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교종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권고의 근원, 구조, 의미.
GAUDETE ET EXSULTATE
Radici, struttura e significato della Esortazione apostolica di papa Francesco

안토니오 스파다로 (예수회)
안수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옮김 (서울대교구)

  선출 5주년을 맞이하여 교종 프란치스코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Gaudete et exsultate』(GE)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세 번째 사도적 권고를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 문헌은, 부제에 명시적으로 언급했듯이, “현대 세계 안에서 성덕에로 부르심” (chiamata alla santità nel mondo contemporaneo)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교종은, 의도하는 바 그대로 “가감 없이” 본질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적 삶의 의미 자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용어 가운데,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cercare e trovare Dio in tutte le cose)로 정의될 수 있는데, 성 이냐시오가 예수회원들에게 권고했던 문구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우선하라 curet primo Deum”1) 를 따르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이든 교회적 차원이든 모든 쇄신에 있어서 바로 이것이 핵심에 해당한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기’.
  훗날 교종에 선출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의 이름으로 “프란치스코”(Francesco)를 선택했는데,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수행했던 직무, 곧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영적 쇄신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기”(ricostruire)에 온전히 결합하고자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사도적 권고에서 이렇게 명시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시며 그 보상으로 우리에게 참생명을, 우리가 창조된 이유인 행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러저러한 평범한 존재로 안주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GE 1).2)
  사도적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가 추구하는 방향은, 이 성덕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풍성하게 만들 다양한 개념 정의나 분류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거룩해지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분석하는 것 역시 아니다. 교종의 “소박한 목표”(L’umile obiettivo)는 “많은 위험과 도전과 기회를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맞갖게 실천적 방식으로 성덕의 소명을 다시 한번 울려 퍼지게 하려는” 데 있다(GE 2).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성덕의 바람을 증진하는 일에 온 교회가 새롭게 헌신할 수 있도록, 이 권고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GE 177). 이러한 교종의 열망이 식별 안에서 그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고 있음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출발점은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성덕에로의 부르심”(la chiamata alla santità)이다. 뒤이어 사도적 권고는 “성덕의 교묘한 두 가지 적들”(due sottili nemici)을 명확히 규명하는 내용으로 넘어가는데, 이 두 적들은 성덕을 엘리트주의나, 주지주의 혹은 주의주의 형태로 녹여내고자 하는 경향을 지닌다.3) 따라서 공허한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스승님의 빛 안에서”(alla luce del Maestro) 길을 따르는 것으로서, 참행복 선언을 성덕을 이루는 긍정적인 모델로 삼아서 다루고 있다. 그 다음에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징표”(alcune caratteristiche della santità nel mondo attuale)에 관한 내용이 묘사된다: 항구함과 인내와 온유, 기쁨과 유머 감각, 담대함과 열정, 공동체적 삶과 지속적인 기도. 사도적 권고는 끝으로 한 장 전체를 “영적 투쟁, 깨어있음, 식별”(combattimento, vigilanza e discernimento)로써의 영적인 삶에 관한 내용에 할애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이 문헌은 읽기에 쉽고, 복잡한 설명을 곁들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내서 성격의 짤막한 본 논고는 단순히 이 문헌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회원으로서 베르골리오와 주교로서의 베르골리오, 끝으로 가장 최근에 교종으로서 그에 대해 사목적으로 고찰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의 사목적 경향 가운데 직접적이진 않지만 보다 근원적인 몇 가지 뿌리를 이루고 있는 특성들을 보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가 오늘날 교회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 중심 주제 역시 규명해보고자 한다. 프란치스코에게 성덕이란 무엇인가? 그는 어디에서 이 성덕이 살아 있다고 보는가? 어떠한 형태와 정황 안에서? 어떻게 이를 정의할 수 있겠는가?

