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경험

L’ESPERIENZA DEL RISORTOL*

피에트로 보바티 신부(예수회, 교황청 성서위원회 사무총장)**
박수현 로사리아 (교회법 석사)

  파스카 시기에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이루신 부활 사건을 거행한다. 교회는 이 기념안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교의 가운데 하나인,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신비”라고 부르는1) 이것은 믿기 어려운 사건이기도 하다. 2) 만약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의 인식에 물음을 던진다면, 아마도 약간의 동요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돌아오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없음을 인지하게 된다. 3) 우리는 예수님이 몸소 당신의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였던 그 순간에 직접 함께 하는 체험을 통해서 부활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육안으로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들과 선한 이들에 의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전해진 증언들을 부활 신앙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토마스처럼 의심으로부터 변화된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을 대어 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볼 수 있기를 원할 수도 있다(요한 20,27).

믿음의 여정

  앞서 언급한 의심으로부터 확실한 신앙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그들이 쉽고 빠르게 거의 자동적으로 부활을 믿게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부활 신앙에 대한 특권과 행운을 누리는 이들처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빛나는 기적들을 옆에서 거들었고, 주님께서 나병환자들을 치료 하시고 장님에게 시력을 해복해 주시는 모습을 보았고, 라자로가 살아서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 자기들을 만나기 위해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또한 직접 눈으로 보았음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모든 체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믿음이 약하다는 꾸중을 자주 들었다(마태 6,30; 8,26; 14,31; 16,8; 17,20). 또한 그리스도의 초인적인 권능의 수많은 표징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수난 순간에 스스로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분에게서 도망쳤고 그분을 부인하였다(마태 16,16; 요한 6,68-69).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분명하고 놀라운 표징이라도 마음의 확고한 동의를 자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설명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의혹이 잠재의식으로 남게 될 수 있고, 이 의식들이 쉽게 회의론과 불신 그리고 거부로 이어지게 된다. 말을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손짓으로 갑작스럽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는 그 선생은 악령의 힘을 빌렸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마태 12,24). 온 도시에 장님으로 알려졌던 이가 눈을 씻으라는 말에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구경꾼들은 혹시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사기행위가 없었는지 물어볼 것이다(요한 9,18).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은 그들이 봉인했던 무덤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는데,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 맞았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다(마태 28,11-15). 그리고 여러 세기가 지난 후, 합리주의 사상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십자가에 못박힌 이는 단지 죽음을 겪은 것처럼 보인 것이고, 부활한 이의 발현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집단적인 환영이나 히스테리적 현상에 불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부활은 하나의 우화, 아름다운 이야기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치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믿을 만한 사실과 증언들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불신자들이고, 부활의 신비를 비방하는 자들은 초자연적인 모든 사건을 거부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 사건이 언급되는 즉시 멸시하며 외면했던 바오로 성인 시대의 아테네 시민들과 유사하다고(사도 17,32), 우리는 자족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사도들에게도, 심지어는 부활을 직접 보았던 이들에게도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복음서의 본문을 살펴보자.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 놀라워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사도들이 다른 이들의 증언과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을 믿지 않고(마르 16,11), 또한 무덤에서 돌아온 여인들(루카 24,1)과 “시골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던 두 제자의 증언도 믿지 않았다는(마르 16,12-13)4) 진술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태오는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는 순간에 의심하는 이를 배치함으로써, 이를 현장에 있던 한 특정한 이에 대한 지적을 넘어서5) 사도단 전체의 체험으로 진술한다.

  루카 복음서는 증인들이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제자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토론하며 먼 길을 가게 되는데, 그들은 그 이방인이 그들의 스승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루카 24,15-24).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었을 때,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 36-3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혼란과 의혹을 보시고(38절) 당신을 만지게 하셨다. 그러나 그때에도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41절) 있자6)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다(42-43 절). 이 마지막 증언에서, 결국 사도들이 부활한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후술에서 언급하겠지만, 이 사실은 어쩌면 신앙이 육체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정하게 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요한 20,14). 여인은 그를 동산지기로 여기고 (17절)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한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나타나셨을 때의 상황을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21,12). 이런 확신은 놀라운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그들이 보고 있는 모습과 실로 존재하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7) 사실 사건의 본질에 속하는 “믿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일어나는 의문과 망설임과 당혹감과 저항은, 그 사건의 들어보지 못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이사 48,6-7; 52,15) 면을 표현하고, 나아가 같은 성경이 전하는 노부부의 득남(창세 18,13-14), 동정녀의 출산(루카 1,34-37), 완전한 파괴 후 농사 재개(예레 32,27), 단 하루만에 한 민족을 탄생(이사 11,8) 이적들처럼 그 사건이 예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타르수스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동안, 부활하신 이의 환시를 보았음을 증언한다. 사도 행전에 쓰여진 사건에 관한 서술에 따르면, 환시를 본 시점에 그가 실제로 실명했었고 하나니아스를 만난 뒤에 비로소 시력을 되찾았다. 이 시력을 되찾은 시점에 그가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사도 9,1-19; 22,6-16).

