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과 동반
「사랑의 기쁨」의 지침

「사랑의 기쁨」의 지침

DISCERNERE E ACCOMPAGNARE*
Le indicazioni dell’«Amoris laetitia»

후안 카를로스 스칸노네 (예수회)**
안수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옮김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주교 서품 당시 선택했고, 훗날 교종이 된 후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는 사목 표어이다. 이 표어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각자를 선택하시듯 베르골료(Bergoglio)라는 한 인간을 선택하실 때, 그 개인에 맞게 고유하게 개별적으로 부르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랑과 자비 가득한 성부께서는 당신 성자를 “살아 있고 구체적인 이(il concreto vivente)”로 사랑하시고, 우리 개개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살아 있고 구체적인 이들”로서 사랑하신다. 베르골료가 과르디니의 작품 『상반된 양극단. 살아 있고 구체적인 철학을 위한 에세이』1)에 대해 신학 박사 학위논문을 쓸 당시 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였지만,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 개개인 또한 염두에 두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르디니의 “살아 있고 구체적인 것”은, (헤겔 철학과 매우 다른 개념인)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universale concreto)”이라는 개념에 해당하거나, 아르헨티나 철학자 마리오 카사야(Mario Casalla)가 “상황적 보편성(universale situato)”2)이라고 부른 것에 상응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은 추상적이 않고 구체성을 지닌 참된 것으로, 역사적 시기나 문화적 공간, 개인적 고유성이라는 조건에 따라 놓인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며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 결과, 이런 종류의 보편성(universalità)과 고유성(singolarità)은 도덕의 측면에서 볼 때 순전히 일방적이고 비역사적인 결의론3)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모호하고 상대적인 윤리를 취하는 것도 아닌, 개개인의 주의 깊은 영적인 식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이하 AL)4)이 잘 다루고 있다. 「사랑의 기쁨」은 당사자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교회가 사목적으로 동반해 주는 개인적 식별을 제시하는데, 성령의 조명과 권능에 힘입어, 성자 그리스도를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 성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사실, 개별적이고 교회적인 식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양 손과 같은 역할을 하신다. “살아 있고 구체적인 존재”, 곧 역사 속 고유하고 유일한 우리 인간 실존의 매 순간마다, 복음서가 제시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최종적이고 객관적인 식별 기준이 되시고 성령께서는 가장 내밀한 주체적 동력이 되신다.

개인적 식별

  베르골료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각주에서 과르디니가 얘기했던 꿈에 대해 서술하고 이를 해석하였다.5) 과르디니는 그 꿈에서 모든 사람이 태어날 당시 각 개인의 고유한 말씀 또는 일종의 비밀번호를 부여받는 계시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선물인 동시에 과제요, 안전 보장이자 위험 요소라고 하였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이 살아있는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며 실행하고 완성하는 일인 것이다.

  이 ‘고유한 말씀’은 각각 다른 환경에 처해 있는 모든 개개인에게, 식별의 여정을 인도하는 안내서이자 원리로써 주어졌는데, 현재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각자가 추구하고 발견하도록 인도해 줄 수 있다. 이 ‘말씀’은 일상 안에서 우리가 특정한 부르심이나 사명을 선택할 때 우리를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소위 갑작스런 “비정상적 상황”에서 역시 이를 가능토록 해준다. 사실상 통계학이나 삼단논법처럼 추상적이고 탈시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원리에 대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영적인 진전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아마도, 비밀번호나 알림 역할을 하는 그 말씀은 우리에게 자신만의 이름을 주셨듯이 무상으로 선사해주시는 하느님의 선택, 성소, 각자의 고유한 사명, 부르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과르디니의 경우 이 고유한 말씀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에 의로우신 심판관께서 우리에게 판결문을 내리실 것이라 보았다.

