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쁨」에 관한 쇤보른 추기경과의 대화

CONVERSAZIONE CON IL CARDINALE SCHÖNBORN 

SULL’«AMORIS LAETITIA»*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 (예수회)**

이자연 사비나 옮김

  빈 대교구장인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과의 대화는 차분하면서 주의 깊은 성찰의 자리였다. 명료한 사고와 깊은 영성의 표상인 쇤보른 추기경은 ‘설교자들의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사제이다. 그리고 그분과 나눈 대화는 ‘관상하고 전하라(Contemplata aliis tradere)’ 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대화는 추상적이거나 지적인 또는 학문적 논제와 거리가 멀었다. 단지 기도를 통해 검증된 논리를 전달하고 공유했을 뿐이다.

  2016년 4월 8일 쇤보른 추기경은 교황청 프레스룸에서 개최된 공식 기자회견에서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의 출간을 발표했다. 곧이어 4월 16일 레스보스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쇤보른 추기경이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고 바르게 전달했다고 친히 확인했다. 이같은 교종의 평은 다른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러므로 쇤보른 추기경이 이 문서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을 제공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사실 나는 2015년 10월에 개최되었던 세계주교대의원회 정기총회 직전에 라 치빌타 카톨리카의 취재 차 쇤보른 추기경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1)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인터뷰도 라 치빌타 카톨리카 사무실에서 가졌던 다수의 만남과 문자 교환을 통해 완성되었다.2)

   

  추기경님, 「사랑의 기쁨」을 읽으셨을 때 어떤 감정이 드셨습니까? 추기경님께서 느끼신 바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교종의 글의 단순성과 복음서와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교종으로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은 “안녕하세요(Buona sera)!”였습니다. 이 문헌에서 느껴지는 신선함에서 바로 그 인사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문헌에서 사람들을 환대할 수 있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이 문헌을 읽으며 저는 착한 목자의 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가정이 사랑의 터전이며, 형제애와 우정이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이 맺으신 계약에 변함없이 충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내는 징표라는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각각의 가정이 품고 있는 모든 바람과 불완전함이 있는 가정의 구체적 삶의 현장으로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이 문헌에 제시된 교종의 관점, 그분의 시선에 대해 어떻게 평하십니까? 교종은 가정의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십니까? 

  「사랑의 기쁨」에 사용된 언어는 포용과 참여의 언어입니다.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이해받고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독자와 진정한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읽기가 쉽습니다. 혼인생활과 가정생활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심오한 기쁨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이지만 노파심으로 기울지는 않습니다. 심각한 사례나 복잡한 상황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교종은 엄격주의나 이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갖고 우리 시대의 현실과 위험, 어려움 그리고 어마어마한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종은 자녀를 신뢰하고 또 자녀들도 신뢰하도록 촉구하는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들의 양심 모두를 신뢰하는 목자(pastor)인 것이지요. 

   

  일각에서는 「사랑의 기쁨」이 교종의 완전한 교도권적 가치가 부족한 개인적 견해에 가까우며, 그러므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문서라고 합니다. 이 교황 권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교도권의 행사로 볼 수 있습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명백한 보이지만, 신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주장이 나오지 않도록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문헌은 교황 권고로서 명백한 교도권의 행사입니다. 교종이 두 차례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자문을 받은 후, 신앙의 목자요 안내자이자 스승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헌이 훌륭한 교황 문헌이자 거룩한 교의(sacra doctrina)에 대한 참된 가르침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문헌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글의 섬세함에 감탄하게 되고, 또 풍부한 가르침이 담긴 자세한 설명이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하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교황 권고의 교의적 가치를 강력하고 단호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문헌에 쓰인 어조와 그 내용을 글의 의도와 연결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저는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더 이상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교회 전체를 위하여 …를 분명하게 제시하고자 합니다.”와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교회의 가르침을 현재라는 시대적 맥락에 맞게 제시해 주는 교도권의 행사입니다. 마치 우리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토대로 니체아 공의회를 이해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비추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해하듯이, 「사랑의 기쁨」에 비추어 가정에 관하여 이전에 교도권이 표명한 바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헌을 통해) 교의적 원칙이 지닌 일관성과 관점 또는 시대적 영향을 받은 표현의 비일관성을 구분하게 됩니다. 기록되거나 그 밖의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 바로 이것이 살아있는 교도권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입니다.

   

  추기경님께 의외로 다가온 부분이 있었습니까? 묵상하셨던 대목은요? 여러 번 다시 읽으셔야 했던 부분이 있었습니까?