성덕의 중산층

  교종으로 선출된 처음부터 프란치스코는 성덕을 염두에 두었다. 2013년 8월『치빌타 카톨리카』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곧, 교종으로 선출된지 5개월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대해서 길게 언급했다. 여기서 그 당시 담화 가운데 근본적인 내용을 담은 한 부분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저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성덕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지닌 일상적인 성덕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부연해서 설명했다: “저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인내하는 성덕을 발견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한 여인, 가족을 부양하려 노동하는 한 남성, 아픈 이들,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주님을 섬겼기에 미소를 머금은 노사제들, 열심히 사도직을 수행하고 숨어서 성덕을 살아내는 수녀님들. 이런 것이 저에게는 공통의 성덕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성덕을 종종 인내심과 연결짓습니다: 단순히 굳건함(hypomonē) 곧, 어떤 사건이나 삶의 정황에서 수고를 짊어진다는 의미의 참을성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항구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께서도 말씀하셨던, 전투하는 지상 교회(Iglesia militante)4) 의 성덕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 제 아빠와 제 엄마, 저를 참으로 아끼셨던 저의 할머니 로사가 지녔던 성덕이었습니다. 제 성무일도 속에 제 할머니 로사의 유언이 있습니다. 저는 종종 그것을 읽습니다: 제게 그것은 하나의 기도처럼 여겨집니다. 그녀는 매우 고통 받았던 한 명의 성녀였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용기를 가지고 윤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5)
  이 대답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어조와 의미, 영성적인 분위기와 실천적 적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 담긴 대답들 가운데, 교종은 하나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성덕의 중산층’(classe media della santità)이 있습니다. 말레그 (Malègue)가 이에 대해 언급했지요.” 죠세프 말레그는 교종이 아꼈던 프랑스 작가로, 1876년에 태어나 1940년에 타계했다. 이 작가는 역시나『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quelli che vivono vicino a noi e sono un riflesso della presenza di Dio)하는 “우리 옆집 이웃 안에서 발견되는 성덕”(santità della porta accanto)대해 다룰 때 인용된다(GE 7). 말레그는 그의 저서『Agostino Méridier』에서 이렇게 썼다: “오직 성인들의 영혼만이 종교 현상을 명확히 파헤치는데 적합한 토양에 해당한다는 낡은 생각은 그에게 불충분하게 여겨졌다. 중간 정도의 영혼들도, 성덕의 중산층 역시도 무언가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여겼다.”6)
  곧, 성덕은 일상의 삶에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이들 가운데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며 초인적인 모델들 안에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다. 2016년 5월 24일 성녀 마르타 숙소 강론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성덕의 여정은 쉽습니다. 되돌아가지 말고 언제나 앞으로, 굳세게 나아가십시오.”7) 이 대목에서 명확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소리를, 무엇보다도 “성덕에로의 보편적 부르심”(vocazione universale della santità)8) 을 이야기 했던『인류의 빛 Lumen gentium』5장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성덕에로의 보편적 부르심을 “아름답게 잘 정돈되어 ‘염색’한 듯한 성덕”(una santità di tintoria, tutta bella, tatta ben fatta)9) 이나, “성덕인 척 가장 하는 것”(finta della santità)10) 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11)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삶을 찾을 필요는 없다(GE 22 참조). 오히려 “잘못과 실패 가운데에서도 계속 주님을 향하여 나아갔고 주님 마음에 든”(GE 3) 사람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치스코는 전임 교종이 직무에서 스스로 물러난 성덕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이렇게 확언했다: “베네딕도 교종께서는 거룩함과, 위대함, 겸손의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성덕은 겸손과 위대함을 동시에 수반하기에 평범한 노동자들이나, 우리의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적용될 수 있다. 모두 동일한 성덕이다. 어쩌면 베르골리오는 이를 말레그의 글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말레그는 이렇게 써 놓았다: “고해성사에서 죄를 사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에, 성덕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아르스의 본당 신부 비안네 성인과 나의 영혼은 무한하신 분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놓여져 있다.”12) 평범한 사람의 영혼과 제단의 영예에 도달한 이의 영혼 사이에는 어떠한 불균형도, 어떠한 천상적 격차도 없다.

대중의 성덕

  프란치스코는 성덕이 결코 고립에서 비롯되는 열매가 아님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성덕은 하느님 백성의 생생한 몸 안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1982년 출간된 어느 글에서 당시 베르골리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몸 안에서 성덕의 사명을 띠고 창조되었습니다: 하나의 거룩한 몸이란 어머니이신 성교회의 몸을 뜻합니다.”13) 크게 축약해 표현해 보면, 베르골리오는 성덕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몸에 방문하시는 것”(è la visita di Dio al suo corpo)14) 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교종은 사도적 권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도 동떨어진 개인으로서 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 공동체에 존재하는 복잡한 대인 관계의 맥락을 고려하시어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백성의 삶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고자 하셨습니다”(GE 6).
  곧,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증인들이 우리가 목적지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초대받습니다”(GE 3). 이 문장은 전에 『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EG)에서 읽은 적 있는 교종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는 “함께 사는 ‘신비’(mistica del vivere insieme), 서로 어울리고 만나고 서로 감싸고 지지하며 이 흐름에 참여하는 ‘신비’를 발견하고 전달하도록 도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 흐름은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진정한 형제애의 체험과 연대의 행렬과 거룩한 순례(un santo pellegrinaggio)가 될 수 있습니다” (EG 87; 이탤릭체는 필자의 강조 부분임) 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러한 체험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이들을 이해하는 생생한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교종은 1987년에 본인이 쓴 두 번째 책의 제목 “사도적 삶에 대한 성찰”(Riflexiones sobre la vida apostolica)을 바탕으로 책의 서언에서 이미 표현한 적 있는 하나의 직관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희망 안에서 살다 간 선조들, 곧 “우리와 똑같이 죄인이었던 대대로 이어지던 남녀들”(generazioni e generazioni di uomini e di donne, peccatori come noi)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 있었던 수많은 대립을 겪었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웠으며, 희망의 횃불을 건네주어야 함을 배웠다. 그렇게 우리 시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희망의 횃불을 풍성히 건네주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 당시 남녀 대부분은 역사를 쓰지는 못했다: 그들은 단지 수고했고 삶을 거쳐갔으며, –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 희망 안에서 구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 신념”(dottrina)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증거”(testimonianza)를 남겨 주었는데, 그들은 “매일의 일상에서 수많은 것들과 관련한 단순함을 통해 이를 이루었다.”15)
  베르골리오는 자신이 좋아하던 프랑스 작가를 또 다시 인용하며 이렇게 이어간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믿음에 있어서 하나의 백성을 이루고, 일상적인 성덕을 보여준다. 말레그가 좋아했던 표현대로, ‘성덕의 중산층’(la classe media della santità)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매일이 어땠는지, 매 해 어떻게 지냈는지 그 세세한 삶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우뚝 선 긍지로 다가온다: 그들이 지녔던 성덕의 향기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16) 30년이 지난 오늘날, 이와 똑같은 표현을 사도적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베르골리오가 성덕의 전망으로 삼는 그 근원적인 뿌리를 증거한다.