  베르골료의 논문 초록에서 보면 그는 이 말씀을 “실존적 케리그마”6)라고 명명하는데, 마치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이 깃들어 있듯이 복음선포적 케리그마 역시 이 실존적 케리그마에 뿌리를 둔다. 사람의 전 생애는 그 응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별 인간이 자신 안에 느끼는 원초적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성과 감성이, 다시 말해 개인의 내밀한 심연이 깊이 건드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만남어긋남재회의 씨실과 우리를 불러내는 살아있는 그 ‘고유한 말씀’의 날실로 짜여 있다. 만남과 재회는 우리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과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반면, ‘부조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만남을 찾고 있는 상태나 어긋난 만남임을 알려주는 표시이다. 성 이냐시오의 확신에 따르면, 무사히 성장하는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만났을 때 이를 바위 위의 낙숫물처럼 튕겨내지 않고 스펀지가 물방울을 빨아들이듯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렇게 청각적인 비유를 따라가다 보면, 정서적 조화와 부조화, 다시 말해 이냐시오 영성에서 쓰는 용어로 말하자면, 위로와 실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하느님 뜻의 지혜로운 깨달음에 대해 다루고자 프란치스코 교종이 다른 문맥에서 “사랑이 낳는 정서적 공본성(connaturalità affettiva)”7)이라 언급한 내용이 도움이 되는데, 교종은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는 신자들 전체에게 신앙의 본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심어주시어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 주십니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적인 실재들과 어떤 공본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더라도 그러한 실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지혜도 주십니다.”8) 인용된 구절에서 보면 교종은 ‘공본성을 통한’ 깨달음에 대해 명시적으로 시사하고 있는데, 성 토마스가 지혜의 선물에 대해 다룰 때 언급한 가르침에 기초한 내용이다. 이는 순수한 감정적 정서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폴 리쾨르9)가 지성과 지혜를 느끼는 것이라 해석한 파스칼의 ‘마음’이나 플라톤의 ‘격정(thymos)’에 해당한다.

  과르디니에 대해 베르골료가 내린 이 해석은, 현대 프랑스 현상학, 곧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장루이 크레티앵, (부분적으로) 미셸 앙리, 특별히 장뤼크 마리옹 같은 철학자들이, 부르심과 응답의 사건을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증여와 같이 순수한 형태로 바라본 현상학적 환원을 떠올리게 한다.10)

  우리 식으로 정리해 보자면, 베르골료가 그 당시 복음선포적 케리그마에서 착안한 용어, ‘실존적 케리그마’는 선택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경험 그 자체를 가리킨다.11) 이러한 경험은 마태오 사도나 다마스쿠스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들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도록 ‘사사로운 애정이나 의지, 개인적 이득’을 포기하게 하며, 마침내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이끈다.

  여기에 이어서 위로와 실망을 통해 식별하는 두 번째 시기의 선택이 뒤따르는데, 이 시기는 위에 인용한 케리그마를 신앙 안에서 살아냈는가에 따라 조화나 부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시작하여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실 식별하는 당사자에게 있어서, 위로와 실망의 리듬은 매순간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능한 충실하려는 응답을 향해 그 방향과 여정을 그리며 나아간다. 두 사람이 사용한 용어는 달랐지만, 카를 라너와 우루과이 예수회 신학자 다니엘 힐(Daniel Gil) 주교는 이냐시오가 말한 두 번째 시기의 선택을 첫 번째 시기와 관련시켜 해석했다. 사실,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에 동의하도록 해 주고, 실망은 우리가 부조화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해 준다.12)

  끝으로, 세 번째 시기의 선택은 위로도 실망도 없는 고요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영신수련에 임하는 사람은 신앙에 의해 조명된 이성을 가지고 이를 행하는데,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의 적절성과 부당성을 살펴보고자 하느님 앞에서 이 이성을 저울질하기도 하고, 죽음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이 궁극적인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등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내적인 평화와 조화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확인을 받게 되는데, 이는 베르골료가 ‘복음선포적 케리그마’를 풀이하고 변용시켜 명명한 ‘실존적 케리그마’와의 조화에 힘입어 이루어진다.

  우리가 보기에, 이 과정에서 이성은 결의론적이라기 보다는 유비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 작용은 오늘날 멕시코 출신 도미니칸 철학자 마우리시오 베우촛과 그의 학파가 명명한 “유비적 해석학”13)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선택의 순간이 어떤 단계이건 간에, 자기기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세 시기의 경우 모두 이냐시오가 말하는 불편심을 전제해야 한다. 이는 “무질서한 애착”에서 해방되어, 자기자신의 의지보다 하느님의 뜻을 조화롭게 선호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가르친 바에 따르면 실제 윤리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지혜롭고 신중한 행위는 “올바른 욕구”14)를 전제로 한다. 보다 가까운 시대를 살펴보면, 리쾨르가 “의심의 스승”이라 이름 붙였던 이들(맑스, 프로이드, 니체)이 선한 탈을 쓴 환영과, 감정적 엄격함이 부족해 일어날 수 있는 속임수를15)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한 바 있다.