  제게 놀라웠고 또 그래서 좋았던 것은 방법론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현실의 영역에서 교종은 교회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쇄신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과 맥을 같이 하고, 또한 교의적 원칙과 현대인들에 대한 고려가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과 분명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문헌에는 현실을 수용하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현실을 수용하려는 갈망이란 일종의 신뢰입니까?

  쉽지 않겠지만, 가정을 바라볼 때 우리가 지향하는 관점은 우리의 이상ideale이나 대대로 전해진 교의(doctrinal heritage)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가정에 대한 환상이 아닌 가정의 현실을 용기 내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며 찾으시고 또 당신께로 이끄신다는 점, 그리고 하느님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할 때 엄청난 신뢰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문서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사랑이 신뢰는 낳는다는 것이죠. 교종 프란치스코 자주 쓰시는 표현인데, 잿더미 속에 남아있는 불씨처럼 하느님이 밝히신 빛 또한 어둠을 뚫고 빛나기 마련입니다./어둠으로 가려지지 않습니다/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선은 현실과 현실의 나약함에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선으로 인해 교의가 약화될 수도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종의 위대한 도전을 하십니다. 즉 이해심과 자비, 신뢰가 충만한 이 시선이 교의를 약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교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의를 하느님 말씀의 ‘오늘’이며, 인간의 역사에서 강생하신 말씀으로 인식하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기된 질문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당신의 인식을 공유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야 말로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증거하는 것인데, 그러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선언(enunciation)에만 고정된 시선을 교종은 거부하십니다.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서 이웃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은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시선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일반화(generalization)를 소수의(an alite)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위해 일부 선언을 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황 권고를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생각해보니 문헌 전체에서 느껴지는 착한 목자의 시선이 문헌을 읽는 열쇠 중 하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시선을 통해 우리는 가장 가난하고 나약한 자를 환대하는 것에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약점이나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전형적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보여주는 이민자들과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은 성령의 징표입니다. 이 두 가지 상황 모두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자비로운 환대와 나약한 사람들을 통합하는 논리가 오늘날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를 특별한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일한 논리에 따라 교종은 노인의 의존적 상태와 극심한 빈곤으로 파괴된 가정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모든 덕에 대한 교종의 깊은 존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시선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몸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열쇠가 됩니다. 이 시선은 교회의 명확한 가르침에서 그 무엇도 덜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장 약한 사람들과 가셨던 이 길을 비추는 빛으로서 교회의 가르침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서두에서 회고하셨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추상적 논제의 순서상의 현재가 아니라 함께 걷는 동반자와 같은 현재입니다. 구체적 현실에 대한 이 신앙의 시선과 그 여정에서 (along the way)가장 약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사랑의 기쁨」이라는 보물상자를 여는 열쇠임이 분명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방어적인 자세에 동조하여(motivated) 타락한 세상에 대한 비난을 더하는데 사목적 힘을 낭비하고, 이를 통해 행복의 길을 제시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복음의 교역자(ministers)과 일부 목자들 중에는 구원의 아름다움보다는 죄의 추함을 더 많이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종은 긍정적이고 사람들을 환영하는 사목적 접근을 고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종은 우리에게 사목적 자기비판을 하도록 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판 없이 계속 갈 경우 겪게 되는 거대한 관념적 유혹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교종은 이를 펠라기우스적 유혹(Pelagian)이라고 하셨는데, 이 유혹에 빠지면 삶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비난하기 전에 성장을 구하고 인식의 깊이를 더하도록 강화하도록 선언하고 동반해야 합니다.

  「사랑의 기쁨」의 모든 동력은 사랑을 믿는 것 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촉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담긴 위대한 진리입니다. 선에 대한 끌림이 이 길을 걷는 동기가 되고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길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고 우리를 찾으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악에 집착하여 “성실하고 참된 증인” (묵시 3,14)의 현존에 등을 돌리게 되는 방어적 사목 방법은 우리와 거리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방금 말씀하신 긍정적 접근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교종은 성장과 성숙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작은 발걸음을 누차 강조하십니다.

  긍정적인 사목적 포용(engagement)은 성장의 길에 동행하는 것이며 빵이 부풀어 오르도록 하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발걸음, 그리고 가정 환경이 더 나은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는 그런 작은 발걸음을 보는 아버지가 얼마나 큰 기쁨을 느낄지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점진적 성장을 통해 인간이 양심적 선을 알고, 사랑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일컬으시며 말씀하신 ‘점진성의 법칙’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과 우리의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 전체에서 하느님의 단호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의 명령과 꾸준히 통합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인간의 나약함 가운데에 심어 주신 선함에 주의를” (AL 308)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긍정적 사목적 접근이 사람들에게 교의를 가르치는 방법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긍정적 사목적 접근은 여성과 남성의 심오한 동기와 연결하여 다정하게 교의를 알려주는 방법입니다. 이는 교의의 모든 것을 표현하되,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롭고 신선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식에서 성 요한 23세는 “진리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진리를 말하고 제시하는 방법은 새롭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셨는데, 긍정적 사목적 접근이 그 말씀의 아름다운 예시입니다.  