사명으로 주어진 개인의 성덕

  따라서, 성덕이란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인 모델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성덕의 차원으로 돌아보면, 이는 “자그마한 성덕”(santità piccolina)17) 과 같이 단순하고 우리 가까이 있으며 대중적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리지외의 데레사를 여러 번 언급하며 성덕을 향한 길에 대해 상기시켰다. 그는 사목방문을 위한 여행 때 데레사 성녀의 책을 챙겨갔고, 그 부모를 시성했다. 2016년 10월 1일 그루지아의 트빌리시(Tbilisi)에서 거행된 미사 강론에서, 교종은 예수 아기의 데레사의 자서전을 인용했다. 이 자서전에서 성녀는 “하느님을 향한 당신의 ‘작은 길’(piccola via), 곧 ‘아버지의 품에서 걱정 없이 잠든 작은 아이의 맡김’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커다란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맡기고 이를 깨닫는 것을 원하십니다’”하고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성덕은 각 개인과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다. 성덕은 지상에서 ‘자신만의’(propria) 부르심과 사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GE 19).18) 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소화 데레사의 가르침에 해당하는데, 교종은 2015년 1월 16일 마닐라의 무염시태 주교좌 성당에서 했던 강론에서 이에 대해 말한 적 있다.19) 성덕 자체는 하나의 사명이다. 추상적인 이상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프란치스코는『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에서 이를 불꽃 같은 언어로 써 내려갔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기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고, 복을 빌어 주고, 활기를 불어넣고,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이 사명으로 날인된 이들, 심지어 낙인찍힌 이들로 우리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영혼의 간호사, 영혼의 스승, 영혼의 정치인,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있겠다고 마음속 깊이 결심한 이들을 보게 됩니다.” (EG 273). 예시에 대한 극단적인 구체성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베르골리오는 “일반적으로”(in generale)라는 표현을 사용해 말하거나 글을 쓴 적이 결코 없다. 구체적인 인물과 예시를 가리키고 심지어 그것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까지 있다고 여긴다.
  1989년 당시 베르골리오는 자신이 좋아하던 교수였던 예수회 신부 이스마엘 낄레(Ismael Quiles)20) 의 책 한권을 소개했다.21) 심지어 그는 이를 『복음의 기쁨』에 인용하기까지 했다. 베르골리오가 소개했던 저서의 제목은 “성덕에 대한 나의 이상” 이었다. 성덕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야기 한 다음, 낄레는 저서의 후반부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 곧,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원하시는 성덕을 설명하는데 할애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만의 길,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이끄는 고유한 성덕의 길을 식별하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는 데, 프란치스코 교종이 예수회 은사 교수의 강의를 상기하면서 함축적으로 집필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참조: GE 11).
  모두에 해당하는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은『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구성하는 뼈대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건네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그 메시지, 그 말씀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GE 24) 라고 프란치스코는 독자에게 외치고 있다.

점진적이고, 포괄적이며, 예외 없는 성덕

  프란치스코가『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추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낄레가 권장하는 바는 바로 점진성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영혼들에게 똑같은 한 가지 완전함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성덕의 어떤 단계에 단숨에 다다르기를 바라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23) 어쩌면 성덕이란 삶 전체를 통틀어 드러나는 것이지, 한 개인의 행위를 따로따로 날카롭게 분석하는 가운데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덕이란 “셈법”(contabilità)에 의해 계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늘날의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반영해 내는가의 정도에 따라 한 개인의 신비가 드러나는 삶 전체 – 종종 그 삶은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 를 통해 알 수 있다(참조: GE 23). 이는 또한 “수많은 실수와 과오 속에서도” 형성되기도 한다(GE 24).
  늘 인간적인 한계나 각자 발전의 보폭을 적절히 고려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거대한 은총의 신비 또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인은 “슈퍼맨”(superuomo)이 아니다. “은총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통상적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따라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역사적이고 점진적인 실재를 거부하면, 우리가 아무리 말로는 은총을 찬미한다 하여도 실제로는 은총을 부인하고 가로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GE 50).
  심지어, 성덕은 “가톨릭 교회 밖의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anche fuori della Chiesa Cattolica e in ambiti molto differenti) 살아낼 수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쓰셨듯이, 교회 밖의 상황에서도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돕는 당신 현존의 표징들을’(segni della sua presenza, che aiutano gli stessi discepoli di Cristo) 불러일으켜 주십니다”(GE 9).24)
  사실, 가장 심각한 위험은 “어디에 하느님께서 계신지 정의하려는”(di definire dove Dio non si trova) 오만함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삶 안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식으로 신비롭게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추측성 확신으로 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GE 42). 이와 반대로,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좌초되어 우리 눈에도 악습이나 중독 때문에 실패한 삶처럼 보일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삶 안에 현존하십니다”(GE 42).
  따라서 우리는 개별 인간의 삶 안에서 주님을 찾아야 하며,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삶을 엄격히 감독할 권한을 준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GE 43). 바로 몇 줄 뒤에, 다른 사람의 삶을 단죄하는 판단으로 이끄는 감시자의 태도를 피해야 한다는 언급 – 이러한 언급은『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AL) (예를 들어 AL 112; 177; 261; 265; 300; 302; 310)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영성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그는 이것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에게서 배웠는데, 성령의 활동과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방식에 대해 어떠한 제한이나 울타리를 치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cercare e trovare Dio in tutte le cose)25) 라고 말할 수 있다. 곧,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인 체험은 한정지을 수 없다”(l’esperienza spirituale dell’incontro con Dio non è controllabile)26) 는 것이다.

