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수행과 그리스도교 묵상

ESERCIZIO ZEN E MEDITAZIONE CRISTIANA*

한스 발덴펠스 신부(예수회)**
윤주현 신부(가르멜 수도회, 대전 가톨릭대학교) 옮김

  불교는 이슬람과 달리 아주 낮은 어조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활동주의와 열광적인 불안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 불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길을 제공하고 있다. 대중의 삶에 있어 광범위한 계층 사이에서는 더 이상 침묵과 묵상을 위한 초대를 그리스도교 교회와 연결 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성찰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그 중에는 아시아에서 유래하는 자극에 의해 도입된 것도 드물지 않게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적인 실천 방법을 향한 단순한 이끌림 그 이상으로 이를 독특한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선(禪)과 서양

  여기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불교 명상과 더불어 제시된 것을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불교도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는 방식에 준해서 선 수행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그에 대해 말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동기는 아시아 종교의 명상 형태가 일본의 선을 통해 서양에 도달했으며 요가는 이미 세속의 영역에서 심리-육체적 훈련으로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느덧 유행이 되어버린 ‘선(禪)’이란 용어의 사용은 수많은 제안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는 일정 부분 권위를 갖는 여러 선사(禪師)에 의해 이루어졌다.1) 한편, 오늘날에는 더 이상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이단적인 것을 표현하는 가운데 판단되어 왔던 피상성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으며 더할 나위 없이 이론과 실천 사이를 분명히 구분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이제 모든 문화에서 이성적인 앎 곁에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사람들 간의 친교를 가능케 하는 앎의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2)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일본질을 통한 인식(cognitio per connaturalitatem)’에 대해 말한 바 있다.3) 이는 영적인 동등함과 긴밀함, ‘동일본질성’에 바탕을 둔 앎을 의미한다. 존 헨리 뉴먼(J. H. Newman)은 자신의 추기경 표어로 “마음은 마음에 말한다(cor ad cor loquitur)”를 선택했다.

  지난 세월 동안 예수회원 페터 리퍼트(Peter Lippert)가 1924년 처음으로 출간한 『영혼에서 영혼으로(Da anima ad anima)』란 책이 많이 읽혀져 왔다. 일본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표현이 상당히 많이 퍼져 있다. 이는 선불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영혼의 상태에 대한 직접적인 통교, 전수를 표현한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관건은 담화적인 길을 통해 통교되는 앎이 아니라 묵상의 실천 가운데 숙고되는 앎에 있다.

선(禪) 수행

  ‘선 수행’은 평온하게 앉은 (좌선) 상태에서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다.4) 이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업에 따라, 정 자세로 방석에 앉아 면벽하거나 또는 수행 도장에서 다른 수행자들을 마주하고 눈을 뜨거나 감은 상태에서 다리를 단순하게 가부좌로 하거나 이중으로 접은 상태에서 수행을 한다. 그럼으로써 완벽한 연꽃의 형태로 오른쪽 발을 왼쪽 다리 위에 포개고 왼쪽 발 역시 오른쪽 다리 위에 포개며 두 손은 하나로 모은다. 이어서 보행 명상(경행)을 하며,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좌선 명상을 계속해서 한다. 이 수행은 본질적으로 고요한 자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적인 고요함은 내적인 고요함에 상응한다. 내적 고요에 도달하려면 처음에 숨을 들이 쉬고 내쉬면서 호흡의 숫자를 세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흡을 평온하게 하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횡경막으로 숨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이 훈련의 목적은 수행자가 상상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있다.

