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도움이 되는 상담

UN AIUTO AL DUBBIO: IL CONSIGLIO*

조반니 쿠치 신부(예수회)**
김민 요한 신부(예수회) 옮김

자비의 첫번째 영적 활동

  의심을 품고 있는 이들을 상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래에 널리 입증된 영적 자비 활동이다.1) 이것은 또한 예수를 따르는 자비행이 지닌 지성적이고 지혜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자비행은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에서 주지시켰듯이 진리에 봉사하는 사랑으로 구현된다. 인간은 진리에 목말라 하며 진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더라도 그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담은 구체적인 도움의 표현이지  ‘첫 번째 자비행’으로서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설정해 준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순례자들을 환대하고 난민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병자들과 죄수들을 방문하는 것, 갇힌 이들을 풀어 주고 노약자를 보살피고 장님과 동반하는 것, 괴로운 이를 위로하고 병자를 치료하며 방황하는 이를 인도하는 것, 의심 많은 이에게 조언해 주고 궁핍한 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인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다.”2)

  마찬가지로 9세기 수도승이었던 라바누스 마우루스 역시 자선carità에 대해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방랑자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 사실 이 세상 모든 의인들이 행하는 모든 선행들은 바로 이 ‘자선’이란 고유한 이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3)

  자비행은 우리 자신을 벗어나 타인을 바라보라는 초대로, 곧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가난한 이들, 절망하는 이들, 비참한 이들을 향해 우리의 최선을 다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자비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존엄성은 종종 사람이 더 취약해질수록 더 빛을 발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하고 평생 계속해야 할 교훈이다.”4)

  ‘의심하는 이들을 상담하는 것’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괴로운 이들을 위로하는 일’과 더불어 이른바 ‘늘 깨어 있는 활동들opere della vigilanza’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활동들을 통해 우리는 인식을 향상시키고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을 함양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양한 타자의 세계와 만나도록 초대받고 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자아의 일면을 마주하도록 허락하게 된다.

  하지만 종종 이 주제와 관련되어 생길 수 있는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데, 상담이 오해로 인해 헛되거나 비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이미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단순히 심리적 혹은 정서적인 재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흔한 상담 사례이다. 반면에 불가능한 일을 시작하면서 절대적인 확신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5)

  교회는 이런 일을 자비의 ‘영적인 활동’이라고 인식함으로써 비난이나 험담 혹은 논쟁의 영역에서 거리를 두고자 한다. 성경은 이와 관련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데,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 그런 관계를 고무시키는 의도, ‘상담자’를 선택하는 기준, 그리고 그가 다룰 수 있는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기교가 아니라 은총이자 선물이다.

상담

  그 누구도 모든 일에 대해서 상담을 할 수는 없다. 이는 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타인에게 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자유, 즉 초연함distacco이 필요하다. 내담자와 그의 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결국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성경은 심리적 섬세함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한다. “여자의 경쟁자에 대하여 그 여자와 상의하지 말고 전쟁에 대하여 비겁자와 상의하지 마라. 사업에 대하여 상인과 상의하지 말고 판매에 대하여 구매자와 상의하지 마라. 감사함에 대하여 인색한 자와 상의하지 말고 관대함에 대하여 무자비한 자와 상의하지 마라. 노동에 대하여 게으름뱅이와 상의하지 말고 일 마무리에 대하여 한 해 품팔이꾼과 상의하지 마라. 많은 일거리에 대하여 게으른 종과 상의하지 마라. 이들의 조언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집회서 37:11)

  상담 요청을 받은 사람은 특정 문제보다 이러한 정서적인 장애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자비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관계적인 맥락은 근본적인 것이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신중하게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상담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다. 조언을 주기 위해서는 영적 권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는데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차마 꺼내지 못하는 해답을 찾도록 돕는 것, 또는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다.”6)

