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성찰과 실재에 대한 시적인 주목

ESAME DI COSCIENZA 
E ATTENZIONE «POETICA» ALLA REALTÀ*

마시모 팜팔로니 신부(예수회)**
최현순 데레사 박사(서강대학교) 옮김

  “만사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라.” 이것은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유명한 좌우명이다. 점점 더 가속화되는, 그리고 특히 실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현대 상황에서 이 좌우명이 갖는 호소력은 중요해졌다.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런 움직임에 우리가 휘말리지 않도록 이냐시오 영성이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성찰 기도’이다.
  먼저 시인이자 수필가인 크리스티나 캄포Cristina Campo(본명 비토리아 게리니Vittoria Guerrini, 1923-1977)의 몇몇 구절에서 시작해보자. 여기서는 성찰기도로 단련된 관상적 시선이 우리의 삶을 관상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텍스트로 변화시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시적 시선과 관상적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동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에 위치한 ‘활동 속의 관상’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교회 전체뿐만 아니라 특히 기도에 할애할 시간이 조금밖에 없는 사도직 활동 종사자들 그리고 일터와 가정에서 분주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보물이다.

시적 주목(注目)

  크리스티나 캄포는 통상적인 개념을 뒤집는 수필 “주목과 시”1)에서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상상이 아니라 주목Attenzione이라고 말한다.2) 상상은 순전히 [마음 내키는 대로 떠올리는] 자의적 활동이고, 본질적으로 “사물의 실재에 대한 폭력”이다.3) 반면 주목은 일종의 ‘기다림’이자 “대담하고 적극적인 실재의 수용”이다. 주목은 “현실에 단단히 닻을 내리는 것”으로 다만 그 실재 속에 숨겨진 암시”만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 한가운데에서 신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4) 정의와 관련해 주목은 실재의 “참된 진실”을 추구하는 반면, 상상은 자기 자신을 현실에서 멀리 떨어뜨려 근원적 불의를 저지르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도취된 이를 [현실과 분리된] 정신착란 수준에 이르게 한다.
  캄포가 드는 예는 상징적이다. 엘렉트라Elettra의 가혹한 정의(正義)는 자신을 죄수로 상정하여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의 고리에서 고리로 그 힘의 무게를 옮기며 더더욱 죄책감에 짓눌린다.”5) 반면 안티고네Antigone의 정의는 영적이고 사려깊은 것이어서 열정에 대한 강한 필요성에서 자유롭다. 엘렉트라의 열정적인 정의 추구는 유리피데스Euripides식 구체적 행동이든, 소포클레스Sophocles식 증오의 지속적 동력에 휘둘리든 피로 얼룩진 복수로 끝난다. 반면 안티고네는 더 상위의 책임성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비극적 딜레마에 마비된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는 계획을 변경함으로써 정의 추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므로 상상은 우리 시대에 점점 더 접하게 되는 어떤 비극적인 경향을 조성하는데, 이미 캄포가 당시에 인지했던 것으로,6) 단순한 현실이 전하는 사실을 무시하려고 한다. 이에 대한 긴급하고 또 점점 더 뚜렷해지는 예증은 “새로운 인간학”이라 불리는 것들의 주장이다. 사실 이런 경향들은 단지 실재에 반발해 시비를 거는 유구한 영지주의 유혹의 출현에 불과하다.7)
  따라서 주목과 상상을 대조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할 위험을 거슬러 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법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의 중대한 요구에 대한 각자만의 진실한 응답이다.
  캄포는 계속해서 말한다. ‘주목’은 또한 깊은 윤리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아마도 주목의 가장 고양된 형태일 것이다. ‘주목하여’ 바라볼 때, 실재와의 만남에 들어갈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치유 받아야 할’ 존재로 내어줌으로써 실재가 나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은 아마 가장 순수한 형태인 ‘책임감’이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을 얻게 되는데, 이는 곧 누군가 혹은 그 무엇에 응답하는 능력으로 악에 대항하여 시와 같은 정도로 존재들 간의 이해를 증진시킨다.8)