  많은 곳에서 소위 ‘공안(公案)’5)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이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이거나 단순한 단어로서, 수행자는 그 이야기나 단어가 지닌 부조리로 인해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공안에 전념해야 한다. “손의 소리를 들으시오!” 하는 하쿠인 선사의 금언 또는 ‘무(無)’6)는 공안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자주 사용되는 ‘무’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는 초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자르고 수행자를 비워 자유롭게 하는 칼과 같다.7)

  수행이 진행되는 때에는 선사가 수행자를 도와준다. 선을 수행해서 목표, 즉 각(覺)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스승의 인도에 내어 맡겨야 한다. 스승은 수행 도장에서 대개 하루에 한 번 가르침(teisho)을 전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승(dokusan)과의 만남에 있다. 이 만남이 반드시 대화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종 스승의 눈길 한 번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이 아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다시금 수행에 깊이 잠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떤 경우 수행자에게서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났음을, 즉 돌파구가 열리고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됐으며 심지어 위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간단한 징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그 누구도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규칙이 있다. 깨달음에는 승인이 필요하다. 더욱이 이러한 승인은 선사로서 인정받고 그러한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선(禪)과 영신수련

  어느덧 선(禪)은 전 세계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상황이다. 불교도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진 지 오래다. 최상의 선상에서 본다면, 선 수행은 모든 이들에게 허용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선 수행을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의 ‘영신수련’과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8) 여기서도 ‘수련’ 또는 ‘수행’이란 말을 사용한다. 영신수련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선 수행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간에 병행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영신수련은 여정을 가리켜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영적인 수행과 연관된다. 근대 초에 활동했던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영신수련은 인간이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관계가 내포한 실존적인 앎으로 인도해주는 길을 바탕으로 한다.9) 따라서 그는 수련을 위한 장소와 시간, 몸의 자세와 영혼의 준비 그리고 수련을 하는 내내 거쳐야 할 개별 단계들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수련을 인도하는 사람의 과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개별 수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어느덧 이런 구체적인 사안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오래 전부터 잊혀 왔다. 오랫동안 영신수련은 일련의 강의 주제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뭔가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아시아에서 유래한 자극에 힘입은 바 크다. 많은 과정에 심리-육체적 요소들이 들어갔으며 거기에 참여하는 그룹은 개방적이고 폭넓게 이루어졌다. 다시금 영신수련은 길을 찾는 이들과 도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주는 지침이 되었다.

서양에서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

  선 수행에 참여하는 사람 또는 유럽에서 이러한 명칭이나 이와 비슷한 이름 아래 제시된 수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통상 ‘서양’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잘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연계되어 있는 신념에 찬 신자들이거나 명목상으로만 그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다. 또한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선과 같은 아시아적인 수행 방식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출신에 따라 그러한 수행에 대해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러나 결핍으로 느꼈던 그 무엇인가를 이 수행에서 발견하며, 낯선 지역에서 유래한 제안과의 만남을 자신의 신앙을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이 점에 대해 증언한 바 있다.10) 소위 ‘외부로부터’ 와서 수행에 의해 준비된 내적 개방을 통해 그리스도교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로, 그리스도교를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체험하면서 동시에 교의와 법으로부터 면제된 선 수행을 탈출구로 경험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그룹들과는 별개로, 서양인들 중에는 불교를 통해 삶의 목적에 이르렀다고 믿는 가운데 ‘삼보(三寶)’, 즉 (창립자), (가르침), (공동체)에 귀의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체험에 담겨 있는 다양한 가치에 대면해서 단순히 선 수행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며 거부하고 이를 늘 경계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 모든 약이 다 모든 사람들에게 맞고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의사나 약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하튼 그 중에 누군가는 전문가이다.

‘길’이신 예수와 선(禪)의 길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다원주의가 점점 더 퍼져가는 시대에 우리는 개인적인 선택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따라서 접근 가능한 모든 길을 검토하는 가운데 우리는 카를 라너가 자신의 모든 연구의 마지막에 간주했던 것,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길은 우리 실존의 목적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해준다고 깊이 확신하게 되는 바로 그 길에 대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나자렛 예수의 수준에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여타 다른 길들은 우리를 이 목적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적어도 길이신 예수에게서 멀리 인도할 뿐이며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위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해도, 이는 우리의 주관적 신념일 뿐이다. 우리는 신뢰심을 갖고 최종적인 판단을 최고의 심급자(審級者)이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운명을 하느님의 심판에 맡겨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영의 식별을 적용함에 있어 취해야 할 기준들이 무엇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 또한 자신들을 가르치던 그분을 ‘스승’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스승님께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당신이 잡혀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예수께서 하신 고별사에서 우리는 제자들 편에서 던진 두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된다. 이는 식별에 있어서 근본적인 그리스도교적 기준의 문제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암시해준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5-6) 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어서 곧바로 필립보가 다음과 같이 청한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9) 라고 대답하신다.

