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의 배경 안에서 미겔 앙헬 피오리토의 민중 신심 고찰

MIGUEL ÁNGEL FIORITO
Una riflessione sulla religiosità popolare nell’ambiente di Jorge Mario Bergoglio

호세 루이스 나르바하(예수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옮김

  2013년 3월 13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래, 그 인물과 그의 역사에 관하여 제기된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에는 그의 사상 전반 특히 그의 신학 사상의 근원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a Bergoglio)는 1968년부터 1978년 사이에 예수회원으로서의 양성을 마치고 사제 직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련장이었고 나중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사제로 서품되었을 때(1969년) 그는 거의 33세였는데, 이 때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미겔 앙헬 피오리토(Miguel Ángel Fiorito, 1916-2005년) 신부였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살바도르 대학교의 학장이었으며(1970-1973), 형이상학 교수였고, 산 미겔의 막시모 신학교 철학부의 학과장도 역임했고(1964-1969년), 철학부 교수들의 논문을 발간하던 학술잡지 「기질 Stromata」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피오리토 신부는 그 지적 및 영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그 제자들에게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준점이 되었다.1)

  베르골료는 관구장으로서 피오리토 신부에게 관구의 중요한 두 가지 직책을 맡겼다. 그것은 제삼수련기(예수회원 양성의 마지막 단계)의 수련장 소임과 「영성 회보(Boletín de Espiritualidad)」의 발행인 소임이었다. 예수회 영성 특히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과 영적 식별에 대한 피오리토 신부의 연구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속한다.2) 이러한 양성의 환경 안에서는 학부에서의 정규 교육과 더불어 독서, 개인적 성찰, 사목적 교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해 함께 나누는 비공식적인 지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미래의 교황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이 신학적 대화를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

  이 시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공의회의 수용은 상충되는 견해들과 이 대륙에 대한 강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신학교 학생들과 신부들은 공의회 전개상황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뒤이어 그 수용과 실행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는 쇄신의 순간이었는데, 두 가지 대조적인 방식으로 쇄신이 받아들여졌다. 어떤 이들은 “쇄신”을 변화로 이해했고, 다른 이들은 회복*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이 두 관점 사이에서 긴장 상태에 있었고, 지향하는 바가 늘 분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대 막시모 신학교의 지적 분위기에서는 또 다른 특별한 “존재 방식”이 있었다. 연구, 고찰, 그리고 교류로 원숙해진 생각들은 앞서 언급한 신학부의 두 출판물, 곧 철학과 신학의 「기질Stromata」과 영적 및 사목적 양성을 지향하는 「영성 회보」에 발표된 논문들로 개념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시모 신학교에서의 신학적 대화

  이 출판물들은 그 그룹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목적 체험의 결과물이었다. 더 다양한 독서들도 – 아마도 – 체계적이라기보다 실존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결합되었다. 그룹 안에서 함께 나누고 받아들인 많은 개인적 독서들에 대해서는 각주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개념의 기원과 그 그룹이 다시 고찰한 것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지적 교류의 한 예가 1974년 2월 18일 그 당시 관구장이었던 베르골료가 제14차 관구총회 개막 연설에서 제시한 “네 가지 원리”였다.3)

  이 원리들은 베르골료의 성찰들에서, 그리고 그 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4) – 베르골료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총독 돈 마누엘 데 로사스(Don Manuel de Rosas)가 1834년 12월 20일에 피게로아 대농장(Hacienda de Figueroa)에서 파쿤도 키로가(Facundo Quiroga)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래한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베르골료가 말하는 원리들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이 원사료와 베르골료의 원리들 중간에 그룹의 고찰과 대화가 있는데, 이에 관한 문헌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1974년에야 이것들이 베르골료의 연설로 공식 기록되는데, 그 이전 상황의 세부 사항들은 구두로만 전해진다. 다른 저자들과 다른 저작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당수를 읽다보면, 베르골료의 숙고들에서 거듭 등장하는 주제들을 마주하게 된다.

