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와 연대성으로 죽어감을 살기

Vivere il morire con umanità e solidarietà

카를로 카살로네 신부(예수회)1)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가톨릭 대학교 생명대학원) 옮김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이 생명 말기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에 대중은 대중 매체나 인터넷 검색으로는 교종의 메시지의 실질적인 내용을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신문 일면에 자주 등장하는 제목은“생명에 대한 유언, 프란치스코 교종의 변화”2) 에서부터“안락사, 교종 입장의 변화는 전혀 없다”3) 까지 다양하게 편집되었다. 만약 독자가 제목 아래의 본문을 읽게 된다면, 교종의 말씀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논점과 논거의 내적 역동성, 그리고 역사적인 관점을 포함한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후에 이에 관한 논쟁이 더욱 넓고 균형 잡힌 관점의 기고문들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볼 가치가 있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교종의 메시지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하고, 중요한 핵심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내용이 구성되는 복잡한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 보면서 핵심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어떻게 교도권의 중요한 가르침을 혁신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청중들과 맥락: 합의적(synodal)이며 대화적인 방식

  무엇보다 교종의 메시지가 지난 11월 16일부터 17일까지 바티칸의 옛 시노드홀에서 “생명 말기 문제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계 의사 협회(World Medical Association, WMA)의 유럽 지역 회의 참가자들을 청중으로 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의는 세계 의사 협회와 교황청 생명 학술원(PontificiaAccademia per la Vita,PAV)과 독일 의사 협회(Bundesärztekammer)4)가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벌써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 회의의 구성원이 다양한 견해와 종교와 세계관을 가진 의사들이었다는 점이다.두 개의 권위 있는 전문가 협회가 바티칸 내부에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생명 말기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교황청 생명 학술원의 참여를 요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 교회가 우리 시대의 어려운 문제들을 용기 있게 직면하며, 권위 있고 조용한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더구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um gaudium, EG)을 통해서 교종은 ‘대화’를 복음화의 포기할 수 없는 요소로 교회에 제시하고, 과학을 포함하여 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영역을  설명했다(EG 242-243).

  팔리아 대주교는 개회사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명시한다: 바로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종이 생명 학술원에 맡긴 본질적인 임무입니다. 학술원이 생명의 근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의 보편적인 지평을 향해 열린 가운 데 맡겨진 임무입니다. 우리는 이념적인 투쟁이나 독재자의 일방적인 의견을 따르는 방법을 취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공통된 기반을 함께 찾아 나갑니다. 이 기반 위에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인간의 진리에 기초해서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5) 따라서 우리는 밖으로 향하는 교회와 합의적 교회정신을 실천하는 과정을 다룬다: “교회의 삶의 다양한 수준에서 참된 합의성이 증진될 필요가 있습니다.”6)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임무이며, 모든 이와 함께 실천해야 할 방식이다.교회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토론을 장려해야 합니다.” (『찬미받으소서), Laudato sì’[LS], n. 61).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그 충격

  이러한 윤곽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무엇보다 오늘날 사회와 문화의 변화가 죽어가는 방식에 어떻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의학은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 덕분에 삶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질병을 정복하면서 분명히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관료적(technocratic)인 논리가 지배적이면, 인간의 몸도 역시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기관들의 집합체처럼 여겨지고 관리될 위험이 있다. 「찬미받으소서」가 분명히 지적한 바와 같이, 기술과학의 논리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기술과학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계속 더 어려워졌다. (LS 108 참조). 이 기술과학 논리는 “인간 생활과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환원주의” (LS 107)를 향한다.

