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갈림길에서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예수회원들과의 대화

«ESSERE NEI CROCEVIA DELLA STORIA»
Conversazioni con i gesuiti del Myanmar e del Bangladesh*

교종 프란치스코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프란치스코 교종은 21번째 사도적 순방을 위해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교종은 11월 29일 수요일 미얀마 주교단을 접견한 뒤 만남을 가졌던 작은 방을 나오면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약 300명의 신학생들과 마주했다. 또한 자랑스럽게 중국 국기를 흔드는 소규모 중국 신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은 “중국에도 곧 와주세요!”라는 바람을 전달했다.

  교종은 걸어가는 중에 이 같은 즐거운 만남을 가졌고, 곧이어 미얀마에서 활동하는 31명의 예수회원들을 만나기 위해 주교관 1층에 있는 경당으로 들어섰다. 13명(사제 3명, 수련자 5명, 연학수사 5명)은 미얀마 출신이었고, 나머지 예수회원들은 태국과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호주, 중국 출신이었다. 또 다른 21명의 미얀마 예수회원들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필리핀에서 공부 중인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참석한 이들은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예수회 기관들을 대표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종적 혹은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교육기관들, 국경지역 교구에서 카친족과 샨족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본당, 가난한 이들이 다시 집을 짓고 소규모 창업자금을 대출받도록 예수회원들이 도와주고 있는 양곤의 빈민 지역에 있는 학교, 카친과 카야 주 그리고 태국과 중국 국경지역에서 갈 곳을 잃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회 난민 봉사단(Jesuit Refugee Service)이 바로 그 기관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입장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교종은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인사를 하였다. 보통의 경당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작고 긴 편이었지만, 줄 맞춰진 의자들을 무색케 할 만큼 자연스런 환영의 분위기가 넘쳤다. 교종이 다양한 뿌리와 배경을 지닌 많은 사람들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참석자들의 얼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예수회 연학수사는 친(Chin)족의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교종은 영어 통역자가 필요하다며, 곧바로 마크 마일즈(Mark Miles) 몬시뇰을 소개하였다. 그러고는 “이분은 좋은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예수회 비밀들을 절대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라며 농담을 곁들였다. 그러고 나서 교종은 자연스레 참석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아래에 나오는 내용은 내가 참석했던 두 차례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서, 교종의 승인을 받아 공개하는 것이다. 본문에 더하여, 대화와 최종 의견의 맥락을 짚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배경 설명도 곁들였다.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 김학준 라우렌시오 신부(예수회) 옮김)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얼굴이 많이 보여서 기쁩니다. 이것이 반가운 이유는 희망의 표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젊은이들이 뿌리가 있다면, 그들은 미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다면, 그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버립니다. 저는 먼저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성찰을 하면서 이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내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뿌리를 갖고 있는가? 내 뿌리는 끈질긴가 아니면 약한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질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은 뿌리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곧, “사람은 찬미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신수련은 또 다른 뿌리, 즉 사랑의 뿌리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는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관상을 제안했습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시작하면서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에게서 몇 가지 질문을 받고 싶습니다.

  교황 성하, 저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모두 미얀마에 살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나라의 상황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신수련’이라는 같은 영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미션을 향해 움직이게끔 하는 강생을 관상하는 영성입니다. 미얀마에서의 실제 상황을 살펴볼 때, 교황님께서는 저희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요?

  저는 우리가 예수회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이 강생의 신비 없이는 사명을 생각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강생 신비는 우리가 현실과 세상에 완전하게 다가서고, 사람과 문화에 대해서도 가까이 다가서도록 비춰줍니다. 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친밀함은 항상 강생의 방식을 따릅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오신 말씀의 강생과 같은 친밀함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자기 낮춤(synkatabasis), 곧 함께 있음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강생하신 말씀이 가까이 다가오신 것처럼 예수회원은 항상 보다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편견 없이 바라보고 들어야 하지만, 신비로움을 지녀야 합니다. 두려움 없이 신비롭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방식입니다.