성덕의 적들

  이 시점에서 교종은 성덕의 두 가지 “적들”(nemici)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려 마음먹는다.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는 “현대의 영지주의”와 “현대의 펠라지오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한다. 이들은 최근,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교적 구원에 관한 몇 가지 관점에 대해 신앙교리성성에서 발표한 서한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Placuit Deo)에서 지적한 동일한 위험들에 해당한다.27)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 사상 가운데 이상주의와 주지주의적 경향에서 유래하는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추상성의 백과사전”(un’enciclopedia di astrazioni)으로 바꾸어버린 양상이다. 영지주의는, 오직 특정 교리에 대해 깊이 깨달을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참된 신앙인이라 여겨질 수 있다고 본다(참조: GE 37). 교종은 이 관점에 대해서 매우 단호히 대응하면서 복음의 신선함에서 멀어져 버린,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데에 빠진 생각에만 봉사하는”(GE 40) 종교라고 말했다.
  성덕은 육신과 관련이 있다. 어느 날 성녀 마르타 숙소에서 있었던 강론에서 교종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우리들의 가장 큰 성덕의 행위는 형제들의 육신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 굶주린 이와 빵을 나누고 아픈 이, 늙은 이,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을 돌보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2014년 3월 7일).
  그렇기 때문에 교리에 관한 우리들의 이해를 마치 “닫혀있는 시스템처럼 여긴다든지, 질문이나 의심 혹은 물음표를 던질만한 역동성이 제거된 양 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으로, “인간의 물음, 고통, 투쟁, 꿈, 시련, 근심,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강생의 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할 때 간과할 수 없는 해석의 진리를 지닌 것들입니다. 인간의 의문에 우리도 의문을 가져 보고 인간의 물음에 우리도 자문해 보게 됩니다”(GE 44).28)
  성덕에 있어 또 다른 거대한 적은 펠라지오주의이다. 이것은 마치 성덕이 의지의 열매이지 은총의 열매가 아닌 양, 개인적인 노력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이다. 베르골리오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성덕이란 무엇보다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에 의해서 완성되는 과정이다. 성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역사를 쓰시도록 내어드리기” (성녀 마르타 숙소 강론, 2013년 12월 17일) 그리고 “성령께 대한 순종” (2013년 4월 16일)이다.29)
  프란치스코는 몇 가지 구체적인 태도를 구분하고, 이를 나열한다: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교회의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 실제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GE 57).
  이러한 것들로 인해 강박적이고, 규칙과 규범에 파묻혀버리며, “매혹적인 단순함”(GE 58) 없이 그 맛이 결여된 그리스도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교회가 복음에 첨부한 계명들이 신자들에게 너무 부담되지 않도록 온건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우리 종교가 일종의 노예살이로 변질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GE 59)30) 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보면, 펠라지오주의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노예제도처럼 만들어 버렸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개념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강조했는데, 거의 글자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거기에서 교종은 펠라지오주의를 경고하면서 “이 말씀은 교회의 개혁을 숙고하고 모든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게 하는 복음 선포의 개혁을 모색할 때에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EG 43) 라고 명백히 했다.

참행복

  그렇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명확하다: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GE 63)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제안했던 것처럼”31), 프란치스코에게도 예수님의 생애의 신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여러 선택과 태도에서 이러한 신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끔 우리를 이끈다”(GE 20). 예수님의 삶을 관상하는 것이 필요하고, 성덕에 대한 예수의 실질적 프로그램인 참행복 선언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 이것이, 사도적 권고의 중심 장을 교종이 참행복에 대해 집중하는 쪽으로 이끈, 출발점에 대한 확신이다. “적은 말, 단순한 말이어야 하는 반면, 실천은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실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하고 행하기 위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3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참행복에 관한 복음 말씀을 한 구절씩 모두 머무르며 주석한다.33) 프란치스코는 이렇듯 난해하게 혹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순수하게 복음적인 성덕에 대해 소개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덕이란 이러한 당신의 요구 없이는 이해되거나 실천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GE 97). 이렇듯 그는 기도를 실천과 분리시키거나 반대로 모든 것을 세속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추상적인 성덕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교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민자에 대한 전세계적인 정치적 매듭”(il nodo politico globale)34) – 본인이 정의했듯이 – 에 대해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일부 신자들은” 이 문제를 “매우 ‘중대한’ 생명 윤리 문제들에 비하여 이민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GE 102)로 여기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성덕의 주제를 다루는 사도적 권고 안에 이민자 문제가 첫째가는 주제로 다뤄지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성덕의 특징