   

  「사랑의 기쁨」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교종께서 완벽하고 미리 정해진 가정은 없다고 강조하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으로 되는 편인데, 왜 그런 걸까요? 이것이 일종의 플라톤주의로 변형될 위험이 있는 로맨틱 이상주의가 아닌가요?

  성경에서도 가정 생활을 추상적 이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를 두고 “장인(匠人)의 공들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의 시선은 우리가 지닌 희망의 현실을 결과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는 관념(notions)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세상과 분리하다가는 실제로 “탁상공론식의 냉정한 도덕만”(AL 312) 펼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혼인을 전혀 매력적이지 않게 너무 추상적으로만 표현했습니다. 교종께서는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어떤 가정도 완벽한 현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가정은 죄인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모든 가정이 길을 가는 중입니다. 이것이 이 문서 전체의 근간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세속주의나 플라톤주의에 반대 급부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관점은 성서적 현실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즉 성서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이 문헌에 사용된 언어는 정말 놀랍습니다. 보통의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읽힙니다. 이 글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 같습니다. 성애(eroticism)의 현상학이라고 할까요? 

  성(sexuality)은 추상적 개념을 따르기 어려운 것입니다. 문헌의 중간 부분에는 사랑의 성장에 대한 내용이 여러 장에 걸쳐 나옵니다. 여기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열정과 애정(affectivity), 성애와 성(sexuality)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며 신선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성애적 차원의 사랑, 욕망,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이 모두 성애의 현상학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문헌은 이 요소들을 단지 출산을 위한 행위로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혼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의 여러 주장과 통합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성적 결합을 “은총의 삶으로 성장하는 길” (AL 74)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과거에 비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몸의 신학과 가정을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본다는 관점으로 일대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이 아닌 인간 자체에서 보는 것을 거의 만장일치로 거부하는 것이 전통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경우 교회의 가르침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보여집니다. 부부와 가정이 당신의 모습을 닮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바람에 교회가 열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모든 기쁨과 열정까지 포함하여 현실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혼인과 가정에 대해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장(chapter)은 문헌의 의미 전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어머니인 교회와 영적 아버지인 교역자(minister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집착은 교육적이지 않습니다.우리는 자녀가 처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라고 교종은 말씀하십니다. 2013년 저와 하셨던 인터뷰에서 교종께서도 교회가 도덕적 주제에 대한 집착으로 케리그마(kerygma)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케리그마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교종은 “자녀들이 자유를 키우고, 소양을 지니며, 온전한 성장을 하고 참다운 자립을 촉진”하는 과정을 사랑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칙을, 비유적으로, 어머니 교회가 신앙 안에서 교육하고 있는 모든 자녀에 대한 어머니 교회의 우려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교종께서 교육에 대한 장의 바로 뒤에 사목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다루신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사목적 실천과 사랑에 필요한 참을성 있는 현실주의를 조명합니다. 즉 이해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은 걸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8장의 열쇠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작은 교회라고 일컫는 가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 전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가정 안에서 될 대로 되라는 태도(방치)나 집착 모두 성숙과 성장의 과정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 두 과정은 자유의 과정으로 우리를 부르는 선함으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 선함의 이름을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완전함에서 더 큰 충만함으로 향하는 “점진적 성장의 과정”에서 “자녀에게 절대적이고 의심 없는 진리들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스스로 특정한 가치와 원칙과 규범의 의를 발견하도록”(AL 264)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종은 앞서 이 같은 내용을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채우는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어떤 것을 내적으로 느끼고 음미하는 능력입니다.”(AL 207) 토마스 성인(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새로운 법, 즉 마음에 새겨진 법에 대해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냐시오 영성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남긴 전통이 섞인 것 같습니다. 추기경께서도 바티칸에서 「사랑의 기쁨」의 공식 발표 자리에서 이 문헌의 고귀한 아버지가 두 분이 계시며 그분들은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이 교황 권고는 이냐시오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헌에서 이냐시오 위대한 전통(양심의 식별)와 도미니코회의 위대한 전통(덕의 윤리)에서 영감을 받은 윤리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한 집착으로 느슨함과 엄격함을 모두 야기하는 의무의 윤리에 등을 돌립니다. 대신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윤리적 전통으로 돌아가고, 이를 통해 개인주의가 기여하는 바를 모두 통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미니코회 사제로서 덕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인식하시는 선이 우리 안에서 뿌리내리고 우리를 위한 선으로 인식되도록… 인간의 내면에서, 자신의 자유의 중심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요소에서 비롯된 현명함과 올바른 판단력, 그리고 상식…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 부적절한 개념들… 유년 시절에 경험한 편견(tendencies)과 상처… 「사랑의 기쁨」은 우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기다려왔던 윤리에 관한 위대한 문헌이며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을 발전시켰습니다. 아마도 교종께서 예수회 사제였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의 동력 안에서 특이성과 보편성을, 그리고 상황(conditioning)과 규범을 이렇게 현명하고 눈부시게(정확하고 명확하게) 결합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우정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따르는 윤리의 핵심을 짚어 내신 정도에 감동했습니다. 서로 만난 두 개의 자유의 상호작용이었습니다. 우정의 동력은 온전히 외적 의무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내적 필요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사랑의 기쁨」이 선택한 길은 사랑의 필요에 의해 그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법은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외적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순전히 의무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 의지가 아닌 우정의 사랑을 살 수는 없습니다.