민중 신심에 대한 고찰

  1968년부터 「영성 회보」에는 “해방”이라는 주제에 관한 고찰을 보여주는 여러 글들이 등장한다. 이 주제는 메데인에서부터5)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색채로 논의가 진전되고 있었다.6) 피오리토 신부의 작업은 아르헨티나 관구가 그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들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73년에 피오리토 신부가 영성 회보 편집장을 맡게 되었을 때 그 고찰은 새로운 전망을 얻게 되었고, “민중신심의 신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10년 후 그것은 “문화신학”이 되었다.7) 민중신심에 대한 고찰은 막시모 신학교의 신학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던 젊은 예수회원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74년부터 1975년까지 피오리토 신부의 지도로 “제삼수련”을 받았는데, 그 구성원은 안드레스 스윈넨, 아구스틴 로페즈, 호르헤 세이볼드, 에르네스토 로페즈 로사스, 훌리오 메레디즈, 후안 카를로스 콘스타블레, 알레한드로 안두노비치 신부, 그리고 살바도르 무라 수사였다.

  지방의 시골 본당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변두리 본당 사목체험부터 시작한8) 이 젊은 예수회원들은 계속 피오리토 신부의 지도 아래 한 달 동안 [자신의 체험들을] 성찰했다. 그 성찰의 결과는 여러 기고글로 실렸다. 그 제삼수련 그룹이 첫 번째 글을 썼고9) 그 다음 아구스틴 로페스가 두 번째 성찰글을 썼다.10) “영성 회보” 두 호 모두에 피오리토 신부의 소개 글이 실렸다.

해석의 원리들

  이 성찰들은 분명하게도 관구장 호르헤 베르골료의 제14차 관구총회 개회연설에서 영감을 받았다.11) [기고글은] 이 연설에서 몇 가지 진술들을 인용해 해석의 기본틀로 삼는다. 즉 인용된 베르골료의 진술들을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정리할 수 있다.12)

  “’신자 백성’이란 무엇인가?” 베르골료는 자신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자 백성이란 “우리의 사제직 사명과 수도자로서의 투신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백성’이란 단어는 이미 우리 사이에서 그 의미가 모호했음이 분명한데, 이는 이 ‘민중’이란 실재를 들을 때나 말할 때 수반되는 이념적 전제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단순하게 신자 백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13)

  “우리는 신자 백성(민중)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베르골료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논거 제시를 위해 덴칭거 교의편람과 논문들을 살펴봤을 때, 나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한 가지 정식 앞에서 경탄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식은, 신자 백성은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 나름의 신앙정식을 그려왔는데, 아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저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교회가 무엇을 믿는지 알고 싶다면 교도권으로 가라는 것(교도권은 오류 없이 가르칠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회가 어떻게 믿는지 알고 싶다면 신자 백성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신자 백성의 해석학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베르골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백성은 영혼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한 백성의 영혼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 백성의 해석학에 대해서, 백성이 실재를 보는 방식에 대해서, 백성의 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 백성은 무엇을 믿는가?” 베르골료는 대답한다. “신자 백성은 부활과 생명을 믿습니다.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민중신심”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며, 그 후에 다른 표현들로 발전되고 “문화신학”이라는 더 완전한 명칭을 받게 된다.14)

  이러한 설명들의 중요성은, 종교행위에서든 문화행위에서든 모든 경우에 민중이 주체임을 지적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신학은 민중의 종교적 및 문화적 표현들을 연구한다. 민중은 그 표현들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자신이 세계와 역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적” 표현, 곧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존재 의미 아래 깔려있는 역사로부터 생겨나는 표현이다.

  명백한 것은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가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추상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인데, 모든 문화는 자기 고유 “신화”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사명의 특성과도 일치하는 바, 그 사명은 개별 교회들 안에서, 보편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그들의 전통과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소명과 더불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틀에서 시작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상을 토대로 오늘날 “민중신학”으로 정의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신학은 민중을 연구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사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민중이 신앙을 살고 문화를 창조하는 방식이다. 민중은 종교적 문화적 표현들의 대상이 아니라 그 주체임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민중을 대상으로 여기는 모든 경우에서, 그러한 해석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에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베르골료는 “민중 (대중, 백성)”이라는 단어의 모호성을 지적한다.

