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셩싼 신부, 천주교회와 중국정부를 말하다

LA CHIESA E IL GOVERNO CINESE
Intervista a p. Joseph Shih*

施省三神父談天主教會和中國政府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여명모 하상바오로 신부(예수회) 옮김

  나는 ‘성 베드로 카니시오’ 예수회 공동체의 수위실에서 스 요셉 신부를 만났다. 바티칸에서 두세 걸음 거리 밖에 안 되었다.『치빌타 카톨리카』는 두 차례 그의 글을 발표한 바 있지만1) 나는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90세인 그는 미소를 띠면서 친절하게 나를 맞이하였다. 얼굴엔 수많은 과거의 경력이 어려 있었는데, 남아 있는 인상은 오히려 평온하고 아주 평화로운 체험이었다.
  나는 그에게 자신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의 부모님은 딸 다섯과 아들 다섯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상하이에서 태어났고, 나는 닝보(寧波)에서 태어나, 닝보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집에서 나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가 언제 상해로 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어릴 적에 쉬자후이(徐家匯)에 있는 성 알로이시오 소학교(초등학교)와 성 이냐시오 공공학교[지금의 쉬후이(徐匯)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때 나는 매일 쉬자후이 성 이냐시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았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사건이 발발한 후, 쉬저우(徐州)에서 선교하던 캐나다 예수회 신부들이 쉬자후이 예수회 공동체에 소집되었다. 그 중에 몇몇 신부님들은 자주 성 이냐시오 성당에 와서 미사를 보았다. 1944년, 나는 성 이냐시오 공공학교를 졸업하였고,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마음이 성숙해졌다. 나는 1944년 8월 30일에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957년 3월 18일 필리핀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나는 그에게 예수회 안에서 받은 교육과 담당했던 직무들 또 어떤 지역에 가 보았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그는 로마, 독일, 오스트리아에 가보았고, 나중에 다시 로마로 불려왔다. 먼저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 그레고리안의 교수가 되기 위해, 그는 일찍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1년 반을 공부했고, 또 반년의 시간을 이용해 아프리카에 가서 당시 아프리카 각국이 분분히 독립하던 때, 천주교의 상황을 관찰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예수회 총원장 아루페 신부는 그가 남미에도 가서 둘러볼 것을 희망하였다. 후에 브라질에 갔고, 또 아르헨티나에서는 한 달을 머물렀다. 로마에서 그는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35년을 가르쳤고, 바티칸 방송국 중국어 프로그램 부문에서 25년을 봉사하였다. “주리더(朱勵德) 신부가 방송국에 와서, 매주 중국 대륙을 향해 주일 미사 성제를 방송하도록 주관하였고, 장춘선(張春申) 신부는 우리들에게 신학과 영성에 관련된 자신의 글을 보내 주었고, 朱立德(주리더) 신부는 대만에서 사서함을 열어 우리들이 개설한 청중이 사연을 보내는 프로그램에 협조하여, 국내 청중과 함께 교회의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2007년 예수회 린환(林桓) 신부가 바티칸 방송국 중국어 프로그램 부문을 이어받은 후, 스 신부는 바티칸 방송국을 떠났다. “그 이후로 나는 매년 대부분의 시간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나의 사명은 증거하는 것(삶)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천주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 상하이 혹은 로마, 어디든 모두 동일한 교회이며, 동시에 ‘거룩하고 하나이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온 교회’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중국의 천주교회의 생활과 중국 천주교 교우들의 미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도 중에 그들과 함께하고,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마음을 품고 그들과 동행한다. 베드로 후계자의 이러한 특별한 관심을 중국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최근 세 분의 교종 가운데, 나는 전임 교종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비교적 친숙하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매우 사랑하였고, 제3세계를 동정하였으며, 중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이해하였다. 그는 재위시에 중국 천주교회와 중국 정부의 화해를 촉진하도록 노력하였다. 애석하게도, 그가 동유럽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했던 역할 때문에, 중국 정부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교종 베네딕토 16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천주교회에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여, 현재 곤경에서 벗어나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였고, 또 셔산(佘山)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문을 써서, 우리 중국 천주교회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보편교회에 요청하였다.2) 우리 중국 천주교도들은 교종에게 매우 감사를 드리며, 그를 존경하고 있다. 우리들은 (또한) 모두 교종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의 풍격을 좋아하며, 그가 우리들에 대해 아버지와 같은 인자로운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최근 수십 년 이래, 중국은 아주 큰 변화, 놀랄 만한 신속한 발전이 있었다. 교회의 생활도 사회처럼 그렇게 변화하였는가? 당신의 개인적인 경험은 어떠한가?