  토착화(inculturation)는 이렇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토착화는 하나의 유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우리의 문화와 언어, 육체와 삶을 받아들이신 뒤에 돌아가신 ‘말씀’이신 그분이 지니신 본질입니다. 토착화란 내가 파견 받은 사람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회원의 기도는―주로 토착화와 관련해서 보자면―중재의 기도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두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회의 기도생활에는 많은 실패가 있었습니다. 초창기에 몇몇 예수회원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세 시간을 기도에 쏟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냐시오 성인을 골치 아프게 했습니다 … 그래서 성 이냐시오는 “아닙니다. 활동 중 관상을 하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74년은 제가 이것을 경험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때는 엄격하면서도 세상과 분리된 채로 규칙을 준수하고자 했던 소위 “맨발의 예수회원들(Discalced Jesuits)”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 이냐시오의 정신과 대립되는 정반대의 개혁이었습니다. 진정한 기도와 참된 예수회적 삶의 방식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방식은 과거에서 영감을 받지만 항상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미래를 향해야 합니다. 도전은 과거에 있지 않고, 오히려 미래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복자 교황 요한 6세는 예수회를 크게 도와 주셨습니다. 1974년 12월 3일에 하신 연설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한 문단을 예로 들자면, “역사의 갈림길 어디에서든, 그곳에는 예수회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6세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분은 “수도원에서 문을 닫아걸고 지내세요.”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역사의 갈림길을 향해 가십시오!”라고 예수회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역사의 갈림길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활발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에 대해 잠시 돌아보고 싶습니다. 여기 온 어떤 이들은 교황님을 뵙기 위해 3일을 걸어서 왔고, 다른 이들은 6개월 동안 돈을 따로 모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 모두가 교황님을 만나서 행복했노라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많은 언론에서는 교황님의 미얀마 방문이 가장 힘들고 도전으로 가득 찬 방문 가운데 하나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들의 추측이 맞습니까?

  두 가지를 언급했군요. 먼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신자들이 많이 걷고 돌아다니며 왔다는 것, 여기에 오려고 돈을 모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굉장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우리에게 영웅적인 덕목들을 가르쳐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도덕성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 교회에 대한 소속감, 베드로의 후계자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 열망에서 이미 저를 추월해버렸고, 이 백성들의 목자가 바로 저라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이것을 느끼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언이지만, 만약 예수회원이 청해야 하는 은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 커다란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첫째 주간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바로 그것을 청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부끄러움의 은총을 청하십시오. 그것은 은총입니다!