  더욱이 질병들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절되기만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질병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시간도 연장된 수명과 함께 길어진다. 한 인격의“완전한 선(善)”의 관점을 상실한 상태로 지엽적인 목표만 추구하면서, 생체 기능 연장에만 몰두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전제들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분명히 제시했던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를 재발견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부르심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 각 개인의 현세적 생명이 지니고 있는 상대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부르심입니다. 결국, 지상의 생명은 ‘궁극적’(ultimate) 실재가 아니고 ‘준궁극적’(penultimate) 실재입니다.”7)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의사들이 특별히 위중한 상태에 처한 환자들을 돌보는 자신들의 직무를 이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질문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임상적인 적절성(appropriateness)과 치료의 균형성(proportionality)

  프란치스코 교종은 집중 치료에서 새로 도입된 인공호흡기에 대한 질문을 다룬 비오 12세의 유명한  연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시작한다.8) 모든 경우에 활용 가능한 새로운 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의무인지 그리고 환자의 회복의 전망의 불투명할 경우 기기 사용의 보류와 중단이 합당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었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모든 가능한 치료 수단을 늘 사용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경우에는 보류하는 것도 정당합니다.”고 확인하며 비오 12세 선임 교종의 답변을 요약한다.

  이어서 교종은 오늘날에도 자주 불분명하게 사용되는 몇몇 용어에 촛점을 맞춘다.이 용어 문제들은 현재의 담론들 안에서 발생하는 부정확한 사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교도권의 문헌에서도 의미가 혼돈되기도 한다.9) 이 용어의 명료화는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첫 단계로, 윤리 신학의 전통 안에서 발견되지만, 오늘날 성찰의 맥락에서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표현의 사용을 피하는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통상적(ordinary) 혹은 예외적(extraordinary) 수단이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눈에 띈다. 다음 단계로, 상호 인격적 관계의 용어들을 중시한다. 이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임상 행위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의료 처치는 돌봄 관계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 처치를 복잡한 상황에서 분리할 수 없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부터 독립된 별개의 방식으로 의료 처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격 중심성

  치료 집착(overzealous therapy)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때로는 좀더 적절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표현인 임상적 “완고함” 또는 “과잉”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치료 집착은 불균형적인 치료법의 사용으로 정의된다. 곧이어, 균형성의 기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된다. 이 균형성은 구분되지만 떼어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이해된다.

  첫 번째 요소는 돌봄의 임상적인 적절함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임상적 적절함에 대한 판단은 의사의 몫이다. 의사는 사실상 이러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의 기술 수준과 직업적인 체험, 그리고 임상적 관계 안에서 얻게 된 환자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사는 고려하는 치료 수단의 적절성– “동반되는 위험과 어려움의 정도, 필요한 비용과 적용 가능성”10)– 을 기대하는 건강상 효과와 연계시켜서 판단할 수 있다.

  두 번째 요소는 환자의 참으로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로 환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여기서는 “환자의 상태와 환자의 육체적 윤리적 능력”11)을 참작해야 한다. 이러한 요인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환자와 상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그 상태를 살아서 체험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환자가 자격과 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중단)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법적 보호자들이 결정해야 하는데, 언제나 환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78항)고 전한다. 이와 같이 단지 어떤 생각이 아니라 진정한 판단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치료의 균형성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이 두 요소를 통합해야 한다. 사실상 첫 번째 요소가 판단의 전제 조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의사의 전문성으로,치료의 임상적 적절성에 대한 판단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 요소는 환자에게 달려 있다. 그의 평가가 없다면 균형성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최종적인 결정은 바로 위험한 건강 상태로 의료적 개입을 경험할 몸의 주인인 환자에게 달려 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 환자는 더 이상은 치료의 주체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환자를 동반하는 의료팀과 가족 친지와 열린 소통과 협력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사 임상적으로 적절한 치료라고 하더라도 환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면 불균형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치료를 보류하거나 중단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야기했듯이 “의무적”이기도 하다.