  마지막으로 라자로와 어느 부자 이야기의 결말을 기억해 보자. 아브라함 곁에 있던 가난한 이, 즉 라자로를 그의 형제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보내달라는 (그렇게 함으로써 형제들을 회개시킬 수 있도록) 부자의 최후의 요청 이후에, 그는 이런 대답을 듣는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27-31). 이러한 선언은 감각적 경험에 반박할 수 없는 효력을 부여하려는 기만을 명백히 비판한다. 8)

  이러한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처지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라는 결론을 끌어 낼 수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에서 오는 증언의 중대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불리하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하자.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매우 중요한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실제로, 요한 복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처에 토마스가 손을 넣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역설처럼 말씀하신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이것은 우리에게 작은 위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도리어 숭고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신앙의 참된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진리에 이르고 진리를 따르는 길을 명시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꿰뚫어 보면서 설득하는 말씀의 힘에 의탁하기 위해서 육안의 검증하려는 요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나이에 있던 우리 조상들은 불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직접 접촉하는 것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심지어 삶을 파괴시키기도 했던 경험을 하고 나서, 중재자인 모세의 말을 통해서 주님의 계시를 받기를 요청 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결정을 승인하시며 말씀하신다. “그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져, 늘 나를 경외하고 나의 모든 계명을 지킨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면 그들과 그들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 5,29). 생명과 행복의 길은 믿음의 여정을 가정하고 부여한다. 이 여정은 곧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해와 영적 지각의 체험, 그리고 개인적이고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진리를 얻는 체험으로 표현된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사화에서 말씀(과 말씀을 들음)은 시각적 경험을 보완하는 요소로 함께 제시되는 것을 넘어서, 믿는데 있어서 더욱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무덤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즉,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들에게 말한 것과 일치한 것이다(요한 20,1-2). 그들은 무덤에 남아 있던 수건과 아마포를 보았고, 곧 그것들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것도 알아챘다(요한 20,6-7절). 요한 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보고 믿었다”(8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 추측하건대 – 그는 저 특별한 사물들의 숨겨진 의미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설자의 논평이 주목된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9절). 따라서 이 표징들은 신비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표징들로 인해 그들은 당황했고 놀라워했으며(루카 24,12), 아마도 의문도 가졌을 것이다. 이 표징들의 의미는 단지 부활의 신비를 전한 성경을 “이해”할 때에만 알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은 루카의 전승에 의해 명확하게 확인된다. 루카 복음서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시는 (앞서 루카 24,39-43을 인용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에 대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표징을 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부활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신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수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을 상기시키시며 이 말씀이 구약 위에 세워졌음을 알려주신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루카 24,44).

  그러므로 부활 사건을 본래 의미하는 바대로 “이해”하고 진정한 동의와 함께 받아들이려면, 이 사건을 성서가 전하고 있는 하느님 약속의 이행으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모세와 예언자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통 기도인 시편 작가의 한결같은 증언은 신앙인의 내면 깊숙한 동의를 위해 필요한 매개이다. 실제로 루카가 말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분은 당신을 만지게 하거나 제자들과 함께 먹는 것 (즉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분의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만족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 45-46).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을 여는 것은 부활하신 분에게 부여된 활동이고, 말씀을 통하여 실현되는 계시의 선물이다.

  사실 이는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와 함께 우리가 상상하는 그 여정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 이 여정은 하루 종일 걸리는 긴 시간의 여정으로 표현되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들의 말을 믿기에 “굼뜬” 제자들의 마음을(루카 24,25) 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고(루카24,27) 전해지는 것처럼 주님은 제자들을 인내롭게 가르치셨다. 이 예수님의 해석적 설명은 교도권의 강의나 논증하고 호교(護敎)하는 의미의 주석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침내 완성된 하느님 약속의 한결 같은 확증을 발견하게 하는 묵상의 과정이다. 또한 지성을 향해서 “마음을 열라”는 초대이며, 무엇보다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정열적 담화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가르침에 동의하고, 동시에 증언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루카 24,32-35).