  도움을 청하는 것과 관련해서, 상담도 겸손에서 우러나오는데, 자신의 취약한 영역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깨어있으라는 부르심에 직면하여 스스로 도움의 필요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 없이는 우리는 상담에 꼭 필요한 조건을 마련할 수 없다. 집회서는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의 자질도 규정하는데, 그것은 전문 기술이나 영향력, 논리적 대화 능력이 아니라 영혼의 선함과 깊은 영적인 삶이다. “네가 보기에 계명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과는 어울려라. 그의 생각이 너의 생각과 같으니 네가 걸려 넘어질 때 함께 고통을 나누리라.” (집회서 37:12) 이런 자질은 선한 마음, 연민을 느끼는 감수성과 정서적인 기도와 관련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약함과 단점을 인정하게 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을(이는 상담자에게 크나큰 유혹이다!) 방지할 수 있다. 상담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러한 자질에 힘입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 결실을 얻게 된다.

  집회서는 또한 두 가지 근본적인 측면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사람의 양심(한국어 성경에는 마음으로 되어 있으나 논문의 표기대로 양심으로 표현)은 높이 솟은 망루에 앉아 있는 파수꾼 일곱보다 때때로 더 확실한 정보를 알려 주곤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앞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너의 길을 진실하게 인도하시도록 하여라.” (집회서 37:14-15) 자기 인식과 영적인 삶은 상담에 합당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이 목적이란 하느님의 뜻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상담은 내담자의 개인적 평가와 결정의 부담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최우선으로 내담자 스스로 자신을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토마스 그린이 주목한 바에 따르면, 종종 의심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하느님의 크나큰 신비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부족으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수고를 겪으려 하지 않고 피상적이고 임기응변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극히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마주할 때처럼 그분을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한 바에 따르면, 참된 식별 (그리고 기도를 통한 참된 성장)에 가장 큰 장애는 하느님의 무형적인 본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남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볼 때조차 가면 뒤에 숨는다.”7)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따르면 영적 상담은 정확한 특성을 갖는데, 무엇보다도 이성과 관련된 은사이다. 이는 토마스 그린이 관찰한 것과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아는 수고를 덜어준다. 이는 우리를 자기 인식이라는 도전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청과 성찰, 내면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특징을 갖는 것이다. 이는 선택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숙고의 행위인 것이다.8)

  영적 상담의 또 다른 특징은 착한 삶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또 다른 은사와 연관된다. 이는 순수하고 명징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이, 온유하고 자비로우며 무엇보다 사려 깊은 이가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적당한 수단을 찾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우리는 관건이 되는 본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사려 깊음의 덕 prudence은 우리가 특정한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도록 허락해주는 상담의 은사에 의해서 가장 잘 완성될 수 있다.”9)