  이를 위해서―또한 신학적 학문의 훈련을 위해서―캐나다 출신 예수회 신학자 버나드 로너간은 “정서적 회심”을 요구했는데, 이는 윤리적 회심의 절정이자 보증이며,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진 존재자의 역동적 상태”로 들어가는 종교적 회심의 통합을 의미한다.16)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분을 선택하거나 생계, 공동생활, 선교 같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냐시오의 방식을―개인사에 관해서든 사목적 방향에 관해서든―모든 경우에, 심지어 가장 어려운 경우에 적용해 보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사실, 방금 언급한 가장 어려운 경우들은 규율을 단순히 연역적으로 적용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한계나 주변 요건 혹은 식별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우연성 가운데, 이를테면 심리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 하에서, 심지어 생물학적 조건 하에서 벌어지는 상황들과 관련된다.17)

“취약함을 돌보고 식별하고 통합하기”

  「사랑의 기쁨」 제8장의 제목은 “취약함을 돌보고 식별하고 통합하기”이다. 이 장은 이 교황 권고의 중심에 위치하지도 않았고 가장 중요한 장도 아니었지만, 적잖은 사람들에게 동요를 일으켰다. 사실, 제8장은 식별의 과정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은 인간의 취약함을 마주하는 자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주관적 양심의 객관적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이어져 간다.18)

  첫 번째 요점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미 「복음의 기쁨」과 「찬미받으소서」에서 신학적 의미의 자비로운 태도로 “약함에 대해 돌볼 것”19)을 우리에게 권고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비는 약하고 고통 받는 이를 온화한 애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쁨」의 경우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상징인 “상처 입은 가정”(AL 305)의 약함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들은 자비 가득한 “야전 병원”(AL 291)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심에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 교회는 자신의 모성애적 측은지심을 진리와 정의의 요구에 결합하여야 한다.

  다른 한편,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GS 16 참조)의 연장선상에서, 「사랑의 기쁨」 제8장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실질적 도덕률의 최종 기준으로 윤리적 양심의 존엄성을 재확인한다. 사목적으로 이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바꾸거나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양심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 실재에 관한 부분이기도 하고, 역사적 객관성에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 권고는 “혼인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객관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몇몇 상황들에 교회가 대처할 때에 개인의 양심을 더 잘 고려하여야 한다”(AL 303)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개인의 차원과 교회적 차원 모두에서 식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혼전순결이나 그리스도교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의를 바꾸자는 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결과에 대해, 무엇보다도 이전에 우리가 ‘죄로 인한 장애 상태’라고 일컬었던 점에 대해 재해석을 내려 보자는 뜻이다. 비록 그러한 상태가 객관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당사자가 하느님 은총으로부터 무조건 배제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확언했다. “객관적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당사자의 인책성이나 유죄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AL 302) 그리고 몇 단락 뒤에 “정황이나 정상을 참작하여, 주관적으로 죄가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죄가 아닌 차원의 죄의 객관적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고 사랑하며 은총과 사랑의 삶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AL 305)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도움에는 성사적 도움이 포함될 수 있다.(같은 쪽, 각주 351 참조)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 대해 교회는 교의를 바꾸지 않으면서 장애 해소나 영성체를 거부하는 징계 규정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를 적용하는 것 역시, 각각의 상황에 대한 개인적 식별과 ‘신중한’ 애덕의 기준을 바탕으로 교회적 식별을 행해야 한다. 이 신중한 애덕이란, 사실혼 상태의 사람들이나 순전히 사회혼만 한 경우 혹은 재혼한 이들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이러한 이상(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비슷하게”(AL 292) 실현해 낼 수 있고 “불완전하나마 교회 생활을 하는”20)(AL 291)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혼인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아직 부합하지 않거나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건설적인 요소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AL 292)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느 모로 하느님의 고유한 사랑을 반영하는 사랑의 표징”(AL 294)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교황 권고 안에서 자유에 관한 다양한 한계와 조건들(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등등)이 다뤄지고 이미 완화된 정황으로 소개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21)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끝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교회법과 같은 새로운 일반 규범”(AL 300)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인 규범들은 “모든 개별 상황에 적용되는 조항들을 다 포함할 수 없”(AL 304)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별의 결과물로 특정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도록 사목적으로 동반해 주는 그러한 식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먼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관대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참되고 솔직하게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또한 “비록 아직 온전한 객관적 이상에 맞갖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각자의 구체적인 복잡한 한계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것임을 도덕적 확실성으로 깨달을 수”(AL 303)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기만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따라서,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참된 회심의 필요성을 인지하는 초기 단계에서 교회적인 동반이 요구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며 조언을 주는 영적 지도자의 말을 듣고 식별의 규범을 따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이 과정은 언제나 정서적 회심을 포함한다. 존재론적이고 역사적 특정 환경에서, 다시 말해 영적 발전을 향해 역동적으로 열려있는 유일무이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최고의 선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발견하고자 한다면, 정서적 회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신중하게 실질적 결정을 내리고자 하는 모든 경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올바른 욕구’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마찬가지로, 훌륭한 선택을 위해서 ‘무질서한 애착’을 이냐시오식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그러한 회심의 작업은 매 순간의 한계를 인정하여 가능한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평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교회적이고 사목적인 식별