  그렇다. 교회의 생활도 사회처럼 그렇게 변했다. 간단히 말하면, 첫째, 옛 신자(구교우)들이 흩어져 버렸다. 둘째 새로운 신자들이 증가하였다. 구교우의 흩어짐: 중국 천주교도들은 이제껏 대부분 농촌에 있었다. 현재 농촌 안의 젊은이들도 줄지어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찾고 있고, 노년층도 종종 자녀들을 따라 도시로 가서 집안일을 돕는다. 농촌은 비어가고, 농촌 성당의 교우들은 모두 흩어졌다. 신교우의 증가: 중국인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근심 걱정이 더 많아졌다. 일자리를 구하는데 걱정하고, 집을 사는데 걱정하고, 자녀 학업에 걱정하고, 노후대비에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사람들의 종교적인 정서를 자극하였다. 현재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증가하였고, 천주교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상하해 쉬자후이(徐家匯)에 살고 있다. 쉬자후이는 원래 교우촌이었다. 성당 주변 사방은 모두 교우들의 집이었다. 현재 쉬자후이는 상하이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성당 주변 사방의 집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주민들은 모두 이주 당하였다. 현재 쉬자후이 성 이냐시오 성당에는 토요일 저녁과 주일 합쳐 모두 일곱 대의 미사가 있고, 매 미사마다 교우들로 가득 찬다. 주일의 첫 번째 미사는 여전히 예전의 구교우들이 참례하고 있지만, 그들은 먼 곳에서부터 차를 타고 온 것이다. 나머지 여섯 대의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은 대부분 국내 각지에서 온 신교우들이다. 그중 적지 않은 수가 젊은 지식인들이다.

  중국의 오늘날 사회와 문화 환경의 특징은, 수많은 서로 다른 경험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앞뒤를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고정관념과 피상적인 이해를 초월해야만 한다. 결국, 우리들은 비관해야 하는가 아니면 낙관해야 하는가? 중국의 천주교회는 어떻게 이러한 역사적 거센 흐름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나는 낙관적이다. 첫째로, 나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인류의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귀착지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이다. 이는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이다. 둘째로, 당신이 말한 것이 맞다. 우리들은 반드시 고정관념과 피상적인 이해를 초월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고정관념을 고집하지 않고, 피상적인 것만을 보지 않는다면, 중국 정부가 현재 실현하고자 꿈꾸고 있는 사회주의의 핵심가치가, 결코 우리들이 신앙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 중국 국내의 천주교회가 중국 정부와 서로 용인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중국 국내에서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코 비관하지 않고 낙관한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인 여론은 모두 사도좌와 중국 정부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그 대화의 주요 목적이 사목방면에 관한 것이고, 정치, 사회, 외교는 그 다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화를 하려면, 당연히 한편에서 기억을 정화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기로 결심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중국 천주교도들은 어떻게 서로 화해하고 또 교회의 친교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우리 중국에서, 정부는 다만 5대 종교가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5대 종교에 대해 모두 지배와 제재 기관을 설립하였다. 천주교는 그 5대 종교 중의 하나이지만, 천주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우리 국내의 천주교회에 두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한 부분은 승인하고, 다른 부분은 승인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종교활동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해외 매체들은 중국 정부의 표현을 따라야 하는데, 다만 그것을 청중들이 비교적 익숙한 명칭으로 바꾸자면, 중국정부가 승인하는 천주교회를 관방교회(소위 애국교회 ― 역자 주)라고 칭하고, 중국정부가 승인하지 않는 천주교회를 지하교회라고 칭한다.
  중국 국내에서 생활하는 천주교도들도 이러한 칭호를 알고 있지만, 그들은 또한 중국정부의 종교정책과 천주교의 신앙을 구별할 줄 안다. 그들이 설령 중국 정부의 종교정책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천주교의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중국 국내에는 오직 하나의 천주교회만 있는데, 바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니케아신경에 맞게 순서를 바꿔 옮겼음 ― 역자 주) 교회이다.
  우리 국내에 비록 오직 하나의 천주교회만 있고, 하나의 천주교회 안에, 확실히 두 개의 다른 단체가 있다. 하나는 관방교회라 칭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지하교회라 칭할 수 있다. 두 개의 단체에는 각기 각자의 성직자 체계가 있다. 그들 사이에는 자주 분쟁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신앙의 차이가 아니라 종교적 이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다. 다시 말해, 전임 교종 성 요한 바오로2세의 끊임없는 호소를 통해, 중국 국내의 소위 관방과 지하교회는, 일찍부터 상호 화해와 친교를 시작하였다. 2005년 상하이 교구 싱원즈(邢文之) 신부가 주교로 축성된 것이 바로 좋은 증거이다. 현재 사도좌와 중국 정부가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 국내 관방과 지하교회의 차이를 과장하여 표현하면서 사도좌와 중국정부의 대화를 방해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중국에서 그 사명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건강한 실용주의를 가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어떻게 이 원칙을 중국의 실제 상황에 맞게 실천할 수 있을까?

