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인 애도의 작업

L’ELABORAZIONE DEL LUTTO
COME RITORNO ALLA VITA*

조반니 쿠치 신부(예수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옮김

뜻밖의 현실인 애도

  죽음이라는 주제의 많고도 다양한 측면들을 대면하는 것은 특별히 남아있는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를 배우며 그에 대한 상실의 체험을 소화하는 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제기한다.1) 이것은 객관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역설적인 태도이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을 붙잡아 두려 하는 자연적 성향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해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지니고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생존하여 그 후에 다른 나라로 이주한 이들에 대한 연구들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애도의 “초세대적” 차원이 입증되었다. 생존자들은 외관상으로는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모습을 보이고 누구에게도, 특히 가족에게 그들이 겪은 것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자녀들이 성장해 가면서 지속적으로 장애가 나타난다. 그들은 분명한 이유가 없는데도 언제나 초조하고 우울하며, 자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일종의 전염병처럼, 부모의 억압된 고통이 자녀의 정신 안에 자리를 잡는다.2)

  아래에서 보게 될 것과 같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거부된 애도는 우울함이 된다.

“상실을 작업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도의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명한 작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자전적 체험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헤아려 본 슬픔』에서 자신의 아내 헬렌 조이 데이비드먼(Helen Joy Davidman)을 잃은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H.’라는 이니셜로만 불린다. 이 작품은 “진정한 개인적 예식으로, 그 내용은 애도를 소화하는 정신적 과정을 명시하는 것”이다.3) 이 글에서 루이스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를 기록하는데, 이 변화는 기본적인 몇 단계로 구분된다. 이 애도의 단계는 심리학 연구에서 나타나는 바와 매우 유사하다.4)

  죽음과 애도라는 주제는 항상 공존하는 일련의 대조를, 때로는 모순들을 연상시키며 논리의 법칙을 중단시킨다. 한편으로 모든 고통은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으며 다른 이들의 고통과 비교될 수 없다. 각자는 완전히 고유한 방식으로 이를 체험한다. 파스칼의 유명한 지적을 빌면, 각자는 “혼자 죽는다.” 다른 한편으로, 루이스 자신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인정하게 될 것처럼, 다른 이들의 고통에 접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작업에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사멸할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유일한 방식이다.5) 마치 이방인처럼, 낯설고 불안정한 환경 안에서 당황하지만 또한 지울 수 없는 방식으로 변화를 겪는다. “한 순간에 우리는 죽음의 나라에 도달한다. 잠시 후에는 이미 어둠의 왕국 안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큰 추위가 우리를 덮친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것을 느낀 다음, 우리는 아직도 이전 그대로일까?”6)

  또 하나의 모순은 애도의 작업 자체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마치 터널과 같아서, 그것을 모두 통과하기를 받아들일 때에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 터널의 끝에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길을 비출 수 있는 어떤 빛이 있어서 거기에 힘입어 어떤 식으로 이미 그 터널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은 무의미와 부조리,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과 안정의 체험을 영원히 쪼개어 놓는 어떤 상실과 직면하기를 요구하기에 고통스런 과정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고통스런 대면은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다시 의미를 체험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한 작업을 거부하고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며 그들이 사라짐을 거부할 때, 그 애도는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면 ‘우울증’이 된다. 애도는 일시적인 상실과 결부된 슬픔인 데에 비하여, 우울증은 전반적인 방향 상실이고 주체가 고통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상태를 다음과 같은 웅변적인 말로 묘사한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처럼 죽은 이들을 방부처리함으로써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우리는 결코 그들이 떠나갔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남는가? 시신, 기억, (그리고 어떤 버전의) 환상. 패러디 또는 공포. ‘죽었다’고 말하는 또 다른 세 가지 방법. 그는 내가 사랑하는 ‘H.’였다. 어떻게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과, 내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일종의 근친상간일 것이다.”7)

  애도는 그와는 반대 방향을 향하는데,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말로써 간결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예수는 라자로를 소생시킨 다음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명한다.(요한 11,44) 이것은 사랑의 최고 형태, 바로 소유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다. 매우 아름다운 영국 격언이 이렇게 일깨워 주는 바와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떠나가게 내버려두어라. 그가 돌아온다면 그는 너의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한 번도 너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애도의 작업은 복합적이며 어렵다. 그 안에 삶의 근본적인 차원인 사랑, 죽음, 고통, 소유하지 않음,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나눔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험은 그 과정을 시작하는 주체의 성숙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서 전에 알지 못했던 측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삶을 바라보고 자신의 가능성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복음에서 말하듯이, 곡식의 낟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요한 12,24 참조)

  죽음은 이렇게 새로운 탄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 한계를 받아들이기

  루이스는 이 다양한 측면들을 문학적으로도 모범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이는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을 기술하는 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글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이 일을 수행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수단인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이 책의 전개 방법이다. 그것은 말의 한계, 그러나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데에 할당된 공간의 한계이다.