  교회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양심에만 의지하도록 방관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자유롭게 그리스도인다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 이들을 동반해 준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기르고 가르침으로써 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나약함 가운데 심어 주신 선함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을 동반한다. “객관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나타내며, ‘거리의 진흙탕에 신발이 더럽혀지더라도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언제나 좋은 일을 하는’ 어머니”(AL 308)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시노드나 교종 본인이 “새로운 일반 규범”(AL 300)을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교황 권고 전체는 이러한 자각이 형성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교회의 보편적 교도권에 따른 이러한 가르침에 더하여 프란치스코 교종은 각 지역 주교들이 어떠한 사목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지 덧붙이고 있다.

  그렇지만 교황 권고는 무엇보다도 영성지도나 고해성사에서 신부들이 어떻게 사목적으로 동반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내적 법정에서 사제와 나누는 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에 수반되는 내용은, 식별에 임하는 고해자를 동반할 때, 사제는 고해자를 단순히 가엾이 여기는 데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들을 식별해 가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사제는 신적 자비의 태도를 바탕으로 목자다운 사랑을 갖추어야 하며 하느님의 뜻을 앞에 두고 이냐시오가 말하는 불편심을 유지해야 한다. 진지하게 식별을 바라는 신자의 양심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사목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표하기에, 영적 동반은 교회적 식별을 드러낸다. 교종은 이러한 면담의 역할을 사제들에게만 국한하지 않았는데, 복잡한 상황을 살고 있는 신자들이 “주님께 봉헌한 삶을 사는 평신도”(AL 312)들에게 찾아가 그들과 믿음의 대화를 나누라고 초대한다. 왜냐하면 평신도들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순간에 교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주님과 교회 앞에서 책임을 지는 개인적이고 교회적인 식별이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에는 “쉬운 방법이 없기”(AL 298)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 역사 전체를 관통해 온 두 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바로 배척과 재통합입니다”(AL 296)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재통합만이 복음 정신에 부합하며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화답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을 피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당하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AL 296) 한다.

  이 사목적이고 복음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특별히 더욱 복잡한 경우에 해당할 때―현대 철학의 중요한 두 흐름에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로, 존재론적 현상학은 본체론적 가치나 진리 인식에 있어서 근본적 태도 혹은 근본적인 정신 상태를 존중하라고 우리를 가르친다.22)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정신상태에 해당하는 자비의 덕에 대해 다룰 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오늘날의 언어 분석 철학은, 식별을 원하는 이와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사목적 동반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 태도의 중요성을 밝혀 준다. 사실, 이 철학 사조에 따르면, 언어가 실용적으로 쓰이는 순간은 언어의 의미론적 내용의 일부분을 이룬다.23) 즉, 리쾨르가 설명했듯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의 방법과 태도는―우리의 경우는 사목적 언어를 사용할 때―의미하는 바의 일부를 이룬다.24) 다시 말해, 말하는 내용, 곧 사목자가 내담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일부를 이룬다. 바로 여기에 영적 동반이나 면담 시에 자비로운 사목적 태도로 처신해야 하는 중요성이 있다.