   

  비판의 목소리 중에는 이 문헌이 ‘상황적 윤리’와 ‘법의 점진성’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교종께선 우리의 나약함을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종은 지식과 욕망, 선을 실천하는 것에서 진전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사는 것을 목표한다는 것은 더 완벽한 것을 추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한 비판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선과 진리의 분명한 객관성과 더불어 문헌은 지식과 ‘길을 걷고 있는(along the way)’ 인간 쪽에서 지식과 선을 행하려는 결의에서의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이 조금씩 자라남에 따라 가정과 혼인의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라는(sequela Christi) 초대를 통해 이 법은 사랑의 요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상황적 윤리(morality of the situation)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상황적 윤리에서는 항상 규범이 실행된 행동의 외적인 것으로 인식됩니다. 개인의 가치 체계에서 규범은 오로지 배타적 이익에 대한 일반적 원칙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상황적 윤리에서 사람은 상황의 실리에 따라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객관적 규범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킵니다(규범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상과 존재(existential)라는 이중의 윤리적 진리 체계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강조하는 덕의 윤리에서 윤리와 그 원칙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현명의 영향 아래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법 안에 표명된 윤리적 선에 관한 진리는 도덕적 양심의 현명한 판단을 통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식별된다.”(CCC 1780). 그렇게 구체적인 행동의 윤리적 정당성(rightness)에 불가분의 관계로 포함되는(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복잡한 나의 사례에 적용되는 객관적 규범을 찾는 여정(quest)입니다. 여기서 나의 사례는 외적 행위에 대한 추상적 분석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인지한 선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덕이 뿌리는 내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의무적 윤리나 상황적 윤리로 설명되지 않는 객관성과 주관성의 관계에 대한 설명의 핵심입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말씀하는 ‘현명’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윤리는 인간의 자율성에 따라 양심이 달라지는 상황적 윤리나 외부에서 부여된 추상적 규범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양심인 의무적 윤리와 다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이다.” “양심의 판단을 직접 인도하는 것” 또한 현명이다 “이 덕으로 우리는 구체적인 경우에 윤리적 원칙을 오류 없이 적용하며 이루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에 대한 의심을 극복한다.” (CCC1806). 현명한 식별이 주어진 사례에서 정당하고 올바른 것을 찾고 판단하고 선택할 땐 나라는 존재와 나와 관련이 있는 맥락을 고려합니다. 사실 이것이 객관적 규범인데, 진실하고 선한 것을 찾고 사랑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나의 사례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현명한 사람은, 도덕적 양심에 귀를 기울일 때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n.1777). 라고 말합니다. 

   

  이 찾는 여정(quest)과 뿌리내림의 역동성은 ‘완전하고 온전한 진리(complete entire truth)’를 향하여 성장하는 우리의 삶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이 역동성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규범을 존중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죄의식의 부재나, 최소한 인책성(imputability)의 분명한 경감을 설명하는 요인을 밝힐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규범을 존중하지 않을 때 왜 주관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요인을 이 성장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는 왜 인책성이 크게 경감될 수 있는 지를 설명하는 요인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어떤 행동에 대한 인책성과 책임은 무지, 부주의, 폭력, 공포, 습관, 무절제한 감정과 그 외에 정신적 사회적인 요인들 때문에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 (CCC1735). 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완전한 인식” 또는 “전적인 동의” (CCC 1859)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다음 규범의 의미와 중심성(핵심)의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교종 프란치스코가 교회의 전통을 따르시는 것이군요.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양심에 관하여 하신 말씀은 공동체의 위대한 전통의 핵심이며 이는 모든 자유로운 행동의 고유성에 대해 개인주의자가 인식하는 바에 따라 더욱 풍성해집니다. 

