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성소

LA VOCAZIONE DI MARTIN LUTERO*

잔카를로 파니 신부(예수회)**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대전가톨릭대학교)옮김

  전기(傳記) 작가들은 루터의 성소에 대한 문제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두가 루터의 성소에 관하여 이야기하지만 일반적인 차원에 머물 뿐이다. 그러나 그다지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루터는 시류에 따라 21살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5년 7월 2일 가족을 방문하고 만스펠트(Mansfeld)에서 에어푸르트(Erfurt)로 돌아오던 중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났다. 번개가 그의 곁에 떨어졌고,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에 떨면서 그는 살게 된다면 수도승이 되겠다고 성녀 안나에게 서원을 하였다.1) 안나 성녀는 광부들의 수호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광부였기 때문에 가정에서 종종 성 안나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2주 후인 7월 17일 루터는 에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들어갔고, 수련자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게 했었다. 가난한 가정 출신 루터는 아버지의 노동력으로 살았다. 후에 그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충분한 위치에 도달하였고, 아버지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화려한 경력을 갖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일으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1501년 에어푸르트 대학교에 들어간 루터는 문학부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학업을 계속하여 1505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국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시기에 그는 매력과 열정을 느끼며 시작한 대학 공부와 문화 세계와 접촉하며, 가정적인 환경에서 떨어져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법학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아마도 자연이 주는 매력에 대한 예민한 감성으로 시인다운 정신을 지니고 음악을 사랑하던 청년 루터는 관상적인 영성 생활뿐만 아니라 내적 평화와 영혼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도생활을 향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터가 자신의 생애와 역사의 여정을 뒤바꾼 무서운 폭풍우를 맞닥뜨린 7월은 바로 그러한 시기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수도승이 되려는 루터의 결정에 반대하였고, 루터가 번개를 맞을 뻔한 순간에 수도승이 되겠다고 맹세한 일을 듣고서도 성소와 ‘하늘의 표징’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동의를 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성소에 대하여 아버지가 질색했던 일을 수차례 말하였고, 1507년 있었던 자신의 사제 서품 때에도 그것을 기억하였다. 몇 년 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형식으로 된 『수도서원에 관하여(De votis monasticis)』라는 책의 서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제가 장담하는 것은 제가 하늘의 공포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자가 되려는 기꺼운 마음, 자신의 원의도 아니고, 물질적인 이득에 움직이는 의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뇌에 휩싸여 자유로이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서원을 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2) 그러므로 수도승이 되려는 결정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1519년 그의 친구 크로투스 루베아누스(Crotus Rubeanus)는 슈토테른하임에서의 낙뢰 사건을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 받은 일에 빗대어 루터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제2의 바오로처럼 땅에 엎어졌다.”3)고 하였다.

  그렇다면 생각지도 않았던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식의 결론은 옳지 않다. 만일 루터가 어떤 망설임과 혹시 순간적인 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4)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원에 대해 갑론을박하거나 이를 무효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서원은 양심이 단단히 묶어놓은 일이었다. 그것은 루터가 생각해왔던 첫 번째가 수도원이 아니었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준비된 결정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미래를 위해 가능성 있는 추측으로서 적어도 가치를 가졌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인들은 쉽게 그런 서원을 하곤 하지만, 그의 진술은 무난하게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워하던 젊은 법학도가 그렇게 과격한 결정을 갑작스럽게 하였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어떤 경우든 루터는 두려움과 위험의 순간에 이뤄졌을지라도 서원의 유효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중대한 위험의 순간에 강요된 서원은 의무가 없다는 것을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듯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는 그 당시 전기 작가들이 전언하였듯이 어떤 사면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에어푸르트 수도원에서 그의 서원을 받은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들조차도 수도성소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가 입회하려고 지원한 수도원에 많은 지원자들이 있었으므로, 성소자들을 받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루터의 결정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더라고 해도, 이는 내적이고 진지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의 수도원 입회 초기에 수도생활에 대한 어떤 강박의 징후를 보이고 있지도 않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루터의 감정과 생각을 알기 위해 그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그에 관한 전기들은 요약하기 불가능한 방향으로 여기저기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수도서원 10년이 지난 후 1515-16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석 한 페이지에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겠다. 요한 미게(Giovanni Miegge)는 루터의 전기를 쓸 때, 이미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는 수도서원과 수도생활의 탁월함에 대한 아름다운 말들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강의에서 헌정하고 있다.”5)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인 14장(章)데 대한 주석에서 루터는 “오늘날 수도자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독특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방식으로 수도 성소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6)

  이 「로마서」 14장은 신앙이 허약한 이들을 다져 모으고 이들을 감화시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기 위한 권고이다. 이 장을 해석하면서 루터는 교회에서 첫 5세기 동안 있었던 관습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바오로가 보낸 편지에서 그토록 확언하는 복음적 자유의 원리가 교회 법률에 의해 규정된 그런 관습들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가?