  덕과는 상반되는 상담에 있어서의 결점이 “경솔함”-경솔하게 결론을 내버리는 것-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경솔함은 “사람의 능력이 사려 깊음의 덕과 올바른 이성적 추론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하는 데 장애가 된다.”10) 이는 우리가 실수를 할 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겸손하다면 이러한 실수를 깨닫고 이미 벌어진 일을 통해 교훈을 스스로 얻는 것이 가능하다. 겸손은 우리를 모든 종류의 성급한 결론과 무모함으로부터 구해준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위험한 모든 오만한 추측에서 벗어나게 해준다.11) 오만한 추측은 자신이 항상 옳다는 완전한 확실성-사실 이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다-을 요구한다. 이러한 완전한 확실성은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일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불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상담과 온유함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남들을 위해 이러한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재빠르게 활동할 수 있고 도전에 대해서 이해하고 평가하게 되며, 무엇보다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대치 않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을 바람을 한껏 받고 움직이는 배에 비유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덕에 의해 인도되는 이들은 더 큰 노고와 소음을 일으키는 노젓기에 의해 움직이는 작은 배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속력이 늦기까지 한다.”12) 성령과 함께 사람은 더욱 자유로울 수 있으며 한때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해 진다.(마태복음 19:26)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들 삶 속에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현존하신다는 징표이자 추호의 의심 없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신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용한 텍스트들은 비록 간략하긴 하지만 상담이 결실을 맺기 위한 최상의 조건들을 멋지게 요약해준다. 이는 단순한 정보나 처방법, 모든 경우에 걸맞은 근사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믿음과 선을 발견하기 위한 원의 속에서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원의가 한 개인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이 원의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참된 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원의와 그 원의의 실현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있음을 의심하는 것, 그리고 이 연관관계는 단순한 환상이거나 힘든 삶에 대한 보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지적하였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어떤 깊은 원의가 새겨져 있어서 이미 존재하고 알려진 선을 향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원의가 실현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3)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한 초대이기도 하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8) 이는 약속이며 의심해서는 안 될 위로의 말이다. 주님께서는 속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을 주고받는 데 있어서 무능력한 것은 대부분 이 현명한 기준들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우선적이고 불가피한 단계는, 직면을 회피하고 이해라는 도전을 두려워하며 현상의 표면에 머무는 게으르고 손쉬운 방식을 택하려는 경향을 극복하고자 하는 원의의 단계이다. 마음이 온유할 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자기 평가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상담 자체를 즐기는 것이 손쉬워진다. 교부들의 어록들 중 하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충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막의 교부가 다른 교부에게 물었다. 오늘날의 수도자들은 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이렇다. 어린이들은 귀를 기울일 능력이 없으니까.”14)

항상 쓸모 있는 은사

  상담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사이다. 특히 부유하며 무한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의지할 공통의 준거점이 결여되어 있고 모순적인 제안들로 가득 찬 우리들의 복잡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상담과 상담가들은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근심과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불행히도 문제의 일부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의심은 중요해진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주어진 생각과 생각의 방식,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된 장애가 될 수 있을, 이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관례들을 명료화하고 도전하는 데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상담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차원은 심리학에서 ‘적당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다. 적당한 좌절은 개인이 직면하는 문제를 내적인 평온만을 위해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담을 제공하는 이에게 그러한 힘이 없고 무엇보다 상담자가 지성과 내적인 평화 속에서 경청을 한다는 전제에서 의심은 더 새로워진 힘과 더 큰 깊이로 여정을 계속하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15) 결정은 항상 도움을 청하는 이의 책임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상담이 줄 수 있는 확실성의 정도는 결코 수학적이거나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는 결코 강제적이지 않으며 이를 수용하고 거부하는 자유가 담보되는 것이다. 결정은 결코 위임될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 어떤 탁월한 상담이라도 인간 조건을 특징짓는 만일의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의심은 상담에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의심은 삶의 현재 상태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16)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은 얼마나 자주 상담이 아니라 ‘신탁’을 해달라고 요청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하느님의 뜻을 보다 더 온전히 실현시키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기보다 의심을 제거해 줄 수 있는 틀림없이 확실한 말을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오해는 항상 종교적인 경험 속에서 현존해 왔다. 우리는 주님과 만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삶이더라도 그냥 좋은 느낌에 머물기만 바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불확실함을 두려워하고 신앙 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투쟁을 두려워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저항을 하는 것이다. “상담의 은사는 우리가 이 갈등과 모호한 상황을 조용히 살아내도록 허락해준다. 이러한 삶을 근심 없이, 내적인 분열 없이, 겸손과 인내 속에서 살게 해주며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을 평화로이 마주하도록 해준다. 상담의 은사는 밝게 빛나는 빛 같은 것이 아니다. 빛 같은 것이었다면 그 어떤 문제도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명징하게 볼 수 있다면 행동하기는 손쉬울 것이니 말이다. 상담은 상황이 불확실할 때 도움을 준다. 상담은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며, 이 시점에서 최선으로 보이는 방식을 이성적으로 선택하며, 그 방식을 또한 기꺼이 수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해준다.”17)