  그러므로 주목한다는 것은 시인의 자질일 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여행자viator라는 자신의 조건을 온전히 살기 원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다. 주목은 최고로 어려운 과제인데, 왜냐하면 부주의와 상상력은 명백하지만 매혹적인 지름길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기술을 잘 이행하는 데 필요한 진정한 헌신을 기만한다.
    “한 사람에게 결코 산만해지지 말고, 상상의 모호함에, 습관적 게으름에, 관습적 체면에 굴복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주목의 최고 경지를 실현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맹목적인 분노와 냉혹한 성공만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그에게 거룩함에 아주 가까운 무엇인가를 요청하는데, 곧 자신의 주의력에서 인간 정신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9)

실재를 잘 바라보기: 행위에 주목 

  이 시적 주목에 대한 예는 현대의 두 작가, 브라질의 여성시인 아델리아 프라도Adélia Prado(1935년생)와 마리오 루치Mario Luzi(1914-2005)가 보여주는 한편, 우리 논의의 기초는 예수회 신학자인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1904-1984)의 몇몇 글에 표현되어 있다. 그는 캄포가 ‘주목’이라는 용어 안에 회화적으로 종합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예술은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이 세상이 드러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찾고 또 드러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침묵의 언어로, 정의될 수 없거나 파악될 수 없는 어떤 현존으로 그것을 드러낸다.”10)
  로너간은 [플라톤의 ‘변론Apologia Sokratous’에서] 재판 중 멜레투스Meletus가 무신론 혐의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것, 즉 태양은 돌이고 달은 땅이므로 이들은 돌과 땅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간접 인용하면서, 사물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것은 실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무엇인가를 빼앗아, 인간 경험 세계에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1) 예술은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것이지 발명하지 않는다. 예술은 순전히 물질적인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세상의 광채는 하나의 암호, 하나의 계시, 드러냄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파악되지 않으며, 분류될 수 없고 차이로 구분되지도 않는 그 무엇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존한다.”12) 그리고 로너간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종합한다. “예술은 해석해야 할 어떤 의미의 가능성을 지닌다.”13) 앞서 현존하는 이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술은 순전히 허세 가득한 탐미 혹은 놀이가 될 뿐이며, 궁극적 실재를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오로지 유물론적 열쇠로만 인식하는 것과 비교하여 궁극적 의미에 주목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무질서한 시대에 근본적이며 교육적인 필수 과제, 즉 “주체의 자유의 재-창조, 양심의 자유의 인정”14)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푀겔린Voegelin도 [마르크스, 콩트, 니체같은 저자들처럼 실재 일부분의 모호한 현상에 관해 분석했는데, 오직“새로운 세상을 재창조하려는” 그들의 체계 때문에 모호해진다고 밝혔다.15) 그는 “다시 실재와 접촉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수단은 실재를 아직 놓치지 않았던 과거의 사상가들에게 혹은 실재를 다시 파악하고자 노력했던 이들에게 호소하는 것임”16)을 지적한다. 하지만 이 사상가들이 사용했던 수많은 단어들과 개념들은, 위에 언급된 저자들이 그것들을 사용한 시대와 달라졌기 때문에 인내롭고 주의깊게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푀겔린이 철학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가 보기에 크리스티나 캄포의 ‘주목하라는 권고’와 부합하며, 몇몇 시인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 예를 들 수 있다.

아델리아 프라도Adélia Prado의 완전한 “일상routine”

  프라도의 시적 세계는 브라질의 큰 주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내부의 삶의 단순성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미나스 제라이스의 일상생활은 아직까지도 단순하고 전통적인 종교성에 젖어 있다. 다음은 “벽화Mural”라는 제목의 시이다.

둥지에서 계란을 주워 담는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이 여인은
늘 그렇듯 능숙하다.

어슴푸레한 빛이 주위를 감싼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빛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베일에 덮인 자연의 빛은 
그녀에게서 나온다.

가족이 있음에,
즐거운 일상을 사랑함에 
그녀의 기쁨 자체일 뿐.

그녀는 모른다, 
온전한 일상은 하느님이심을. 
암탉은 또다시 알을 낳았다고 울 것이고, 
그녀는 치마를 둘러 입을 것이며 
나무는 제 때 발그레해진 꽃을 피울 것이다.

