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쁜 목자’인가?

프란치스코 교종이 제안한 특징들과 성서적 표상들

CHI È IL «CATTIVO PASTORE»?
Le caratteristiche e le immagini bibliche 
proposte da papa Francesco*

디에고 파레스 신부 (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한국어판 편집부 옮김

거저 받은 유산을 팔아먹는 목자

  사제 시절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나쁜 장상과 그의 표상」1)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연히 어떤 특정한 사목 직무를 맡고 있는 예수회 내부의 장상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그가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에 대비하신 삯꾼의 표상을 사용하지 않고, ‘거저 받은 유산을 팔아먹는’2) 이의 표상을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유산을 팔아먹을 때는 언제나 ‘헐값’이다. 이 때문에 유산을 팔아먹는 이들은 ‘눈먼 인도자들’이라고 정의된다. 언제나 가장 나쁜 일로 간주되는 이런 불경스러운 행위의 근원에는 눈이 멀어 있고, 식별이 부재하며, 육(肉)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베르골료는 이를 다음의 히브리서 내용의 틀 안에서 이해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계약의 피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은총의 성령을 모독한 자는 얼마나 더 나쁜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히브 10,29)3)
  유산을 팔아먹는 것은 다만 목자와 주님 사이의 관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 피해를 준다. 따라서 베르골료는,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눈먼 인도자는 ‘자신의 백성을 충실하게 보호하지 않는 이’4)라고 말한다.
  양 냄새 나는 목자들과5) 거저 받은 유산을 팔아먹는 이들은 각각 착한 목자와 나쁜 목자를 특징짓는 두 개의 강한 표상들이다. 양 냄새라는 후각적인 표현과 자기 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의 것인 유산을 팔아먹는 이라는 경제적인 은유는 다른 많은 윤리적 개념들이나 추상적 정의들보다 훨씬 뚜렷하게 기억에 새겨진다.
  몽상적인 생각을 넘어서, 나쁜 사도인 유다의 모습은 자신의 친구요 주님이신 분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먹어 버린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살인을 감행한 포도밭 소작인들의 표상이 자리 잡고 있고,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했다!”(마태 21,38)는 살기등등한 역모의 괴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장상의 표상에 관한 삼부작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면, “나쁜 장상과 그의 표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지역 장상’과 ‘장상들을 위한 영신수련’6)이라는 다른 두 편의 글과 더불어 완성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서 베르골료는 ‘이상적인 장상의 표상’7)에 대해 말한다. 즉, 하나의 작은 삼부작을 이루는 이 글들을 안에서 그는 장상들의 장상으로서 장상들에 대해 성찰한다. 오늘도 전혀 다름없이, 그는 로마의 주교로서 주교들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베르골료-프란치스코에게 장상과 목자는 ‘교회를 세우는’(ad aedificationem)8)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살아 있는 돌로 교회를 세우는 것 외에도 견책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는 것이 견책하는 능력을 동반한다고 가르친다.”9)
  이러한 능력은 베르골료-프란치스코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그의 ‘아니다’는 분명히 ‘잘못되다’는 의미이다. ‘걸어가고-교회를 세우고–고백하기’의 삼위일체적 모습을 의도한 그의 첫 번째 강론은 ‘잘못 되는’ 것에 대한 견책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거기에서 베르골료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길을 걷기, 우리 삶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걷기를 멈출 때 일은 잘못 흘러갑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일은 잘못 흘러갑니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며,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상의 속인들입니다.”10)
  같은 현상은 그의 “그럴 수 없다.”에서도 일어난다. “교구 안에 머물지 않으면, 목자로서 자신의 양을 진짜로 알 수 없고, 그들의 앞에서, 가운데서, 뒤에서 걸을 수 없으며, 가르침과 성사집전, 삶의 증거로서 그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11) “불만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12) “오늘날 교회가 여러분에게 맡기는 –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에게 맡겼던 – 직무는 전체성을 포용하는 안목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독단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친교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13)
  우리들의 문화처럼 다양한 해석들에 개방된 문화에서는, 이해시키기 위해 선(善)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한 것으로서 그 선에 완전히 대비되는 것을 명료하게 표명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견책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마지막 단계에서 추상적으로 남아 있도록 마무리되는 방식으로 악을 비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모든 견책의 순간과 한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에 대해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지침을 찾을 수 있는데, 거기에서 주인은 그 문제를 조심스럽게 대응하며, 가라지를 즉시 거두어 내려는 종들을 말린다.
