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심판

GESÙ E IL GIUDIZIO*

마르크 라스투앵 신부(예수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성삼의 딸들 수녀회) 옮김

  “하느님, 그분께서 심판자이시라네!”(시 50,6). 시편 저자의 이 외침은 그리스도 시대에 히브리인들의 공통된 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확실히 인간들과 나라들을 모두 심판하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악인이 주님을 업신여기며 ‘당신께서는 벌하지 않으신다’고 마음속으로 말합니다”(시 10,13 참조). 그런데 이 말에 랍비 아키바는 이렇게 응답한다. “심판이 있고 심판자가 계신다.”1)

  협박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희망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무엇보다도 우선 나쁜 소식이 아니다. 당신 백성의 구원을 원하시는, 나아가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성경과 경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지혜 11,24). 성경의 신앙은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심판자이시라는, 그 어떤 인간 제국도 그 어떤 권력자도 그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이 믿음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을 듣는 히브리인들과 이 확신을 나누신다. 수많은 비유와 표상과 단어들이 이 심오한 확신을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행하실 것이다. 의로운 심판관은 그분 본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ㄱ).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판에 대해 말할 때 당신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신다. 성경 본문과 당시의 유다인들의 저술 가운데서 유래한 본문들을 잘 알아 가다 보면 점차적으로 그 독창성을 감지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심판에 대해, 정의에 대해, 심판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시대를 판단하라***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현재에 대해, 그리고 현재 안에서 판단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느님께서 미래에 심판하시리라고 믿는 것은 좋다. 그런데 현재는 어쩔 것인가? 신앙인은 지불을 무기한 연기하듯이 하느님의 최후 심판으로 미루려는, 그리고 현재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자신이 판단하라는 요구에서 빠져나가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자기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권고를 기억한다면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시대를 판단하라고 초대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희는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5-56). 이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권고이다.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열쇠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를 알아보는 능력이다.

  예수께서 하신 생애 최초의 확정적 판단은―그분은 이 판단에 마지막까지 철저하셨는데―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사명을 주어 그를 파견하셨다는 것이었다. 요한이 백성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는 시대를 정의롭게 판단하는 것이다. 최초의 결정적 질문은 이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루카 20,4). 이는 진짜 문제이다. 예수께서 여정을 시작하셨다면 세례자가 하느님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먼저 당신의 온 존재로써 이 결단과 이 철저한 영적 확신을 증명하기 위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려고 요르단으로 가셨는데, 그 확신은 요한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요한의 사명의 기원을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회개를 위한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이것이 심판이다.

  예수의 이 처음의 판단과 그것이 그분의 생애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한과 주님께서는 구원계획을 시작하셨으며, 예수께서는 그에게서 당신 사명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를 알아보셨다. 그것은 세례자의 사명이라는 맥락 안에서 제시되지만 동시에 고유한 특징들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이었다. 예수께서 따라가신 이 여정에는 풍부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기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시대가 어떤가?” 심판의 시간은 먼 미래로 옮겨져서는 안 된다. 이미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추진하고 계시는 모든 일이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시간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각자에게 속한다. 누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신호를 주시는가?

  스스로 판단하기

  우리가 처한 시대를 판단하라는 권고인 루카 12,55-57에 나타난 예수의 질문에는 또한 스스로 판단하라는 권고도 들어 있다. 이는 우리에게 놀라운 것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거룩한 백성 안에는 이 일을 맡은 재판관들과 사제들이 있지 않은가? 요는 바로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좋아하시는 표현들 중 하나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 14,35)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구성원 수가 많은 공동체는 판관들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이 받는 유혹들 중 하나는 늘 판단의 책임을 짊어지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자 판단하는 임무가 맡겨진 판관들의 존재를 내세워 의존하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조차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3-14). 그분은 이렇게 덧붙이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여러분은 인간의 삶이 재산에 있지 않다는 것과 형제들 사이의 질투는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시초부터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야기되고 있지 않습니까?