  도움을 청하는 이들은 종종 신탁 ‘신탁’을 청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의 귀를 현혹하고 사람들을 홀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지 그들에게 좋은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 그들에게 좋은 것이 쓰기는 하지만 건강한 치료책이기 십상이다. 이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우리를 자신 안에 갇혀 있게 만들며 길을 잃게 될 때까지 선(善)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든다.18) 가장 위대한 상담자셨던 예수님의 경우에도 많은 이들은 기적 앞에서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서는 “주님을 두려워함”이라고 표현한19))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좋은 숙고를 위한 토대를 갖게 되는 것이고 의심을 그치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는 ‘회심’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의미를 포함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다양한 차원에서 의심을 경험한 이들이 하는 체험이다. (책과 사람, 경험으로 구체화되는) 지혜와의 다중적인 만남을 통해 그들은 근원적인 문제가 비록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큰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로너건은 그의 저서 『통찰Insight』을 마무리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저서를 부단히 공부를 한 것이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딜레마들과 관련하여 명확한 대답을 해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매우 기나긴 지적인 여정이 그의 사고 방식을 변화시켰고 그에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20) 이것이 바로 그가 “지적인 회심”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문제에 대한 간결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에게 문제에 대한 다른 해석을 소개해 주고 그리하여 새롭고도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열어주는 지평의 변화였다.

상담에의 도움: 영의 식별

  의심을 품는 이들을 상담한다는 것은 함께 걸어가야 할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며 문제의 맥락에 관한 가능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서 이러한 종류의 도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손꼽히며 잘 알려지고 증명된 방식이 바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영의 식별이다.

  이냐시오에게 식별은 무엇보다 문제를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이라는 적절한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식별은 이야기의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이냐시오는 누군가의 역사와 삶의 방향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 “자기 죄를 진정으로 보속하는 사람들”21)), 그리고 반복된 활동을 통해 마음에 뿌리를 내린 습관에 대해서 언급한다. “죄의 역사”에서 선한 영은 “사건들”의 형태로 개입하고 의심을 품게 하고 참회를 통해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리고 (문자 그대로 “양심을 찌르는”) 내적인 슬픔은 우리가 삶의 변화를 위한 조짐을 발견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마련한다. 반대편에 있는 원수는 현세적인 즐거움으로 유혹하고 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외설적인 방식을 제시하며 그럼으로써 이전과 같이 위험한 길을 계속하도록 하게 한다. 이 전술은 선함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한 길과는 정반대의 방식이다.

  이렇게 분기(分岐)하는 양식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눈을 연마하고 “이성의 내적 양심synteresis”, 즉 선과 악의 근본적인 원리를 아는 능력22)을 함양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선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만적인 것, 그리하여 공허함과 허무함의 느낌 속에 머물게 하는 것과 실제의 선을 구분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 특히 영적 생활을 최초로 근본적으로 발견하는 기간 동안을 다시 곱씹음으로써 참된 위안과 거짓 위안 사이의 차이를 보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다양한 양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 머물며 팜플로나 공방전에서 입은 중상에서 회복하였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기사 이야기와 같은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를 찾았다. 불행히도 그의 수중에 있었던 책들은 예수님과 성인들의 전기뿐이었다. 그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상황에 그는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 성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는 두 가지 대립되는 세계를 보게 되었다. 기사들의 모험과 성인들의 활동. 두 가지 매우 다른 세계는 분명히 그에게 동시에 매력적이었다. 그의 마음에서 마치 추가 양쪽 방향을 오가듯이 그는 어떤 때에는 한 쪽에, 또 어떤 때에는 다른 한쪽에 마음이 끌리는 것을 보았다.