  프란치스코는 견책에 대해 시간적인 한계를 설정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을 지녔다. “이것은, 지금은 아닙니다.”, 또는 “지금으로서는 아닙니다.”라고 식별한다. 교조적이고 절대적인 질책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하고 강하지만, 겸손한 견책들이다. “그렇게는 아니고, 지금으로서는 아닙니다…”, 또는 “지금은 좋습니다.” “생명과 사랑 안에서 ‘아니오’는 ‘예’를 위해 봉사합니다. […] 부정적인 원칙들은 생명이 죽음으로 변모되지 않도록 도와주지만, 생명은 ‘아니오’를 양산하는 힘으로써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예’를 많이 함으로써 향상되고 성숙됩니다.”14)
  반대되는 악을 비난하지 않는 한 선을 확언하고 실현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 비난을 통해서 결코 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이는 하느님만이 마땅한 시간에 하실 것이다. 인간적인 분별력은 악을 중립화해서 은총이 자기의 여정에 따라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근본적으로 ‘악을 거두어 내라고’ 주장하지 않고 이것을 ‘중립화’한다는 생각은 프란치스코의 신중한 교육학의 일부분이고, 그의 견책 능력의 일부분인데, 이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제거되는 순간에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나쁜 장상의 특징들

  ‘주어진 유산을 받아들이고, 신중하게 지키며, 풍성하게 전달해 주는 데에서 수도회 장상의 모성적이고 부성적인 태도들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풍부한 성서적 형태론’15)을 제시한 다음, 베르골료는 ‘유산을 파는’ 장상의 세 가지 특징들을 규명한다. 첫 번째는 ‘게으르다’는 것인데, 그것의 특수한 표징은 ‘나쁜 피곤함’이다. 두 번째는 ‘그는 기억을 못한다.’는 것인데, 그것의 특징적인 표징은 ‘생활의 권태감’이다. 세 번째 특징은, 바로 ‘경건함이 결핍된’ 장상인데, 그것의 특수한 표징은 ‘불평하는 태도’이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와 같이 ‘유산을 파는’ 이들이 때로는 의인인 척하며, 거래하지 않으면 모욕을 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정결한 수산나의 경우처럼, 겉으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기 때문에, 베르골료는 확실한 기준으로 십자가의 기준을 제시한다. 만일, 그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면, 선한 장상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거래하고’ 좋은 인상을 보여 주기를 원하는 것이 드러나면, 나쁜 장상과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모든 장상이 스스로 제기해야 하는 핵심 질문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관련된 것인데, 이들이 어떤 상징을 지녔는지 깨닫기 위해서이다. “자기 자신을 언제나 더 벗겨 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끄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이고, 열정의 용광로이다. 그 안에서 어떤 원한을 키워 주는가? 이전의 실패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대한 야망들을 그에게 제시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영의 것이고, 그의 영혼에 바리사이 율법주의를 형성시키며, 그를 고갈시키고, 당나귀로 변모시켜 버린다. 명예에 사로잡힌 자는 당나귀와 같다(Homo cum in honore sit, quasi asinus).”16) 모욕을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견뎌냈건,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원했건 간에 모욕은 이냐시오의 근본적인 기준이고, 프란치스코가 지금도 견지하고 있는 근본적인 기준이다.
  베르골료는 역설이라는 열쇠로 마지막까지 깊이 파고들며, ‘보지 않는 것’과 ‘눈먼 이가 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음미했다. “어떤 장상이 주어진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를 충실하게 전수하기를 원한다면, 그 유산의 충만함을 ‘보지 않는 태도’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유산에 대해서도 충실함의 법칙은 ‘그것을 전달하는 것’에 있고, 그것에 대한 충만함을 즐기는 것을 포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17) 유산의 전수를 효력 있게 만드는 것은 유언자의 죽음이다. 이 ‘보지 않는 것’은 유산을 전수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것을 즐기기를 원하는 이를 눈먼 이로 만들어 버리는 ‘흥정하는 것’의 반대이다. 베르골료에게 영감을 주면서, 나쁜 장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들에 온전히 반대되는 성서적 표상들은 아브라함과 노년한 시메온과 안나의 표상들이다. 이들은 ‘멀리서 약속을 환영할 용기를 가지고’ 희망 안에서 기뻐한 이들이다.(요한 8,56 참조)
  이러한 표상들과 베르골료가 나쁜 장상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들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 삶에 싫증을 느끼고, 관능의 덫에 걸린 삼손의 표상이 그렇다. 그는 힘을 잃고 자신을 눈멀게 한 적들의 손에 잡혀서, 어떤 방식으로든 야기된 악을 보상하기 위하여 재앙에 호소해야 했다. 방랑하며 불평만 늘어놓고 불콩죽 한 그릇에 맏아들 권리를 팔아 버린 에사오의 표상이 그렇고, 사기를 치면서도 신심이 깊은 척하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표상이 그렇다. 그들은 실제로는 약삭빠르고 저속한 사람들이다.