  제 4 장에서 프란치스코는 동시대 안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 성덕의 특징을 제시한다. “현대 문화의 위험과 한계에 비추어 각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위대한 다섯 가지 표현들입니다”(GE 111). 교종은 이러한 문화 안에 위험과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 “소모적이고 약해지게 만드는 불안감과 난폭한 생각, 부정과 우울, 안인하고 소비적이며 이기적인 나태, 개인주의 그리고 오늘날 종교 시장을 지배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빠진 온갖 형태의 거짓 영성”(GE 110).
  첫 번째 성덕의 특징은 항구함과 인내와 온유함의 특색을 지닌다. “우리는 우리의 공격성과 자기중심성을 깨닫고 이러한 성향들이 뿌리 내리지 않도록 맞서 싸우는 것”(GE 114)이 필요하다. 일상의 모욕을 견디어 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겸손은 성인의 또 하나의 특징인데, 성인은 “오만한 자기중심에서 생겨나는 공격성에서 자유로워져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에 머물러 있는”(GE 121) 마음을 지닌다.35)
  두 번째 성덕의 특징은 기쁨과 유머 감각이다. 즉, 성덕은 “소심하거나 침울하거나 언짢거나 우울하거나 암울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불만은 성덕의 표징과 거리가 멀다”. 반대로, “거룩한 이들은 기쁨과 즐거운 유머로 가득” 하며 그들은 “철저히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이고 희망에 가득 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춘다”(GE 122).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복잡하지 않게 생각하기를 원하신다”(GE 127).
  세 번째 성덕의 특징은 담대함과 열정이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담대함을 잃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성덕은 두려움과 지나친 신중함과 안전한 피신처를 찾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낸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개인주의, 심령주의, 폐쇄주의, 중독, 완고함, 수구주의, 교조주의, 복고주의, 비관주의, 원리주의”(GE 134). 성인은 관료도 공무원도 아니며, “무디고 따분한 평범함”(GE 138)에 도취되어 살 줄 모르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성인은 예상치 못하게 움직이고,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새로움”이시며 그분께서는 “우리가 늘 새롭게 출발하여 익숙한 것을 뛰어넘어 변방으로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기를 촉구”(GE 135)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성덕의 특징은 공동체적 동반이다. 더욱이, 교회는 종종 “복음을 영웅적으로 실천하였거나 모든 구성원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 공동체 전체를 시성해 왔다”(GE 141). 심지어, 함께 순교를 준비하기까지 한 알제리의 팁히린 (Tibhirine) 트라피스트 수도원 복자들의 경우도 있다(참조 GE 141).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행복을 찾으며 고립되게 하는 경향”(GE 146)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적 삶이다.
  다섯 번째 성덕의 특징은 지속적인 기도에 있다. “거룩한 사람은 기도의 정신과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에 대한 갈망을 특징으로 합니다. 거룩한 사람은 편협하고 숨 막히는 이 세상을 특히 염려하며, 그러한 염려와 헌신 가운데에 하느님을 갈망하며, 주님을 찬미하고 관상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 한계에서 벗어납니다”(GE 147). 거룩한 사람은 주님을 관상하면서 본인의 한계를 넓힌다(참조: GE 151).
  그런데 교종은 이렇게 밝힌다: “굳이 긴 시간이나 강렬한 감정을 쏟는 그러한 기도가 아니어도 기도 없는 성덕을 믿지 않습니다”(GE 147). 심지어, 그는 “영성적 편견에 기초하기”(pregiudizi spiritualisti)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한 경향은 “다른 이의 이름이나 얼굴을 피해야 할 방해꾼으로 여기며, 기도는 어떠한 분심도 없이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관상이어야 한다고”(GE 154)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성덕은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GE 96) 아니라고 명확히 했다. 이와 반대로, 전구와 청원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즐기시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프란치스코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제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면서 이냐시오를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행동 속에서도 관상을 실천하고, 책임감 있고 관대하게 우리 고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GE 26). 즉, 이냐시오 성인의 초창기 동반자였던 예로니모 나달 신부의 유명한 라틴 문장에 따르면, 이러한 모습은 이냐시오적 이상에 해당한다: “활동 중의 관상가(simul in actione contemplativus)”36) “하느님과 세상 중에” 한 쪽만 선택하기 혹은 “하느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아님” 이러한 사고방식은 틀렸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업적을 이루시고, 세상을 완성에 이끄시고자 일하신다, 세상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게 하도록 말이다. 기도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성덕의 여러 길을 식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투쟁의 성덕과 식별의 성덕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우리에게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복음을 선포할 힘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승리하실 때마다 기뻐할 수 있기에 이러한 투쟁은 달콤합니다”(GE 158). 이 문장은 사도적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마지막 장의 의미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
  교종은 이 투쟁을 “우리를 어리둥절하고 어정쩡하게”(ci intontisce e ci rende mediocri)만드는 세상의 정신 상태에 저항하는 하나의 전쟁으로 축소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약함이나 성향에 거스르는 투쟁으로 환원시키지도 않는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명확히 말한다: 각자는 게으름, 육욕, 시샘, 질투 등등 자신의 약점과 경향을 지닌다. 이것 역시 “악의 우두머리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투쟁”(GE 159)이며, 단순히 “신화, 표상, 상징, 비유 또는 관념으로 여겨서는”(GE 161) 안된다.
  성덕의 길은 “점화된 등불”(le lampade accese)을 지니는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을 거슬러 참으로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일종의 무감각과 무기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GE 164), 이는 영적 타락으로 “편한 자기만족의 눈먼 형태이기에 죄인의 쇠락보다 더 나쁜 것”이며 “기만, 중상, 이기주의, 다른 미묘한 형태의 자기중심성과 같은 것들이 전부 용납되는 것처럼” 보인다(GE 165).
  식별의 은총은 이러한 영적 전투에서 도움을 주는데, “어떤 것이 성령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세속적 영이나 악마의 영에서 비롯된 것인지”(GE 166) 알아채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프란치스코는 영성생활에 있어 자신의 스승인 미구엘 안젤 피오리토(Miguel Ángel Fiorito) 신부의 가르침을 따른다. 피오리토 신부는 『식별과 영적 투쟁』(Discernimiento y lucha espiritual)이라는 제목으로 식별에 있어 성 이냐시오의 규칙을 해설한 ‘주석서’를 썼고, 베르골리오 본인이 1985년에 그 주석서의 서언을 쓴 바 있다.37) 서언의 내용 가운에 무엇보다도, 영적 전투는 자기지시성에서 벗어나 “우리들의 인간적 흔적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vedere nelle nostre tracce umane le tracce di Dio)라는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사도적 권고의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요동치는 심장에 해당한다. 베르골리오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이란, 전반적으로 덕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덕 있게 살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덕의 삶은 그 이상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성령의 활동과 움직임을 받아들일 줄 알고, 이를 따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존재론적 재핑(zapping) 문화에서, “식별의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모든 지나가는 유행에 좌우되는 꼭두각시가 되기 쉽다”(GE 167). 만일 식별을 따르지 않으면, 이른바 영적인 재핑(zapping) 문화에 휘둘려 살게 될 수도 있다.
  이 은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때와 그분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으려면, 주님의 감도를 놓치지 않으려면, 또한 성장하라는 주님의 초대를 흘려버리지 않으려면 식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GE 169). 이러한 일이 매일 작은 일들에서 일어나고, “흔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미소한 것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 “위대한 것은 단순한 일상 현실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GE 169) 교종은 다시 한번 이를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확언한다: “식별은 위대한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작은 것, 오늘의 일에 온정성을 쏟는 문제입니다”(GE 169). 이 부분에서 프란치스코는 성 이냐시오에게서 비롯됐다고 여겨지는 격언 하나를 떠올린다: “보다 대단한 무엇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보다 작은 무엇 안에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이 거룩함이다”(Non coerceri a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38)
  그리고 식별은 유식한 이들, 박학한 이들, 계몽주의자들을 위한 지혜가 아니다. 교종은 미얀마 사목 방문 중 예수회원들에게, 본인이 수도성소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소 지원자들이 식별할 줄 압니까? 식별을 배울게 될까요? 만일 식별할 줄 안다면, 무엇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나쁜 영에게서 오는지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지원자들이 앞으로 발전하기에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비록 많은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비록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더라도, 괜찮습니다. 영적 식별을 할 줄 안다면 말입니다.”39) 식별은 은사이다: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당신을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참조), 식별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더 뛰어난 지력이나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GE 170).
  프란치스코는 특별히 돋보이는 한 단락으로 식별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마무리 짓는데, 그 단락은 이 순간까지 했던 모든 여정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하느님 앞에서 삶의 여정을 성찰할 때, 금단의 측면은 없습니다. 삶의 모든 측면에서 우리는 계속 성장할 수 있고, 심지어 우리가 가장 어렵게 여기는 그러한 측면에서도 하느님께 더욱 훌륭한 것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우리 삶의 특정 측면에서 그분을 가로막아 버리는 두려움을 몰아내 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청하시는 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병들거나 축소되는 것을 원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충만함을 가져다 주시고자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식별은 유아기적인 자기 분석이나 개인주의적 자기 성찰의 형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으로 벗어나 하느님 신비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GE 175).