  이 측면에 대해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이 너무 중요하고 어려우며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데에서 기가 꺾이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루이스는, 성공을 위해 결정적인 요인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간접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특히 『헤아려 본 슬픔』의 서술적 구조를 통해서 이 말을 한다. 『헤아려 본 슬픔』은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 장들은 실상 본래 부인의 것이었던 네 권의 공책이다. 루이스는 집에서, 아델(Adele)이 죽은 후에 그녀의 편지들 사이에서 이것을 발견한다. 이렇게 하여 그 공책들은 글을 쓸 재료가 되고 부인과 대화를 계속할 계기가 된다. 그것들은 부인에 대해 말하는 물건이며 그녀의 현존과 부재를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공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루이스는 다른 공책들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의 여정에 한계를, 쓸 수 있는 종이의 숫자에 따른 양적인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그 숫자는 미미하고, 수천 권의 책에 적어도 부족할 그의 엄청난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 그래도 그는 결정을 취소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공책은 사지 않을 것이며 지금 가지고 있는 공책만으로 그의 작업이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위로를 체험하면서 터널에서 나가도록 도와주는 결정적 요소이다. 그는 최종적인 단절을 행하면서 과거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힘과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애도의 작업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중요한 선택과 같이 어렵고 고통스런 실존적 상황들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필수적 단절이다. 한계를 정하는 것, 돌아가지 않을 지점을 정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것이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시각과 청각을 잃어버린 미국 저자 헬렌 켈러가 지적한 것이다.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에서,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상상한다. 그녀는 분명 시각의 선물을 지극히 귀중하게 여길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켈러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영웅들과 모든 시대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라고 본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많은 이들에게 결정적 결과를 가져올 중대한 일을 이루기 위하여 언제나 적은 양의 시간만을 갖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반대급부로 그들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며 즐겁게 노력하면서 살게 한다. 켈러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대개 좋은 결말을 맺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시련이 주인공들을 깊이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야기에서 영웅은 보통 극한 상황에서 다행히 구조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의 가치관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삶의 의미와 그 영구적인 영적 가치들을 더 존중할 줄 알게 된다. 죽음의 그늘 아래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그들이 부드러운 감미로움을 담아서 모든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8)

  치유에 있어서도, 제한된 횟수의 만남을 갖는 것은 특히 마지막 만남에서 그 사람에게 자극이 된다. 그는 전에는 말할 용기나 능력을 갖지 못했던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사람에게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는 데에 2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할당한다. 그 후에는 최종적 결정을 내리고, 더 이상 그 선택을 논의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도록 권고한다. 분명 이것은 하나의 테크닉으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권고라고 할 수 있다. 전적이고 오류가 없는 확인을 원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힘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끝을 맺지 못할 것이며 참되게 살지도 못할 것이다. 위험은 실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상상에서 제거해 버린 우리 기술 사회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불안과 초조의 여지가 커지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에서 확실함을 보장받으려 한다는 것이다.9)

저항을 표현하기

  『헤아려 본 슬픔』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 공책이기도 한) 첫 번째 장은 저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주된 감정인 고통, 두려움, 분노, 슬픔을 표현하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죽음이 확인해 주는 바와 같이 희망이 사라지는 것에 결부된 감정들이다. “고통이 두려움과 이렇게 유사하다는 것은 아무도 나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유사성은 신체적인 것이다. 위가 경련을 일으키고 잠을 잘 수가 없으며 하품이 난다. 계속해서 침을 삼킨다.”10)