  반대로, 복음적이지 않은 배척과 제거의 논리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추상적인 공식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본인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서―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사실상 복음의 정신과 구체적으로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교종은 단순하지만 지혜로운 목소리로 사목자들에게 당부한다. 엄격한 판단을 내리지 말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을 피하”(AL 296)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또한, 복잡한 상황들을 단순분류하거나 “적절한 개인적 사목적 식별의 여지 없이 그러한 상황을 단정해 버리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틀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AL 298)되며,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AL 310)인 교회를 “세관”으로 만들면서 “은총의 촉진자보다는 은총의 세리처럼 행동”(AL 310)하지 말고, “매우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 (…) 탁상공론식의 냉정한 도덕만 펼치지 않게”(AL 312)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동시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목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개인의 행위가 단순히 법이나 일반 규범에 맞는지만 고려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의를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서 식별하고 확인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AL 304) 아울러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목자는 도덕률을, 마치 사람들의 삶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나 되는 듯이, ‘비정상적’25)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단순히 적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AL 305)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상 “모세의 의자에 앉아 때로는 거만하고 피상적으로 어려운 문제들과 상처 입은 가정들을 단죄하려고 교회의 가르침 뒤에 숨는 것이 익숙한 이의 닫힌 마음”(AL 305)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을 명심하라고 사목자들에게 말한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AL 310) 베르골료의 모토 “자비로이 부르시니”에 따른 이러한 방향성은 최우선적으로 사목자들에게 적용된다.

실천적 지침

  이와 같은 사목적 동반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소상히 살피는 것이다. 개인이 처한 역사적, 정황적, 조건적 상황 안에서, 또한 그 상황을 완화시키거나 악화시키는 사건들 안에서 “인격적이고 영적인 성장과 복음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야”(AL 293) 한다. 예컨대, 성사에 대한 신실한 열망, 회개, 새로운 배우자에 대한 신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과 돌봄 등등이 이에 해당한다.

  프란치스코 교종 스스로 재혼한 이들을 존중했듯이,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식별의 여정에서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정황들을 분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의 경우를 구분지어 언급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고해지는 두 번째의 결합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자녀들을 얻게 되고, 공인된 신의와 관대한 자기 증여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며, 자신의 비정상적 상황과 새로운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는 양심의 가책 없이는 이 상황을 돌이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갑니다.”(AL 298)

  이를 위해 교종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이러한 과정은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통하여 양심 성찰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AL 300) 그리고 곧이어 재혼한 이들이 성찰해야만 하는 다양한 논점을 열거하며, “‘부부 사랑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어떻게 행동을 하였는가?’, ‘화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였는가?’, ‘내가 버린 배우자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이 나머지 가족들과 신자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AL 300) 등과 같이 자문해 보도록 한다.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위에서 말한 영적 여정이 어떠했고, 얼마나 발전하였는가, 매 상황과 순간에 가능한 최선을 이루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불가함으로 귀결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커다란 한계 속에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겉보기에만 올바른 생활보다 더 기뻐하실 것”(AL 305)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가 모두 개별적이고 모든 사례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규범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식별의 경우에도 하나의 결의론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의도와 정신 상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신뢰를 바탕으로 도와주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행하며, 「사랑의 기쁨」의 가르침을 포함한 교회의 인도에 따라서 임해야 한다. 교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 [우리 사목자들이] 다른 이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 온유한 사랑이 지닌 힘을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워집니다26).”(AL 308) 더욱이 해당 신자에게나 그의 사목자에게나, 사목적 결실은 ‘복음의 기쁨’을 이룰 것이다.