  그래서 교회는, 부활하신 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을, 겸손한 충실함으로 받아 부활 전야의 장엄한 전례 안에서 재현한다. 이 안에서 교회는 세상의 창조에 관한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시작해 구원사의 시초 사건들을 지나, 예언자들의 말에 대한 조명과 시편의 믿음의 화답을 통해,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경이로운 예고를 비로소 이해하고 음미하게끔 인도한다.9) 이는 어떠한 교리가 아니며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들음의 여정이고, 신비롭고 성사적인 입문이다. 그 안에서 예식에 참여하는 이들은 마음을 열고 와 닿게 하는 계시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고 – 정확히 말하면 경험 해야 하며, – 의심과 낙담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즐거운 확신으로 건너가게 된다.

  부활전야에 전례를 완성시키는 이 여정은, 일 년 동안, 아니 더 나아가 전체의 삶 동안 완성되도록 초대받은 신자들의 여정의 본보기이다. 이는 상징적으로 은총의 오래된 경륜에서 구원의 새로운,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으로의 건너감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즉 인간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에 대한 약속과 예시를 내용으로 한다. 신약 성경은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분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을 증언하며, 예언자적 열정으로 부활이 신앙 공동체 모두에게 전하는 영원한 은총과 같은 충만함의 사건, 즉 종말론적 완성에 주목한다(참조 1고린, 15장).

  말씀을 읽고, 듣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과정은 완전히 종료될 수 없는 신앙인들의 여정이다. 주님이 주는 은총의 신비는 언제까지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향한 새로운 위안을 주는 영신수련과 모든 열림의 체험을 하는 순간, 기도 안에서 주어지는 계시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든 은총의 순간에 우리는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을 얻는 동시에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희망에 가득 찬 이 순간은 우리를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더 높은 지성으로 올라가도록 격려하기도 하고, 헤아릴 수 없고 심오한 신비의 풍요로움을 향해 내려가게 한다. 주님의 성경 말씀을 새겨듣는 행동은 이 여정을 돕고 지속시키며, 우리의 인식을 열어 놓는다. 왜냐하면 희생된 어린 양, 죽음의 승리자가 봉인들을 뜯고(묵시 5,1-14), 진리의 핵심 안으로 신자들이 들어가게끔 하고, 그 안에서 솟아 나오는 그들의 알렐루야 찬가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만남으로서의 부활 사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영적인 여정을 수행하며, 높은 이해력으로 주님 부활의 신비를 충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에 대해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어떠한 이미지를 찾아 보려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는 여성들의 발걸음이나 예수님의 육신이 정말로 무덤에서 사라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가던 사도들의 발걸음, 멀리 떠나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급하게 돌아오던 엠마오의 제자들의 발걸음, 또는 베드로가 호수에 낚시를 하러 갔다가 그의 주님을 뵙기 위하여 호수에 뛰어 들어가던 발걸음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계시의 장소를 향해 움직이던 이 여인들과 사내들의 발걸음은 어쩌면 불확실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발걸음 위에는 성경의 말씀에서 오는 등불이 있다. 이는 길을 밝혀 주고 용기를 주며 이끌어주고, 특히 마음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를 친히 보여준다.

  파스카 전야의 전례 예식은 그리스도 공동체에 이와 유사한 여정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파스카 초를 밝히는 행렬에 의해 상징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례의 독서의 순서, 즉 구약 성서의 말씀들(하나의 완전한 순환을 가리키기 위한 7편의 독서들)을 듣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렇다. 그는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선포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상징적이기는 하나, 이 여정은 더욱 실제적으로 실현된다. 이 전례의 순간은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 “인간”의 임무를 표현하며, 성찬전례 안에서 구원을 맞이 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이 방식으로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은 다소 부분적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주도권에 대한 관상과 더불어 완성된다. 부활 사건의 본질, 즉 결과적으로 전례예식을 통해서 이르고자 하는 본질은 실제로 제자들을 “만나러 오시는” 주님의 발걸음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말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떠나 천사의 발현을 말해주기 위하여 제자들을 향해 가고 있었던 여인들을 “만나러 오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마태 28,9)라는 구절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겸손한 찬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향해 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여인들이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루카 복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나타나시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그리고 마지막 발현은 (그리스도의 천상 승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승천 장면) 예수님의 주도권으로 시작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이끄시어,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가셨다”(루카 24,50).