  루이스는 신앙인이지만 이 사실이 고통을 완화해 주지 않으며,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든다. 사랑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이 생명의 근원이라면, 왜 지금 우리는 고통, 질병, 죽음, 분리, 격리의 체험을 하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불러 일으키는 분노와 화를 저자는 정직하고 진솔하게 표현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이것은 가장 괴로운 증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네가 행복할 때에는 하느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너는 너무 행복해서 그분의 요구를 간섭으로 느낀다. 네가 깨닫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향하면, 그분은 팔을 벌리고 너를 받아들이신다(적어도 이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너의 필요가 간절하고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될 때에 그분께 가면, 무엇을 보게 되는가? 네 앞에서 문이 닫히고, 안에서 두 개의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다음엔 침묵이 흐른다. 더 기다릴수록 침묵은 더 커진다. 창문에는 빛이 없다. 혹시 빈 집일 수도 있다. 그 안에 누가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느낌과 같이 강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왜 번영 속에서는 그분의 지배가 그렇게 강하게 현존하고, 역경 속에서는 그분의 도움이 그렇게 완전히 부재하는가? (…) 너무도 쉬운 대답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부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즉 존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솔직히 말해 그분을 찾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까지 현존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11)

  이것은 신앙인의 공통된 체험을 표현하는 숙고들이다. 이들은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했던 간절한 청원에 대해 전하는 복음의 단락과 비교할 수 있다. 그 청원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가식이나 검열 없이,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애도에서 포기할 수 없는 측면이다. 성경은 신앙인의 분노를 제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예를 들어 “저주 시편”이라고 알려진 글들에서와 같이 명시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도록 권고한다. 하지만 이 시편들은 시간 전례에서 배제되거나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이는 의미가 깊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분노와 기도, 찬미와 공격성을 결합시키기 어려워하고 결국 그들이 조화될 수 없다고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이다.12) 타인의 분노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놀라서 물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이며, 자신과 또한 고통의 상황에 대한 진실의 한 형태이고, 희망으로 고무된 의미의 요구이다. 그 분노가 저지된다면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향한 파괴적인 일탈을 가져올 수 있다.

  루이스는 자신의 분노를 말로 표현하면서, 거기에 내포된 의미들의 심각성을 감추지 않는다. 이 분노는 그에게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가학적이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생각 속에 다른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고, 그에게 이 복잡성의 도전을 대면하게 한다.

악한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

  다음 공책은 치유의 시도들에 대한 실망을 다룬다. 그는 마지막에는 조롱을 당한다고 느낀다. “우리의 기대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진, 방사선 사진, 이상한 완화, 거의 기적적인 일시적 치유에 의해 강요된 희망들. 우리는 한 걸음씩 코가 꿰어 끌려간다. 그분은 자비를 보여주실 때마다 실제로는 새로운 탄원을 준비하고 계셨다.”13)

  제어되지 않은 분노의 표현이 모든 확실한 것들과 삶 자체를 부서뜨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단계가 보여주는 것은 낙담과, 또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는 선언된 가치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이다. 나머지 공책에서 루이스는 이 위태롭고 불안정한 길의 두 면을 유지하는 모범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감정들의 복잡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쉬운 지름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허무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수수께끼 같은 시점에서, 그가 어떤 식으로 의미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항은 일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분노를 표현하는 말, 그 안에서 형성되는 글은 어떤 식으로든 현존하고 있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루이스는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발걸음을 되짚어본다. 무의미, 허무, 부조리가 실재의 전부일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정말로 하느님이 가학적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어제 저녁에 이런 말들을 썼다.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다 부르짖음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악한 하느님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어쨌든, 그렇게 악한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어마어마하게 가학적인 하느님을, 악의에 찬 바보를?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겠다.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느님을 긴 수염을 가진 늙고 엄위하신 임금으로 나타내는 것보다도 더 지나치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 (형식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인간성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 우리보다 더 오래된 어떤 것을, 더 지혜로운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시사한다. 신비는 온전히 그대로 남겨 둔다. 희망에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14)

  이것은 루이스의 여정에서의 진정한 전환점이고, 그의 글쓰기에 방향을 알려주고 터널에서 벗어나게 해 줄 빛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세상과 하느님과 또한 자신의 실재를 의심한다. 그러나 우울한 망상에 빠져 있는 사람과 달리 그는 아직도 성찰의 가치에 충실하다. 성찰은 그에게 하느님이 만일 하느님이라면 인간을 지나치게 닮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15)

  의미에 대한 전적인 부인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시작될 수 있기 위해서 이미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행위들은 상황의 개선에 대한 희망과 이를 실행하는 사람의 갈망을 표현한다. 말 자체도 의미가 없다면 쓸모없는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허무주의자도 이 문제와 극적으로 충돌했다. 가장 유명한 허무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신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 죽음의 걱정스런 결과들을 드러낸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혼돈, 곧 빛과 열과 기준점의 철저한 부재이다. “이 땅을 그 태양의 사슬에서 풀어내다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지금 어디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움직이는 곳은 어디인가? 모든 태양들로부터 떨어져서? 우리는 영원히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뒤에, 옆에, 앞에, 사방에서?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가? 우리는 마치 무한한 무(無)를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위에는 빈 공간이 한숨을 쉬지 않는가?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밤이,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은 밤들이 이어지지 않는가?”16)