도덕적 양심의 판단

  불균형적인 치료에 대한 거부를 “의무적”이라고 제시한다는 사실은 매우 새로운 것이다. 실제로 이전 문헌에서 이 치료 거부는 정당한 선택 사항이다. 즉, “의무적”이라는 말의 의미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12) 선택에서 의무로 발전하는 과정을 잘 이해하려면, 이런 변화가 고려된 맥락에서 상황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1980년 안락사 선언이 균형성의 범주를 도입하면서, 결정의 최종적인 조건으로“환자 흑은 환자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 사람 혹은 의사의 양심”을 언급한다. 물론 언제나 “사례의 다양한 측면과 윤리적 책임에 비추어” 상황을 고려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제 그 균형성의 판단을 위해서 무엇이 합당한 자료인지 질문해야 한다. 관련 내용에 대한 판단 능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 환자의 양심이 이 자료 중에서 우선권을 가진다.

  사실상 우리는 “육체적 윤리적 능력”을 엄밀하게 의학적인 용어 안에서 평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치료의 부작용이나 질병 자체의 연장으로 인한 고통의 무게와 연관된 능력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적인 동기와 즉시 연결시킬 수 없는 요소들이 포함되는 것도 가능하다. 이미 비오 12세는 치료를 평가하기 위해서 추가 될 기준으로 다른 이들에게 주는 부담과 “개인, 지역, 시대와 문화의 상황”13)을 언급하면서 상황을 좀 더 확장된 관점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그러한 요소들은 또한 환자가 치료 자체를 직면하는 능력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온전한 의학적인 차원에서도 그 환자를 덜 부담스럽게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주 사용되는 예를 취하자면, 자녀의 결혼과 같은 고대하던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환자는 연명치료로 인한 고통을 다른 상황에서 보다 더 잘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확실히 임상적인 상황들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반면 여러 치료 계획은 적절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환자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힘들 수 있다. 더욱이 환자의 선호와 의료-보건적인 요소들 사이에 상호 작용은 매우 섬세하다. 그래서 자율성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보게 되겠지만, 좋은 판단을 위한 심사숙고 과정에서 바른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고 주의 집중해서 심도 있는 의사 소틍올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판단이 생명의 모든 중요한 차원 – 즉, 환자 자신의 내적 능력과 건강 그리고 가족 관계와 사회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가치 – 을 포함한 양심적인 식별 과정의 열매라면, 비로소 결정적인 구체적 명령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명령은 전통적으로 행위의 “근접 규범” 혹은“궁극적 행위 규범”이라고 정의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중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양심적 판단의 구속력에 대한 전통 가톨릭 윤리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가르침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한계를 받아들여라. 그러나 생명을 단축하지 마라

   ‘치료 집착’을 피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영원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책임감 있게 인정하면서, 유한한 생의 조건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교종은 강조한다.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14) “죽음을 초래하면서 생명을 중단하는 것을 의도하는 한” 언제나 부당한 안락사는 완전히 다른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안락사의 광범위한 정의를 종합적으로 표현한다. 바로“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그 자체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죽음을 야기시키는 작위 또는 부작위라고 이해할 수 있다.”15)

  이 긴 정의를 인용한 이유는 어떤 치료가 “불균형적”이라는 판단은 환자의 거부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발히기 위해서이다. 관련되는 요인들은 사실상 다양하다, 합당한 시간 동안 생명 연장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임상적으로 적절한 수단을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의향이 얼마나 분명한지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여러가지 중요한 이유를 고려해야 한다. 만약 타당한 이유들이 없다면, 개인적인 선택의 자율성에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거부는 소극적 안락사처럼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의 단계가 필요하다.