  이제 말씀하신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정말로 매우 어려운 여정이 맞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번 방문이 취소될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제가 완수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방금 전에 읽은 독서기도에서, 자기 백성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목자들에 대해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젖을 짜 먹습니다. 양들로부터 젖을 탈취하고 양털을 깎아버리는 목자들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징이 있습니다. 음식은 부유함을 나타내고, 양털은 허영을 의미합니다. 부유함과 허영심에 익숙해져버린 사목자는 성 이냐시오가 말한 대로 결국 커다란 오만함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유명한 논문인 「목자들에 관하여(De Pastoribus)」에서 이 주제를 택하여, 만약 나쁜 목자가 재산과 허영에 집착한다면, 그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좋은 목자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난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가난을 수도생활의 어머니이자 보루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들이자 겸손한 사람들이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목자들은 이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이번 여정이 어렵게 보였다면 이 여정 역시 우리가 있어야만 하는 역사의 갈림길인 셈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와야만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님의 방문은 한 걸음 전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주 말씀하신 대로, 중요한 핵심은 저희에게서 양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미얀마 각지에서 왔으며, 사제로서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난민들을 위해 일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희가 하느님 백성의 냄새를 강렬히 느끼면서도, 이냐시오 성인께서 저희에게 당부하셨듯이 교회와 함께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겠는지요? 어떻게 하면 저희가 이곳에서 교황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최근 저는 주교님들에게 두 가지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양 냄새요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냄새입니다. 우리는 양 냄새를 알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또 함께해야 합니다. 양들은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냄새를 풍기는지 알아챕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오늘날 선교 임무는 더 이상 개종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베네딕토 16세 교종께서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개종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증거함으로써 성장합니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 교종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난민들이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네 군데의 난민 캠프를 방문했습니다. 세 개의 대규모 캠프가 람페두사(Lampedusa), 레스보스(Lesbos), 그리고 이태리 북부 볼로냐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친밀함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장소와 또 다른 이름의 감옥을 잘 구분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난민 캠프가 강제수용소나 감옥과 별반 다를 바 없기도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의 존재감을 이탈리아에서 강하게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여기에 있고, 너무나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비극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얘기를 나눴던 어떤 난민은 집을 나와서 람페두사에 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5번이나 팔렸습니다. 속아서 로마 인신매매단에 팔려 온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과 관련하여, 어느 노(老) 사제는 로마에 사제가 더 많은지 아니면 팔려 와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더 많은지 잘 모르겠다며 저에게 씁쓸한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각국에서 모여든 사제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로마는 또한 인신매매로 팔려온 성매매 여성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 편집자 주) 이들은 납치되고 기만당하여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끌려온 소녀들입니다. 로마 교구는 이 문제에 대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방과 관련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어린이 노역에 강제로 동원되는 아이들에 대한 착취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제는 노는 방법을 잊어버린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셋째 주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아이들을 보는 것은 고통 받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할까요? 네, 저는 특히 국경을 막아버린 나라들을 방문하여 분명히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유럽에는 자신들의 국경을 닫아버린 나라들이 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나라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마음 역시 닫아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닫혀버린 그런 마음에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선교임무입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가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함께 할 것입니다. 많은 난민들은 저녁으로 빵 한 조각을 먹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케이크도 먹을 겁니다. 이것은 저에게 레스보스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 및 히에로니무스 아테네 정교회 대주교와 함께 레스보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잘 정렬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저는 수천 명의 사람들 앞을 걷고 있었습니다. 제 뒤로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가 따라 왔고, 이어서 히에로니무스 대주교가 걸어 왔습니다. 저는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저와 악수를 하고는 있었지만 시선은 뒤를 바라보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지?”하고 제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저는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가 사탕이 가득 담겨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탕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한 손으로 저와 악수를 하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사탕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아이들이 요 며칠 동안 먹은 유일한 사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레스보스에서의 또 다른 이미지는 제가 하느님 앞에서 많이 울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세 명의 어린 자녀가 있는 30대의 어떤 아버지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무슬림입니다. 제 아내는 그리스도인이구요. 우리는 서로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테러리스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아내의 십자가를 보더니, 그것을 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거절했고, 그들은 제가 보는 앞에서 칼로 아내의 목을 그어버렸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제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은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대도시의 거실에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인간적인 비극에 침묵을 지키고 싶어 하겠지만, 우리는 이를 널리 알리고 공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곳의 많은 예수회원들은 양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양성 담당자로서, 저희는 오늘날의 예수회원이 어떠해야 하는지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좋은 예수회원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와 관련하여 저희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좋은 예수회원이 될 수 있도록 미얀마에 있는 젊은 예수회원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지 마세요! (이 부분에서 교종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양성 담당자 중에는 일선 현장에서 계셨던 노(老) 예수회원이 계셨습니다. 훌륭한 과학자 예수회원이었는데 한때 저에게 주신 조언 중에는 ‘예수회에서 꾸준히 살려거든, 명확하게 생각하고 애매모호하게 말하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과학자였지만, 좋은 양성 담당자는 아니었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 부분에서 교황님은 다른 예수회원들과 함께 웃으셨다). 말씀드리고 싶은 두 번째 것은 또 다른 인물과 관계있습니다. 여기 미얀마에서 그분을 언급하고 싶은데, 아마 그분은 자신의 이름이 이곳에서 얘기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예수회원이고, 이름은 미겔 앙헬 피오리토(Miguel Angel Fiorito)입니다. 이분은 베드로 파브르 성인의 『영적일기(Memoriale)』의 원전 비평 연구판을 펴내기도 하셨지만, 사실은 철학자였고 성 토마스와 하느님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자연 의지에 관해 논문을 쓰셨습니다. 그는 철학 교수이자 학장이셨지만, 영성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생인 저희에게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식별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도 그분이셨습니다. 만약 양성 중인 어떤 예수회원을 여러분이 만나게 될 때, 그가 식별을 할 수 없거나, 식별을 배운 적이 없는데 식별을 배우는 데 그다지 관심도 없다면, 비록 그가 유능한 젊은이일지라도 다른 길을 찾으라고 말하십시오. 예수회원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식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우리에게 하루에 두 번씩 양심성찰을 하라고 한 것은 몸에서 벼룩이나 이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양심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제 의견으로 예수회 성소의 기준은 ‘이 지원자가 식별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이 식별을 배울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가 식별하는 법을 안다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나쁜 영에게서 오는 것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는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험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그가 영적 식별을 안다면 괜찮습니다.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식별하는 법을 알았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흑인 노예들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반면에 몇몇 고매한 신학자들은 흑인 노예들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수련원에 들어와서 사제서품을 받기까지 양성 받는 데 14년이 걸렸습니다. 함께 양성을 받던 동료들은 그 사이에 예수회를 떠났습니다. 미얀마 출신 예수회 사제는 이제 고작 세 명입니다. 양성을 받고 있는 회원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격려의 말씀이 있으신가요?