  공관복음서에서 다루기 시작하는 이 주제는 후에 요한이 광범위하게 다룬다. 세상의 방식에 따르면 판관들이 메시아의 권능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 자체도 그분의 일차적 사명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이 발전시키는 관점은 바로 이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께서 심판관이신 메시아이시라고 상기시키는 것은 구원자이시오 생명과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그분의 사명을 부차적 차원으로 흘려보내 버릴 위험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물론 정의로운 심판자이시지만 심판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다. 요한은 스스로 심판관으로 나서지 않으시는 예수의 이 침묵을 강조한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요한 8,16).

  이 구절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잘 묵상하고 깊이 새긴다면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에서 예수께서 심판 앞에서 극도로 조심하시는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신중하게 행해져야 한다.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는’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에 대해 지니시는 관계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판단할 수는 없을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충분히 상황을 밝히지 않은 사실로 인해 우리의 판단이 너무 자주 틀리지는 않았더라면?

  자기 형제를 심판하는 것

  일단 때를 잘 선택했고 각자가 스스로 직접 판단을 하고도 아직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한 여지가 있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바로 자주 하게 되는 것,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예수께서 이웃을 심판하지 말도록 끈질기게 권고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권고가 상황과 행동을 판단하지 않을 필요에 대한 것이라고 알아듣는다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실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루카는 즉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하고 밝히면서,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하고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하는 심판과 단죄하는 심판을 구별할 필요가 있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자 앞에서 땅에 몸을 굽히시는 방식으로 생각하자. 그분은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요한 8,11) 하고 말씀하신다. 단죄하지 않음이 심판에 앞선다. 죄가 있었다. 하지만 단죄하지 않는 것은 어렵고도 힘든 내적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 하나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하여 쉽게 그 사람을 심판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산다는 것은 각자가 변할 수 있다고 믿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인간적 차원에서 판단이 우리 삶에 참으로 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리타 바세(Lytta Basset)가 우리 각자는 “결정적 판단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려는 이 충동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하고 쓴 것은 맞는 말이다. 심판은 심판 당하는 이웃에게 행하는 잘못일 뿐 아니라, 그리고 우선적으로 그런 잘못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입는 상처이다. “우리의 판단하는 마음은 마치 가시 돋친 고집통처럼 끊임없이 우리 기쁨의 여정을 침범하고 덮어 버린다.”2)

  예수께서는 우리 인성의, 그러니까 당신 인성의 이 부분에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그분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아우구스티누스식 격언을 철저하게 실천하셨다. 선입견 없이 죄인들을 향해 가셨지만 사실에 대해 눈을 감지도 않으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요한 4,17-18). 죄와 곤경, 고통의 영역에 자리한 것을 얼마나 섬세하게 선(善)과 참됨의 질서에 속하는 것 안에 들게 하시는지! 우리 역시 어떤 죄의 상황을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참된 모든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친다면? 그렇게 해서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지는 않을까? 

  이에 관해서는 자캐오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모범이 된다. 예수께서 주도권을 잡으셨다. 죄인의 집에 스스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오늘이라는 은총이 자캐오의 마음 안에 흘러들어가도록 두셨다. 어떤 식으론가 그가 자유롭게 자신의 참회를 확실하게 하도록 두셨다. 그분은 회심이 일어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고 각 사람에게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내리는 판단들은 흔히는 우리 자신에게 내리는 판단의 결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관대한 아량과 지나친 엄격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어떻게 해서 자신에게 좀 다른 시선을 돌리게 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그러한 판단을 첫 자리에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이 간극을 의식하도록 도와 주셨고 하느님의 자비에 토대를 두고 자신들의 삶을 비추어 보도록 그들을 초대하셨다. 먼저 우리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보지는 못하고 이웃을 판단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주의를 옮겨가신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이웃을 고려해서이다. 그분은 결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판단을 명백히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판단으로 이끄는 동기들을 의식하도록 권고하셨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따라서 자신들에 관해 다른 조망 안으로 들어가도록 권하신다.