의료 행위 안에서 자율성의 의미

  환자의 중요성과 그의 양심의 판단에 대한 강조되는 상황에서 “자율성” 개념을 몇몇 측면에서 명료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자율성”은 사실상 생명 윤리에서 기초적인 개념이다.16) 뉘른베르크 강령(1947) 이후 자율성은 임상 실험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국가의 헌법 체계와 직업 의무 강령 안에 의료 행위의 합법화 조건으로 자율성이 포함된다. 이처럼 건강과 육신이 관련된 선택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념에 부여된 의미는 한 가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제가 되는 자유 개념의 차이에 따라 자율성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과 책임 사이에서

  용어의 첫 번째 의미에서, 자율성은 방어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종교적, 정치적, 의료적) 힘의 침범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한다. 그러한 힘의 남용 위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개인의 독립성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온전한 처분권으로서 자기 결정권이 확립된다. 이 관점은 역사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관점으로 중요한 가치를 확고히 지키려고 하지만, 상호 인격적 관계와 주체로서의 인간의 복합성을 축소된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 관점에 계약의 논리가 지배적으로 되는 위험이 있다. 한편으로는 질문의 대상을 물질적인 선으로 여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용-이익의 분석에 따라 대상을 인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인 관계는 마치 계약에서 어떤 요소를 추가하는 것과 같이 이미 앞선 삶을 통해서 형성된 한 인격의 주체에게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격은 무엇보다 관계를 통해서 체험되고 형성된다. 우리가 생명의 체험을 그 시작점에서부터 고찰한다면, 이런 인격 형성의 진실을 깨닫을 수 있다. 교종은 이전 생명학술원 정기총회 연설에서 남자와 여자의 상이성이라는 주제와 그것이 출생과 갖는 연관성에 대해 언급할 때 이미 이러한 방향의 관정을 가지고 있었다. “출산의 모습은 […] 생명에 관한 깊은 지혜를 발산합니다. 선물처럼 받은 것이기에, 생명은 선물할 때 기뻐합니다. 생명을 태어나게 함으로써 우리도 새롭게 태어납니다. 생명을 내어 줌으로써 우리는 충만해집니다.”17)

  만약 우리가 생명 안에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생명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 다른 분들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무시할 수 없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로 인간 생명(의 출산)을 특징짓는 근원적 수동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몸 안에 뿌리내리고 있음이 첫 번째이며 가장 직접적인 증언이다. 만약 자유에 대한 성찰 안에서 그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상호 책임과 연대의 관계의 맥락 안에 존재 한다는 관점을 얻게 된다. 즉, 우리의 인격적 정체성은 구조적으로 관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생명을 단지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결정의 대상으로 축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올바르게 행사하기 위해서 이 자유를 배태한 조건을 고려하고 자유를 행사할 때 이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에 앞서 타인들이 존재하였기에 자유로운 인간은 타인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18) 이는 의료적 온정주의(medical paternalism)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 말기의 고유한 맥락에서 절대적 자율성과 다른 관계적이며 책임 있는 자율성에 대한 해석을 도입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과 “친밀한 책임감”(proximate responsibility): 완화의료(palliaive care)

  자율성을 잘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자유가 결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사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상황은 자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자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잘 행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조건과 상황을 규제하는 심리적인 요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 혹은 사회의 만연된 기준이나 효율성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인하여 깊은 인격적 확신에 기초한 결정이 아니라 현대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부정적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위에서 설명한 균형성의 기준을 이론적으로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구체적인 복잡한 상황에서 이 기준을 실행하는 노력을 최대한 기울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적인 요인들과 감정적인 요인들이 모두 관련된다. 모든 이가 치료법과 다른 가능한 대안의 전문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결정 능력 역시 부분적일 수 있다. (어린 아이나 인지 능력이 퇴화된 성인을 생각해 보라.)

  더욱이 신체와 관련된 선택을 둘러싼 감정적 중압감은 매우 크다. 병으로 유발된 고통과 죄책감, 무기력이나 불쾌감으로 인해서 약해진 사람에게 그러한 중압감은 더 크게 느껴진다. 임상 실험이나 임상 행위 안에서 참으로 어려운 사전 동의(informed consent)의 체험을 통해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에 효과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명확한 기준을 가지는 것이 좋다. 그러나 동시에 점진적인 접근이 먼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접근을 위해서는 소통에 필요한 도움을 주려는 자세와 시간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은 본래 비대칭적이었던 치료 관계가 더 많은 전문가가 개입하면서 더 세분화되고,계속 증가하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요구 사항으로 인해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현실에서 독립적인 윤리 위원회의 자문도 소중하다.