   

  교종께서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표현을 따옴표로 묶고 ‘이른바’라는 표현을 쓰신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이 문헌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문헌이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잘 맞는, 잘 되는 혼인과 가정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현실이 다른 모든 것과도 관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고 있는 여행자(viatores)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대상이며 We are all subject to sin 자비가 필요합니다. 가장 전통적인(orthodox) 환경에서 변화(conversion)에 대한 호소는 비정상적인 상황만큼이나 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단계에 가서나 우리는 죄와 실패 그리고 가정에 영향을 주는 상처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교종은 종종 ‘비정상적인’ 상황을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반대로 교종은 죄의 현실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교종도 정상적인 상황과 비정상적인 상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그러한 관점을 뛰어넘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에 담긴 심오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단지 상황에 대한 구분 없이 모든 상황을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문제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은총을 간절히 청하는(beg)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가 있으므로, 그러한 구분짓기가 재혼 가정의 구성원들에게 어려운 것인지 저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의 언어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쁨」으로 교회의 표현에 어떠한 변화가 생깁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문헌에 대해 ‘everyone must be integrated, because what is involved is fundamental Gospel compassion.  모든 이가 통합되어야 하며, 그 이유는 여기에 관련된 것이 복음의 근본적 연민이기 때문이다‘라고 안내하십니다. “모든 이를 통합하고 저마다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신만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가 “과분하고 무조건적이며 무상인” 자비의 대상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평생 단죄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복음의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AL 297).

   

  이렇게 (문헌을 관통하는) 포용의 원칙에 대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권고가 특정 이완주의에 기울어진 것은 아닌지,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기준점(points of reference)을 잃은 것이 아닌가요?

  교종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이상한 해석을 방지하기 위해 교종은 “교회가 혼인의 온전한 이상, 곧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제안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 (AL 307)을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교종께서도 “개인의 행위가 단순이 법이나 규범에 맞는지만 고려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의를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서 식별하고 확인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L 304)라며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편협하지 맙시다!

   

  특히 목자들은 편협할 수도, 편협해서도 안 됩니다!

  목자는 도덕률을, 마치 사람들의 삶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나 되는 듯이,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단순히 적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종 프란치스코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가끔은 애석하게도 교회의 가르침마저도 닫힌 마음과 편협한 자세를 가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종은 “건강한 수준의 자기비판”을 요청하시며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냉철한 현실 감각과 함께 가정의 복음을 한 걸음씩 실현하는 사랑의 길(via caritatis)을 추구하도록 강요하십니다. 이 사랑의 길에서 우리가 점점 예수라는 인물에 매혹됨에 따라 교의는 조금씩 빛이 됩니다.

  시노드 교부들의 말씀을 들으시며 교종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람들을 “이혼한 뒤 재혼한 이들”이라거나 다른 식으로 사람들을 추상적 범주로 말하거나 통합의 사목적 실천을 일반적인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원칙의 단계에서, 혼인에 대한 교의와 성사는 명확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를 매우 명확한 언어로 새롭게 표현하셨습니다. 규율의 단계에서 교종은 셀 수 없이 많은 구체적 상황들을  고려하십니다. 그리고 일종의 교회법과 같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일반 규범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천의 단계에서 교종은 어려운 상황과 상처를 입은 가정을 바라보시며 개별 상황에 대해 책임 있는 개인적 그리고 사목적 식별을 다시 한 번 촉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식별은 “’모든 경우마다 따르는 책임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식별에서 규정의 결과나 효과가 늘 동일하지는 않다”(AL 300)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한 식별은 “성사 규율에 관한 경우에도 그러하다. 식별은 개별 상황에서 중대한 실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AL, 각주 336)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대처할 때 개인의 양심을 더 잘 고려하여야”(AL 303)하며, 특히 “내적 법정”(AL 300)에서 사제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권고 후에 일반적으로 이혼한 뒤에 재혼한 모든 사람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지는군요.  