  첫 번째 대답은 우리 시대의 신학자의 대답을 연상케 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원리와 쟁점이 되는 관습들의 비필연성과 질문자의 급진성에서 나오는 처방들을 즉시 인정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를 매우 분명한 상대, 즉 유대교를 향해서 제기하고 있다.7) 루터는 그러한 문맥 밖에서도 이를 법을 준수하는 것이 합법적이고 유용하다고 결론을 낸다.

  루터가 중간 단계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게 보인다. 고대 교회와 당대 교회에서 외적인 준수는 비록 적법하지만 지엽적인 것이기에, 누군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믿음과 사랑을 무시하면서 외적인 준수를 통해서 구원의 보증을 찾으려 한다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면서, 루터는 하느님과 자신의 내적 움직임에 입각하여 개인적으로 봉헌한 결의에 의거하는 개인의 감성에 따라8) 교회의 법과 관습을 고수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외적 태도에만 치중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곧 믿음과 사랑 그리고 내적인 덕을 고려하지 못하게 한다고 본다.

  루터는 여기서 비록 근본주의적 뉘앙스를 함축할 수 있기는 하지만, 수도 서원을 여전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누군가 서원을 지키면서도 그 근본적인 까닭인 사랑을 망각하고 있다면 이는 신성모독이며 자신의 자유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보는데, 이는 그가 사랑 없이, 의지에 반하여 행위한 것이기에 차라리 그 서원을 발하지 않은 것이 나았을 것이기 때문이다.9)

  이 점에서 루터는 가장 관련성 있는 주제인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완전히 내버려 두고 있었음을 자각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으로 맑고 단순한 자유를 산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마저 신약성경에서 오직 사랑으로 발견되고 사랑이 충만한 자유라면, 규정된 교회법들, 일반 규정들, 단식들과 정해진 축제들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신속하고 절대적이다. “보편 교회의 고대로부터의 동의에 의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이유로써 규정된 것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필수적이거나 불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회에 요구되는 사랑에서 감도된 순명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10)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교회에 따르는 순명은 구원을 위해서 본질적이다. 한편, 믿는 이들은 사랑과 교회를 위한11) 이 순명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수행에 관한 구체적인 이미지와 상황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에게는 사목적인 고려가 핵심이다: 교회 규범들이 최소한만 있어야 한다. 그 규범들은 항상 최종적인 목적지가 사랑이어야 하고 ― 왜냐하면 교회의 통교는 사랑이므로 ― 때가 되면 이 목적을 위해 재정립되고 바뀌어야 한다.

  이 담화는 여기서 당대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집중한다. 이는 교회법을 준수할 때에 필요한 지향이 결여된 것에서 비롯되는 현실인데, 신자들이건 사목자이건 외적 계명 실천에 치중할 때에, 특히 믿음과 사랑에 무관하게 자행되는 종교적 관습에서 발생하는 위험한 환상에 말미암은 것이다.

  루터의 관점은 비록 당대의 종교적 태도를 논쟁적으로 해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전통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수도 생활의 의례적인 측면을 가볍게 하는 전례 개혁 정도이겠다.

수도성소

  현실에 대한 언급이 담화의 마지막에 스며들어 있고, 이는 수도 서원에 관련된다. “지금(nunc) 수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의미를 지니는가?” 여기서 지금(nunc)을 주목하게 되는데, 수도생활의 절대적 가치 평가가 아니라 특정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법하게도, 그는 담화에서 루터는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곳, 즉 ‘절망이 수도자를 만든다(desperatio facit monachum)는 말’12)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낙담할 때에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하므로 수도자가 되고 만다. 루터는 이 전통적인 금언에 강하게 반박한다. 낙담은 수도자가 아니라 단지 악마를 만든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 때문에(ex charitate)13) 수도자가 된다. 곧 자신의 배은망덕함을 규정짓는 많은 죄들을 지은 이후,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려는 원의에서부터인 것이다.