신자 백성의 믿는방식

  베르골료가 지적한 이러한 사상 노선들은 피오리토 신부가 지도했던 젊은 예수회원들의 숙고에 구체적인 틀을 규정했다. 민중신심의 표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아르헨티나에서 순례하고 있는 신실한 하느님 백성의 믿는 “방식”을 발견하게 해 줄 것이다. 이 점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교회들이 내세운 다른 제안들과 관련해 취해진 경로를 평가할 때에 중요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메데인 회의의 해석과 수용은 개별 교회들 안에서 구체화되었고, 각자 자기 이해에 따라 이를 실행했거나 또는 하려고 시도했다.

  민중신심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이 젊은 예수회원들 모임은 몇 가지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15) 이 점은 그 고찰에 대한 피오리토 신부의 소개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룹이 섭리에 따라 선택한 고찰의 주제는 ‘민중신심’이다 – 어떤 이들은 ‘신심, 종교심’이라는 단어가 지닌 일반적이고 때로는 경멸적인 어조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민중신앙’이라 부른다. – 그리고, 우리의 ‘민중적’ 체험들을 기억하고 알리는 과정에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백성’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고찰에 이르기 전에, 피오리토 신부가 소개 글에서 언급한 세 가지 개념들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단일성. 첫째로, “민중신심”이라고 말할 때에는 마치 교양 있는 교회를 따로 떼어놓고 교회의 한 부분만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교양 있는’이라는 형용사가 ‘박학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 실제로 그러한 것처럼 – ‘문화 창조자’라는 뜻으로 이해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시각에 기초하여, 이 성찰 모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화는 한 백성이 살고 죽는 방식이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교회적인 관점으로 여기에 접근한다.”

  다음으로 이 젊은 예수회원들은 “민중신심”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 해석들을 지적한다. 이들이 부정적인 이유는 민중을 “무지하거나” “소외된 이들”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적 입장과 반대로, 이 그룹은 분명하게 천명한다. “우리는 민중들이 (자유주의적 개념과 반대로) ‘무지’하지도 않고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반대로) 소외되지도 않았다고 믿는다.”

  이와 유사한 또 한 가지의 문제는 가난한 이들의 교화와 부자들의 교회를 대립시켜 단순히 구분시키는 것에서 생겨나는데, 실상 부의 악용을 개탄하는 하나 된 교회가 아니다. 피오리토 신부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교회와 대립하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의 악용에 대항하는 것이다. 교양 있는 이들의 교회에 반대되는 민중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들도 자기 고유의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백성에 대한 현실적 시각. 이 고찰을 시작하는 데에 필요한 또 다른 설명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어떠한 낭만적 시각도 배제하려는 것이다. 일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려 하는 유혹들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낭만적으로 부인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분열의 현실을 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피오리토 신부는 이렇게 단언하며 소개 글을 마무리한다. “교회는 자신을 ‘분열시키는 유혹’도 느끼고, ‘분열의 영’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천사주의’이겠지만, 거기에 머무는 것은 지극히 분별력이 없음을 뜻한다.”16)

  보편적 개념. 이러한 고찰이 고유한 문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 문화의 역사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명의 결과인 지역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폐쇄성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편교회의) 개별적인 구체성으로부터 (개별적인 것 안에서 구체화되는) 보편성에 도달한다.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긴장은 동시에 집단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출신이 다르고 경험이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응집력을 갖게 한다.

민중신심 표현들

  이러한 해석학적 틀 안에서, 그리고 이 설명들과 더불어, 이 그룹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백성의 영혼’과 그 신심을 “믿음에서 무류성을 지닌 신자 백성, 이론이나 이념과 대비되는 교리, 민족 문화”라는 범주들을 기초로 겸손하게 묘사하는 것이다.”17)

  그 기고글의 두 번째 부분은 백성의 영혼에 대한 묘사이다. 이 제삼수련기 예수회원 그룹은 “세례, 죽은 이들, 성찬”이라는 세 주제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의 표현들, 몸짓들, 공동표출행위들을 수집한다.