  베르골료는 성서의 인물들을 관상하고, 그들의 태도들을 현실화하면서, 우리가 매일 보는 것들 안에서 오늘날의 표상으로 그것들을 해석해 낸다. 관상은 실천적인 분별력으로 이끌어 주고, 삶 위에 진짜로 새겨지리라는 절박한 열망을 갖고 있다. 나쁜 장상에 대해 만들어진 ‘풍자’는 진리를 위하여 쓰인다. 특히 자신을 은폐하고, 요직에 앉기 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에 기초하는 나쁜 영의 힘을 중립화하는 역할을 한다.
  복음에서 우리는 바리사이인 니코데모에 대해서 예수님의 반어법이 어떻게 그의 마음 안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지, 그리고 반대로 회개하기를 바라지 않는 다른 바리사이들에게는 어떻게 반대의 효과를 끼치는지를 본다. 그들의 마음은 더욱더 굳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세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친구들은 언제나 찬양받고, 적들은 언제나 비난받는다. 우리들의 죄에 관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진실을 말하는 이가 우리를 도와주려는 열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복음에서 참된 복은 언제나 “너희는 불행하다.”는 말씀을 동반한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선을 행하는 이들을 칭송하고 축복하실 때, 이와 똑같은 힘과 원의로 나쁜 권력들을 질책하신다.

나쁜 장상과 나쁜 주교

  먼저, 나쁜 장상의 모든 표상이 똑같이 나쁜 주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때때로 미디어가 하는 것처럼, 나쁜 주교들의 몇 가지 표상들을 풍자의 형태에 담아서 확대하는 것은 파괴적일 뿐 아니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어떤 고소를 당한 사람이 늘 주어진 유산을 파는 사람은 아니다. 베르골료가 지적하는 것처럼, “의인은 팔기 원하지 않는 유산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방어하려는 나쁜 사람처럼 보인다(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처럼 불의한 자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버린다.”18)
  베르골료-프란치스코는 늘 영신수련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서, 유혹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냐시오가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 쓴 ‘세 단계’를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재산에 대한 탐욕이라는 유혹, 세상의 헛된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교만의 유혹이다.(영신수련 142 참조) 베르골료-프란치스코의 식별에 따르면, 가난의 결핍은 노동을 회피하는 것으로, 허영심은 영적인 세속성으로, 그리고 교만은 경건함의 부재로 구체화되기 마련이다.
  ‘인물의 윤곽’을 평가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어떤 주교의 윤곽은 그가 가진 덕들의 산술적 합계가 아니다. […]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이 모든 소질은 결국 부활하신 분에 대한 핵심적인 증언에 집중해야 하고, 이 우선적인 임무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에 대한 증언들은 부활하신 분의 영께서 하시는 것이고, 그 영이 주교를 세우면서 자질들과 가치들을 보완한다.”19) 따라서, ‘거저 받은 유산’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는 것이다. 이는 팔 수 없는 유산이고, 평가 절하하거나 임대하거나 저당 잡힐 수도 없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직 초기부터 나쁜 주교의 윤곽을 그리며,20) 늘 그에 대해 언급했다.21) 거기에서 노동의 회피(‘군주’의 심리), 영적인 세속성(주교직의 추구), 또는 경건함의 부재(‘교회의 배필’이 되지 않는 것)로 유산을 팔아먹는 이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 핵심적인 유혹 – 거저 받은 유산을 팔아먹는 유혹 – 에 집중하며, 프란치스코가 주교들에게 쓴 글들에서 몇 가지를 주목해 볼 텐데, 그 안에는 일종의 근본적인 구조처럼, 주교를 ‘유산을 파는’ 사람으로 만드는 세 가지 실재들이 존재한다. 