여인은 기도할 줄 모른다. 
그러하오니 주님, 
아무 것도 바꾸지 마소서.17)

  이 장면은 단순하고 심지어 하찮게 보인다. 세상 어느 시골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어렸을 적 엄마, 할머니 혹은 이모를 떠올리면 어렵지 않다. 한 여인이 자기 집 헛간 앞마당에서 계란을 꺼낸다. 오늘날 흔한 장면은 아니겠지만, 보다시피 눈에 띄게 특별한 것은 없다. 시인은 그러나 ‘주목’하며 바라본다. 시인은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선명히 인식하면서도 단순한 미학적 평가 그 너머를 바라본다.
  이 ‘주목’을 통해 시인은 그 반복되는 행위들 안에서, ‘흥겨운 일상 안에서 다름 아닌 신성 자체에의 참여, 즉 일상의 소소함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참여하는 장면을 발견하고 있다. 이 일상의 소소함들은 매일매일 기적적인 삶의 지속 안에서 반복된다. 요컨대 온전한 일상이야말로 하느님이다. 시인은 이를 알아차리고 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닌 주목에서 비롯됐다. 시인은 그녀의 삶이 어떻게 기도가 되는지 주목하여 바라본다. 설령 이 여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녀의 소소한 행위들이야말로 온전한 일상, 곧 창조주 하느님의 지속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암탉은 알을 새로 낳았다고 울 것이고, 그녀는 치마를 둘러 입을 것이며 나무는 제 때에 그 발그레한 꽃을 피울 것이다”). 이것은 한 여인이 사랑하는 일상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처럼 흔하디 흔한, ‘세상’이 보기에 특별히 눈에 띌만한 어떤 것도 없지만 고요 속 온전한 돌봄의 행위들로 표현된 사랑의 일상이다.
  시인은 그녀 주변에 퍼지는 빛을 바라본다. (“빛은 그녀에게서 나온다”). 고요한 사랑을 향한 순종의 자취를 따를 때 이 빛을 볼 수 있다. 이 순명을 통해 그녀는 일종의 ‘그리스도의 운반자’(Cristoforo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사람)가 된다. 다름아닌 그리스도 당신이 탁월하게 빛을 내신다. 이 여인의 단순한 행동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시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도 기도에 일치되어 “주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마소서”라고 관상적 청원으로 향하게 한다. 

마리오 루치Mario Luzi의 삶에 대한 미각

  비슷한 장면을 루치의 “바램”이라는 시가 묘사한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한 여인이 
오전 내내 노래한다, 
얼마나 체력이 버틸지, 
복도를 닦고 
왁스를 칠한다. 
일어나 소리 높여 노래 부른다. 
이제 막 혼인한 여인은
아이 낳고 집안일 돌보며 
잘못하면 다투기도 하겠지. 
솔과 걸레로 
벌집 구석구석 쓸고 닦는다.
바깥은 벌써 봄이다.

이제 주위 모든 발코니마다,
그녀가 풍요와 죽음의 예식을 거행하는 시간 
화분에 물을 주고, 꽃을 꽂아
긴 잎들을 꺾어 다듬고, 
마른 가지들을 떼어내며 
엉킨 싹들을 풀어준다.
비보다 더 많이 물을 주고 

더 뜨거운 햇볕을 쬔다,
혹은 나의 젊음과 활력을 위하여, 
조금씩 시들어갈 나의 늙음을 위하여, 

비오니, 
여기 있음이 은총이기를,  
손 모아 비는 것도 은총이기를.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다문 입술과 낮춘 눈길에도 은총이 깃들기를. 
삶의 올바름 속에,  
세상사 속에, 
여기 있음이 은총이기를, 
그대로 이루어지기를.18)