  이 두 가지 대답은 하나로 모아진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인격 그 자체로 길이시기에 우리는 바로 이 길에서 궁극적 실재, 즉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은 바로 여기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의 삶을 살아가신 방식은 우리를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바로 그 길을 구체적으로 가리켜준다. 성부와 성자는 비록 서로 구별되지만 하나이시며, 우리와 통교하시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영 안에서 일치를 이루신다. 당신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에 대한 예수님의 담화들은 ‘신비 교육적(mistagogia)’이다. 즉, 참으로 예수님을 보고 이해하는 사람은 그분에 의해 신성한 신비 속으로 인도되어 들어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들의 진리 추구 여정에서 유효한 연계점이 된다.

규범: 사랑에 대한 이중 계명

  예수께서 당신 자신에게 하신 언급에 대면해서,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자문해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중 계명을 만나게 된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마태오는 좀 더 유다이즘을 향한 시선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종합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사실, 예수께서는 히브리인으로서 이 두 계명과 더불어 자신의 종교적인 전통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분은 유일하신 하느님, 말씀과 행적으로 당신 자신을 통교하시고 사람들을 당신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적인 관계로 나아가도록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믿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들어라, 이스라엘!”이란 말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정표를 구성한다. 그것은 인류의 여러 종교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다.

  더욱이, 사랑은 인간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에 직면해서 그리고 창조 세계 전체를 통해 지녀야 할 개방적인 태도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다. 인간 세계에 있어, 마태오 복음의 공심판이라는 거대한 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없다.(마태 25,31-46) 이 복음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업적들을 열거한 다음, 좋은 일은 ‘사람의 아들’에게 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사람의 아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마태 25,40.45)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활동과 당신이 겪으신 고통 속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자가 되셨다. 그분처럼 행동할 때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 안에서 행동하기 위한 초대를 알아들을 때,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가운데 진정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받아 안으신 책임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그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복음사가는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스승으로 예수님을 묘사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사랑’과 ‘봉사’, 이 두 단어는 최근 들어 점점 더 그리스도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단순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공통분모로 집약시킨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관건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침묵이 말에 앞선다.

하느님의 ‘자기 비움(kenosis)’

  남의 일을 잘 도와주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랑은 오늘날 또 다른 말과 연결되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말은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용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기 비움(kenosis)’을 가리킨다. 필리 2,5-8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heauton ekenōsen)”라고 말한다.11) 여기서 ‘비우다’라는 용어는 그 문자적인 의미만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일본의 선사(禪師)들을 비롯해 철학자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는 이 용어가 불교 사상의 영성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 중에 하나와 가깝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를 숙고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공(空, sūnyatā)’이라는 개념으로 돌아왔다.12)

  이 용어가 그 자체만으로는 참선에 속하는 고유한 말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원후 2세기의 인도 신비가이자 현자인 나가르주나(Nāgārjuna)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의 내용 가운데 위대한 유산의 형성은 특히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철학적인 의미도 담고 있는 이 ‘공’이란 용어는 주로 영성적인 실천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선불교에서는 본질적으로 ‘공의 비움’ 과정,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부터의 철저한 이탈 과정에 대해 말한다. ‘공’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 아니라 과정이다. 이 과정은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같은 고전적인 스페인 신비가들로부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라인란트의 신비가들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언어를 아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상기시켜 준다.