자기의 사제들과 신자 백성으로부터 멀어진 주교

  나쁜 주교들을 향해 프란치스코는 사목적인 게으름을 질타한다. 이는 주어진 유산의 가장 위대한 보배요 재산들을 평가 절하하게 만든다. 이 보배와 재산들은 신자 백성들 안에, 그리고 자신의 사제들 안에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프란치스코는 멕시코의 주교들에게 백성들의 종교성이라는 유산이 상실되게 놔두지 말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를 보호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주교가 이에 관해 유혹을 받는다면, 그 유혹의 특징은 거리 두기이다. “우리의 목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를 두고 싶은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고, 나는 여러분 각자에게 존재할 수 있는 거리 두는 방식들의 일람표를 만들어 보게 하고 싶습니다.”22)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사제들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멀리 있는 주교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활용한다. “내가 사제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그들에게 들었습니다. 정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 생애에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주교님께 전화를 걸었는데, 비서가 주교님께서 나를 만나실 시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달이고 흘러갑니다. 정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제가 주교에게 전화를 걸면, 바로 그날이나 적어도 그 다음날 이렇게 전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들었습니다. 뭘 원하시나요? 지금은 신부님을 만날 수 없는데, 날짜를 함께 맞춰봅시다.’ 어떻게든 사제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사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그분은 아버지가 아니라 사무실의 대장이거든!’ 잘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신부가 전화할 때, 그날 응답할 수 없으면, 적어도 그 다음날은 응답합시다. 그러고 나서 언제 그를 만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고, 그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23)
  또한 사람들도 자신의 목자를 가까이 느낄 필요가 있다.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백성들 스스로가 이것을 원하고, 자기 주교가 자기와 함께 걷고, 자기 곁에 있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숨쉬기 위해서 이것을 필요로 합니다!”24) 또는 “양 떼에게는 목자의 마음에서 자리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25)
  거리를 넓혀 가는 것은 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그것을 줄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곧 매일 자기 양 떼를 향해 베푸는 온정이 그것이고, 특히 더 문제가 많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거리는 단지 정서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질이 안 좋은 거리가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들을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주교들에게 ‘케리그마적’이 되라고 권고한다.26) 케리그마(kerigma)는 언제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거리는 공간적인 범주이고,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므로, 이러한 질 나쁜 거리들을 극복하는 덕은 인내이다. 그것은 모든 순간에 올바른 거리를 찾을 줄 아는 주교의 구체적인 표지인데, 그가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이고, 영성 생활에서 성장의 과정들을 시작하고, 유지하며, 동반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리(Siri) 추기경은  이렇게 반복하곤 했습니다. ‘주교의 덕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고, 셋째도 인내며, 넷째도 인내이다. 그리고 마지막도 우리가 인내하도록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인내하는 것이다.’”27)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인내는 탁월하게 역동적이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내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교는 하느님 앞에서 ‘인내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끈기 있게 바라보면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찾으면서 자신을 찾게 놓아두며, 발견하면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28)
  기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도직을 이끌어 가기 위하여 바로 그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사도적 인내에 대해서도 유효합니다. 주교가 말씀의 선포에서 수행해야 하는 것과 같은 충실성(hypomonē: 2코린 6,4 참조)을 자기의 기도에서도 가져야 합니다.”29)
  이러한 인내를 가지고, 현대 세계 고유의 ‘능률에 대한 열광’이라는 유혹에 맞서야 한다. ‘능률에 대한 열광’은 게으름의 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금전에 열광하는 흐름에 따라 물질적으로 행동하는 특혜를 누리지만, 사람들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적인 흐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30)

자기 백성의 선익을 위해 분별할 용기를 갖지 못한 주교