  이 시도 일상의 장면을 그린다. 신혼의 젊은 여인이 집을 청소하고 있다. 아마도 토요일 아침 같다. 시인은 우리 각자가 그 순간 그곳을 지나간다면 보게 될 장면을 보고 있다. 그러나 ‘주목’하여 바라본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이상을 볼 수 있다.
  젊은 여인의 행동, 즉 풍요와 죽음의 예식을 거행하는 행위들, 식물에 물을 주고 마른 잎들을 떼어주는 것들은, 주목하여 보았을 때 더 큰 의미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시인이 여인의 개별 결정들에 부여하는 의미, 다시 말해 로너간과 함께 ‘해석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한다. 시인은 그녀의 행위들이 함축적인 사랑의 표현임을, 의식적이지만 그 순간에는 주제화될 수 없는, 그럼에도 여인이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발산하고 표출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다. (“비보다 더 많이 물을 주고, 더 뜨거운 햇볕을 쬔다”). 
  사실 이 여인은 보통 ‘벌집’과 관련해 연상되는 여왕벌이나 부지런한 꿀벌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제적 직무의 거행과 그녀의 노래를 통해, 마치 빛 자체가 퍼지듯 그녀를 움직이는 그 사랑이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그 발코니와 그 방들은 한 현존을 위해 준비된 왕좌etimasia와 같다.19)
  시인은 그러한 현존을 알려주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이 가장 큰 의미 속에 담겨져 있음을 간파한다. 그 가장 큰 의미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동시에 여자의 일상 행위들을 드러낸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에게 드러난 그 전체의 한 부분을 느끼면서 눈을 반쯤 감을 수 있다. 생애 모든 무대를 그 실제적 특성들과 함께 모아들이도록 요청하면서(“혹은 나의 젊음과 활력을 위하여, 조금씩 시들어갈 나의 늙음을 위하여”), 삶의 올바름과 세상사 안에 그 분 현존의 면전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시는 아델리아 프라도가 그랬듯이 기도처럼 마무리 한다. 여인의 전례적 행위들을 주목해 보면, 시인의 소망은 ‘그렇게 되기를’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의 기도로 끝나는데, 그러한 표현은 성찬기도 마지막에 바치는 ‘아멘’과 같은 힘을 지니고 울려 퍼진다. (“비오니, 여기 있음이 은총이기를, 손 모아 비는 것도 은총이기를”).