  주님께서 존중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유입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자유,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분은 침묵하시고 고통을 받으실 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극단적이기도 합니다. 이 극단과 예수회를 떠나는 것 사이에는, 죄는 아니지만 사람을 약하게 하거나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해주는 역사적인 상황들은 많습니다 … 수도생활의 포기, 사제직의 포기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 형제를 존중해야만 하고 그가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어야 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좋은 분이시고, 약간 강하게 표현하자면 은밀하신 분이시기도 하니,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밀함에 대해 몇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저를 놀라게 했던 어떤 예술 작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 야고보의 길(산티아고 순례길 ― 역자 주)이 시작되는 프랑스 중부 베즐레(Vézelay)의 성 마리아 막달레나 대성당에 있는 기둥머리가 바로 그 작품입니다. 기둥머리 한쪽 면에는 혀를 드러내고 눈을 뜬 채 죽은, 목을 매단 유다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악마가 그를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기둥머리의 다른 면에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를 잡아채서 어깨에 둘러매고 데려가는 모습입니다. 이 13세기의 조각가는 예술가였지만, 마음 안에서 그는 또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비가였고 용감했습니다. 그는 우리 신학자 가운데 아무도 감히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현명하시고 은밀하시다는 것을 대성당에서 용기 있게 말한 것입니다. 그는 특별했습니다. 만약 착한 목자의 입술을 잘 살펴 본다면, 마치 그가 악마에게 “너 나 때문에 망했지!”라고 말하면서 조소를 띤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항상 희망을 가져라 … 이 말은 남편이 자살을 하여 지옥에 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어떤 과부에게 아르스의 본당 신부였던 비안네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부인, 부군께서 몸을 던진 다리와 강 사이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저는 교사로서 양성을 받고 있는 예수회원으로서 가난한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서로 도와주려고 합니다. 어떤 소녀는 저에게 “제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데 과연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그 소녀에게 지적인 대답을 주려고 했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 질문을 교황님께 말씀 드려보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지적인 답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반(反)지성주의자는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두세요! 우리는 많이 공부해야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대답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아내를 잃은 남편에게, 아이나 아픈 사람에게 … 무슨 말이 소용 있을까요? 그냥 바라보는 것 … 미소, 악수, 팔짱, 어루만짐 …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은 우리 안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려주실 겁니다. 설명을 해주려하지 마세요. 그 소녀가 질문했던 것은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가진 것 없는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좀 더 가까이 다가서세요! 그 사람이 어떻게 당신을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조금 더 다가서세요. 함께 동반하세요. 곁에 있어주세요. 그러면 성령께서―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말하는 것은 가장 최후의 것입니다. 행동이 먼저입니다. 침묵 속에서 함께 하시고 곁에서 머물러 주세요. 아주 가까이 말입니다. 이것이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입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소녀에게 “좀 더 가까이 있어주렴!”하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가까이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뒤에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합시다.