  ‘유산을 팔아먹는’ 주교의 두 번째 특징은 받은 유산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고, 이는 그에게 분별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의심하고, 트집 잡고, 자기 백성들의 삶에서 선으로 이끄는 것과 악으로 이끄는 것을 문제 삼지도, 바라보지도 않는다. 이것은 허영과 관계된 것이며, 중재를 바라는 다른 이들의 선과 악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들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글을 통해서 이런 기억을 잃어버리는 ‘저명한’ 주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종은 신임 주교들과 나눈 짧지만 매우 강력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 모습을 묘사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춥니다. 저명인사가 되려 하고, 자기 모습을 꾸며내기를 좋아합니다. […] 더 위대하시면서 우리의 미약함을 경멸하지 않으시고, 더 거룩하시면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비난하지 않으시며, 참으로 선하시면서 우리의 상처들에 대해 추문을 퍼뜨리지 않으시는 그 ‘어떤 분’이 자신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전율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 전율이 여러분 안에 흐르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제거하지도 말고, 잠잠하게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31)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은 거짓말로 미혹하는 사람들에 지쳐 있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유행을 따르는’ 신부들이나 ‘유행을 따르는’ 주교들이 그들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차립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한 직관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이들, 교묘하게 조작하는 이들, 자기 것을 방어하는 이들, 헛된 십자군 선동가들을 대하게 되면, 낌새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멀리합니다.”32)
  ‘저명인사’가 되려 하고, ‘자기 모습’을 꾸며 내는 것은 외적 허영이며, 더 깊게 들어가면 기억의 부재이다. 기억은 ‘목자들의 눈을 정화시키는 안약’33)이고 구원의 역사처럼 그들에게 생명의 “신명기적 의미”를 제공하며, “영적 알츠하이머병”에서 그들을 해방시킨다.34)
  베르골료는 ‘당나귀’35)의 표상을 사용한다. 어떤 주교가 세속적 명예를 추구하려 하면, 요한 23세 성인이 “거룩한 사명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이 비웃음이라는 말은 강한 표현이지만, 사실입니다. 세속적인 정신에 굴복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목자들은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립니다.”36)
  이런 주교의 식별의 부재는 ‘양들을 지키는’37) 능력이 없음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양들을 지키는 것’은 착한 목자의 고유한 특성이다. 자기의 꿈에서까지 마리아와 예수님을 지키는 요셉 성인의 표상은 거저 받은 유산을 팔아먹는 온갖 유혹을 방어하는 표상이다.
  무능한 주교의 유산 매매는 일종의 임대 형태로 이루어진다. 제대로 분별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땅의 공간들이 박물관처럼, 또는 유행을 시험해 보는 작업장처럼 함부로 사용되게 할 때마다, 그 거룩한 땅은 임대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약속들에 대한 기억이 새롭고 생생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선이나 진짜 적이 명확히 인지되지도 않고, 분별력이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문제가 있다.
  프란치스코는 교종으로서 한 첫 번째 강론에서, 베드로가 받았던 분별력을 해치는 유혹을 언급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십자가만은 이야기하지 맙시다.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저는 다른 길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십자가 없이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없이 걸어간다면,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운다면,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상의 속인들입니다. 우리가 주교, 신부, 추기경, 교종이기는 하겠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닐 것입니다.”38)
  베드로는 열쇠의 권한, 곧 선에 대해서는 길을 열고 악에 대해서는 길을 닫는 식별의 권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 생각들을 분별하시도록 했기 때문에, 그도 훗날 자신의 때에 다른 이들의 생각들을 분별할 수 있다. 주님께서 당신 목자들의 손에 맡기신, 이른바 더 ‘고정적인’ 다른 권한들도 있다. 성사들은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효력을 가진다. 즉, 성사 거행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진다. 비록 문화 양식이 바뀌면 이를 수정하고, 이해 가능하고 지속 가능하도록 그에 대한 표현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을지라도, 진리에 대한 ‘추상적인’ 표명 양식들은 모든 시대를 통해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영들에 대한 식별은 정확한 시점에 관련된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선택하게 하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한번 선택했으면 그분 편에서 확인을 받을 때까지, 투쟁하고 굴곡을 겪어내면서 주님의 시대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합의 정신이 없는 폐쇄적 주교

  나쁜 장상의 세 번째 특성은 경건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39) 나쁜 주교의 경우에는, 이러한 부족을 몇몇 사안에 대해서는 경건함을 과장하여 드러내면서도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이를 간과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감출 수 있다. 미사에 대해서는 매우 경건하면서, 직원들이나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참을성이 없고 섬세하지 못한 이의 경우와 같다. 또는 교의나 윤리적 측면은 마치 검투사처럼 방어하면서,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 그렇다.