성찰기도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영적인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관상으로 이끄는 ‘시적’ 주목이 일어나는 장은 ‘성찰기도’인데 종종 ‘양심성찰’이라고도 불린다. 비록 ‘양심성찰’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고백성사에 대한 즉각적인 준비만 요구할 우려가 있지만 말이다.
  이 기도의 의미를 두 단어로 종합해야 한다면 일상생활에 적용된 이냐시오『영신수련』(ES)의 역동성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
  권고에 따르면 15분을 넘지 않고 예수회원들이 수련기부터 매일 두 차례씩 하는(이냐시오는 말년에 매시간마다 했다) 이 짧은 기도는 다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 하루 동안 (혹은 최근 성찰 이후) 주님에게서 받은 구체적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기, 2)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성령을 청하기, 3) 자신의 하루의 삶을 다시 헤아려 보면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말했으며, 또 어떻게 반응했는지 등등을 돌아보는데, 이는 하느님이 어디에서 지나가셨고, 어디에서 당신의 요청이 있었으며, 어디에서 우리가 응답했고, 어디에서 우리가 깨닫지 못했는지, 어디에 우리가 숨었는지 등등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4) 앞 단계에서 드러난 습관적인 부족함에 대해 용서를 청하기, 5) 마지막으로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과제들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이후에 할 일을 곧바로 기억하기(점심 전에 성찰했다면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저녁에 했다면 그 다음날).
  이 기도는 마음수행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 역사 어디에서나 계시는 하느님을 찾고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는 성령께서 매일 우리와 함께 쓰시는 ‘구원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행하는 매일의 짧은 성찰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 우리의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안에서 주님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시적’ 주목의 능력, 다시 말해 삶의 모든 순간 나에게 당신 자신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상에 적용된 『영신수련』자체의 역동성으로 움직인다고 할 때,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가 『영신수련』의 규칙에 대해 쓴 글을 보면21) 어떤 식으로든 ‘성찰기도’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하루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일종의 이야기 훈련으로서, 순전히 파편화돼 버릴 수 있는 순간들을 재결합시켜 그것들이 왜 의미 있는지 해석할 수 있도록 하나의 단위를 부여한다.
  스파다로 신부는 『영신수련』수행법이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적 관찰을 하도록 초대한 결과, 그들이 많은 글을 쓰도록 만들었고 또 계속해서 쓰게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영신수련』에서는 “내면적으로 어떤 것을 관찰하게 되어서, 그리고 눈을 열어준 어떤 조건에 놓여짐으로써 인생과 세상과 사물과 현실을 더 잘 보게 해주기 때문”22)이라고 쓰여 있다. “성찰기도”에 대한 설명은 쓰여 있지 않지만, 동등한 하나의 이야기이며 글로 쓰여 있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하느님에게 말하고 있는 그 텍스트는 우리의 하루 자체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그 자체로 기억을 통하여 실재의 구현을 가능케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이 기억의 훈련을 이해하는지–‘성찰기도’ 또한 기억 훈련이기 때문에–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돕는지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기억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만나고 내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행한 행동들, 그리고 그것들을 행하면서 가졌던 감정들을 상기시킨다.”23) 이에 대해 과르디니R. Guardini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기억은 자기 인식 기관이 되며, 그것으로 자기 역사의 기초가 된다.”24)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너머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의 고백록은 전지하신 존재 앞에서 했던 조용한 독백 수련이다. 이것은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진실할 수 있는(모든 것을 아시는 분에게 거짓말은 부질없다) 체험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그래서 이 수련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다름아닌 가장 참된 자신의 정체성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25)
  그러나 이런 정체성은 자기 삶의 부서짐과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적대세력에 대한 인식 안으로, 더불어 죄의 심연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 자비와 용서에 의해서(네번째 단계)만이 아니라 감사(첫번째 단계)에 의해 회복되고 치유되고 결속되고 쇄신되는 것으로, 곧 기도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찰기도는 하루 동안 ‘방문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들에 대한 내적인 이야기에 감사하며 주목하여 바라보는 마음을 훈련시킨다. 그러한 순간들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되거나 위로나 실망 등의 감정적 반응이 올라오는” 경우들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찰 안에서 읽게 되는 우리 삶의 텍스트는 항상 요점공책을 예고하는 일종의 현장보도(reportage)같은 것으로, 그 공책에는 “늘 더 중요한 부분들에 주목하여”(영신수련 118) 주석을 단다.”26) 이 경우 공책은 기억으로 채워진다. 우리가 보기에 성찰기도 또한, 스파다로 신부가 『영신수련』에 대해 쓴 것에 따르면, “갖가지 삶의 체험 상황 속에서 인간이 표현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훈련”27)이다.
  그러나 아직 한 단계가 남았는데 그것은 크리스티나 캄포가 말한 시적 주목과 ‘성찰기도’ 덕분에 우리가 선사받은 매일의 삶에서의 하느님을 향한 관상 사이를 온전히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를 위해 ‘훈련’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하루 두 번 행하는 성찰기도는 또한 효과적인 주의력 향상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엇인가 등장했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들의 열매를 저녁에 거두는 것만이 아니다. 경험은 ‘성찰기도’에 충실하면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이러한 주의력attenzione으로 산다면 그 순간들은 관상과 기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데이빗 마리아 투롤도(David Maria Turoldo, 1916-1992)의 작품에서 인용한 두 가지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예는 “살로 향기를 맡은 이는 당신이다”28)이다. 여기서 투롤도는 마지막 성취의 관점으로 자신을 염두에 두는데 (하지만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리라)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 눈앞에 숨겨져 있었던 실재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저녁의 시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이슬이 
섬세한 손으로 밤을, 풀밭을 덮었었는지 
보지 못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시인은 하느님이 지나가면서 선사하신 충만함으로부터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운 혹은 덜 아름다운 순간들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게 되었다. 

찻잔의 물결 속처럼 바다에는
하나의 떨림 자체 혹은 폭풍우가 있다. 
당신은 어디에나 계셨다.

  격랑의 순간조차도 다시 읽혀져 감춰졌던 그 분의 현존이 인식된다.

사랑의 목소리마다 딸꾹질이 나왔다.
하지만 살로 향기를 맡은 이는 당신이다.
당신은 모든 욕망 속에 숨어 있다.
혹은 당신의 포옹에 무한대의 무게를.