  중국 정부는 공산당 정부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오늘날 중국의 실제상황인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수십 년 안에, 심지어 백년 후에 반드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천주교회는, 중국 국내에서 중국 정부와 모종의 관계를 맺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대립하는 관계?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다. 타협하는 관계인가? 그도 안 된다. 그것은 자기 본래의 색깔을 잃게 된다. 그러면 유일한 한 가지 가능한 관계는 상호 용인하는 것이다. 용인과 타협은 다르다. 타협은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인데,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까지 양보하는 것이다. 용인은 상대방에게 양보하지는 않지만,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 국내의 천주교회와 우리 중국 정부의 상호 용인에는 필수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로마 교황청과 사도좌가 중국 정부와 대립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사도좌와 중국 정부가 대립하면 우리 중국 국내의 천주교회는 필연적으로 사도좌와 정부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면 당신 생각에, 중국 정부가 사도좌를 따르면서도, 자국 내에 자신과 대립하고 있는 천주교회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혹여 나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교황청이 중국정부를 반대하지 않으면, 그러면 중국 정부가 바로 중국 국내의 천주교회를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천주교회는 현재 이미 중국 국내에 존재하고 있고, 또한 상당한 성과들이 있다. 천주교회와 중국정부의 상호 용인은 이미 시험 단계 안에서 실현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건강한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신부님은 상하이 보좌주교 마다친(馬達欽)이 인간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겪은 고통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마다친(馬達欽)은 2012년 7월 7일 주교로 축성되었다. 당시 그는 로마 교황청과 북경 정부가 상호 승인하고 받아들인 주교였다. 하지만 그가 서품식을 치른 후에 곧바로 애국회의 모든 직무를 사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정부를 거슬렀다. 그래서 (그는) 바로 연금되었고, 머지않아 주교로서의 공적인 직무가 철회되었다. 나중에, 작년 6월 그는 그의 상하이타대오(上海達陡) 블로그에 글을 발표하여, 그가 종전에 애국회를 떠나기로 한 결정에 대한 후회를 표시하면서, “일찌기 외부 세계의 현혹에 꿰어, 애국회에 잘못된 언행을 하였다. 사후에 반성을 해보니, 이것은 지극히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고, 또 양심에 있어서도 오히려 더 평화롭지 못하였다.” 최근 올해 4월 16일, 예수부활절에 그는 더욱이 복건성 민동교구에 있는 공개교회(정부에서 인정한 교회. 지역에 따라 종교적인 상황이 다름으로 인해 여러 용어들이 혼용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보임. ― 역자 주) 단체의 주교관에서 짠쓰루(詹思錄) 비합법주교와 공개적으로 공동주례를 하였다. 그래서 매체 상에 빈번히 그의 ‘변심’과 ‘투항’이 회자되고 있다.
  나는 마다친 주교를 안다. 나는 그가 ‘변심’도 ‘투항’하지도 않을 거라 믿는다. 내 생각에 그는 숙고(想穿: 생각하여 통하였다는 의미 ― 역자 주)하였고 깨닫게 되었다. 원래 어떤 중국인도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애국은 종종 추상적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공자의 중국일지도 모른다. 혹은 장제스의 중국인지도 모른다. 마다친의 깨달음은, 첫째 애국은 구체적인 중국을 사랑하는 것으로, 오늘날 공산 정부 통치하에 있는 중국인 것이다. 둘째 그는 교회가 반드시 중국 정부와 대립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반대로 교회는 오늘의 중국에서 생존해야 하고 또 성과를 내야하며, 반드시 적어도 정부가 용인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결국, 마다친 주교는 “건강한 실용주의”를 이해한 중국 주교인 것이다. 그는 그래서 민동 교구에 가서 짠쓰루 비합법주교와 공개적으로 공동주례를 하였던 것이다. 먼저는 짠 주교와 화해하기 위해서였는데, 자신이 주교로 축성되던 날 이 주교의 안수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중국 정부와 화해하기 위해서였는데, 그의 (서품식) 당시의 행위는 또한 현장에 있었던 중국 관원들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주교는 현재 중국에서 생활하는 주교이고, 가택연금된 셈이지만, 그는 중국 정부에 대해 선의를 표현한 것이다. 전임 교종 성 요한 바오로2세는 재위 시에 중국의 천주교회와 중국 정부가 화해할 것을 누차 권면하였고, 현재 마다친 주교는 교종의 유지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2세 교종께서 하늘에서 그에게 강복하시기를 빈다.