  이와 매우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같은 저자도 삶의 부조리함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막다른 길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아무 것도 의미가 없고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가둘 수 있는가? 절대적인 유물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전적인 허무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 안에 물질 이외에 무엇인가가 더 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이미, 의미를 지닌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가치 판단을 중지하는 것과 같다. (…) 말을 한다면, 추론한다면, 특히 글을 쓴다면, 즉시 형제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나무는 정당화된다. 사랑이 생겨난다. 절망한 문학이라는 것은 단어상의 모순이다.”17)

  이전에 의미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인간 세계는 존립하지 못할 것이며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발달 심리학은 어린아이가 안정된 의미 체험을 하지 못한다면 정신병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경험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숨 쉬는 공기처럼 의미와 애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적 사건 안에 묵시적으로 들어 있는 이러한 의미에 대한 요구는 경험적 체험을 기초로 설명될 수 없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요구는 이성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초월하여 제기된다.18)

신뢰

  그러므로 루이스는 저항과 고통의 말을 포함하여 그가 하는 모든 말의 기초가 신뢰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초는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다. 폴 리쾨르(Paul Ricœur)가 분석한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그 기초는 부재자의 상징적 현존이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렇게 강렬하고 의미가 깊은 것은 그것이 그 특별한 미소 속에, 그 표현과 색채 속에 부재하면서 또한 현존하는 화가의 어머니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향수를 상기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 그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19) 이와 유사하게, 루이스에게 그 근원적인 것의 현존은 사랑하는 여인의 현존과 마찬가지로 부재 속에서, 해체된 것처럼 보였던 만큼 더 실제적으로 드러난다. 부재는 고통의 원천이지만 또한 정화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고통은 저자를 피상적이고 냉정하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정화시킨다. 스스로의 복된 상아탑에 갇혀 있는 자신만의 즐거움인 신앙은 산산이 부서져야 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환상이었다. 이것을 고려하는 것은 참된 인간적 동참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세상의 고통들이 정말로 나에게 중요했다면, 나 자신의 고통에 압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20)

  루이스는 이 대조에서 다른 역설적인 측면을 파악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대성이 클수록, 자신의 고통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게 될 때에 그 고통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리를 두는 것은 분명 악 앞에서 방어하는 한 형태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애도를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더 크고 더 감추어진 고통에 이르게 한다. 고통 받는 이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현실 위에 생각지 못했던 빛을 던져주는 슬기를 얻게 하여 준다. 루이스는 전에는 알지 못했다가 이제는 알 수 있게 된 이 슬기의 향수와 갈망을 아내의 죽음과의 고통스런 대면을 통하여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와 아내 사이의 유대의 가치를 되살아나게 한다.

  많은 부부들이, 자신에게 또는 상대방과 자녀에게 차이를 존중하면서 자기 체험을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그와 연관된 감정들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위기를 맞았다. 예를 들어 남편은 내향적이고 아내는 외향적이라면, 이들은 고통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고 표현할 것이다. 남편은 그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음으로써, 아내는 항상 그것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 고통을 표현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지만, 비교와 이해의 지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서로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남편은 아내의 끝없는 탄식에 지칠 것이고, 아내는 남편의 침묵에 분노할 것이다. 치유의 관점에서, 생명으로 돌아오는 느린 작업은 공감의 고유한 특징인 관점의 변화에 의지한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리를 옮겨 다른 사람의 체험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감의 결핍은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Irvin Yalom)이 페니(Penny)에게서 발견한 불행한 상황의 근본 이유였다. 페니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스러운 딸 크리시(Chrissie)의 죽음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딸을 상실한 고통으로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두 아들도 (문제투성이의 낙오자라고 여기며) 돌보지 않았다. 이 두 아들은 누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잃었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그들이 ‘자기 딸’과 얼마나 다른지를 늘 상기시켰던 것이다. 자신의 상실에 초점이 맞추어진 정서적, 인지적 무게 중심을 옮기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우울의 감옥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즉 자신의 상황과 아직 살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일어난 모든 일을 두 아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21)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가족들을 더 가까워지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회복할 수 없이 서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죽은 이들과의 관계는 산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공감이 없다면, 다시 말해 고통이 자신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외로움과 죽음을 두드러지게 하면서 상실에 상실을 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대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도와준다. 이는 이 주제에서 드러나는 역설적인 측면이다.