  끝으로 요한 복음 사가는 이러한 관점을 완성하는데, 그는 부활하신 분께서 문이 닫힌 집 안에 있던 제자들을 만나러 “오셨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요한 21,19.26). 살아 계신 바로 그 분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즉 자신을 드러내시려 그들에게 오셨다. 마지막 이야기인 티베리아 호수에서의 주님의 발현(요한 21장)에서도, 주님께서는 주도권을 가지시고 고기잡이 기적이라는 표징을 깨닫게 해주시고, 무엇보다 베드로를, 그리고 베드로 안에서 그의 동료 모두를 용서하시는 표현의 말씀을 전하셨다. 인간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 주님의 발걸음은 언제나 그들을 앞서 나아갔다. 이렇게 주도적으로 앞선 가신 이유는 파스카 신비가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이끄는 이 마지막 계시는 예수님의 육체에서 일어난 변화, 즉 죽었다가 완전히 살아난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부활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부활 사건을 따라 나타나는 구원의 효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제자들이 깨닫게 함으로써 참되게 이루어진 구원의 효과를 명백히 함으로써 부활을 설명한다.

  이 주제를 밝히기 위해 요셉의 여정 마지막 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해 그는 다른 형제들의 질투 대상이 되었다. 요섭의 형제들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리기로 결정했으며, 그가 죽었다고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으로 증언했다.

  요셉이라는 인물 안에서, 특별히 그의 고통스러운 운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다른 자녀의 질시로 인해서 죽음에 넘겨지는 모습이다. 나아가 창세기 45장의 서술을 짚어 보는 것이 더욱더 의미가 있는데, 부활하신 분의 발현 사화들과 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둘 사이에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은데, 부활의 구원적 양상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세 요인만을 살펴보자.

  1) 기다림의 시간. 요셉이 그의 지혜로운 재능을 꽃피우며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을 때, 그는 영광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곡식을 얻으려 이집트에 온 것을 보았을 때, 그는 형제들이 자신을 금방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성경의 이야기에 따르면, 형제들이 그를 알아볼 때까지 몇 년에 걸친 여러 다른 만남과 다양한 계략이 필요하였다. 이 긴 시간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형제들의 마음이 연민으로 차츰 열리게 되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죽을 만큼 슬퍼하는) 아버지 야곱과 (노예로 팔려 간 라헬의 다른 아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될 위협을 받는) 막내 동생 벤야민을 향한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이 기억 안에서 그들의 잘못과 그로 인해 생긴 고통의 흔적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서도 이를 주목할 수 있는데, 비록 훨씬 짧은 시간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드러내시는 데 있어서 시간의 지체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 일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3 일 동안 제자들은 그들이 겪은 혼란스러운 사건들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스승님의 비극이라 단정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배반하고 버렸으며 도망쳤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정적인 인물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날들은 슬픔의 나날들이었고, 루카의 진술에 따르면 베드로는 슬피 울었으며(루카 22,62), 모든 공동체가 이 비극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엠마오 제자들의 상징적 이야기를 참조한다면, 혼란과 슬픔으로 닫혀있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을 알아보는 빛나는 순간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간을 쓰셨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복음사가들이 한 마음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성찰해 볼 가치가 있는 또 다른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바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부활 사건을 알리는 천사들을 보았으며, 적어도 마태오와 요한에 따르면, 부활하신 분을 만나고 알아보았던 첫 번째 사람들이다. 이 사실은 관례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견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견해를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사건이 사도들의 의식에서 불러일으킨 효과를 주목하면 좋겠다. 여인들은 주님을 골고타까지 따라갔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이 부활하신 분을 보았다고 증언했을 때,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들이 여인들처럼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 중 몇은 실제로 무덤에 갔지만, 여인들과 다르게 주님을 보지는 못하였다(루카 24,24).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은, 부활하신 주님의 방문이 얼마나 자비로운 것인지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자세를 성숙 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2) 부활하신 분의 주도권. 제자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분과 만남을 이루기 위한 어떠한 내적, 외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배경이 되는 창세기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 앞에 있는 재상이 그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라고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 대한 연민 가득한 사랑으로,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자신을 형제라고 선언한 사실은 자신의 친형제들의 범죄를 이미 화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 실제로 요셉은 자신의 역사를,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된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따른 사건으로 다시 읽는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앞서 보내신 것 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창세 45,5.7-8). 이로써 요셉의 성공은, 기적을 통해서 죄에서 생명의 놀라운 열매가 나오는 것처럼, 범죄의 증오마저도 포함한 모든 것을 선을 드러내는 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활동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요셉은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당당히 제위에 오른 것이다.