  이냐시오가 더 주의 깊게 생각의 흐름을 성찰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노트를 남겼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 가면서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23)

  이냐시오가 하느님에 대한 최초의 근원적인 체험을 하게 된 것은 독서에서 비롯한 정서적인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낯선 대칭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즉, 세상에 대한 생각에는 쉽게 빠지게 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종국에는 쓴 맛을 남길 뿐이다. 반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확실히 어렵고 이런 생각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투쟁이 필요하지만, 한번 이 생각에 머물게 되면 비록 금욕이나 참회, 금욕과 같이 어렵고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생각일지라도 깊고도 오래 지속되는 평화 속에 머물며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24)

  영의 식별에서는 또 다른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미래의 예수회 창립자 자신이 겪은 놀라움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으로 사는 한 일종의 피상적인 평화만 체험할 뿐임을 깨닫게 되자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시작한 후로 미처 알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친다. 몇 년 후 이 체험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이 애초 자신의 선택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즉 삶의 개선, 곧 하느님의 뜻에 더 순응하는 삶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주위환경 및 정서와 사고방식이 원래 목적을 방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의심과 어려움은 이 선택이 옳은 것이고 확증된 것임을 증명해준다. 유혹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혹을 통해 이미 시작된 이들의 가치를 측정하고 확인하며 그 한결같음을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금과 짚을 불로 태우면서 그 차이를 확인하듯이 말이다.(1코린 3,10-15)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신자들이 이 순간을 기다리도록, 그럼으로써 준비를 하도록 초대한다.(집회 2,1)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다. 모든 이가 이 순간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모든 성인들이 그러하였고 모든 신자들이 그러하였다. 이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이냐시오가 제안한 것은 근대성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생각과 이성적인 추론이 분명하지 않고 애매할 때, 그리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이미 시작된 좋은 활동에 장애가 된다고 할 때 의심을 적절하게 사용하였다.25) 심지어 유혹이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명백히 유익하면서도 확실한 제안을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바를 식별할 필요성이 나온다. 지금 감지된 것과 그것의 ‘이야기 흐름percorso narrativo’, 그 기원과 무엇보다 향하는 지점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26) 그렇기에 자신을 알고 무엇보다 자신의 약함, 약점, 중요한 부분, 그리고 자신이 예민하게 느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영혼의 참된 암호이다. 이 암호야말로 유혹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유혹자들이 원수에게 영혼의 문을 열고 원수가 “우리 영혼 안에 들어가서 자신에게로 끌어 들일”27) 위험이 있다. 이는 피곤하지만 가치 있는 활동이며 식별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일반적인 성숙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사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정련시키며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일을 무심코 받아들이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깊이 있게 경험을 분석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 있어서 실질적인 식별의 기준이 되는 세세한 부분과 뉘앙스를 눈치채게 해준다. 이러한 노고를 통해 우리는 거친 단순성과 피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단순성과 피상성은 이냐시오가 그의 회심에 앞선 시기를 특징짓는 것으로 그가 헛되고 무익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음의 단계

  식별의 이야기적인 차원은 우리가 영적인 상담이 단순한 수사적인 설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자아와 삶을 참을성 있게 읽는 과정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자비의 활동은 의심을 품은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삶과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선함을 깨닫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종종 상담을 청하는 이들에게 간과되는 것인데, 사실 상담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토대를 이룬다. 예컨대 이냐시오는 지난 과거의 죄를 반복적으로 이끄는 의심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겠노라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그러한 결정을 내리고 “세심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28) 진정한 대답이 결정 다음의 순간에 찾아온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했듯이, 마치 도움을 청하는 일 자체가 이미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가 굳건해지는 것은 상담 과정의 한 부분이다.