  교황 성하, 저는 교황님께서 순방을 하실 때마다 왜 항상 예수회원들을 방문하려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른 질문도 있는데, 예수회원이 미얀마 사람들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항상 예수회원들을 만나는 이유는 제가 선교사라는 것과 죄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교종의 이 말씀에 참석자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이 질문에 등장한 “교회”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냐시오는 교회와 함께 느끼고, 또 교회 안에서 느끼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식별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위계질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만약 나 자신의 의견이 주교님과 다르다면, 용기를 내어 그를 찾아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담대함(parrhesia)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런 뒤에는 궁극적으로 순명해야 합니다. 잔 피에트로 카라파(Gian Pietro Carafa) 추기경이 교종 바오로 4세로 선출되었을 때 이냐시오 성인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만약 바오로 4세 교종이 예수회를 해산시킨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고, 이냐시오 성인은 잠시 기도하면서 마음을 다잡은 뒤 다시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회를 교회와 동급으로 혹은 하부교회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하면서도 죄로 물든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속에서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느끼고 침묵 속에 지내야했던 위대한 예수회원들의 사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드 뤼박(De Lubac) 추기경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사람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예수회가 자족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면, 더 이상 예수회가 아닙니다.

  이곳의 심각한 문제는 근본주의입니다. 저는 무슬림과의 긴장이 많은 지역 출신입니다. 근본주의에 현혹되는 사람들을 교황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돌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를 방문하시면서 이 사안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근본주의는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세례 받은 신자들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명예”를 지니고 있습니다. 학교 졸업을 앞둔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해서 연구한다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종교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심판관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본질로 가는 것―본질에 간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무엇이 근본적인가를 잊어버릴 정도로 가 버리는 것입니다. 근본주의는 그 결과들을 잊어버립니다. 근본주의자들의 태도는 다른 형태들을 취하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것을 너무나 강조하는 공통 배경을 가진 나머지 실존적인 것을 거부해 버립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역사를 부정하고 사람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는 강생을 부정합니다.

  모임은 “여왕이시며(Salve Regina)”를 함께 부르는 가운데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개인적인 만남과 사진 찍는 시간이 이어졌다.

  방글라데시 방문 기간 중, 교종은 12월 1일 오후에 네 종교의 대표자들(무슬림, 힌두교도, 불교도, 가톨릭) 및 시민사회 대표자와 함께 평화를 위한 교회일치운동 및 종교간 대화 자리에 참석하였다. 마침기도는 성공회 주교가 해주었다. 이어서 로힝야 사람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교종은 그들을 환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끝으로 교종은 방글라데시에서 일하고 있는 13명의 예수회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다카의 교황대사 관저로 이동하였다.

  방글라데시 지역의 예수회 책임 장상은 교종과 함께 하게 된 예수회원들의 기쁨을 전달했다. “저희는 방글라데시에서 일하고 있는 예수회원들입니다. 저희 중 9명은 이곳 출신이고, 3명은 인도, 1명은 벨기에 출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축복해 주셔서, 저희는 3개 교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 미션 지역은 연학수사가 14명, 주니어가 3명, 수련자가 3명입니다. 저희는 영신수련 피정집과 양성분야, 본당 사도직, 교육 사도직, 난민 사도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예수회원이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6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600년에 성당이 건립되었지만, 이듬해에 파괴되었습니다. 많은 사건을 겪은 후, 저희는 지역 교회가 저희를 초대한 1994년 이후에야 방글라데시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황님께서는 당신을 알현하는 특권을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저희 모두는 예수회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교황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원래 오늘 이 자리는 연설을 듣는 자리로 생각했으나, 그보다는 열린 대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바꿨습니다.” 교종은 환영 인사말에 대해 이렇게 답하셨다.

  언급하신 두 가지 연도, 1600년과 1994년이 저의 관심을 끄는군요. 몇 세기 동안, 예수회원들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변화를 겪으며 지냈습니다. 괜찮습니다. 예수회원의 삶은 원래 그렇습니다. 후고 라너 신부님은 무릇 예수회원이란 하느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 모두에서 식별하는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겪은 지난 세월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움직이는 것이자 식별에 비추어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교황 성하, 로힝야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이고, 교황님 역시 그들을 두고 형제이자 자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저희 관구장은 그들을 돕기 위해 두 명의 회원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로힝야라고 불립니다. 당신은 그들을 형제요 자매라고 얘기하시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저는 제게 무척이나 소중한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당시 노예들과 함께 지내셨지만, 몇몇 신학자들은―감사하게도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노예에게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예언적이었고, 그분은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떻게 하면 은행을 구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은행 구제가 핵심인 것이죠.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존엄은 과연 누가 구제할까요? 아무도 파괴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만약 우리가 약간의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면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언론이 관심을 갖고 이슈화하는 것은 은행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 앞에서, 우리는 울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세상은 눈물이라는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셨던 이냐시오 성인은 눈물이라는 은총을 청하셨습니다. 베드로 파브르 성인도 마찬가지셨습니다. 한때 우리는 미사 중에 눈물이라는 은총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당신은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저의 죄 많은 마음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세계의 뻔뻔함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기도하는 것이고 눈물이라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 제가 만난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제 자신과 온 세상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과 제 느낌을 공유할 뿐입니다…