  이것은 특히 ‘성찰기도’ 수행 초기에 더 자주 일어나는 경험이다.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하느님이 지나간 [기억들]이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어떤 것들이 이해하게 되며, 우리의 소홀함 아니면 하느님의 온화함을 깨닫게 된다.29) 그 분은 우리가 신호 대기하는 동안 차장 밖으로 보았던 아이의 작은 몸짓 안에 계실 수도 있고, 혹은 햇빛이 아침에 내린 비로 인해 사무실 옆 나무 잎사귀들 위에 맺혀진 물방울들에 산란되는 빛깔들 안에서 계실 수도 있다.
  그러나 목표는 투롤도의『마지막 신학자의 죽음』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 중 하나에서30) 불교 승려 쓰라유키(Tsurayukí, 9-10세기 동명의 일본 시인에게서 영감을 주었다)가 묘사할 때 그가 항상 보고한 것에 도달한다.

다른 날 그가 내게 말했다(왜냐하면 정말로 조금 말했기 때문에), 하느님은 한 알의 모래알일 수도, 비둘기의 눈동자일 수도, 혹은 사람의 숨일 뿐일 수도 있다고. 그러므로 더더욱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날 저녁 그가 내게 말했다. “자두나무 잎들 사이로 빛이 보이니?”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오랫동안 빛이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31)

  이 일화는 “행위에 주목”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보여준다. 즉 ‘주목’은 이제 만사에서 하느님 현존의 지나가심 혹은 현현을 즉시 인식하고 관상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찰기도”는 쓰라유키의 행위에 해당하는 것을, 다시 말해 현재의 순간을 “내면적으로 느끼고 맛보는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의식–성경적 언어를 선호한다면, 마음–으로 하여금 더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장기적 목표로 한다.
  이러한 시선을 얻음으로써 항상 관상의 재료를 가지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관상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이 ‘주목’은 우리로 하여금 개별 순간의 감옥에 갇힐지도 모를 ‘순간들의 파편화’를 어떻게든 극복하여 우리의 실존을 기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파편화는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 “우리는 부서진 표상들의 더미를 태양이 내리쬔다” 시구 참조). 또한 주목을 통해 우리가 자애롭고 친절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인식함으로써 자양분을 얻으며,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구원 역사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더우기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건전한 훈련인데, 이것은 시리아 이사악(Isacco il Siro)의 아름다운 문장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된 실재를 향해서든 신적 실재를 향해서이든 유일하게 참된 길이다.
  “네 안에 있는 보물의 방 안에 들어가면 하늘에 있는 보물의 방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같은 것이고 둘 모두에게 단 하나의 입구가 있을 뿐이다. 왕국으로 오르는 계단은 네 안에 감추어져 있고 네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 네 자신 안에 잠기면 네 영혼 안에서 올라가는 계단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32)