  루터가 사용한 형식은 그가 살던 시대―전과 후에도 마찬가지로―에 내용상 전통성을 띤다고 하더라도, 독특한 강조점을 지니고 있어서 특별히 흥미롭다. 루터는 수도승에게 요구되는 겸손이나, 봉사의 외적인 하찮음에 놀라기보다는 수도복이 역사적 관련성과 시의적 의미를 결하고 있다는 데에 더욱 크게 놀란다. 그리고 그는 과장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이에 되돌아간다. 그리고 역으로 그리스도교의 역설이라는 차원에서 수도복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회복시킨다.

  이백 년 전 수도승의 수도복은 품격과 아름다움을 주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신과 취향에 본질적으로 부합하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도복이 수도자를 우스꽝스럽고 경멸스럽게 만든다. 그것이 더 넓게 자신을 비우고 자기 사랑을 버리도록 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ex charitate) 비롯된다면 그러한 겸손은 좋은 것일 수 있다.

  주교들과 사제들이 통상 수도자들에 저항하고 업신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감각 없는 수도복과 그에 따르는 모욕도 존재한다. 주교들과 사제들은 품격 있는 옷을 입고, 관계적 삶과 그전 오백 년 세월의 복장에 적합하며 그들의 세상 속 존엄성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안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수도성소를 위해 먼저 거부당하고 극단에 이르기까지 멸시받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거부당하고 멸시되길 원하므로 논쟁적인 반박을 하기를 머뭇거린다. 루터는 예상과 달리, 인간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수도승의 부적합함만을 증거하는 듯한 이 이상스러운 복장의 가치를 복원시킨다. 그러나 루터에 따르면 매우 적은 수의 수도자들만이 “그들이 십자가와 치욕에 노출되었으므로”14) 진정 기뻐한다. 

  하느님의 의지에 의거하여 각자 원의와 함께 청원을 결정하는 행동, 곧 바른 지향(bona intentio)의 주제도 나타난다. 수도 영성에서 예를 들어 기도(망각, 분심, 모순 등)에서 발생하는 원의의 자연적인 불연속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이 점에서 루터는 기본적인 반론을 제시한다. 즉, 바른 지향, 원의의 선한 움직임은 누구도 줄 수 없다.(참고 로마 7,14-24) 전통적인 교의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언제나 곁에 계시면서 그에게 그가 받고자 하는 내적 태도, 즉 내적 신실성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기에 이것이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확신을 거슬러 루터는 독설을 폈다. 그는 즉흥적이고 기쁜 태도와 무관한 인간의 신실함을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그에게는 다음이 결정적인 가치 기준이다: 만일 교회가 영적  관습들(전례, 규범, 기도, 단식 등)의 의무적인 성격을 제거한다면, 사람들은 즉시 그것들을 그만둘 것이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두려움이나 습관에서 행했다는 것을 말해줄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모든 교회와 제단들이 거의 황무지가 되는데 드는 시간은 일 년이면 충분할 것이다. 소득과 명예의 희망을 위해 또는 충만 혹은 양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하느님의 봉사에 전념하는 사람들처럼, 자유와 기쁨과 함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있어야 할 것이다.”15)

  역설적으로 이 페이지부터 명백하게, 수도 생활에 관한 루터의 입장이 매우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데, 이 때가 아마도 1516년 중반 경, 그가 수도승이 된 지 11년이 지난 시기이다.

성소의 진정성

  이 페이지는 장차 종교개혁을 이끌게 될 루터의 수도 성소의 진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루터 그 자신이 강하게 부정했던 참된 수도 성소가 그에게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도미니코회원 하인리히 주조 데니플레(Heinrich Suso Denifle)16)와 예수회원 하르트만 그리사(Hartmann Grisar)17) 이후에도 논쟁이 반복되어 온 문제이다.