“나의 공안은 예수 그리스도”

  팔로틴회 수사인 요한네스 코프(Johannes Kopp, 1927-2016)는 『햇빛에 눈이 녹아내리듯이』(Schenneflocken fallen in die Sonne)13)라는 자신의 작품의 제4장에 이 구절을 제목으로 붙였다. 그의 선 스승인 로시 코운 야마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공안(公案)으로 정하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해야 합니다.” 이 표현이 내포한 의미는 코프가 신앙을 “그리스도를 향해 믿는 것(credere a)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credere in)”이라고 이중적인 방식으로 언급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향해 믿는 것은 외부에서부터 그분께 다가와 마침내 그분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 그것은 진리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내면화하도록 초대하고 촉구하는 계시와 증언에 바탕을 두고 상상되고 재현된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이는 우리의 생각과는 대치된다. […] 양극성을 초월하면서 이러한 내면의 강렬함 속으로 침잠하는 사람은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성취되는 복음의 약속이 요구하는 철저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을 향한 길’의 험난함과 위기를 익히 알고 있으며, 고유한 시간과 방식에 따라 갑작스레 ‘~안에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이 뒤집히는 것도 안다. 여기서 그는 형언 불가한 영역에 있게 된다. 여기서 ‘공안’은 그 과제를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공안’에서 ‘~안의 존재’를 체험한 다음,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성취하게 된다. 그분은 계시와 신약성경의 목적이자 의미이다. 이제 불꽃이 흩날리며, 섬광이 비춰진다. 그는 ‘~안에서’ 폭발하기에 이른다.”14)

  ‘공안’은 완성에 도달할 때 그 의미를 다하게 된다. 이처럼 ‘공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를 향해(a) 믿는 것’에서 ‘그리스도를(in) 믿는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결코 끝나지 않을 과정의 시작이자 언제나 더욱 더 깊은 심오함으로 인도하는 과정의 시작을 보여준다. 성경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 안에(in)’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수많은 측면에서 요한과 바오로의 언어를 상기하게 한다. 사실, 우리는 ‘성부-안에-성자’와 ‘성자-안에-성부’, ‘그리스도-안에-나’, ‘나-안에-그리스도’, ‘그분-안에-우리’, ‘우리-안에-그분’이라는 다양한 표현을 익히 알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내밀한 하느님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고 관통하게 해주는 언사들이다.

  성경의 이론적인 정식을 바탕으로 선(禪)에서 ‘구현되는’ ― ‘to realize’라는 영어 동사가 지닌 이중적인 의미(‘실현하다’와 ‘이해하다’)에 준해서 볼 때 ― 것은 경험되고 ‘실현’된다. 우리는 감탄의 자세로 다음과 같이 자문해볼 수 있다. 불교의 선사가 어떻게 자신의 그리스도인 제자에게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할 수 있는가?

  실제로 여기서 우리는 선 수행이 그리스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수련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선 수행은 그러한 수련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기 위한 길을 찾게 해준다. 또한 성찬례 거행이 이러한 수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예수회원인 후고 에노미야-라잘레(Hugo Enomiya-Lassalle)에게 있어서 성찬례 거행은 수행을 위해 할애된 시간, 즉, ‘마음을 건드리는 시간’인 ‘접심(接心, sesshin)’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이런 긍정적인 체험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만일 ‘영적 식별’을 얻으려면 위험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광야에서 그분이 겪으신 유혹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마태 4,1-11 참조) 마찬가지로, 선 수행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위기의 상황들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기는 수행이 더욱 진전되는데 있어 피할 수 없다. ‘마경(魔境, makyô)’, 즉 영들의 세계에 대해 말하자면, 여러 가지 현상들과 환영들 또는 그와 비슷한 것들을 들 수 있는데,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때 이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있다.15) 선 수행이 애착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나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종류의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행자는 결국 철저한 이탈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포함해서 모든 면에서 비우게 된다.16) 수행자가 철저한 고요에 이르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억압된 모든 것이 의식으로 다시 떠오르며 비워졌다고 하는 사실 속에 있다는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수덕적인 면에서 보면, 유혹은 죄는 아니지만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 있다. 이는 그러한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해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가장 좋은 권고는 ‘외견상 드러나는 것들’, ‘여러 가지 암시’, ‘여러 가지 이미지’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런 지침에 의지하는 자만이 깨달음의 목표에 이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를 보면 광야에서 살았던 안토니오의 모습이 눈에 띤다. 그를 그린 이콘 곁에 표현된 돼지는 그가 겪은 유혹들을 상기시켜 준다. 실제로 이는 많은 성화에서 재현되어 드러나는 것으로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 Grünewald)의 작품인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보다 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악마의 세계’인 ‘마경’과 관련해서, 여타 다른 전문가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승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교적인 식별이 시작된다. 즉, 우리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알 수 없는 수련으로 들어갔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 덧입는’ 체험을 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을 향해 걸어가지 못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유혹과 함께 만들어지게 되는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개방된 채로 놔둔다. 하나는 수련자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따라 움직이며 이를 통해 수련의 도움과 더불어 보다 더 깊은 심오함에 이르게 해주는 시험을 제공할 수 있다. 아니면 수련자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 실제로 멀어지게 하는 시험을 제공할 수 있다.