  교황청의 병폐와 관련해서,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유혹의 증상을 강조하며, ‘험담’에 대해서 그리고 ‘폐쇄적인 세계’로 만드는 이들에 대해서 언급한다.40) 주교들 안에서는 이러한 비슷한 행동 양식이 더 심각한 증상으로 드러나는데, 바로 합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는 성령을 거스르는 유혹이다. 성령은 모두 함께, 서로 결합되어 장상과 함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특히, 예를 들어 교종이 그들에게 마음껏 발언하도록 초대하였음에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서 식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규모 집단이나 복도에서는 주저함 없이 말한다.
  합의 정신에 반대되는 유혹이 반드시 명시적인 거부는 아니다. ‘더 큰 걸림돌’은 ‘친교의 빈곤’에서 일어난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친교가 전혀 없거나 어쨌든 친교가 빈곤한 것은 가장 큰 걸림돌이고, 주님의 얼굴을 훼손하고 그분의 교회를 조각내는 이단입니다. 어떤 것도 분열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겉옷을 찢고 하느님의 백성에게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물러나고 포기하는 편이 ― 또한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의의 증거를 제시하는 편이 ― 더 낫습니다.”41) 사랑하면 일어나는 일이 공동합의성과 같은 근본적인 은총에도 일어난다. 솔직하고 공개적인 큰 싸움보다 작은 모욕이나 작은 거리감이 더 절절히 느껴진다.
  프란치스코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합의의 정신을 손상하는’ 일련의 유혹들을 강조한다. 이 유혹들은 각각의 죄들보다도 전체로서 부패에 대해서 알려 준다. 그것들은 ‘시간의 개인적 운용’, ‘수다들’, ‘거짓말이 되는 반쪽 진실들’, ‘내적인 실망들을 드러내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 ‘참여하지 않으면서 판단하는 냉혹함과 책임지지 않으면서 동의하는 방임주의’ 등이다.42)
  교종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교회가 성령의 활동을 체험하는 보호된 공간입니다.”43) 따라서 함께 걷는 것에 반대하는 나쁜 주교의 유혹은, 우리 안에서 성령께,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에 공간을 내주지 않는 방식이다. 오히려 단순한 백성이 이를 할 줄 안다.44)
  공동합의성에 반대하는 나쁜 주교의 유혹은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에게 공간을 주지 않는 것에도 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는 공의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공의회는 많은 이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표현합니다. 교회 안에서 커다란 자산인 다양성은, 마치 모든 작은 돌조각들이 하느님께서 디자인하신 하나의 커다란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한 곳으로 모여진 커다란 모자이크처럼, 언제나 일치의 조화 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분쟁을 언제나 극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름 안에서 일치되기외에 우리가 일치하기 위한 다른 보편적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다름 안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로마의 주교와 보편 교회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이루는 친교의 표상인 팔리움은 또한 여러분 각자가 친교의 도구가 되라는 책임을 의미합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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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주교가 그를 특징짓는 본질적인 모습들을 지녔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교회를 세우는(ad aedificationem)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들을 향한 영적 부성(父性)이 풍성한 사람인지, 다윗처럼 ‘자기 백성을 위해 또 견고하고 강한 민족을 위해 40년 통치의 유산’46)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나이 많은 엘아자르처럼 거짓되지 않은 신심을 지니고 ‘숭고한 유산’47)을 자기 백성의 젊은이들에게 남겨 주며 죽을 줄 아는 일관된 사람인지,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역사의 혼란한 교차점에서 자기 백성의 선익을 위해 구별할 용기를 가지고 ‘영적 세속성’의 유혹에 양보하지 않는 사람인지48) 등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모든 이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개인의 크고 작은 호감의 문제가 아니라, ‘책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매일 보여 준다. ‘책무에서 도망가지 않는 것’은 친근하게 가까이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사목에서 지역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변두리를 찾아 나아가며, 자비를 베풀며 식별하는 목자의 고유한 모습이다.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는 것은 식별이, 이미 축성된 진리를 의문에 붙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엘리트주의적이고 위험한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책무라는 점, 곧 사람들의 선익과 고통이 극적인 문제가 될 때마다, 추상적인 표현 뒤에 숨지 않고 개인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안에 참여하는 소임이라는 점이다.