  아구스틴 로페스가 쓴 두 번째 글에서는 젊은 예수회원들의 성찰 경험 자체로부터 나온 자료들이 제시된다. 이번에는 성품성사(구체적으로, 사제에 관하여)와 고백성사를 중심으로 한다.18)

피오리토 신부의 기초

  고찰의 두 번째 부분의 같은 항에서, “영성 회보” 해당 호 소개 글에서 피오리토 신부는 민중신심의 기초와 그에 대한 개인적 고찰을 제시한다.19) 여기에서도 젊은 사제들과 함께 한 (이번에는 개인적인) 수개월 성찰의 결과에 대해 말한다. 피오리토 신부의 고찰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각 주목받을 대답에서는 곧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살겠다는 세례 때의 영원한 소명과, 지금 여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삶을 사는 구체적 역사의 소명 사이의 긴장이 드러난다.

  피오리토 신부는 두 가지 노선에 따라 이 긴장을 전개한다. 먼저 영성에서 출발하고, 그 다음 사목에서 출발한다. 이 삶은 “우리의 현대적인 그리스도교 언어 안에서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자리한다. 우리가 이 단어로써 성령의 구체적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의도한 것이라면 말이다.”

  문제는 그러한 긴장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피오리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충돌 지점이면서 동시에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과제는 […] 신앙의 차원과 역사적–문화적 상황의 차원이라는 두 차원을 통합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점은 우리가 그 문제를 ‘주체’로부터,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 현저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기 실존의 두 차원을 다루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긴장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문제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집단적 주체로서 “집단적 의식 안에서 자기 신앙의 차원과 역사 안에 자리하는 차원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조직되지 않은 군중으로 여기거나, 또는 순전히 내밀한(이 단어의 의미를 격하시키면서 ‘신비롭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차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고, 유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는 조직되지 않은 군중으로 여길 수 없는 집단성과 비교해 개인의 가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급은 “집단과 개인의 회개, 기도, 자발성 등, 분명 필요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부인하거나 집단 및 개인의 은사를 무시하는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뜻하는 바는 단지, 집단적 또는 개인적인 은사가 제도적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면 결정적인 역사적 요소가 되기에 필요한 힘을 온전히 갖출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피오리토는 긴장들의 복합성에 주의를 환기시키며, 하느님의 백성이 위계적인 교회라는 현실을 덧붙인다. “물론 이것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자신의 의식 안에서 신앙체험을 ‘역사적-문화적’ 과제와 통합시켜야 하는 임무에, 그것을 행하되 더불어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하는 다른 이들과의 일치를 본질적으로 깨뜨리지 말아야 하는 요구사항이 더해진다.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점은, (실제 상황에서 그 가능성이 종종 한계에 이르는 것으로) 우리 백성들의 임무를 늘 그러한 임무를 지향하지 않는 책임자들이 있는 제도의 현실과 […] 통합하는 것이다.”

  예수회에서, 위계적 교회를 향한 이러한 봉사는 아주 고유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언급한 후 피오리토 신부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교계에 대한 봉사 없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대한 봉사란 없다. 또한,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한 봉사 없이 교계에 대한 봉사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말하는 것은 쉬운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예수회 기본법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위계적 교회의 이 은사를 받아들이기 전에 ‘충분히 오랫동안’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 활동은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태도를 불러 일으키고, 거기에서부터 역사적 상황을 새롭고 특수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 결론은 교회 전체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특정한 문화와 역사적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동시에 교회의 사명에 관한 문제를, 결정적인 지점인 그 목적과 목표들과 관련해 제기하는 것과 같다.”

  사목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고찰할 때에는, 영적인 내용이 선교활동의 노선을 결정짓는다. 사목활동의 기초는 “시대의 징표를 읽는” 임무에 있다. 피오리토 신부는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3-4항)을 참고하여, 시대의 징표를 읽는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1) 그 징표들은 교회가 제도로서 참여하는 사건(요구 또는 갈망)들이다. 2) 우리는 이 “사건, 요구, 갈망”들의 중요성 또는 구원적 의미를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고찰할 수 있다. 3) 피오리토 신부는 “사건들”을 “신학의 장소”로서, 곧 “하느님의 신비”를 중심으로 하는 고유하고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신학적 고찰의 출발점으로서 일컫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 세 가지 지적으로부터 피오리토 신부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단순히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데로 이끄는” 신학인가? 시대의 징표들을 하느님 계획의 표지들로서 해석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내면적인 영적 자세(영혼을 준비하고 식별할 줄 아는 것)이고, “함께 뒤따르는” 교회적 확인이다. 이러한 이중의 ‘영성과 사목’의 길은 시대의 한 표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민중신심이다.