  수많은 주교, 신부와 평신도 최근 수십 년 동안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증거하였다. 그들의 충정이 오늘의 교회와 새세대 교우들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

  당신의 질문은 내가 얼마 전에 쓴 주일미사 강론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연중시기 제 12주일의 미사 강론이었다. 주일미사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26절에서 33절이다. 내가 쓴 주일 미사 강론의 표제는 ‘큰 소리로 하느님이 뜻을 선포하여라’였다. 강론 중에, 나는 미사 복음을 봉독한 이후에 계속해서 말하였다.
  이상의 말은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 마태오 사도는 그것을 기록하여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모든 교우들이 읽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교훈은 2천년 후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고 또한 매우 값진 것이다. 얼핏 들으면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정말 대단해, 아예 우리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으셨다라고. 사실상 그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들은 우리의 육신을 소멸시킬 수는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들의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지옥에 보낼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아야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자기 신앙을 인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은 구원하실 수가 없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보증해 주셨다. 우리들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허락이 없이는 누구도 우리들을 해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 두 마리의 참새 혹은 머리카락 한 가닥과 같은 작은 일조차도 또한 그의 통치 아래에 있다. 바꾸어 말해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다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신앙을 위해서 증거하고 또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고초를 겪은 수많은 주교, 신부와 평신도들은, 예전부터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고 또 실천한 것이다. 현재 (그들은) 더더욱 그들의 모범을 통해서, 오늘의 교회와 훗날의 천주교도들에게 그와 똑같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다시 말해, ‘순교자의 피는 교우의 씨앗이다’. 오늘날, 천주교회는 우리의 국가 안에서 상당히 평화롭고, 교우들도 증가하였다. 이 또한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은 우리 중국 천주교회 안의 진주들이다.

  신부님 개인적으로 중국 천주교 신자들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바람을 가지고 계시는가?

  나의 바람은 해외에 머물면서 국내 천주교회에 관심이 있는 인사들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해가 되는 부적합한 일들을 만들어낸다. 나의 바람은 우리 중국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다른 국가로 이주해 가서 이주민이나 난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우리 천주교도들이 우리들 자신의 국가 안에서 진정한 천주교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 사도좌가 중국 정부와 대화를 진행 중인데, 나의 바람은 사도좌가 숭고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품고서 중국 정부에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 국내의 천주교회로 하여금 그와 우리 국가의 정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V 52-58 | 4015 (7/21 ottobre 2017)
1) J. Shih, «Il metodo missionario di Matteo Ricci» in Civ. Catt. 1983 I 141-150; Id., «La Chiesa cattolica in Cina. Una testimonianza», ivi 2016 II 369-374 참조.
2) Benedetto XVI, «Lettera ai vescovi, ai presbiteri, alle persone consacrate e ai fedeli laici della Chiesa cattolica nella Repubblica popolare cinese», Roma, 27 maggio 2007. Cfr anche La Civiltà Cattolica, «Nota esplicativa sulla lettera di Benedetto XVI ai cattolici cinesi», in Civ. Catt. 2007 III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