  그분 말씀 중 많은 부분이 우리의 판단방식의 열쇠로서 하느님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나중에 요한은 이 주제를 이렇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각자가 자신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것, 아버지가 내민 손을 거부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눈길을 점점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기를 청하면서 이 심판을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그 눈길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어 눈을 감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일차적으로는 선하고 참된 것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쁜 소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심판관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는 힘주어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심판관이 되고 싶어 하며 그렇게 행동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여러 형태로 죄는 자신의 심판관이 되려는 인간의 완고함에서 나온다.”3)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완전히 무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심판 당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시기까지 하셨다. 심판자이신 그분은 당신이 심판하셔야 했던 사람들에게서 심판을 받으셨다. 우리 위에 자리한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심판자이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쁨과 똑같은 기쁨으로 기다려야 한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오시리라”는 것은 위협이 아니라 행복한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자로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 받으러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옳은 일을 하셨다. 원칙적으로는 ‘아멘’ 말고는 이 모든 것에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이다.”4)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자신을 단죄하지 않고 올바르게 심판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라면?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집단적 역사가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을 담고 있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다. 심판을 요청하는 것은 고통 받는 온 인류의 정당하고 긴급한 갈망이다. 빛을 받지 못하고 심판 받지 않은 모든 불의는 심판을 요구한다.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의로움에 대한 이 갈망이라는 토대 위에서 이야기(racconto)가 우리 삶에서 행하는 역할을 분석한다. “인간의 삶은 결국은 이야기될 필요가 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들을 한다. 이렇게 보는 입장은 패배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를 보존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할 때 모든 가치를 얻게 된다. 모든 고통의 역사는 복수를 외치고 이야기될 것을 요구한다.”5)

  여기서 우리는 일련의 경찰 수사로 얻어지는 성공을 기억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 존재가 자신 안에 간직한 정의에 대한 깊은 목마름에 부응한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서, “정의를 행하는 시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라는 모토를 가진 미국 드라마 《콜드 케이스》(Cold case, 미결 범죄들) 시리즈를 인용해 보자. 탐정소설들도 역시 이러한 추구에 기초하고 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과 진실에 대한 목마름인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추구한다. 소중한 사람 하나를 잃었을 때라도 진실을 아는 것은 마음을 진정시킨다.

  몇몇 위대한 탐정소설 작가들은 바로 자신들의 저술에 영감을 주는 이 가정(假定)에 이야기식 형태를 부여했다. 종종 대단히 심하게 악에 공격당한 세상에서는 정의를 희구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콜드 케이스》에서는 자주, 희생자와 연결된 사람들만 자신들이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후에 종종 여러 해 동안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 자신도 편치 못하며, 발생한 일을, 곧 자신이 저지른 일을 설명하면서 일종의 구원을 체험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고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으려고 하는 범인의 경우는 가장 폭력적인 경우인데,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간단히 말해서,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가 쓰고 있듯이 “정의는 끔찍한 실재이지만, 불의는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이다.”6)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탐정소설들은 정의에 대한 꿈을 담고 있다. 잘못한 일들이 바로잡히고 나쁜 사람들이 그들이 버릴 생각을 못했던 표지들에 의해 배반당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투사한다. 살인자들이 체포되고 (…) 무죄한 희생자들의 처지가 회복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그런데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은 이렇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비전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이에 작가는 이렇게 답한다. “탐정소설들은 참된 것이어야 할 세상에 대한 비전을 생생하게 유지한다. 물론 사람들은 그 소설들을 재미로, 즐거움을 위해 읽는다. 재미로 십자말풀이를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간직하고 있다.”