  우리에게는 신앙의 교의와 관습이 있는데, 이는 성스러운 교의에 기반한 규율과 교회의 삶입니다. 또한 개인의 영향과 공동체의 영향을 모두 받는 실천이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각자의 가장 구체적인 삶의 단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시대에 해당하는 정상 참작의 요인들과 상황에 대한 교회의 인식에 변화가 있습니다.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는 정상 참작의 요인들과 상황에 관한 확고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구원받을 수 없는 죄 안에서 살고 있으며 거룩해지는 은총을 빼앗겼다고 더 이상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순한 규범에 대한 무지 이상의 것이 여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규범을 잘 알고 있지만 ‘도덕적 규범의 내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죄를 짓지 않고서는 다르게 행동하거나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없게끔 하는 현실적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시노드 교부들이 말한 것처럼,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제한하는 요소들이 존재합니다.’”(AL301)

   

  하지만 이러한 방향(orientation)은 잘 알려진 「가정 공동체 Familiaris Consortio」 84항에 이미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사목자들은 진실을 알기 위하여 상황 파악을 조심스럽게 해나갈 의무가 있다”고 「사랑의 기쁨」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특정(certain) 상황들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분은 첫째 혼인을 구제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하였으나 부당하게 버림받은 사람들과 자신의 중대한 잘못으로 교회법상 유효한 혼인을 파괴한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양육을 위해서 재혼한 사람과 이미 치료할 수 없게 파괴된 처음 혼인은 결코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양심상의 확신을 때때로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각각의 상황이 차별적 도덕적 평가(differentiated moral evaluation)의 대상입니다. 모든 이들이 교회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러한 참여를 위한 출발점은 다양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들의 각각의 상황이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사랑의 성사와 분리된 대죄(mortal sin)의 삶과 같다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객관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상황을 식별하는 것과 내적 법정에 대한 고려를 통하여 더 폭넓은 이해로 가는 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는 교의에 대한 이해가 진화했군요. 

  오늘날 가정의 복잡한 상황은 불과 몇 십 년 전 서구 사회의 관습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그러한 상황의 복잡성은 보다 미묘한 관점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객관적 상황만으로 그 사람이 하느님과 또 교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다 알 수는 없으며, 이는 과거보다 오늘날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죄의 객관적 상황이라고 할 때 의미했던 바를 시급하게 재고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는 교의의 이해와 표현에도 동일한 변화를 암묵적으로(implicitly) 가져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의미심장한 걸음을 내딛으셨습니다. 「가정공동체」에 암묵적으로 표현된 것, 즉 객관적 죄의 상황과 하느님과 하느님의 교회 앞의 은총의 삶 간의 관 계에 대하여, 그리고 논리적 결과로서 죄의 실질적 인책성을 설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1990년대에 이에 대해 설명하시기를, 우리는 새로운 결합의 경우에 자동으로 대죄의 상황을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1994년에 신앙교리성에서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들에 대한 문헌을 발표했을 때 제가 라칭거 추기경님께 드렸던 질문을 기억합니다. 저는 “교회가 오랫동안 실천했던,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 고해사제와 내적 법정에서 물의를 빚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성사를 받는 가능성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제가 알고 있었던 이 실천은 아직도 유효한가요?”라고 질문 드렸습니다. 추기경님은 교종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즉 모든 구체적인 사례에 한결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규범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반적 규범이 모든 사례에 철저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 규범이 명확한 만큼이나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번에 심화하신 통합의 동력은 「가정공동체」에 이미 존재했군요.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 방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이번 교황 권고에 드러난 변화(evolution)는 주로 객관적 변화(evolution), 바로 우리 사회의 상황(conditioning)을 인식한 것입니다. 이는 인책성을 억제하거나 경감하는 요인에 대한 식별에 더 큰 자리를 내어주고, 복음의 충만함을 향하여 객관적으로 의미있는 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아직은 객관적 이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한 죄의식의 부재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작은 발걸음으로 동행한다면, 이는 착한 목자의 보시기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교회가 주는 성사적 도움을 청할 때 자비가 충만한 식별에 고려되어야 하는 중대한 가치가 이 역동적인 과정에 객관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의 객관적 상황이지만 주관적으로 또는 완전히 죄책감이 들지 않을 때 “어떠한 경우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고 사랑하며 은총과 사랑의 삶 안에서 동등하게 성장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인 성찬례 와 모든 성사를 포함하는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교회의 고전적 교의 안에서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요? 과거에 확인된 내용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있나요?  