  이냐시오가 사제가 되기 위한 기초 공부를 시작했을 때 일어났던 또 다른 의미심장한 일화는 이러한 측면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기나긴 학업과 무미건조한 연학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연학을 계속할 수 없도록 방해가 되는 멋지고 좋은 상념을 즐길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상념의 덫에 걸렸고 여기에서 어떤 조화롭지 못한 낯선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기도하러 가서도, 미사 중에도 이처럼 생생한 통찰이 일찍이 내게 생긴 적이 없었는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그러자 서서히 이것이 일종의 유혹임을 깨닫게 되었다.”29)

  이는 중요한 통찰이다. 어떤 것들은 잘못된 장소, 잘못된 때에(항상 이냐시오가 공부를 시작할 때) 일어나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렇기에 이것이 유혹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유혹의 때가 다가오는 경우 그 유혹과는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기도를 하고 나서 이냐시오는 선생님에게 가서 온 힘으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최종적으로 그는 이러한 결정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단단히 작심하고서 이 언약을 하고 나자 그런 유혹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다.”30)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 상황에서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삶의 이야기와는 반대되는 생각들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속적인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에 선한 영은 일을 쉽게 해주고 일이 끝난 후에는 평화와 고요가 찾아오게 해준다.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안정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복잡함을 살아갈 줄 아는 지혜

  그러므로 평가와 숙고 이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검증의 필수적인 면이자 중요한 지점으로, 이 성찰의 시간에는 의심에 빠진 이들을 상당 활동의 중심에 [다시] 두어야 하며, 개인과 공동체, 단체와 수도회, 신앙 모임 모두 자신들이 선택하는 선익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만약 많은 대화와 사목적 삶에 대한 이성적 추론의 결론이 씁쓸하고 화가 나는 것이라면, 이는 하느님의 영의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는 사회학적인 자료와 성찰에서 비롯한 것이지 하느님의 성령의 활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일과 활동을 하고 문제를 손에 쥐고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대화를 해나간다면 이는 성령의 활동일 것이다. (…) 원수는 주의 깊게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만들며, 다양한 형태의 이성적 추론으로 이런 무위(無爲)에 우리가 확신을 갖도록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남는 것은 씁쓸함과 믿음의 결여, 암울한 느낌, 일종의 분노일 뿐이다.”31)

  그러므로 우리는 복잡성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20세기 비극적 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이른바 “최종 해결책”(나치독일이 완곡하게 표현한 유대인 절멸 계획) 따위의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 복잡성 안에 머물고 유동적인 산등성이에 머물며 자신의 삶 안에서 그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의심과 어려움에 사로잡힐 정도로 암울하고 적대적이어서, 어떤 노력도 헛수고라는 생각을 떨쳐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가라고 내어주신 세상은 예수님께서 로마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헤로데 당원들, 쿰란(에세네파) 사람들 가운데 사셨던 세상과 같다. 어두움과 속임수, 함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고요함으로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셨다. 그분도 고통을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실 수 없다. 하지만 진실과 정직과 명예로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32) 우리는 항상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당신께서는 우리 곁에 계실 것이고 의심의 풍랑에서 우리를 건져 올리실 것이다.(마태 14:30-33)

