을 도둑맞지 마십시오) Milano, Mondadori, 2013, 85-108.
16) Francesco, 칠레와 페루의 사목 방문에서 돌아오는 항공기에서의 기자회견 참조, 2018년 1월 22일.
17)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5.
18) 같은 곳.
19) SeP, 94. 과르디니는 “방종하고 폭력적이며 권력과 내적 불안으로 타락한” 사람의 특징으로 무절제함이나 방탕함(Ausschweifen)을 지적한다. R. Guardini, Der Herr, Würzburg, Werkbund, 1964, 22; Il Signore, Milano, Vita e Pensiero, 2005, 46. 편집자 주. 우리말로는 다음의 책을 참조할 것. 로마노 과르디니, 주님, 남현욱 외 옮김, (서울: 바오로딸, 1995).
20)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교종 프란치스코와의 대담), in Civ. Catt. 2013 III 450 참조.
21) «Cinque anni di papa Francesco. Il cammino del pontificato si apre strada facendo» (교종 프란치스코의 5년. 교종직의 길은 나아 가면서 열린다), in Civ. Catt. 2018 I 523 참조.
22) SeP, 102-103.
23) 같은 곳, 102.
24) 같은 곳, 103 참조.
25) 같은 곳, 105.
26) 편집자 주. 오스틴 아이버레이(Austen Ivereigh)는 영국의 저술가, 언론인, 그리고 평론가로서 Catholic Voices 의 공동설립자이며 BBC, Sky, Al-Jazeera, 그리고 The Guardian과 같은 국제 언론사와 함께 일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예수회 잡지인 America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그의 저서 The Great Reformer: Francis and the Making of a Radical Pope 는 호르헤 베르골료의 생애를 가장 잘 묘사한 영어권 출판물로 평가받는다. Austen Ivereigh, The Great Reformer: Francis and the Making of a Radical Pop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2014). 이 책은 이태리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으며 여기서는 이태리어 번역을 따르고 있다. A. Ivereigh, Tempo di misericordia. Vita di Jorge Mario Bergoglio, (Milano, Mondadori, 2014).
27) A. Ivereigh, Tempo di misericordia. Vita di Jorge Mario Bergoglio, Milano, Mondadori, 2014, 242.
28) SeP, 105.
29) Francesco, 교종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audete et exultate, 115항; SeP, 104 참조.
30) SeP, 105.
31) D. Fares, «“Io sono una missione”. Verso il Sinodo dei giovani»(“나는 하나의 사명이다.” 청년 시노드를 향하여), in Civ. Catt. 2018 I 431 참조.
32) SeP, 103.
33) 같은 곳, 103-104.
34) 같은 곳, 104.
35) 같은 곳, 105.
36) J. M. Bergoglio, 위에서 인용한 Umiltà 참조. 이 글은 가자의 성 도로테오(san Doroteo di Gaza)의 『영적 가르침』(Insegnamenti spirituali)에서 자신이 번역한 “훈화 7번”(Istruzione n. 7)을 싣고 해설한다.
37) 같은 곳, 12.
38) 같은 곳, 11-12와 17.
39) Id.,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4-215.
40) Id., Umiltà, cit., 85, 주 1; P. Favre, Memorie spirituali (영적 비망록), n. 51 참조. 편집자 주. 성 베드로 파브르는 그의 비망록에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정직한 열망은 진실한 영과 함께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악령은 많은 일을 진실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성령의 인도로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진정한 개혁은 교회와 함께 성령의 감도로 친절하게 그리고 천천히 시작된다고 적고 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종 취임 첫해에 행해진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에서 성 베드로 파브르의 식별, 즉,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분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온화하고 사랑이 가득한 분임을 소개하였다. 이듬해 2014년 1월 3일 베드로 파브르 성인 시성 감사 미사에서 성인의 식별력의 근저에는 바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완전한 갈망에 있었다고 강론했다. 성 베드로 파브르의 우리말 소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것. 메리 퍼셀, 베드로 파브르 성인: 예수회의 첫 사제 이냐시오의 동료, 김치헌 김학준 공역, (서울: 가톨릭 출판사, 2017).
41) J. M. Bergoglio, Umiltà(겸손), cit., 86.
42)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48번.
43)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5.
44) 같은 곳, 214.
45)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사도 7,51). 이는 스테파노가 모든 답변에도 격분하여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유대인에게 설교한 말이다.
46)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5 참조.
47) 같은 곳.
48) Francesco, 챨스 J. 쉬클루나(Charles J. Scicluna) 주교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후 칠레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 2018년 4월 8일.
49) J. M. Bergoglio, «La dottrina della tribolazione» (시련의 가르침), cit., 213; 2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