  루터의 청년기와 성소에 관한 기본적인 연구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8)라는 제목의 전기를 저술한 오토 쉘(Otto Scheel)이 공헌하였다. 그는 루터에 관한 전설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통적인 이야기를 보존하되 명백한 오류와 황당한 부분은 제거한다. 수도원에서의 루터의 삶에 대해서는 플라치오 일리르코(Flacio Illirco)의 몇 가지 증언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성소와 영성 생활이 담겨 있다.19)

  지난 세기 중반, 루터의 성소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에 공헌한 여러 작가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개혁가의 가톨릭적 사고 안에 나타난 전환점을 제시하는, 1939-40년에 출판된 『독일의 개혁(La Riforma in Germania)』이라는 책을 집필한 역사가 요셉 로츠(Joseph Lortz)가 있다.20)

  그는 한편으로는 루터의 수도 성소의 진정성과 그의 영성 생활의 열정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성서 지식에 대한 열정을 말한다. 우리의 눈에 루터는 마치 ‘영성의 대가’로 다가오며, 무엇보다 강하게 그리고 독창적이고 심오하게 종교적인 사람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그의 전례 찬가들이나 잦은 고해 등에 특별히 드러나는 기도의 삶도 강조한다. 그리고 루터 신학의 핵심, 즉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언급한다.

  루터에 대한 비판도 분명히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뿌리 깊은 그의 주관성은 어떤 점에서 그의 오류를 야기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로츠(Lortz)의 저서는 어떤 점에서는 다소 오래되기는 했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특히 루터가 참으로 수도 성소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저술이다.

  몇 해 이후 1946년에 루터에 대한 소고를 쓴 요한 미게(Giovanni Miegge)도 기억해야 한다. 이 발도파 신학자는 루터의 수련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때는 루터에게 비교적 행복한 시기였다. 이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젊은이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성소에 열정을 가져다 주었다. 규범적인 삶의 이로움, 영적인 헌신, (…) 성무일도, 잦은 고해 그리고 그를 지도하는 이들과의 영적인 대화 및 그가 도움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읽었던 교훈적인 책들, 이런 것들이 이 젊은 수련자에게 영혼의 평화를 향한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21)

  미게는 이 진술을 여러 참고 자료들로 뒷받침한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루터의 진술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신심 깊은 수도승이었고 규범을 엄격하게 지켰다. 만일 어떤 수도승이 자신의 수도 생활의 미덕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동료 수도자들이 그것을 증언할 수 있다.”22) 루터가 복음 완덕의 길을 따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증언하는 다른 많은 증언들도 있다.

  책의 마지막에 미게는 그의 확신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개혁이 루터의 수도성소의 위기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수도 성소의 결과, 결국에는 바라지 않았던 종교 개혁이 뒤따랐다고 확언할 수 있겠다.”23)

  또 다른 연구자 리엔하르트(M. Lienhard)는 그 시대의 다른 많은 수도자들과는 달리 루터가 달리 살 길이 없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아님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의 결정을 분명히 종교적인 선택이었다. 만일 이 관점이 엄격하고 지존하신 하느님 앞에서 고뇌하는 양심과 만나는 지점이었다면, 수도 생활이야말로 그가 교회에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또한 그가 철학을 공부할 때에 알게 된 오캄주의에의 경향성과 하느님의 주권은 그가 추구하던 엄격한 삶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매우 엄격한 규율로 알려져 있었다.24)