결론

  『영신수련』의 역동성에 비추어 본 “성찰기도”는 이냐시오 영성의 가장 귀한 보물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시인이 실재를 바라보는 방식과 이 기도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텍스트를 다시 읽을 때 일어나는 것 사이의 일종의 동형론을 제안했다. 두 경우 모두 우리를 실재 안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하며, 그것은 감각적 인식에만 근거한 판단에 국한된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
  다시 말해서, 실재를 주목하여attenzione 바라본다는 것은 의미로 매개된 세상을 인식한다는 뜻인데, 단 주어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인용한 프라도Prado와 루찌Luzi의 시 두 편이 기도처럼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목하여 바라본다는 것은 다름아닌 성령 안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오직 성령만이 그 위대한 신성 안에서 사람들이 알아채기 아주 미소한 것들의 무한한 가치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33)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385-397 | 4013 (2/16 settembre 2017)
** Massimo Pampaloni S.J.
1) C. Campo, “«Attenzione e poesia» 주목과 시, in Id., Gli imperdonabili 용납할 수 없는 것들, Milano, Adelphi, 1997, 165-179.
2) 여기서는 ‘상상’이라는 용어를 캄포의 글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인 실재로의 접근을 방해하는 상상력의 기능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상상은 정확이 말해서, 예를 들자면 산 비토레의 후고(Ugo di San Vittore), 에드몬트 버크(Edmond Burke), 토마스 스턴즈 엘리오트(Thomas Stearns Eliot), 혹은 러셀 키르크(Russell Kirk)처럼 몇몇 거명해도 – 그러나 인간적 담화의 형태들에서 가능성의 탐색에서, 그리고 실재의 구조화에 대한 이해에서 긍정적 기능을 한다. O. de Carvalho, Aristóteles em Nova Perspectiva. Introdução à teoria dos Quatro Discursos, São Paulo, Vide Editorial, 2013 참조.
3) C. Campo, “Attenzione e poesia”, cit., 166.
4) Ivi, 167.
5) Ivi, 166.
6) 참조: ivi, 167.
7) 여기에서 “영지주의적 유혹”이라는 표현은 E. Voegelin, Science, Politics and Gnosticism, Two Essays, 과학과 정치, 그리고 영지주의에 관한 두 가지 논고(Washington(D.C.), Rognery, 1997)에서 부여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참조: Id, Il mito del mondo nuovo, Saggi sui movimenti rivoluzionari del nostro tempo 신세계의 신화, 우리시대 혁명 운동들에 관한 소고, Milano, Rusconi e poesia“, cit., 170.
8) C. Campo, “Attenzione e poesia”, cit., 170
9) Ivi.
10) B.J. F. Lonergan, Sull’educazione. Le lezioni di Cincinnati del 1959 sulla “Filosofia dell’educazione” 교육에 관하여–교육철학에 관한 1959년 신시내티 강연, Roma, Città Nuova, 1999, 317.
11) Ivi.
12) Ivi. The splendor of the world is a cipher, a revelation, an unveiling, the presence of one who is not seen, touched, grasped, put in a genus, distinguished by a difference, yet is present.
13) Ivi. There is to art an interpretative significance as a possibility.
14) Ivi.
15) 왜냐하면, 실재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대로 되게 만들려는 온갖 영지주의적 시도를 명백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16) E. Voegelin, Autobiographical Reflections 자전적 성찰, Coumbia, Massouri, 2006, 120.
17) A. Prado, Poesia reunida 시 모음, São Paulo, Siciliano, 2001, 446. 이탈리아어는 저자의 번역임.
18) M. Luzi, L’opera poetica시집, Milano, Mondadori, 2001, 279.
19) Etimasia는 동방교회에서 유래하는 이콘의 주요 주제로서 옥좌는 일반적으로 비어있거나, 그 위에 십자가가 올려져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비가시적 현존을 상징하는데 그리스도는 최후 심판을 위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그 옥좌를 차지할 것이다. Hetoimasia, Etimasia (ἑτοιμασία, “preparation”), prepared throne, ready throne or Throne of the Second Coming
20) 성찰기도의 다섯가지 요점 형태는 영신수련 43번에 있다. 오늘날 성찰 수행법이 이냐시오가 당시 영신수련 책에서 제시한 것과 한참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발견된 실제 형태는 영신수련의 일반적 역동성에 아주 잘 부합한다. 참조: Ignazio di Loyola, Esercizi Spirituali, a cura di G. Piccolo, Milano, Garzanti, 2016
21) A. Spadaro, Abitare ‘nella’ possobilità, L’esperienza della letteratura가능성 안에서 살기, 문학의 체험Milano, Jaca Book, 2008, 169-184 참조.
22) Ivi, 179.
2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 8, 14.
24) R. Guardini, La conversione di Sant’Agostino, Brescia, Morcelliana, 2002, 26. “죄에 대한 성찰”에서 “의식에 대한 성찰”로의 전환은 아쉔브렌너(Aschenbrenner)의 논문에서 기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25) 브라질 철학자 올라보 데 카르발호(Olavo de Carvalho)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성찰 참조.
26) A. Spadaro, Abitare ‘nella’ possibilità 가능성 안에서 살기, cit. 178.
27) Ivi, 182.
28) D.M. Turolodo, Amare, Cinisello Balsamo(Mi), San Paolo, 1989, 86s.
29) ‘지나가면서 en passant’에 주목하자, 이것은 영신수련 동안 ‘기도 돌아보기’의 역할이기도 하다. 열매를 거두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보는 것’은 모든 영역에서 이냐시오식 교육법의 근본적인 지침이다.
30) D. M. Turoldo, La morte dell’ultimo teologo 마지막 신학자의 죽음, Milano, Gribaudi, 1994.
31) Ivi, 20.
32) Caritone di Valamo, L’arte della preghiera 기도의 예술, Milano, Gribaud, 2000, 167 에서 재인용.
33) A. Bloom, Alla sera della vita인생의 저녁에, Magnago (Bi), Qiqajon, 2000,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