  교황 권고와 지역 주교들의 간헐적 지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내용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 식별의 전통 역시, 삶에서 가능한 “놀라운 다채로움”을 지지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함이 마땅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목자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그저 개인의 양심에만 내맡기거나 양심과 무관하게 그들을 동반하지 않듯이, 사목자 역시도 사목적 동반의 순간에 고립된 주체로 남거나, 교회적인 소속과 기능을 끊어버린 채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말고 오히려 교회를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함께하는 여정’이라는 시노드(syn-odos)의 본래 의미에 기초하여, 오늘날 몇몇 저자들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소중히 여기는 주제인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부각시키고 있다.27) 그 결과, 교종의 사도적 권고를 따르는 여러 주교회의와 소속 주교의 지침을 따르는 많은 신부들이 이 식별의 원리를 따름으로써, 포괄적 결의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실로, 이는 기준에 관한 문제이지 연역적 추론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그 기준들은 각각의 경우에 고유한 식별의 과정을 거쳐 적용되어야 하며, 개방적이며 유비적인 해석학에 따라서, 진리와 사랑, 정의와 자비에 충실한 태도로,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늘 ‘추구하고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28)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11-23 | 4015 (7/21 ottobre 2017)
** Juan Carlos Scannone S.I.
1) R. Guardini, Der Gegensatz. Versuche zu einer Philosophie des Lebendigkonkreten, Mainz, Grünewald, 1985 참조. 여기서는 가장 최근의 이탈리아어판, L’opposizione polare. Saggio per unafilosofia del concreto vivente, Roma, La Civiltà Cattolica – Corriere della Sera, 2014를 제시하고 있는데, 독일어판 제목의 ‘der Gegensatz’가 로망스 어군(語群)에서는 ‘l’opposizione polare’(상반된 양극단)로 번역되는 것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2) 각각의 서지는, F. Lefèvre, L’itinéraire philosophique de Maurice Blondel. Propos recueillis par Frédéric Lefèvre(모리스 블롱델의 철학적 여정: 프레데릭 르페브르와의 대담), Paris, Spes, 1928; M. Casalla, «Filosofía y cultura nacional en la situación latinoamericana,contemporánea(현대 라틴아메리카 상황 속 민족의 철학과 문화)», in O. Ardiles et Al., Hacia una filosofía de la liberación latinoamericana(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철학을 향하여), Buenos Aires, Bonum, 1973, 38-52 참조. 상황적이며 유비적인 보편성에 관해서는, J. C. Scannone, Religión y nuevo pensamiento. Hacia una filosofía de la religión para nuestro tiempo desde América Latina(종교와 새로운 사고: 라틴아메리카에서 비롯된 우리 시대 종교 철학을 향하여), Barcelona – México D. F., Anthropos – UAM (Iztapalapa), 2005, cap. 7 참조. 폰 발타살 또한 각 개인에 주어진 고유하고 유일한 성소와 사명에 대해 다룰 때, 유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H.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vol. 2: Die personen des Spiels, parte 2: Die personen in Christus(하느님의 드라마, 2권: 드라마의 등장인물들, 2부: 그리스도 안의 인간), (Einsiedeln, Johannes Verlag, 1978), 256s (tr. it. Teodrammatica, vol. 2: Le persone del dramma, parte 2: L’uomo in Cristo, Milano, Jaca Book, 1983, 259s) 참조.
3) 결의론(決疑論)은 양심의 문제나 행위의 선악을 경전이나 율법, 도덕에 비추어 규정지으려는 학설을 뜻한다. 즉 시대에 상관없이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고 한 가지 뜻만 강요하는 억지, 또는 특정 원칙으로만 판단하거나 단죄하려는 태도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 편집자 주
4) 본문에 인용되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의 모든 번역은, 가능한 한 역자 본인의 해석을 배제하고, 「사랑의 기쁨」 한국어판을 온전히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다만, 불가피하게 수정한 경우에는 따로 명시할 것이다. ― 역자 주
5) D. J. Fares, «Prefazione. L’arte di guardare il mondo(서문: 세계를 바라 보는 예술)», in R. Guardini, L’opposizione polare…, cit., VIII s, nota 1 참조.
6) 같은 글, IX-XI 참조.
7)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25항.
8) 같은 문헌, 119항.
9) 성 토마스의 공본성을 통한 깨달음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들 가운데에서도 『신학대전』II-II, q.45, a.2, c. 참조. 리쾨르는 이를 ‘마음’이나 플라톤 철학의 ‘격정(thymos)’와 관련지었다. P. Ricœur, Finitude et culpabilité, I: L’homme faillible, Paris, Aubier, 1960 참조.