  루터의 전기(傳記)에서 바인톤(R. Bainton) 역시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고,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도 더 강렬하게, 하느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였다”25)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루터의 성소에 대한 여러 엇갈리는 판단이 있음을 지적한다. “루터가 후일 자신의 서원을 번복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변심을 두고 그가 서원 자체를 발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에 따르면, 그가 참으로 수도승이었다면 자신의 수도복을 결코 벗어던지지 않았어야 한다. 그가 수도 생활의 체계를 비판한 것도 그가 수도 성소가 없었고, 하느님의 참된 부르심에 응답했기보다는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수도자가 된 것으로 보게끔 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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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판단들은 1516년 그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석으로 쓴 페이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정 서식의 정확함, ‘절망이 수도자를 만든다(desperatio facit monachum)’에 의거하는 전통적 금언에 대한 비판, 서원의 유효성에 대한 문제, 아버지와의 갈등 관계 그리고 면면히 들여다본 그의 삶의 맥락들은 보면 결국 루터가 참된 성소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의 수도 생활 초기에 좋은 수도승이었다. 그가 거짓 성소를 가졌다거나 그가 당시 시류가 그러했듯이 세상을 피해서 수도생활을 선택했다고 보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 M. LUTERO,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Weinmarer Ausgabe [WA]), Weimar, H. Böhlau, 1883 e ss., Tischreden 4, 440, n. 4707 (1539.7.16.) 참조.
2) De votis monasticis Martini Lutheri iudicium, 1521, in WA 8, 1889, 573 s.
3) WA Briefe 1, 543, 105 ss.
4) Cfr O. SCHEEL, Matin Luther. Vom Katholizismus zur Reformation, vol. 1, Tübingen, Mohr, 1926, 237 s; 296 e nota 8.
5) G. MIEGGE, Lutero giovane, Milano, Feltrinelli, 1977, 27;ID., Lutero. L’uomo e il pensiero fino alla Dieta di Worms (1843-1851), Torino, Claudiana, 2008⁵(or. 1946), 51.
6) WA 56, 497 s; M. LUTERO, Lezioni sulla Lettera ai Romani,, II, a cura di G. PANI, Genova, Marietti, 1992, 257.
7)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히브리인들이다. 모세율법과 할례 그리고 음식 규정들 준수하며 이를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세례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구원경륜은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 자체, 즉 그분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충실히 지키신 것에 토대를 세우고자 한다.
8) 라틴어 표현(secundum uniuscuiusque votum)이 매우 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옳다. (WA 56, 495, 27).
9) 주석: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다른 의무들과 사랑 대신 그 외적인 것에 매달린다.(마치 지금 모든 곳에서 사제들과 수도자들 사이에, 특히 세속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듯이) […] 우리가 다시 유대의 미신과 율법에의 노예로 되돌아간 것이라면 결코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단지 기꺼이 따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마치 이것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환상마저 갖고 있다.”(M. LUTERO, Lezioni sulla Lettera ai Romani, II, cit., 256).
10) Ivi.
11) Ex charitate: 이 장(章)에서 여러 번 이 표현이 나타난다.
12) WA 56, 497, 20-21. 실제의 금언은 다음과 같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군인이 되거나 수도승이 된다(Militem aut monachum facit desperation).
13) WA 56, 496, 14, 16.
14) M. LUTERO, Lezioni sulla Lettera ai Romani, II, cit., 257.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하지만 오늘 ― 슬프도다! ― 그들보다 더 오만한 사람들은 없다.”(ivi).
15) Ivi, 259.
16) H.-S. DENIFLE, Luther und Luthertum in der ersten Entwicklung; quellenmäßig dargestellt, Mainz, F. Kircheim, 1904. 바티칸의 하급 기록 보관인 데니플레(Denifle)는 15세기 수도회들과 성직자들의 퇴폐주의와 부패를 연구하였다. 그는 루터의 몇 가지 언급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루터를 욕망과 무지와 거짓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차라리 그가 수도자가 되지 않은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 저작은 당시 화제를 일으키며 심지어 독일 국회를 술렁이게 하기도 하였다.
17) H. GRISAR, Luther, 3 voll., Freiburg I. Br., Herder, 1911-1912. 그의 관점에서 루터는 수도 생활 초기부터 수도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켜지지 않은 서원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처럼 진지한 고려 없이 시작한 수도 생활이었기에, 루터는 그것을 지속할 은총을 받지 못하였다. 성소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사는 루터가 불행하고 심리적 장애를 지닌 이라고 결론 내린다.
18) O. SCHEEL, Matin Luther. Vom Katholizismus zur Reformation, vol. 2, Tübingen, Mohr, 1916, 6; 337, nota 36.
19) ID., Dokumente zu Luthers Entwicklung (bis 1519), Tübingen, Mohr, 1929², 201, nota 534 참조.
20) J. LORTZ, La Riforma in Germania, I, Premesse, inizio, primi risultati, Milano, Jaca Book, 1971 (or. 1939-40) 참조.
21) G. MIEGGE, Lutero…, cit., 59.
22) Ivi, 83. 작가는 1533년의 공작 조르지오와의 ‘작은 대답(Kleine Antwort)’을 언급한다. Cfr M. BRECHT, Martin Luther, I. Sein Weg zur Reformation. 1483-1521, Stuttgart, Calwer, 1983², 76 s.
23) G. MIEGGE, Lutero…, cit., 460 s; M MIEGGE, Maritn Luter(1483-1546). La Riforma protestante e la nascita delle società moderne(프로테스탄트 개혁과 근대 사회의 탄생), Torino, Claudiana, 2013, 34.
24) Cfr M. LIENHARD, Martin Luther, La passion de Dieu, Paris, Bayard, 1999, 21-26.
25) R. H. BAINTON, Lutero, Torino, Einau야, 1960, 15.
26) Ivi,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