  이 문서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제 생각에 「사랑의 기쁨」의 설명(elaboration)에서 근본적인 요지는 우리가 어떤 추상적 범주에 속하든 간에 우리 모두가 자비를 청하고 변화를 갈망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교종 프란치스코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어떠한 경우에” 성사에 의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각주에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 문제가 실체화 되었을 때 잘못된 방법으로 문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빚을 진 그리스도의 몸을 개별적으로 식별하기 보다는 일반적 담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종께서 이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대단한 통찰력을 지니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성경에서 성찬례를 다루는 부분 중 가장 중요한 코린토 1서 11장 17-34절을 묵상할 것을 요청하십니다.(AL185) 이는 이 문제를 바오로 성인께서 놓으신 바로 그 지점으로 옮기시고/ 이 문제를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으로 연결하고,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시는 영민한 방법입니다. “(주님의) 몸을 식별하기” 위해서 자비를 청하며 삶의 구체바오로 사도가 친교의 문제를 제기했던 성찬례에서 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의역을 해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적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법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일지라도 식별이 부족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죄의 객관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성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 뒤에서 감히 눈을 들지 못했던 세리와 같이 청하는 마음으로(as beggars) 성사에 접근합니다. 외적 상황도 나름 중요하지만, 교종은 외적 상황만 보기 보다는 과연 은총의 신성한 역동성에 더 잘 응답하고자 자비로운 용서에 대한 갈증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을 요청하십니다. 형식적인 상황만 보고서는 일반적 법에서 “어떠한 경우”로 넘어갈(pass to)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 죄의 객관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성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러한 경우를 설명하려면 일종의 목록을 작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할 경우 추상적인 결의론(casuistry)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예 예외를 다루는 규범을 통해 죄의 객관적 상황에서 성체를 모실 권리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지점에서 교종은 내적 법정과 외적 법정 양쪽에서 개별적 상황을 식별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죄의 객관적 상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종은 분명 첫째 혼인에 대해 혼인 무효 선언을 받은 후 재혼한 사람들이나 “형제자매”로서 함께 사는데 필요한 요건을 충족한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상황이 비정상적일 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사실 죄의 객관적 상황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교종은 혼인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객관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그들의 삶의 방법을 이 요건에 맞게끔 바꾸지 못한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영적 동행의 경험이 풍부하신 교종께서 “죄의 객관적 상황”이라고 말씀하실 땐 단지 「가정공동체」 84항에 명시된 여러 부류만을 지칭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혼인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객관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사람들과 구체적 요인들의 영향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개인의 양심을 더 잘 고려하여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AL 303)

  양심이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양심은 주어진 상황이 복음의 일반적 요청에 맞갖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관대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참되고 솔직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양심은, 비록 아직 온전한 객관적 이상에 맞갖지 않은 것이라도 그것이 각자의 구체적인 복잡한 한계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것임을 도덕적 확실성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AL 303).

   

  실제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의 기쁨」은 규범을 이해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죄책감 없이 다른 결정이나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능력의 제한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종은 그 시각을 넓히십니다. 교종은 먼저  대상이 되는 사람(subject)의 인책성에 관한 이론적인 도덕과 실천(practice)이라는 오래된 전통(authentic tradition)에서 그 첫발을 내딛으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직접 고려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도외시하거나 제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점진성의 법칙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영적 지도자들의 위대한 전통인 실천에 호소하십니다. 언제나 영적 지도자들의 역할은 내적 성향과 은총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삶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식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between all or nothing) 사이에 은총과 성장의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커다란 한계 속에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겉보기에만 올바른 생활보다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44항; AL 305).  

   

  교종 프란치스코의 시각은 교회의 고전적 교의(classical doctrine)와 어떻게 통합되나요(integrate)?

  아마 다음 내용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교회나 교회 공동체들의 개별 신자들에게 특별한 상황에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에 그 목적은 개별 신자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중대한 영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지, 교회 친교의 가시적인 유대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다른 교파 신자들 간의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 vivit」 45항) 이것이 성체를 모시기를 요청하고 제대로 준비되어 되어 있는 가톨릭 교회에서 객관적으로 갈라진 동방 교회 신자들을 두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한 말입니다.(「동방 교회들Orientalium Ecclesiarum」 27항) (가톨릭 교회와의) 객관적 갈라짐과 교회의 일치의 성사로서의 영성체 사이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책성이 아니라 성사, 영적 필요 그리고 일치에 대한 공통의 관심 안에서 공통의 믿음에 기반한 길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자들과 갈라진 교회의 신자들(갈라진 형제들)간의 일치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영성체(Holy Communion)가 거부되지 않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구조 안에서 다닐 수 있는 길을 새로 열거나 성체를 사유화 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 “영원한 구원을 위한 중대한 영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각주 351항에서 말하는 “어떠한 경우”와 유사하게 정리하자면, 비인책성(non-imputability), 혼인 성사에 대한 믿음, 객관적이며 의미 있는 과정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사업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을 찾는 것입니다.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단체성(collegiality)”를 추가하면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립된(formulated) “수위권”이 (보강되고) 발전된 것과 같이, 우리는 여기서 보완적 진리를 추가함으로써 발생된 발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이미 「가정공동체」에 명확하게 규정된 혼인 유대의 객관적 요건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혼인한 부부가 자유를 행사하는데 필요한 상황을 보완적으로 반영하는 데에 기여합니다.