침묵 다음에 오는 말

  식별 과정에서 수련 이후에 일어나는 것 그리고 이와 동시에 거기서부터 맺어지게 되는 열매는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침묵 이후의 말을 불러일으키는 것, 우리를 ‘말하도록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여기에 이른 사람은 무엇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마태 12,34) 예수께서 어떻게 한 신자 안에서 말씀하시는지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기준을 구성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의 토대들이 부서지고 거친 교의적인 정식들이 사슬처럼 쪼개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묵상에 더욱 견고하게 연계되어 있는 방식 속에서 묵상 수련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신비들에 접근하는 것은 가로막혀 있다. 비록 ‘하느님’을 말한다 해도, 더 나아가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 또는 ‘세 위격 가운데 계신 하느님’, 그리고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시라 할지라도, 그러한 신비들은 그 자체로 수그러들 뿐이다. 믿는 자 역시 종종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이로 인해 비난 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곤 한다. 달리 말해, 믿는 사람조차 종종 자신이 실제로 믿는 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일반적인 선상에서 볼 때, 오늘날 언어와 관련해서 제한되어 있고 방해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언제나 더욱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싶은 느낌을 갖게 된다.17)

  철학적, 심리학적 양성의 결핍은 묵상을 가르치는 몇몇 그리스도교 스승들을 경계선까지 몰고 간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비인격적 존재 안에서 용해되며, 더 이상 역사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되신 예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이제 그분이 우주적 원리와 관련된 그 무엇이라고 여겨지는 데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여기서 십자가의 대담함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장벽이 된다. 그리고 이는 참된 것을 입증하는 바탕이 된다. 한편으로 비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비교하는 것은 종종 충격적인 경험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 소위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에 그리스도교적인 것 또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한 것은 십자가의 상징이 공공 생활로부터 사라지게 하고 그것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아무 관심도 끌지 못하는 단순한 예배의 대상이 되게 한다.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18)

  하지만, 종교적인 언어 영역에서 침묵 중에 인도되는 행위의 기준은 언제나 유효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공심판에서(마태 25,31-46 참조) 중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사심 없는 헌신, 사랑을 바탕으로 한 책임이다. 영신수련과 관련해서 보면, 이 수련 이후 말이 줄어드는 반면 자신의 삶을 계속 폐쇄된 자기충족, 특히 엘리트적인 자기만족으로 인도하게 될 경우,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영(靈) 안에서 체험된 조명된 삶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서 참된 깨달음을 단순히 심오한 앎, 심오한 이해로 일방적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열정으로 충만한 헌신과 함께 빛이 비추어지지 못한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초대한다.