  다양성에 대한 인내심 있는 사랑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공동합의성도 하나의 책무라고 증언한다. 곧 다름 안에서 결합된 모든 이가 함께 걸어가며, 성령께서 교회의 다양하고 다면적인 삶 안에 작용하실 수 있게 하는 책무이다.
  기도를 통해, 프란치스코는 모든 주교가 ‘눈먼 이가 되지 않고’, 거저 받은 유산을 온전히 전해 주기를 바라며, ‘멀리에서 약속들을 환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권고한다. “‘보지 않는 것’과 ‘눈먼 이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을 연결하고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주 성전에 가고,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며,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 성전에서 자신의 경건함을 빗어나갈 것인데, 이는 ‘떨어져 나온 반석을 우러러보고 퍼내 올려진 저수 동굴을 쳐다보기’(이사 51,1 참조) 때문이다. 그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이사 51,2 참조) 관상하며, 자신을 위해 받은 유산인 이 정체성의 책임을 수행하면서,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이 유산을 미래로 지고 나갈 수 있는 이들에게 선물하며, ‘보지 않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는 충만함을 꿈꾸는 가운데 기뻐하고, 멀리서 관상하며, 용약하며 충만히 기뻐하리라.(요한 8,56 참조)”49)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345-359|4013 (2/16 settembre 2017)
이 소논문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80세 생일을 맞아 교황청 주교성이 발행한 책의 후기에 해당한다. D. Fares, «Il cattivo pastore e la sua immagine»(나쁜 목자와 그의 표상), in Congregazione per i Vescovi, Papa Francesco ai vescovi(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들에게), Città del Vaticano, Libr. Ed. Vaticana, 2016, 287-299 참조.
** Diego Fares S.I.
1) J. M. Bergoglio-Francesco(베르골료-프란치스코), «Il cattivo superiore e la sua immagine»(“나쁜 장상과 그의 표상”), 같은 이, La croce e la pace. Meditazioni spirituali(십자가와 평화. 영성 묵상집), Bologna, EMI, 2014, 110-126 참조. 이 글의 원문은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의 Boletín de espiritualidad(영성 회보) 84호, 1983년 12월에 실렸다.
2) 같은 책, 110.
3) 같은 책, 111 참조.
4) 같은 곳.
5) D. Fares, Il profumo del pastore. Il vescovo nella visione di Papa Francesco(목자의 향기, 프란치스코 교종의 시각에서 본 주교), Milano, Àncora, 2014 참조.
6) 첫 번째 경우는, 베르골료가 아마도 1975년 말에 어떤 장상연합회에서 했던 Arrupe 신부의 «Direttive per i superiori locali…»(지역 장상들을 위한 지침서)에 대한 해설을 말한다. 이는 후에 «El superior local»(지역 장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태리어판은, «Abbracciare conflitti»(갈등을 껴안다)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어 J. M. Bergoglio–Francesco, Nel cuore di ogni padre. Alle radici della mia spiritualità(모든 사제의 마음에서. 내 영성의 뿌리에서), Milano, Rizzoli, 2014, 83-90에 실려 있다. 두 번째 글은 그 책의 ‘제3편’, 225-277면에 실려 있다.
7) 같은 책, 230.
8) 같은 책, 83 s 참조.
9) 같은 책, 229.
10) Francesco, Omelia nella Messa con i cardinali(추기경단과 함께한 미사 강론), 2013년 3월 14일.
11) 같은 이, Discorso ai partecipanti al Convegno per i nuovi vescovi(신임 주교들의 회합에 참석한 이들에 대한 연설), 2013년 9월 19일.
12) 같은 이, Discorso alla 66ª Assemblea generale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이탈리아 주교회의 제66차 정기 총회에서 한 연설), 2014년 5월 19일.
13) 같은 이, Discorso ai vescovi messicani(멕시코 주교들에게 한 연설), 2016년 2월 13일.
14) D. Fares, «Educare i figli secondo “Amoris laetitia”. La pedagogia di Papa Francesco»(「사랑의 기쁨」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하기.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육학), in Civ. Catt. 2016 II 360.
15) J. M. Bergoglio-Francesco, «Il cattivo superiore e la sua immagine»(나쁜 장상과 그의 표상),위의 책, 116 s.
16) 같은 책, 124 s.
17) 같은 책, 125.
18) 같은 책, 123.