  자신의 고통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순간, 루이스는 애도의 작업을 이제 끝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가고 있다. 마침내 사랑하는 헬렌을 떠나보낸 것이다.

삶의 노래

  루이스는 4장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집에서 찾아낸 빈 공책이다. (…) 나는 이것이 내 기록의 끝이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 다른 공책을 더 사지 않을 것이다. 무너져 내릴 때의 제방처럼, 안전밸브처럼, 이 일기는 도움이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다른 목적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상태’를 묘사하려고 했고, 고통의 지도를 그리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고통이 상태가 아니라 과정임을 발견했다. 필요한 것은 지도가 아니라 역사이다. 내가 어떤 한 지점에서 이 역사를 기록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멈추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22)

  앞서 지적했듯이, 애도 작업을 끝내는 것은 의지의 결정이며 한계를 받아들이고 서술을 끝내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 경우는 다른 공책들을 더 갖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끝이 난다. 삶으로 돌아가기를 도와주는 것은 앎이 아니라 결단이다. 선은 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력하게 된다. 이것이 치료의 과정에서, 환자가 지닌 결단의 자유를 끌어들이지 못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앎은 치료 과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말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잘못에 대해서, 잘못은 그 잘못에서 거리를 취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했을 때에만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애도의 작업은 루이스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달리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고통은 뜻하지 않은 놀라운 일이 되고,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기쁨을 낳는다. 그는 헬렌을 알기 전에 체험했던 기쁨을 ‘싱겁다’고 말한다. 그 기쁨은 상실과 격리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기쁨이었다. 이제는 모든 선물의 원천이셨던 분, 그리고 상실의 신비를 그대로 두면서도 그가 더 이상 자신에게 매여 있지 않기에 그에게 특이한 평화를 남겨 주시는 분께 더 많은 여지를 내어드릴 수 있게 된다. “이 기록은 나에 대해서, 헬렌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해 준다. 바로 그 순서에 따라 말해 준다. 이 순서와 비율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의 정반대이다.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도 나는 우리가 찬양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하느님이나 헬렌을 향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찬양은 언제나 자체 안에 기쁨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찬양의 올바른 순서는 먼저 선물을 주시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 다음에 선물인 그녀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찬양할 때에, 우리가 찬양하는 것에서 비록 멀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라도 즐기지 않는가? (…) 이것은 사랑이 일으키는 기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은―두 사람 모두에게, 그러나 아마도 특히 여성에게―매력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매력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23)

애도의 작업은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헤아려 본 슬픔』은 애도의 과정, 즉 루이스가 홀로 감당해 낸 그 과정을 감동적이고 훌륭한 방식으로 요약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치유적인 가치를 지닌 글쓰기 덕분이다. 그의 이 글은 글쓰기의 치유적 가치에 대한 뛰어난 본보기가 된다. 하지만 이 일에는 언제나 그의 글들을 감도한 확신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 확신은 그가 재고하고 반박하고 마지막에 재발견한 것이었다. “루이스가 글을 쓰는 것이 바로 찬양을 통하여 세상을 떠난 부인을 기리는 한 방법임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처음부터 믿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의 공책들을 기록하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그럼으로써 또한 자신의 애도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은―이 상실이 그에게 실제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동시에 그가 그것을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면, 아무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애도 작업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24)

  루이스에게는 노력을 하기 위한 확신이 있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은 그에게 애도를 작업하는 데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고, 자신의 죽음을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은 치유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앞서 언급한 얄롬은 그가 접했던 많고도 다양한 경우들을 돌아보면서,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이 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그 사람 안에서 삶의 가능성을 강화하고 그에 따라 죽음에 대한 태도도 변화시킨다는 것을 지적했다. “내가 직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얻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더 강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해석을 위한 좋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삶이 빈곤할수록 또는 삶의 가능성이 헛되이 낭비되었을수록, 죽음에 대한 고뇌는 더 강할 것이다.”25)