기쁨과 성덕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하면서, 그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성덕으로 나아가라는 프란치스코의 호소는 사도적 권고 초입에 인용했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단순한 기쁨에 대한 초대로 시작되었다: “너희는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마태 5, 12). 복음적 기쁨에 대한 초대는 이미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안에 이미 울려 퍼졌고, 그렇게 찬미와 기쁨에 대해 거론했던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와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도 담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말하고 있는 기쁨이란 과연 무엇일까? 베르골리오에게, 기쁨이란 성 이냐시오가 서술했던 “영적 위로”를 가리키는데, “창조주이신 주님 안에서 영혼을 침잠시키고 평온하게 하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부르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인 기쁨” (영신수련, n. 316)을 말한다. 교종은 당시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마음의 단순함과 기꺼움을 통해 받아들이는 이의 일상적 상태이다”40) 라고 쓴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장례식장의 표정” (EG 10)을 지을 수 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기쁨” (alegría, gozo)이라는 용어는 베르골리오가 사용하는 어휘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41) 그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영신수련 과정에서 행해지는 몇 개의 묵상 역시 복음의 기쁨에 할애했다.42)
  그런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이 제목은 즉각적으로 1975년에 복자 바오로 6세 교종에 의해서 반포됐던 『그리스도인의 기쁨』(Gaudete in Domino)을 떠올리게 한다. 몬티니는 이렇게 썼다: “우리도 참된 영성적인 기쁨,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인간 정신이 성삼위 하느님을 신앙으로 알아 뵙고 그분을 사랑으로 모심으로써 만족을 얻고 안주할 때에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크리스찬의 모든 덕에 특색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얻는 하찮은 인간적 기쁨들은, 보다 높은 실재의 씨앗과 같은 것들로서, 반드시 변화됩니다”(GD III).43)
  성 요한 23세 교종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 『어머니이신 교회는 기뻐할지어다』(Gaudet Mater Ecclesia)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다가 베르골리오의 글 안에서 “숨쉬고 있는”(respira) 아파레시다의 문헌 (Aparecida, 2007)을 덧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44) 이 문헌의 경우 기쁨에 대해 60번 가까이 주의를 환기시킨다. 제5 차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전체 주교회의 폐막 문헌에 따르면, 제자로서의 기쁨은 영적인 삶과 성덕을 향한 긴장감의 특징을 지닌다: “이기주의적으로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되는 어떤 확신,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북돋는 확신을 말합니다” (n. 29). 이런 말도 있다: “한계를 지닌 우리 실존의 기쁨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마음에 진실한 감사를 불러 일으킵니다” (n. 356).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와 프란치스코 교종의 다른 교도권 문헌과의 관계를 통해, 심지어 아르헨티나에서 사목했던 베르골리오 시절의 글을 통해서, 이 사도적 권고가 오랜 시간 교종이 마음에 품고 깊이 묵상해온 무르익은 성찰의 열매임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세상 안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과 깊이 연관된 ‘성덕’에 대해 교종이 어떠한 전망을 지니고 있는지 유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다른 글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오래 전 베르골리오가 추기경 시절 발언했던 다음의 확신을 들려준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의 약함을 복음적 기쁨을 향해서, 곧 우리 힘의 원천을 향해서 인도해야 합니다.”45)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각을 성모 마리아께로 향하면서『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마무리 짓는다. 이미 1980년대에 베르골리오는, “죄 없이 청아하고 순수한 마리아의 얼굴에”(nel volto di Maria, la senza peccato, la linda e pura) 비춰진 교회의 성덕을 바라보았다. 물론, “하와의 자손들을 당신 품으로 모아들이시는, 죄 많은 인간들의 어머니이심”(nel suo seno raduna i figli di Eva, madre degli uomini peccatori)46)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성모님께서는 “성인들 중에 성인, 모든 이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덕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진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며 당신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성모님과 나누는 대화는 우리를 위로하고 자유롭게 하며 거룩하게 해 줍니다” (GE 176).