  이렇게 하여 피오리토 신부는 민중신심에 대한 고찰에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다. 이것은 대중적인 전망도 아니고 종교적 표현들에 대한 민속학적 관심도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의 계획의 “표지”이다. 피오리토 신부가 제시한 이 기초는 호르헤 베르골료가 관구장 시절 “신자 백성이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만큼 교도권의 확언을 동반한다.

신앙의 : “우리 조상들의 신앙

  피오리토 신부의 그룹에 속한 젊은 예수회원들의 공통의 체험들 속에는 “공통의 기초”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상, 우리 부모, 우리 조부모의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이었다. 피오리토는 이러한 공통의 역사적 기초에 대한 논거로, 자신이 고찰한 이론적 근거에 기초해 아르헨티나 민족의 역사와 신앙의 종합을 제시한다. “우리의 땅은 거의 4세기에 걸친 역사 안에서 두 가지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하나는 정복자들의 영향으로, 여기에서 혼혈이 생겨났다. 다른 하나는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이 그 후손들이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고, 국가 시책에서 신앙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신앙은 그 본질상,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인간의 마음 안에 실존한다는 것 자체로, 통합의 원리로 작용한다. 민족 문화에는 신앙의 역사가 침투되어 있다. 하느님의 사람들인 남녀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형성된 신앙을 살아가는 방식과20) 계속해서 자기 실존을 살아가는 방식은 서로가 밀접히 관련돼 있다.”

  피오리토 신부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살고 그래서 삶 전체가 신앙인의 축제적 성격을 지니는 아르헨티나 신자 대중의 이러한 문화 형태를 묘사한다.21)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지는 단순한 행위들로 표현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민중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문화와 관련이 있지만 이러한 이유로 문화가 멈추지는 않는다. […] 그것은 관습과 전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과 죽음을 느끼고, 자연(사물)에 가하는 노동, 타인들과의 활동(사회 안에서), 자기 운명의 신비를 추구하는 (하느님, 그리고 이미 왔으면서 아직은 아닌 피안)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을 위한 투쟁을 인식한다. 이 문화는 하나의 ‘지혜’이며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인, 사물의 ‘맛’이란 뜻에서) 실재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알고, […]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도덕적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를 직관한다.”