   

  자비의 언어는 삶의 진리를 구현합니다.  가정의 사랑에 대한 이 권고에서 교종의 관심은 교의를 교회의 사목 사업(mission)에 맞도록 맥락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한 교종에서 다음 교종으로 이어지는 계주와 같은 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가 참된 반석(rock)인 희망으로 들어가는 길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교도권적으로 베네딕토 16세는 추상적 교리적 집대성(corpus of doctrine) 뿐만 아니라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신앙의 유기적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강생의 논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즉 하느님께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문을 열도록 하는 무한한 자비가 있으시며, 그 자비 덕분에 하느님은 지금 우리 각자에게 사랑이시며,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추기경께서는 이렇게 전해 내려온 바통을 직접 목격하신 분으로서 이 바통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베네딕토 16세(명예 교황?)께서 자크 세르바이(Jacques Servais) 신부와 하신 인터뷰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에 실린 적이 있는데, 저는 그 기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인터뷰는 「사랑의 기쁨」이 발간되기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뷰에서 교종 베네딕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부터 교종 프란치스코까지 시대의 참된(authentic) 표징을 읽으시는 깊이 있는 연속성을 보여주십니다. 말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자비가 신자들의 의식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에게 가는 문을 여셨습니다. 교종 베네딕토는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신앙의 유기적 본질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그 한계점을 넘어가도록, 밖으로 나가 우리의 가난함에서 그분을 만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세 분의 교종 모두가 각자의 현명한 방법으로 공의회의 특징인 신의(faithfulness) 안에서 이 쇄신의 과정을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사목적 변화(conversion)과 교의를 설명한 인터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남자나 여자나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언제나 구원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교의의 실천에는 사목적 변화(conversion)가 지속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중한 인터뷰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기쁨」의 역할입니다. 베네딕토 16는, 예를 들자면, 비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전과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심오한 교의적 진화(evoluation)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현대 시대가 시작할 때 발견된 이 신세계(New World)로 인해 이에 대한 관점이 급격하게 변했습니다.”(「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인터뷰) 여기서 우리는 “연속성 안에서 쇄신의 해석(hermeneutic of reform in continuity)”과 연결된 심오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방법으로 교의를 전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제시하려면 신앙의 유산에 담긴 여러 진리를 구분하고, 그 진리를 명확히 밝히는 식으로 교의에 맥락을 더하려면(contextualize)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과 특히 연관이 있는 것은 교회와 오늘날 세상과의 관계인데, 언뜻 보기에는 인류학 영역과 부분적으로 단절된 듯 보입니다. 이 명백한 단절을 통해 교회에 맡겨진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교회는 기존에 교회가 내린 결정, 예를 들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나 종교적 자유의 문제 등을 다시 검토하거나 간혹 번복했던 사례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각기 다른 차원에 있는 이러한 연속성과 단절의 조합에서 바로 진정한 쇄신의 본질이 놓여있다.”고 베네딕토 16세는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교종 프란치스코는 기쁨이라는 주제를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지금이 기쁨을 논할 때인가요? 오히려 기쁨을 잃을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닌지요? 왜 우리는 자비가 불편한가요? 사람들은 왜 포용을 말하면 우려하나요? 어떤 사람들의 경우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떤 두려움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자비에 대한 호소는 우리가 자비를 실천하고 그 댓가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밖으로 나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쁨」이 말하는 “앞으로 나아가는(going forth)” 교회입니다. 우리 스스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다시 결합하기 위해 우리에게 안전한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한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시고자 친히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끄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바꾸는 만남, 사랑의 만남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갈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사목적 변화는 오늘날 작용하고 있는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지속적으로 찾습니다. 이 현존에서 기쁨, 사랑의 기쁨이 발생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란 어렵지만, 사랑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6 III 130-152 | 3986 (23 luglio 2016)
**** Antonio Spadaro S.J.
1) A. Spadaro, «Matrimonio e conversione pastorale. Intervista al cardinale Christoph Schönborn», in Civ. Catt. 2015 III 494-510 참조.
2) 나는 이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준 마르크 라리베Marc Larivé에게 감사를 전한다. 쇤보른 추기경과 나를 둘 다 잘 아는 그는 이번 인터뷰 내용의 확장판 기사가 실릴 예정인 「말과 침묵Parole et Silence」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