1) “모든 다른 것들에 앞서, 항상 눈 앞에 하느님을 모시듯 행하라” (편집자 주: 교종 바오로 3세가 1540년 9월 7일 사도좌 서간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에서 승인한 예수회 기본법, n. 1).
2) 편집자 주. 프란치스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에서 직접 인용. 이하 GE로 표기.
3) 편집자 주. 프란치스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 권고』의 35항에서는 이 두가지 적들로 영지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를 지적한다.
4) 편집자 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그의 영신수련 352번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정제천 신부는 그의 번역서 영신수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투 교회란 현세의 교회를 말한다. 연옥 교회를 통해서 영혼이 정화되고 천상 교회는 영광을 누리는 데 비하여 현세 교회는 선과 악의 실제적인 싸움터라는 뜻이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서울: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6).『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7항의 우리말 번역은 투쟁 교회라고 표기 한다.
5)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in Civ.Catt. 2013 III 460. 편집자 주. 우리말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교황 프란치스코,『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안토니오 스파다로와의 대담집』, 국춘심 옮김, (서울: 솔출판사, 2014).『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의 7항에서 다시 언급된다.
6) J. Malègue, Agostino Méridier, Milano-Roma, Corriere della Sera-La Civiltà Cattolica, 831s.
7) Francesco, L’umiltà e lo stupore. Omelie da Santa Marta. Settembre 2015-Giugno 2017, Milano, Rizzoli, 2018, 230.
8)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다른 주요 문헌에서처럼, “시노드성. 함께 걷는 정신”(sinodalit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몇몇 주교회의의 의견을 수용한다. 즉, 이 문헌 안에 뉴질랜드 주교들 (GE 18), 서아프리카 주교들 (GE 33), 캐나다 주교들 (GE 99), 인도 주교들 (GE 156) 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9) 성녀 마르타 숙소 강론, 2013년 10월 14일.
10) 성녀 마르타 숙소 강론, 2015년 3월 5일.
11) Id., La verità è un incontro. Omelie da Santa Marta, Milano Rizzoli, 2014, 335; Id., La felicità si impara ogni giorno. Omelie da Santa Marta. Marzo 2014-Giugno 2015, ivi, 2015, 371.
12) J. Malègue, Agostino Méridier, cit., 989.
13) J. 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Milano, Rizzoli, 2014, 210.
14) Ibid., 211.
15) Ibid., Il desiderio allarga il cuore. Esercizi spirituali con il Papa, Bologna, EMI, 2014, 22s.
16) Ibid.
17) Francesco, L’umiltà e lo stupore, cit., 244 (2016년 6월 9일 강론).
18) 참조: D. Fares, «“Io sono una missione”. Verso il Sinodo dei giovani», in Civ. Catt. 2018 I 417-431. 편집자 주. 이 글은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4권에 수록되었다. 죠반니 쿠치,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향하여: 젊은이, 신앙 그리고 성소 식별”, 이정주 신부 옮김,『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4권 9호(2017, 겨울), 6-16.
19) “예수 아기의 데레사가 이야기 했듯이, 우리 각자는 다양한 성소에 초대 받았고,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심장 안에서 ‘사랑’이 되라고(essere l’amore nel cuore della chiesa) 부르심 받았습니다.”
20) 참조: J. M. Bergoglio, Non fatevi rubare la speranza, Milano, Mondadori, 2013, 212s.
21) 교종은 특별히 I. Quiles, Filosofia de la educación personalista, Buenos Aires, Depalma, 1981, 46-53을 인용하고 있다.
22) Ibid., Il mio ideale di santità, Milano, Paoline, 1956.
23) Ibid., 196.
24) Giovanni Paolo II, s., Lettera apostolica Novo millennio ineunte, n. 56. 편집자 주.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를 알아내고자 적극적이고 세심한 식별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교회가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새 천년기』,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56항.
25) 참조. Ignazio di Loyola, s., Esercizi Spirituali, nn. 230-237; Ibid., Autobiografia, 99; Costituzioni della Compagnia di Gesù, n. 288. 편집자 주. 여기서 인용된 영신수련과 자서전 그리고 회헌 외에도 다음의 사료를 주목하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남긴 7,000여통의 서간들 중에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의 영성이 가장 잘 드러난 편지는 1551년 6월 1일에 코임브라의 안토니오 브란다오 신부에게 부친 서간이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모든 사물들 안에서 찾으시오. 예를 들어, 말하는 것에서, 걸어가는 것에서, 음식을 먹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찾으시오. 하느님의 권능은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당신의 작용과 존재를 통하여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 안에 계십니다.” 전헌호,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115(1996), 108.
26) J. Bergoglio – A. Skorka, Il cielo e la terra. Il pensiero di Papa Francesco sulla famiglia, la fede e la missione della Chiesa nel XXI secolo, Milano, Mondadori, 2013, 24.
27) 참조: 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 Lettera «Placuit Deo» ai Vescovi della Chiesa cattolica su alcuni aspetti della salvezza Cristiana, 2018년 2월 22일. 편집자 주. 주교회의는 “그리스도교 구원의 일부 측면들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Placuit Deo)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이 서한에서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5년 11월 10일 피렌체에서 개최한 제5차 이탈리아 가톨릭교회 대회의 참가자들에게 말씀하신 연설을 소개한다. “신펠라지우스주의가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신이 하느님과 다른 이들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개인은 근본적으로 자율적이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구원은 개인의 자력이나 순전히 인간적 체계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체계에서는 하느님 성령이 주시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8) Videomessaggio al Congresso internazionale di Teologia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Cattolica Argentina (2015년 9월 1-3일). 편집자 주. 이 글은 교종 프란치스코가 교황청립 아르헨티나 가톨릭 대학교에서 열린 국제 신학 대회에 보낸 교종 영상 담화였다.