  의심을 품은 이들을 상담한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움 없이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선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의식하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평가와 결정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을 아름답게 하고 살만한 가치를 갖도록 만드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가치 있는 일에 쓰일 수 있을 기회를 마주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127-140 | 4010 (15 lug 2017)
** Giovanni Cucci S.J.
1) 야고보 서간의 마지막의 권고 참조.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진리를 벗어나 헤맬 때 누가 그 사람을 돌이켜 놓았다면, 이 사실을 알아 두십시오.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놓는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야고보 서간 5:19-20)
2) Agostino, s.(아우구스티노), «Manuale sulla fede, speranza e carità», 1972, in Id., Opere, vol. VI/2, La vera religione, Roma, Città Nuova, 1995, 561.
3) Rabano Mauro, La formazione dei chierici(사제 양성), II, 28, Roma, Città Nuova, 2002, 105.
4) James F. Keenan, La opere di misericordia cuore del cristianesimo, Bologna, EDB, 2010, 109.
5) 체계적인 의심이나 절대적 확신이라는 환상이 초래하는 극단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G. Cucci, «Id dubbio: insidia o opportuntà(의심, 위협 또는 기회)», in Civ. Catt. 2017 III, 29-38(“Doubt: Threat or Opportunity”, in Civ. Catt. (English edition) 0817) 참조.
6) L. Manicardi, La fatica della carità(자선의 수고) , Magnano (Bi), Qiqajon, 2010, 143.
7) T. H. Green, SJ, Weeds Among the Wheat. Discernment: Where Prayer and Action Meet(밀밭의 가라지: 식별, 기도와 행동이 만나는 곳), Ave Maria Press, 1984, 22.
8)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I-II, q. 68, a. 1-3; II-II, q. 52, a. 1, ad 3; q. 71, a. 3. 참조.
9) A. Tanqueray, Compendio di Teologia Ascetica e Mistica, Roma, Desclée de Brouwer, 1930, n. 123.30.
10) 『신학대전』 II-II, q. 8, a. 7, ad 1; cf q. 52, a. 4.
11) C. Marmion, Cristo vita dell’anima, Milan, Vita e Pensiero, 1943, 155 참조.
12) L. Lallemant, La dottrina spirituale, Casale Monferrato (Al) – Milano, Piemme – Àncora, 1984, 163.
13) 토마스 아퀴나스, Summa contra Gentiles(대이교도대전), l. III, c. 51; 『신학대전』 I-II, q. 30, a. 4; G. Cucci, La forza dalla debolezza. Aspetti psicologici della vita spirituale, Rome, AdP, 2011, 33-73 참조.
14) A. Louf, Generati dallo Spirito. L’ accompagnamento spirituale oggi, Magnano (Bi), Qiqajon, 1994, 66에서 인용.
15) G. Cucci, “Il dubbio: insidia o opportunità?” 참조.
16) 『신학대전』 II-II, q. 52, a. 3, ad 2.
17) C. M. Martini, Uomini e donne dello Spirito(성령의 사람들), Milan, Piemme, 1998, 107.
18) 이러한 경계는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르마스의 목자』에서 거짓 예언자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종의 마음을 파괴한다. 그가 파멸시키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 의심을 품은 이들이다. 의심을 품은 이들은 거짓 예언자에게 마치 점쟁이를 만나듯 찾아가서 그들에게 닥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 본다. 그러면 그 거짓 예언자는 그 안에 신령한 영이 없으면서도 그들의 물음에 답을 하는데, 이 답은 그들의 사악한 뜻에 걸맞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을 자신들의 원의에 따라 기대에 부풀게 만든다. (…) 주님에 대한 믿음 속에 굳건히 머무는 많은 이들, 진리의 옷을 입은 많은 이들은 이러한 영혼과 관계를 맺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멀리한다.”
19) 문자 그대로는 “주님을 경외함”이다.(시편 110:10; 잠언 1:7; 집회서 1; 예레미야 28)
20) Bernard Lonergan, Insight: A Study of Human Understanding(통찰: 인간 이해를 위한 연구) (Collected Works of Bernard Lonergan, Vol. 3), 5th Ed. University of Toronto, 1992.
21)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314번. D. J. Fares, «Aiuti per crescere nella capacità di discernere», in Civ. Catt. 2017 I 377-389(『치빌타 카톨리카』 한국어판 제3권(2017년 가을호)에 「식별력을 기르기 위한 도움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 편집자 주) 참조.
22) 『신학대전』 I, q. 79, a. 12.
23)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8번.
24) 같은 곳 참조.
25) “마음속에서 ‘앞으로 남은 치립 평생을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해나가겠느냐?’ 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 오는 듯했다. 그 생각이 원수에게서 오는 것이라 믿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맹렬한 격분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 불쌍한 존재야, 네가 나한테 한 시간의 목숨이나마 보장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렇게 유혹을 이겨 내고 그는 평안을 되찾았다.”(같은 책, 20번)
26)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333번 참조.
27) 같은 책, 332번.
28)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자서전』, 25번.
29) 같은 책, 55번.
30) 같은 곳.
31) C. M. Martini, Uomini e donne dello Spirito(성령의 사람들), cit., 114.
32) 같은 책,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