  해야 할 결정들이 매우 민감하고 단지 의료 처치만이 아니라 실존의 모든 차원이 관련되어 있는 순간에 우리는 왜 환자 동반이 중요하고 왜 프란치스코 교종이 “친밀한 책임감”을 강조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사실상 지상 삶의 마지막 단계, 자유롭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인생 여정의 번복할 수 없는 종료를  표시하면서 자유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순간에 환자에게 친밀하게 다가가 동반하는 모든 방법의 사용을 고무해야 한다. 완화의료와 통증치료는 이러한 동반의 효과적인 표현이다. 이런 치료를 통해서 환자와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도움이 표명하는 바는 결코 포기가 아니라 친밀함이다. 환자가 한계를 수용하는 것을 돕는 동반 과정에 담긴 친밀함이다.

  이 때문에 완화의료는 문화적인 영역도 지닌다. 왜냐하면 가장 약한 바로 그 순간에 상호의존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핵심 조건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완화의료와 통증치료는 치료 집착을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치료는 안락사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이들이 가하는 압력을 줄일 수 있다.

“치료적 불평등”과 공동선

  마지막 부분에서 공동선의 증진과 관련된 두 요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점점 커지는 기회의 격차”이다. 이 격차는 경제적 이익과 기술-과학적 능력이 결부되어 조장된다. 가능한 치료와 그 비용의 증가로 인해 조장된 치료의 불평등은 국가들 사이 뿐만 아니라 “더 부유한” 국가들 내부에서도 드러난다. 보건 서비스의 제공이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달려 있던, 공공 재원에 달려 있던 간에, 어떻게 하면 보건 시스템의 지속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치료에 있어서 최대의 형평성을 장려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19)

  교종은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교황청 부서에서 개최한 “보건 분야에서의 세계적인 불평등을 직면하기”라는 주제에 관한 32차 국제 회의에서 했던 연설에서 이 주제를 더 광범위하게 다루었다.20) 그 자리에서 교종은 건강 보호의 권리와 정의의 권리를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세계 의사 협회(WMA)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교종은 기회의 격차와 치료의 균형성에 대한 평가 과정을 연결시키려고자 했다. 이는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더욱 더 관계적이고 체계적이다. 여기서 비오 12세가 치료 수단의 사용을 위해 “필요한 비용”을 언급하면서 표현하려고 했던 의도를 볼 수 있다. 또한 자원과 지식의 더 평등한 분배와 예방에 대해서 관심 증진을 위해 투자할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중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즉,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공유될 수 있는 의견에 다다르기 위해서 중재가 필요하고, 규범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공동선을 증진하기 위해서 중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재는 한 편으로는 정당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핵심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공존은 사회에 속한 모든 이를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상호 인정에 기초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미 이탈리아 국가 생명 윤리 위원회에서 필요한 중재 과정에서 신자들의 역할을 설명하였다.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하는데 이 역할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도움이 된다. “윤리 문제에 있어서 교회가 얼마나 민감한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분야에 있어서 어떤 특권적인 위치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시민적 양심이 자유롭고 열린 합리성과 사회와 인격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수준으로 성찰하고, 식별하고, 활동한는 것에 교회는 만족합니다. 사실상, 바로 이러한 책임 있는 시민적 성숙함은 (교회에 계시되고 맡겨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었다는 표징입니다. 이 성숙함은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복합적 문제 안에서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21)