  성경이 전하듯이, 타보르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문 순간 이후의 제자들은 자신들 곁에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마르 9.8 참조)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영의 식별에 있어 예수님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불러 일으켜 주시는 관심사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최초로 부르심 받은 제자들에게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길을 걸으며 예루살렘을 향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209-222|4011-4012 (5-19 ago/2 set 2017)
** Hans Waldenfels S.I.
1) 필자는 후고 마키비 에노미야-라잘레(1898-1990)라는 예수회 스승들을 통해 실천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선 묵상에 입문했으며 하인리히 드물랭(1905-1995)을 통해서는 그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라잘레는 이를 실천에 도입했으며 자신의 스승인 하라다의 사찰에서 한 주간의 수행인 ‘접심(sesshin)’으로 이끌었다. 필자 역시 라잘레의 그 다음 스승인 로시 코운 야마다(1907-1989)를 알 수 있었다. 라잘레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기 바란다. H. Enomiya-Lassalle, Zen Weg zur Erleuchtung, Wien, Herder, 1960 (tr. it., Zen, via verso la luce, Roma, Appunti di Viaggio, 2002); ID., Zen-Buddhismus, Köln, Bachern, 1966; ID., Zen-Meditation für Christen, Weiheim, Otto Wilhelm Barth, 1969 (tr. it., Meditazione zen e preghiera cristiana, Roma, Paoline, 1979) 참조. 또한 그 이상으로 후에 출간된 다음 책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롤랑 로퍼스(Roland Ropers)에 의해 집필된 것도 있다. 드물랭에 대한 것은 다음을 참조하라. H. Dumoulin, Geschichte des Zen Buddhismus, Bern, A. Franke, vol. I: 1985; vol. II: 1986; ID., Zen im 20 Jahrhundert, München, Kösel, 1990; ID., Spiritualität des Buddhismus, Mainz, Grünewald, 1995.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의 비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ID., Begegnung mit dem Buddhismus. Eine Einführung, Freiburg, Herder, 1978 (tr. it., Buddhismo, Brescia, Queriniana, 1981); 공안집(公案集), 무문관(無門関)에 대한 번역으로는 Die Schranke ohne Tor, Mainz, Grünewald, 1975을 보라. 코운 야마다(Kôun Yamada)에 대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기억하기로 하자. Die torlese Schranke. Mumonkan. Zen-Meister Mumons Koan-Sammlung, München, Kösel, 1989.
2) 이어지는 주제에 대해서는 H. Waldenfels, An der Grenze des Denkbaren. Meditation – Ost und West, München, Kösel, 1988, 148-176, 특히 150-152 참조.
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I, q.1, a.6, ad.3; I-II, q.23, a.4; q.58, a.5; II-II, q.45, a.2; q.60, a.1, ad.1 e ad.2 참조.
4) 이러한 수행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읽도록 권한다. PH. Kapleau, Die drei Pfeiler des Zen. Lehre – Übung – Erleuchtung, Weilheim, O.W. Barth, 1972 (tr. it., I tre pilastri dello Zen. Insegnamento, pratica e illuminazione, Roma, Ubaldini, 1981). 이어지는 것과 관련해서 다음에 제시된 간략한 소개의 글을 보기 바란다. H. Waldenfels, Faszinazion des Buddhismus. Zum christlich-buddhistischen Dialog, Mainz, Grünewald, 1982, 116-118.
5) ‘공안’은 문자 그대로 과거에 있었던 ‘공적인 문제’를 전사(傳寫)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특히 두 가지 중요한 공안집이 있다. il Mumonkan (giapponese; in italiano, a cura di Z. Schibayama, Mumonkan. La porta senza porta, Roma, Astrolabio Ubaldini, 1977; 참조. gli scritti di Heinrich Dumoulin, Kôun Yamada, Philip Kapleau e Zenkei Shibayama citati nelle note 1, 4, 7). 그리고 다음 작품의 번역본도 있다: W. Gundert, Bi-ÿan-lu. Meister Yüan-wu’s Niederrschrift von der Smaragdenen Felswand, München, Carl Hanser, voll. I-III, 1964-1973.
6) 여기서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한 세 가지 번역 단어를 선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무’는 단순히 공간적 또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무(nulla)’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아니요(no)’라는 의미 또는 절단의 의미에서 ‘결코 아니다(non)’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행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등과 같이 해설서에서 말하고 있는 칼과 같다.