19) Francesco, Discorso alla riunione della Congregazione per i vescovi(교황청 주교성 회의에서 한 연설), 2014년 2월 27일.
20) 같은 이, Discorso ai partecipanti alle Giornate dedicate ai rappresentanti pontifici(교종 대리들의 날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13년 6월 21일.
21) 같은 이, Discorso alla riunione della Congregazione per i vescovi(교황청 주교성 회의에서 한 연설), 같은 곳; Discorso ai partecipanti alle Giornate dedicate ai rappresentanti pontifici(교황 대리들의 날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같은 곳.
22) 같은 이, Discorso ai vescovi messicani(멕시코 주교들에게 한 연설), 같은 곳. 이탤릭체는 필자의 것이다.
23) 같은 이, Discorso ai partecipanti al Convegno per i nuovi vescovi(신임 주교 모임에 참석한 이들에게 한 연설), 같은 곳. 교종은 2014년 8월 14일에 한국의 주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다.
24) 같은 곳.
25) 같은 이, Discorso alla riunione della Congregazione per i vescovi(교황청 주교성 회의에서 한 연설), 같은 곳.
26) 같은 곳.
27) 같은 곳.
28) 같은 곳.
29) 같은 곳.
30) 같은 이, Discorso nell’incontro con l’episcopato brasiliano(브라질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2013년 7월 27일 참조.
31) 같은 이, Discorso ai partecipanti al corso di formazione per nuovi vescovi(신임 주교 교육과정에 참여한 이들에게 한 연설), 2016년 9월 16일. 이탤릭체는 필자에 의한 것.
32) 같은 곳.
33) 같은 이, Omelia nella Professione di fede con i vescovi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이탈리아 주교회의 주교들의 신앙 선서 때에 한 강론), 2013년 5월 23일.
34) 같은 이, Discorso alla Curia romana in occasione degli auguri natalizi(교황청에 성탄 인사차 한 연설), 2014년 12월 22일.
35) «Verum est ergo quod dicitur in Psalmo: “Homo cum in honore esset, non intellexit, comparatus est iumentibus insipientibus, et similis factus est illis”» (J. M. Bergoglio-Francesco, Nel cuore di ogni padre…[모든 사제의 마음에서…], 위의 책, 49; Virgilio, Eneide, l. VI, c. XXXIII 참조).
36) Francesco, Discorso ai partecipanti alle Giornate dedicate ai rappresentanti pontifici(교종 대리들의 날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위의 책. 이탤릭체는 필자에 의한 것.
37) 같은 곳.
38) 같은 이, Omelia nella Messa con i cardinali(추기경단과 함께한 미사 강론), 2013년 3월 14일.
39) 베르골료에게 경건함은 선한 자녀들이 되는 은총이다. 충실한 백성들 가운데 작은 이들처럼, 섭리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도움을 청할 필요를 느끼는 양심이다. 경건함은 항상 사도적 열성에 결합되어야 하고, ‘부드러움의 혁명에 대한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J. M. Bergoglio-Francesco, Chi sono i gesuiti(예수회원이란 누구인가), Bologna, EMI, 2013, 83 e 42 s 참조).
40) Francesco, Discorso alla Curia romana in occasione degli auguri natalizi(교황청에 성탄 인사차 한 연설), 같은 글.
41) 같은 이, Discorso alla 66ª Assemblea generale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이탈리아 주교회의 제66차 정기 총회에서 한 연설), 2014년 5월 19일.
42) 같은 곳.
43) 같은 이, Introduzione al Sinodo per la famiglia(가정을 위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개막 연설), 2015년 10월 5일.
44) 같은 이, Discorso nell’incontro con l’episcopato brasiliano(브라질 주교단과의 만남에서 한 연설), 같은 글 참조.
45) 같은 이, Omelia nella solennità dei santi Pietro e Paolo(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2013년 6월 29일.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
46) 같은 이, Omelia a Santa Marta(성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2014년 2월 6일(1열왕 2,1-4.10-12 참조).
47) 같은 이, Omelia a Santa Marta(성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2013년 11월 19일(2마카 6,18-31 참조).
48) 같은 이, Omelia a Santa Marta(성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 2014년 1월 17일(1사무 8장 참조).
49) J. M. Bergoglio-Francesco, «Il cattivo superiore e la sua immagine»(나쁜 장상과 그의 표상), 위의 책,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