결론

  우리는 미겔 앙헬 피오리토 신부의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그의 저작은 아르헨티나와 라틴 아메리카 전체 교회 안에서 정치적, 교회적, 제도적 차원에서 커다란 긴장이 있던 시기에 균형잡힌 성찰과 사목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는 또한 막시모 신학교의 학문 연구를 동반했던 신학적 대화도 소개했다. 이러한 지적 활력은 베르골료가 살았고 양성을 받았던 배경의 특징이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의 기원을 보여주는 배경과 사상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련장” 피오리토 신부 주위에 형성되었던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민중신심과 관련된 부분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상의 풍요로움과 동시에 그 균형을 알아보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1) 참조. D. Fares, «Aiuti per crescere nella capacità di discernere» 식별력 향상을 위한 조언들, in Civ. Catt. 2017 I 384.
2) 피오리토 신부의 여러 출판물 중 두 책을 소개한다: Discernimiento y lucha espiritual 식별과 영적 투쟁, Buenos Aires, Diego de Torres, 1985; Buscar y hallar la voluntad de Dios. Comentario práctico de los Ejercicios Espirituales de san Ignacio de Loyola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관한 실천적 해설, ivi, 1989.
3) 참조. Cfr J. M. Bergoglio, Meditaciones para religiosos 수도자를 위한 묵상, Buenos Aires, Diego de Torres, 1982, 42-50.
4) 참조.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217-237항.
5) 1968년 8월 26일부터 9월 7일까지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열린 역사적인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를 일컫는다.
6) 참조. O. Calvo, «Una estrategia para la liberación» 해방을 위한 전략, in Boletín de Espiritualidad, n. 11, 1971, 4-27; I. Iparraguirre, «Liberación y Ejercicios» 해방과 영신수련, 같은 책, n. 18, 1972, 9-15: D. Gil, «Discernimiento y liberación» 식별과 해방, ivi, 17-47; J. I. Vicentini, «Liberación bíblica» 성서적 해방, 같은 책, n. 19, 1972, 25-41..
7)참조. J. M. Bergoglio, «Discurso inaugural» al Congreso Internacional de Teología «Evangelización de la cultura e inculturación del Evangelio», 국제신학총회 “문화의 복음화와 복음의 토착화” 개막연설, in Stromata 기질 41 (1985) 161-165, 특히 162쪽.
8) “우리가 서로 다른 이들과 가졌던 서로 다른 경험들에서 공통된 부분은 교회의 체험이었다. 어떤 이들은 [지방의 시골] 후후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에 대해, 어떤 이들은 라 리오하에 대해 […] 말했고, [아르헨티나] 안에서 태어나 수많은 이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대해서도 말했다”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Presentación del editor» 민중신심 고찰, 편집자 소개 in Boletín de Espiritualidad, n. 31, 1974, 1-3; 인용된 본문은, p. 2).
9) 참조. 여러 저자,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민중신심 고찰, 같은 책, 3-17. .
10) 참조. A. López,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Orden sagrado y Penitencia», 같은 책, n. 35, 1975, 13-25.
11) 이 연설은 각주 3에 인용되었다. 참조. 여러 저자,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민중신심 고찰, cit., 3.
12) 참조. 같은 곳.
13) D. Fares, Papa Francesco è come un bambù. Alle radici della cultura dell’incontro 대나무와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 그 ‘만남의 문화’의 뿌리에 관하여, Milano – Roma, Àncora – La Civiltà Cattolica, 2014. 이 주제는 «“Cultura” e “popolo fedele di Dio”» 문화와 하느님 백성, pp. 25-35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14) 앞서 인용한 개막 연설에서 베르골료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란 최고수준의 자의식을 갖게 되는 창조의 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민족들의 최고 요소이자 그들의 예술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며, 그들의 기술에서 가장 뛰어난 분야라고 부릅니다. 문화는 민족들의 정치 조직들이 공동선에 이르게 하고, 그들의 철학이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부여할 수 있게 해 주며, 그들의 종교들이 경배를 통하여 초월성과 연결되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관조로부터 자신의 삶을 판단하여 정하는 이러한 인간의 지혜는 추상적으로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손으로 수고한 것에 대한 관조이고 민족들의 마음과 기억에서 비롯되는 관조이며, 역사를 통하여 시간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관조입니다”(J. M. Bergoglio, Meditaciones para religiosos, cit., 162).
15) 참조. 여러 저자,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민중신심 고찰, cit., 5.
16)같은 곳, 2.
17)같은 곳, 5.
18) 참조. A. López, «Reflexiones sobre la religiosidad popular. Orden sagrado y Penitencia», cit., 1.
19)참조. M. A. Fiorito, «Signos de los tiempos en la pastoral y en la espiritualidad» 사목과 영성에서의 시대의 징표들, in Boletín de Espiritualidad, n. 35, 1975, 1-12.
20) 영성 회보Boletín에 실린 M. A. Fi보rito – J. L. Lazzarini의 글들은 이 점을 더 심화시킨다: «Un aporte de la historia a la pastoral popular» 민중사목에 대한 역사학의 기여, in Boletín de Espiritualidad, n. 34, 1975, 1-22; «Originalidad de nuestra organización popular» 우리 민중신심단체의 독창성. (Cardiel 신부의 편지-보고서 선집)», 같은 책, n. 37, 1975, 1-39; «El credo de nuestra fe» 우리 믿음의 신조, 같은 책, n. 39, 1975, 6-28; «El P. Pedro Lozano y los primeros pasos de la Compañía de Jesús en el territorio argentino» 페드로 로자노 신부와 아르헨티나 영토에서 예수회의 첫 발자취, 같은 책, n. 48, 1976, 1-42.
21) “신앙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서 사는 것이며, 축제의 의미를 지닌다. 백성은 본성상 죽은 이들을 애도할 때에도 ‘축제적’이지만, 특히 교회에서 혼인하거나 자녀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때에도 축제적이다” (M. A. Fiorito, «Signos de los tiempos en la pastoral y en la espiritualidad», cit.,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