  죽음이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초대라는 것은 참으로 역설(逆說)이 아닐 수 없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229-243 | 4017 (4/18 novembre 2017)
** Giovanni Cucci S.I.
1) G. Cucci, «La morte come cifra dell’esistere umano. Un approccio filosofico», in Civ. Catt. 2017 IV 131-144 참조.
2) V. Volkan, Bloodlines: From ethnic pride to ethnic terrorism, Boulder, Westview, 1997, 43; D. Vardi, Memorial candles: Children of the Holocaust, London, Routledge, 1992, 40; D. Berkowitz, «On the reclaiming of denied affects in Family Therapy», in Family Process 16 (1977) 495-501; M. Andolfi – I. Zwerling, Dimensions of Family Therapy, New York, Guilford, 1980 참조.
3) E. Perrella, Per una clinica delle dipendenze, Milano, FrancoAngeli, 1998, cap. III; in accademiaperlaformazione.it/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 id=104:per-una-clinica-delle-dipendenze- &catid =45:libri&Itemid=69
4) E. Kübler-Ross, La morte e il morire, Assisi (Pg), Cittadella, 1976 참조.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에서는 다섯 단계를 구분한다. 그 다섯 단계는 거부, 분노, 협상, 억압, 수용이다. 이 내용은 다음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G. Cucci, «La crisi: fallimento o possibilità di rinascita?», in Civ. Catt. 2014 III 3-17 참조.
5) G. Cucci, «La morte come cifra dell’esistere umano», cit. 참조
6) P. L. Landsberg, Il silenzio infedele. Saggio sull’esperienza della morte, Milano, Vita e Pensiero, 1995, 32.
7) C. S. Lewis, Diario di un dolore, Milano, Adelphi, 1990, 26. (참고로,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의 이탈리아어판은 ‘고통의 일기(Diario di un dolor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편집자 주)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애도에서 가난하고 공허해지는 것은 세상이다. 우울증에서는 나 자신이다. 환자는 자기 자신을 부당하고 무능하며 도덕적으로 경멸스럽다고 느낀다. 자신이 가난해지고 격하되며, 부정적으로 판단받고 벌받으리라고 예상하게 된다.” (S. Freud, «Lutto e melanconia», in Id., Opere 1905-1921, Roma, Newton Compton, 2001, 911).
8) H. Keller, «Three Days to See», in Atlantic Monthly (in www.afb.org/ section.aspx?FolderID=1&SectionID=1&TopicID=193&SubTopicID=17&Document ID=1215), gennaio 1933.
9) G. Cucci, «I mille volti della paura», in Id., La forza dalla debolezza. Aspetti psicologici della vita spirituale, Roma, AdP, 2011, 321-359 참조.
10) C. S. Lewis, Diario di un dolore, cit., 9.
11) 같은 책, 11-13.
12) E. Bianchi, «I salmi imprecatori», in Parola Spirito Vita, n. 21, 1990, 83-101 참조.
13) C. S. Lewis, Diario di un dolore, cit., 36 s.
14) 같은 책, 37.
15) E. Perrella, Per una clinica delle dipendenze, cit., cap. III.
16) F. Nietzsche, La gaia scienza, Milano, Adelphi, 1986, nn. 125, 130.
17) A. Camus, «L’enigma», in Id., Opere, Milano, Bompiani, 2000, 1000. 다른 본문에서 그는 죽음 이후에 계속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제쳐둘 수 없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고찰을 되풀이한다. “불멸에 대한 신앙이 인간에게 필요하여 이것이 없다면 자살로 끝나고 말 것이라면, 이는 이것이 인류의 정상적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혼의 불멸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Id., Il mito di Sisifo, ivi, 304).
18) L.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e Quaderni 1914-1916, Torino, Einaudi, 1964, prop. 6; 41; 79 참조. 이에 대한 설명은 G. Cucci, Esperienza religiosa e psicologia, Leumann – Roma, Elledici – La Civiltà Cattolica, 2009, 13-25 참조.
19) P. Ricœur, Della interpretazione. Saggio su Freud, Milano, il Saggiatore, 1967, 196 참조.
20) C. S. Lewis, Diario di un dolore, cit., 45.
21) I. Yalom, Guarire d’amore. I casi esemplari di un grande psicoterapeuta, Milano, Rizzoli, 1990, 153; G. Cucci, Altruismo e gratuità. I due polmoni della vita, Assisi (Pg), Cittadella, 2015 참조.
22) C. S. Lewis, Diario di un dolore, cit., 67.
23) 같은 책, 70; 81.
24) E. Perrella, Per una clinica delle dipendenze, cit., cap. III. 이탤릭체는 원문의 것이다.
25) I. Yalom, Guarire d’amore…, cit.,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