10) 특히 다음을 참조하시오. J.–L. Marion, Réduction et donation. Recherches sur Husserl, Heidegger et la phénoménologie, Paris, Puf, 1989, 272-302; Id., Étant donné. Essai d’uune phénoménologie de la donation, ivi, 1997, 28s.
11)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건실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세 시기들」과 「영들의 식별 규칙」, 영신수련, 107-188번 및 313-336번 참조. J. C. Scannone, Discernimiento filosófico de la acción y pasión históricas. Planteo para el mundo global desde América Latina, Barcelona – México D. F., Anthropos – Universidad Iberoamericana, 2009; Id., «Church and Spiritual Discernment in a Secular Age and a Global World», in Atti del Congresso «Renewing the Church in a Secular Age. Holistic Dialogue and Kenotic Vision», Roma Pont. Univ. Gregoriana, 4-5 marzo 2015 참조.
12) K. Rahner, «Die Logik der existentiellen Erkenntnis bei Ignatius von Loyola», in Id., Das Dynamische in der Kirche, Freiburg, Herder, 1958, 74-148 참조. (tr. it. «La logica della conoscenza esistentiva in Ignazio di Loyola», in L’elemento dinamico nella Chiesa, Brescia, Morcelliana, 1970, 79-152); D. Gil, La consolación sin causa precedente. Estudiio hermenéutico-teológico sobre los n˚330, 331 y 336 de los Ejercicios Espirituales de San ignacio de Loyola y sus principales comentaristas, Roma – Montevideo, CIS, 1971.
13) M. Beuchot, Tratado de hermenéutica analógica, México D. F., Ítaca, 1997 참조.
1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 VI, cap.2 참조.
15) P. Ricœur, «La critique de la religion», in Bulletin du Centre Protestant 16 (1964) 5-16 참조.
16) B. Lonergan, «Natural Rights and Historical Mindness», in F. Crowe (ed.), A Third Collection. Papers by Bernard J. F. Lonergan S.I., New York – London, Paulist Press, 1985, 161-183 참조.
17)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301-303. 308항 참조.
18) 「사랑의 기쁨」에 대한 수많은 주석 가운데, il dossier «“Amoris laetitia”. Il discernimento», in Vita Pastorale 7 (2016) 33-50 참조. 여기서 특히 M. Yáñez, «Le situazioni irregolari», 44-47의 의견을 보라.
19) 「복음의 기쁨」, 209-216항 참조.
20) 「사랑의 기쁨」 한국어판에는 “불완전한 교회 생활을 하는”으로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21) 「사랑의 기쁨」, 301-302.308항 참조.
22) 예를 들어, 마르틴 하이데거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서 취한 ‘평온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라. 이는 현실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열린 태도를 말하는데,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며, 이냐시오의 불편심에 빗댈 수 있다. M. Heidegger, Gelassenheit, Pfullingen, Neske, 1959 (tr. it. L’abbandono, Genova, il melangolo, 2004) 참조.
23) 후기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존 오스틴(John Austin), 존 설(John Searle) 등과 관련된다. J. C. Scannone, Religión y nuevo pensamiento…, cit., 211-222 참조.
24) P. Ricœur, «Le modèle du texte: l’action sensée considérée comme un texte(텍스트 모델: 텍스트로 간주되는 현명한 행위)», in Id., Du texte à l’action. Essais d’herméneutique(텍스트에서 행위로: 해석학 논고) II, Paris, Seuil, 1986, 183-211 참조. (tr. it. Dal testo all’azione. Saggi di ermeneutica, Milano Jaca Book, 1994)
25)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한국어 초판에는 “비상정적”이라고 쓰여 있으나, 단순한 오타로 판단하여 “비정상적”으로 수정, 인용한다. ― 역자 주
26) 「사랑의 기쁨」 한국어판에는 “긴밀해집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
27) D. Vitali, «I soggetti del discernimento: la Chiesa(식별의 주체들: 교회)» , in «“Amoris laetitia”. Il discernimento», cit., 48-50 참조.
28) 이 글 본문은 2016년 10월 17일, 파리가톨릭대학교(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열린 「사랑의 기쁨」에 관한 연구의 날에 저자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정식 출판 서지는 다음과 같다. P. Bordeyne–J. C. Scannone, Divorcés remariés. Ce qui change avec François, Paris, Salvator, 2017. 편집자에게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