  탐정소설들은 우리에게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이해할 만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콜드 케이스》의 경감 릴리 러쉬(Lilly Rush)의 일―소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을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깊은 곳에 있는 이 확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범인의 처벌이 아니라 진실이 인도하는 화해인 것이다. 이는 대단히 그리스도교적인 확신이다. 진실 없이 자유는 없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다.

  정의 자체가 기쁜 소식일 수 있는가? 그렇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진실의 말을 들려 줄 수 있겠는가? 성경학자 다니엘 마르게라(Daniel Marguerat)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심판의 지평은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어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려는 세상의 욕망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상처이다. 심판은 세상이 이렇게 우상숭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파고드는 일에서 숨통을 열어 준다.”7) 우리의 인간적 심판은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실”(이사 25,8)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목마름을 표현한다. 예수의 참행복은 우리에게 그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은 심판자로서이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예수께서 심판에 대해 지니신 관념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굳건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창적이다. 그분 가르침의 다른 차원들에 해당되는 것이 심판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곧 예수께서는 성경의 가르침의 모든 주제들을 자신 안에 결합하시고 조상들의 전통을 혁신하면서도 그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신다. 모방할 수 없는 어조로, 그리고 놀라게 하는, 아니 들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당신의 보물창고에서 새로운 것들과 오래 된 것들을 꺼내신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지만 각 사람은 이미 지금부터 잘 판단하도록 권고 받는다. 하느님의 심판은 식별의 수동성과 식별하지 않음에 대한 알리바이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두 번째로, 각 사람은 이웃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도록 권고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세상을 그대로 살도록 두는 쪽을 택하셨다. 최고의 심판자보다 더 엄한 심판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라!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자이시지만 당신 심판을 멈추고 인내를 사용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자비를 행하고 싶어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본받도록 권고하신다. 우리에게 이렇게 되풀이하여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은 그 나라가 오기 전에 행동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하실 심판에 대한 믿음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촉구가 아니라 반대로 행동을 위해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는 경청의 촉구이다. 아무튼 결국 잘 판단해야 하는 것은 시대와 자기 자신들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첫 번째 회심(전환)은 하느님께 대한 판단의, 하느님 자신에 대한 시선의 전환이다. “평화를 위한 계획이지 재앙을 위한 계획이 아닌”(예레 29,11) 하느님의 관점으로 조금씩 들어서는 사람은 단죄를 멀리하는 비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에게는 심판이 단죄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도 역시 같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데 마태오 복음은 완전히 심판의 표지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두 전승이 서로 그다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복음사가인 요한도 예수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요한 7,24). 마태오 역시 사람의 아들이 돌아오는 엄숙한 장면에서 마지막 심판의 말씀을 가장 작은 이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 대해 남겨두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마태오는 이렇게 십자가의 성 요한이 했던 유명한 말을 앞당겨 얘기한다. “인생의 저녁이 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심판 받을 것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423-432 | 4019 (2/16 dicembre 2017)
** Marc Rastoin S.I.
*** 새 성경에는 “시대를 알아보라”로 되어 있다. 원문의 ‘giudizio’는 ‘심판’이나 ‘판단’으로 옮길 수 있는데 본 글에서는 문맥에 따라 선택한다. ― 역자 주
1) 창세기의 히브리 해설서, Bereshit Rabba 26,6.
2) L. Basset, Moi je ne juge personne, Paris, Albin Michel, 2003, 9 s.
3) K. Barth, Dogmatique, IV, 1, Genève, Labor et fides, 1966, 232.
4) 같은 책, 287.
5) P. Ricœur, Tempo e racconto, vol. 1, Milano, Jaca Book, 1986, 123.
6) «Justice is a terrible thing, but injustice is worse», citato da S. Hauerwas, A Better Hope, Grand Rapids, Brazos, 2000, 205.
7) D. Marguerat, «Loi et jugement dernier dans le Nouveau Testament», in F. Mies (ed.), Bible et droit. L’ esprit des lois, Bruxelles – Namur, Lessius, 2001,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