  이제 이 경이로운 일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수난의 상처들을 보여 주시는 순간에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지난 날에 대한 어떠한 비난의 말이나 꾸짖음의 기색 없이 그들에게 승리의 상징들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을 속죄하고 구원하는 사랑을 증명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만나러 오시면서 실제로 “평화”를 전하셨다(요한 20,19.26). 배반했던 이들에게 향하는 화해의 말씀인 “평화”를 전하시고,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께서 신비안에서 계획하신 고난의 “필요성”을 보여 주시며, 그들과 함께 구원사를 다시 읽으신다. 그 역사 안에서 자비의 승리와 하느님 구원의 경이로운 도래가 찬연하게 빛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를 친히 알려주심으로써,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 사랑이 용서와 치유, 나아가 생명을 다시 살리는 힘을 지닌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말씀해주신다.  

  3) 파견. 다시 찾게 된 친교의 상징, 즉 죄와 그 결과에서 오는 죄책감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요셉의 형제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표지는, 그들이 체험한 경이로운 사건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임무를 부여하는 데 있다.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요셉에게 보내졌다. 그들은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이 사실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위한 생명의 놀라운 근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달함으로써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지금은 살아있고 영광스러운 잃어버렸던 아들의 성공으로 인해 다시 힘을 얻어, 다시 합쳐진 가문 전체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온다(창세 45,9-13).  

  이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는 무덤 옆에 있던 여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는 동시에 인간의 형제애적 친교와 연결된다. 동시에, 이 친교에서 사도들의 사명으로 맡겨진 선포(kerygma)가 비롯된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파견하는 제자들에게 사랑의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그들이 용서의 원천이 되게 하신다(요한 20,22-23). 그리고 제자들은 증언자로서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가서,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 사랑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 구원자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떠난다(마태오 28,19-20).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다.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다(시편 118,23). 요셉의 형제들의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빛이 바래가던 사건이 이제 찬란하게 완성된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구원하고 파견하는 역사이고,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이며 생명을 얻는 사건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 16-28 | 4003 (25 mar/8 apr 2017)
** Pietro Bovati S.J.
1)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2004, 647항.
2) 프랑스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 (Emmanuel Carrère)는, 자신의 소설 『왕국』에서, 그리스도교 기원에 대한 역사적 재현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며, 현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료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며 진지하게 대면하고 곰곰이 성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의해 버리는 것을 문제로 제기한다. 진정한 신앙인조차도 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일에서 면제될 수 없을 것이다 (참고 P. Gibert, «Da lui a noi: qual è “Il Regno” di Emmanuel Carrère?», in La Civiltà Cattolica 2015 III pp.308-317). 마르티니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적으로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는 비신앙인과 신앙인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말하고, 물으며,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예리하고 염려스러운 질문들을 한다. 내 안에 있는 비신앙인이 내 안에 있는 신앙인을 불안하게 하고 반대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 이런 대화의 명확함과 진실함은 나에게는 인간적 성숙함에 도달하는 징후로 보인다” (C. M. Martini, Le cattedre dei non credenti, Bompiani, milano 2015, p.6). 그는 라칭거의 저명한 책인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에서 고려되었던 것을 다시 다룬다. 신앙의 동의를 향한 여정은 내적 여정의 인내심과 용기를 요구하며,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바르게 이 여정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신다.
3) “복음사가들은 부활의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언하거나, 증거들의 열거를 완성하는 데에 주요한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종교적 의미 안에서 각자 다른 시점에 따라 부활의 사실을 알리고 소개하기를 더 원했다” (C. M. Martini, Il problema storico della risurrezione negli studi recenti, Roma, Libr. Ed. Gregoriana, 1959, 73).
4) 토마스 또한 다른 사도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다 (요한 20,24-25).
5) “그들 중 몇은 그러나 의심하고 있었다”는 서술은 불가타 번역에 기초한1971년의 이탈리아 주교회의 번역본에 해당된다. 한편, 2008년에 주교회의는 그리스 원문에 충실하게 “그러나 그들은 의심하였다” 로 새롭게 번역하였다.
6) 루카의 이야기에서 깨닫게 되듯이, 감각(시각과 촉각)은 온전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를 환영에 현혹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7) 따라서 “시각”에서 오는 감각적 경험과 “계시”에서 오는 영적 터득을 구별해야 한다. 이 안에서, 눈으로 지각되는 것의 실재를 제자들이 취하게 되는 것이다.8) 비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앞선 이 발언은 아브라함에 의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이 발언의 가치를 상대화 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들의 논의 체계를 완성시키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나타나지 않으셨고, 오직 성경의 말씀을 믿도록 가르쳤던 이들에게만 나타나셨음을 (사도 10, 41; 13, 31) 이해하게 돕는다.
9) 이 여정에 관해서는 다음의 책을 보라: Jean-Pierre Sonnet, La Bibbia si apre a Pasqua. Il lezionario della Veglia pasquale: storia, esegesi, liturgia, Cinisello Balsamo, San Paolo, Milano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