29) J. M. Bergoglio, La verità è un incontro, cit., 423 e 78.
30) 참조: Tommaso d’Aquino, s., Summa Theologiae, I-II, q. 107, a. 4.
31) 편집자 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그의 영신수련 261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Los Misterios de La Vida de Cristo Nuestro Señor)이라고 말하며 이하 312번까지 피정하는 이가 묵상하고 관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세 개의 요점을 설명한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서울: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6).
32) Francesco, La felicità si impara ogni giorno, cit., 126.
33) 이 주제를 심화하려면 다음을 읽을 것을 권장한다. D. Fares – M. Irigoy, Il programma della felicità. Ripensare le beatitudini con Papa Francesco, Milano, Àncora, 2016.
34) Francesco, Discorso alla Comunità de «La Civiltà Cattolica», 2017년 2월 9일
35)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태도가 “가톨릭” 미디어에서조차 존재하고 있으며, 선동하지 않는 선에서 모략과 비방을 방관하고 있음으로 인해, 분노와 복수를 조장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참조. “가톨릭 매체 안에서도, 도를 지나친 비방과 폭언이 난무하며 모든 도덕 기준과 타인의 명예에 대한 존중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GE 115).
36) 편집자 주. 예로니모 나달은 그의 저서에서 “활동 중의 관상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냐시오 신부는 만사에서, 모든 행동에서, 그리고 대화 중에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했고 영적인 풍미를 느꼈습니다. 이냐시오 신부는 활동 중의 관상가였으며 그 분이 자주 표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만사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Jeronimo Nadal, 『Epistolae P. Hieronymi Nadal』, (Roma: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962), n. 81.
37) 참조: M. A. Fiorito, Discernimiento y lucha spiritual. Comentario de las Reglas de discerner de la Primera Semana de los Ejercicios Espirituales de San Ignacio de Loyola, Bilbao, Mensajero, 2010 (orig. 1985). 참조: J. L. Narvaja, «Miguel Angel Fiorito. Una riflessione sulla religiosità popolare nell’ambiente di Jorge Mario Bergoglio», in Civ. Catt. 2018 II 18-29. 편집자 주. 이 글은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2018년 7월호 인터넷판에 수록되었다. 호세 루이스 나르바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의 배경 안에서 미겔 앙헬 피오리토의 민중 신심 고찰”, 안소근 수녀 옮김. http://laciviltacattolica.kr/1001-1/
38) 그 당시,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던 베르골리오 신부는 이 모토에 관해 중대한 고찰을 행했다: 참조 J. M. Bergoglio, «Guidare nelle cose grandi e in quelle piccole», in Id., Nel cuore di ogni padre, cit., 91-102. 무엇보다도 내용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냐시오 성인은 세상의 기능주의적인 가치라는 정황 안에서, 무엇보다도 삶의 영적인 관념 안에서 […] 무엇인가가 ‘작다’(piccolo)거나 ‘크다’(grande)고 여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초자연적 전망의 실재를 다른 차원으로 그렇게 축소시키는 것은 일상적인 유혹입니다. 오직 식별의 지혜만이 이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p. 94). 편집자 주. 성 이냐시오의 묘비에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이 표현(Non coerceri a maximo, contineri tamen a minimo divinum est)은 원래 익명의 벨기에 예수회원이 예수회가 교종 바오로 3세로부터 인가된 지 100주년을 기념했던 1640년에 성 이냐시오에게 붙였던 칭호였다. 프레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은 그의 히페리온(Hyperion)에서 이 표현을 인용하기도 했다. 휴고 라너는 이 표현이 성 이냐시오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Hugo Rahner,『Ignatius the theologian』,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8), 23. 교종 프란치스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주교 시절부터 이 표현을 즐겨 사용했으며, 교종 취임 첫해에 행해진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에서 이 표현이 자신을 항상 놀라게 해 왔던 문구라고 소개했다. 프란치스코는 덧붙여 말하기를,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크고 열린 마음으로 매일 작은 일들을 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의 234항에서 위의 문구를 적용하여 세계화와 지역화의 긴장을 설명한다. 프란치스코는 2015년 2월 14일에 새 추기경들을 서임하시는 자리에서 이 표현을 성 바오로가 코린토1서의 13장에서 말한 사랑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즉, “작은 것을 간과하지 않고 큰 것을 사랑하며 큰 것의 지평 안에서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인내이며 친절입니다.” 이와 같이 이 표현은 교종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문구이다.
39) J. M. Bergoglio, «Essere nei crocevia della storia. Conversazioni con i gesuiti del Myanmar e del Bangladesh», in Civ. Catt. 2017 IV 525. 편집자 주. 이 글은 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6권에 수록되었다. 교종 프란치스코, “역사의 갈림길에서: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예수회원들과의 대화”, 김학준 신부 옮김,『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6권 15호(2018, 여름), 6-22.
40) Id., Aprite la mente al vostro cuore, Milano, Rizzoli, 2013, 124.
41) 참조: Id., In Lui solo la speranza. Esercizi spirituali ai vescovi spagnoli (2006년 1월 15-22일), Milano-Città del Vaticano, Jaca Book-Libr. Vaticana, 2013, 74s, n. 2.
42) 참조: Id., Aprite la mente al vostro cuore, cit., 21-29.
43) 참조: 같은 곳, 24.
44) 이 교회 행사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D. Fares, «10 anni da Aparecida. Alle fonti del pontificato di Francesco», in Civ. Catt. 2017 II 338-352.
45) J. M. Bergoglio, È l’amore che apre gli occhi, Milano, Rizzoli, 2013, 261.
46) Id., Nel cuore di ogni padre, cit.,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