  오늘날 예수회는 방글라데시의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예수회가 방글라데시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 관구장이 두 명의 예수회원을 난민 캠프에 파견했다는 사실에서 저는 예수회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소이고, “예수회 기본법”에서는 이를 ‘디스쿠리르(discurrir)’라는 한 단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즉, 이 말은 ‘앞으로 나아가라, 움직여라 … 돌아다녀라 … 영들을 분별하라…’ 이런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소를 위해 아름다운 일이면서 옳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교황님께서 이토록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에 와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수도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방글라데시는 저에게도 놀라운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풍요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추기경을 서임할 때, 저는 변두리 지역에서 성장하는 작은 교회들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 작은 교회들에게 위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즉, 변두리에서 성장하며 오랜 가톨릭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 작은 교회들이 보편 교회와 전체 교회를 향해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작은 교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음을 확실하게 느낍니다.

  오늘 가톨릭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신 후 소감은 어떠십니까? 평소처럼 아이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네. 저는 몇몇 아이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에는 로힝야 소녀 두 명과도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이들은 저에게 다정함을 줍니다. 이같이 잔인한 세계에서 다정함은 좋은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비가였습니다. 그의 진정한 면모가 최근에 재발견되고 있지요. 우리는 그분에 대해 엄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환자들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깊은 다정함을 갖고 있음을 여러 사례에서 드러내 보였습니다. 아루페 신부님은 예수회 총장으로서 우리에게 이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셨고, 이냐시오의 심오한 영혼을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냐시오 영성센터를 설립하셨고, 우리의 영성을 더욱 재정립시켜줄 수 있는 「크리스투스(Christus)」라는 잡지도 출간하셨습니다. 저에게 아루페 신부님은 예언자 같은 분이십니다. 방금 제게 하신 질문은 약하고 가난한 작은 사람들을 향해 다정하고 연민이 가득한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끔 해줍니다.

  예수회 난민 봉사단(Jesuit Refugee Service)을 설립하신 분도 아루페 신부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행기에서 뇌졸중 증세를 보이시기 전에, 아루페 신부님은 방콕에서 “기도하세요, 기도하세요, 기도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으로서, 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예수회원들과 아루페 신부님이 가졌던 대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아루페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예수회에 물려주신 마지막 유산이기도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사회학도 중요합니다만, 기도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즉시, 교종께서 바로 앞서 가진 로힝야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사회학적인 담론으로 마무리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 한 명에게 기도를 청하시며 함께 기도하셨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교종이 혹시 더 질문이 있는지 묻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없습니다. 오늘 교황님의 현존이 많은 대답보다도 더 좋았습니다!”하고 말했다. 만남은 묵주 축복과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번 대화에서 교종이 사용한 표현들을 되새길 때는 예전에 교종이 다른 곳을 순방하며 예수회원들과 나눈 대화를 모든 책의 서문에 교종이 손수 쓴 다음 내용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가 여기저기 방문하는 중에 특히 예수회원들과 만남을 갖게 될 때는 매우 자유롭다는 것을 느낍니다. 방문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짓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편안하고 집에서 쓰는 언어로 말하며, 오해받을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이 때로는 약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교종은 이렇게 덧붙였다. “때로는 저도 제가 느끼는 것을 말해야 하고, 그럴 때면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화하는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제 안에서 생겨나고, 이를 바탕으로 저 역시 성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1)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519-532 | 4020 (16 dic 2017/6 gen 2018)
1) Papa Francesco, Adesso fate le vostre domande. Conversazioni sulla Chiesa e sul mondo di domani, Milano, Rizzoli, 201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