1) Carlo Casalone S.J
2) Paolo Rodari, “Fine vita, svolta del Papa: ‘Evitare accanimento terapeutico non è eutanasia,’” La Repubblica, November 17, 2017, www.repubblica.it/vaticano/2017/11/16/news/papa_fine_vita_cure-181244418/.
3) http://www.famigliacristiana.it/articolo/eutanasia-nessuna-svolta-del-papa-che-ribadisce-il-no-all-accanimento-terapeutico.aspx
4) 교황청 생명 학술원에게는 새로운 주제는아니었다. 이미여러번이런문제와이와관련된측면을다루었다. 참조: J. Vial Correa – E. Sgreccia (eds), The Dignity of the Dying Person, Città del Vaticano, Libr. Ed. Vaticana, 2000; I. Carrasco de Paula – R. Pegoraro (eds), Assisting the Elderly and Palliative Care, Città del Vaticano, PAV, 2015.
5) V. Paglia, Saluto di apertura, in www.academyforlife.va/content/pav/it/notizie/2017/AulaVecchiadel SinodoconlaWMA.html.
6)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a plenaria della Congregazione della Dottrina della Fede, 29 gennaio 2016, in 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6/january/documents/papa-francesco_20160129_plenaria-dottrina-fede.html
7) 요한 바오로2세, 회칙『생명의 복음』, 2항(Giovanni Paolo II, s., Evangelium vitae(EV), n. 2.)
8) Pio XII, Risposta a tre domande di morale medica sulla rianimazione, 24 novembre 1957, in w2.vatican.va/content/piusxii/fr/speeches/1957/documents/hf_pxii_spe_19571124_rianimazione.html
9) 참조: P. Taboada, «Mezzi ordinari e straordinari di conservazione della vita: l’insegnamento della tradizione morale», in E. Sgreccia – J. Lafitte(eds), Accanto al malato inguaribile e al morente. Orientamenti etici ed operativi, Città del Vaticano, Libr. Ed. Vaticana, 2009, 77-88; 같은 책 안에서, M. Calipari, «Il principio di adeguatezza etica nell’uso dei mezzi di conservazione della vita: tra eccesso terapeutico e abbandono del paziente», 100-113; D. P. Sulmasy, «The Clinical Decision Making Process for the Elderly Patient at the End of Life: Upholding Tradition», in I. Carrasco de Paula – R. Pegoraro (eds), Assisting the Elderly…, cit., 83-102.
10) 교황청 신앙 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05.05), 4장(Congregazione per la Dottrina della Fede,Dichiarazione sull’eutanasia Iura et bona, 5 maggio 1980, p. IV.)
11) 같은 책, 같은 곳.
12) 예를 들면 다음을 보라.『가톨릭 교회 교리서』2278항; 『생명의 복음』, 65항.
13) Pio XII, Risposta a tre domande di morale medica sulla rianimazione, 24 novembre 1957, in w2.vatican.va/content/piusxii/fr/speeches/1957/documents/hf_pxii_spe_19571124_rianimazione.html
14)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78항.
15) 『생명의 복음』, 65항.
16) T. L. Beauchamp – J. F. Childress,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New York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17) Francesco, Discorso all’Assemblea generale della PAV, 5 ottobre 2017, in 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7/october/documents/papafrancesco_20171005_assemblea-pav.html
18) 참조: G. L. Brena(ed.), La libertà in questione, Padova, Messaggero, 2002; M. Chiodi – M. Reichlin, Morale della vita. Bioetica in prospettiva filosofica e teologica, Brescia, Queriniana, 2017, 203-214.
19) 다음의 흥미로운 관찰을 보라: D. Callahan, Taming the Beloved Beast. How Medical Technology Costs are Destroying Our Health Care Syste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는 다음을 보라: H. Ten Have, Global Bioethics: an Introduction, London – New York, Routlege, 2016.
20) Francesco, Messaggio ai partecipanti alla XXXII Conferenza internazionale sul tema «Affrontare le disparità globali in materia di salute», 16 novembre 2017, in 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pont-messages/2017/documents/papa-francesco_20171118_conferenza- disparita-salute.html
21) Francesco, Discorso al Comitato Nazionale per la Bioetica, 28 gennaio 2016, in 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6/january/documents/papa-francesco_20160128_comitato-nazionale-bioetic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