7) ‘무(無)’는 무문관(無門関)의 첫 번째 공안에 있어 핵심을 구성한다. “il teisho(‘discorso’) di commento di Yamada”, in Die torlose Schranke…, cit., 30-334 참조. Z. Shibayama, Zu den Quellen des Zen, Bern, Donauland, 1976, 31-46 참조.
8) H. Enomiya-Lassalle, Zen und christliche Spiritualität, München, Kösel, 1987, 125-186 (tr. it., Zen e spiritualità cristiana, Roma, Edizioni Mediterranee, 1995) 참조. 이 책은 라잘레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책의 본문은 롤랑 로퍼스(Roland Ropers)와 보그단 스넬라(Bogdan Snela)에 의해 수정된 것이다.
9) K. Rahner, “Die Logik der existentiellen Erkenntnis hei Ignatius von Loyola”, in ID., Sämtliche Werke, Bd. 10, Freiburg, Herder, 2003, 368-420 (tr. it., “La logica della conoscenza esistentiva in Ignazio di Loyola”, in ID., L’elemento dinamico nella Chiesa. Princìpi, imperativi concreti e carismi, Brescia, Morcelliana, 1970) 참조.
10) W. Johnston, Der ruhende Punkt. Zen und christliche Mystik, Freiburg, Herder, 1974; ID., Christian Zen. A Way of Meditation,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71 (tr. it., Lo zen cristiano, Roma, Coines, 1974); K. Kadowaki, Zen und die Bibel. Ein Erfahrungsbericht aus Japan, Salzburg, Otto Müller, 1980 (tr. it., Lo zen e la Bibbia. L’esperienza di un sacerdote,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1990); ID., Erleuchtung auf dem Weg. Zur Theologie des Weges, München, Kösel, 1993; J. Kopp, Schneeflocken fallen in die Sonne. Christuserfahrungen auf dem Zen-Weg, Antweiler, Ploger, 1991 (tr. it., Così la neve al sol si disigilla. Esperienze di Cristo sulla via zen, Roma, Appunti di Viaggio, 2001); M. Seitlinger–J. Höcht–Stöhr (eds), Wie Zen-Meditation mein Christsein verändert. Erfahrungen von Zen-Lehrern, Freiburg, Herder, 2004 참조.
11) K. Rahner, “Zur Theologie der Menschenwerdung”, in ID., Sämtliche Werke, Bd, 12, Freiburg, Herder, 2005, 318 (tra. it., “Teologia dell’Incarnazione”, in ID., Saggi di cristologia e di mariologia, Roma, Paoline, 1965, 113) 참조. 여기서 저자는 하느님의 철저한 벗음의 길을 통해 그분 안에서 일어난 것이 인간 안에서 수렴되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분은 사람인 한에서 자신의 자기 드러남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자기 드러남으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드러나고 선포될 때, 그리고 그분 친히 이 사랑의 위엄을 숨기고 당신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드러내실 때, 실은 계시되어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12) 이에 대한 참고문헌은 다음 작품을 통해 광범위하게 제시됐다: H. Waldenfels, Absolutes Nichts. Zur Grundlegung zwischen Buddismus und Christentum, Paderborn, Ferdinand Schöningh, 2013. 참조. 또한 다음 작품의 제2부를 보라: ID., Gottes Wort in der Fremde. Theologische Versuche II, Bonn, Borengässer, 1997, 167-331; 129-164.
13) J. Kopp, Cosí la neve al sol si disigilla, cit., 51-63 참조.
14) 같은 책, 94.
15) H. Enomiya-Lassalle, Zen Weg zur Euleuchtung…, cit., 50-53 참조.
16) 일본어로는 ‘생각의 부재’(fushiryô, 不思量)와 ‘생각하지 않는 것’(hishiryô, 非思量)을 구별한다.
17) E. Hurt, “믿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지식의 위기가 있다”, in Herder Korrespondenz 66 (2012), 141-146 참조.
18) 이러한 입장 또는 고백이 과학적인 토론과 같은 차원에 자리하지는 않는다. 순전히 개념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이론이 ‘동사화’ 되는 과정은 그 고유한 자리에서 대면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는 구어(口語)를 초월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영의 식별과 혼동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