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아시아 신학의 탄생
조화를 기치로

조화를 기치로

LA NASCITA DI UNA TEOLOGIA PAN-ASIATICA*
Sotto il segno dell’armonia

브누아 베르망데 신부(예수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옮김

도입

  온 세상의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21세기가 참으로 ‘아시아의 세기’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로부터 나타난 활기와 창의성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의 신학자들은 아시아 백성이 겪은 체험들의 본성을 “조화의 신학”으로 종합하려 했고, 이 신학은 지난 삼사십 년 동안 그 원리와 특징들을 발전시켜 왔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에 의하여 조직된 모임들을 통하여 연결된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작업을 완성하는 데에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 본고는 그러한 신학의 배경, 양식 그리고 고유한 주제들을 기술하려 한다. 또한 그 내부적인 차별화를 고려하고, 이 신학이 점차로 아시아 안팎의 교회적, 신학적, 영성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영향력을 보여줄 것이다.

아시아 신학의 배경: 대조(對照)되는 것들의 넓은 바다를 항해하기

  조화의 신학을 건설하려는 시도들에 접근할 때 관찰자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상황은 ‘대조의 바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서로 상이하고 때로는 상치되는 맥락들이, 아시아적인 공간과 정신이라는 통합 요소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종교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는 여러 원천들에서 그 자원을 끌어 온다. 중국 문화에는 도교, 유교, 대승 불교 전통들이 포함되고, 인도에는 힌두교와 소승 불교, 그리고 인도에서 직접 발생한 다른 종교적 표현들이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이다. 토속 신앙과 다양한 관습들이 이 지역 전체에 퍼져 있으며, 흔히는 다른 종교 표현들과 결합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본래 서양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도 있다. 아시아 남동부에서 그리스도교는 16세기 이전에도 이미 현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세기부터 시리아 교회는 페르시아 상인들의 도움으로 스리랑카, 미얀마, 그리고 말레이 반도에 자리를 잡았다.

  유럽 전통에 따라 형성되어 있던 그리스도교는 특히 1550년 이후로 아시아 북동부에 도달하여 일본, 중국, 한국 문화와 만났다. 그러나 그 지역의 자원과 통찰들을 신학적 작업에 명시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예를 들어 상하이의 예수회 신학교는 1952년부터 1967년 사이에 필리핀으로 옮겨졌는데, 1964년까지 라틴어만을 교육용 언어로 사용했으며 그 후에 영어로 바꾸었다. 가톨릭 세계 안에서는, 1968년 타이베이에 푸런 신학부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중국어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빠르고 깊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과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의 맥락에 언어적, 문화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다의적인 일이다. 그것은 단어, 개념, 언어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는 세계관을 고려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는 체험의 다수성에 개방되어 있을 것이 요구된다. 토착화를 심화하기 위한 근본 조건은 ‘해석학적 주의(注意)’로 정의할 수 있다. 끊임없이 변천하는 경제적, 사회적, 생태학적 도전들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감수성과 부지런함도 요구된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인내와 관용을 요구하는 정치적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복고주의1)가 지배적인 종교적 경향이 되었고, 이는 흔히 종교적 공존과 자유를 해친다.

  지역의 맥락들을 마땅히 존중하면서, 아시아 신학자들은 이 요인들과 그 밖의 다른 요인들을 강하게 느끼고 연구했다. 시대의 징표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신학적 임무의 한 부분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테오스(theos)와 로고스(logos)라는 단어가 결합되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로 ‘신학(teologia)’이란 로고스(이성에 근거한 체계적 담론)와 카이로스(살아계신 하느님의 오심이라는 특별한 사건) 사이의 긴장을 토대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2) 신학은 신앙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신앙 체험의 식별을 도우며(1요한 4,1-4 참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언어와 근본 주제들이 하느님께서 구원 역사의 이야기를 계속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현존하게 하시는 방법들에 따라 쇄신되어 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에서 그러했듯이, 오늘날 아시아에서도 이것은 사실이다.

신학적 방식: 마음의 낙관주의

  신학은 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진행 방법이기도 하다. 첫째로 신학은 자신의 담론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하여 비판적 식별을 요구한다. 자신의 단언들이 고정되고 전달되는 과정들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진정한 신학적 담론은 하느님 말씀이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지고 육화하는 방식에 대한 체험에 근거해야 한다. 신학은 바로 그 체험을 언어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신학적 방식을 만드는 것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3)

  조화의 신학이 점차로 구성되는 모습에서는 아시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탄생과 견고화의 역사가 증언해주는 바와 같은 그들의 전형적 ‘신학적 방식’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그것은 집단적인 일이었고, 그 발전은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의 역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970년 마닐라에서 있었던 아시아 주교들과 교종 바오로 6세의 역사적 만남 이후인) 1972년에 만들어진 아시아 주교회의는 초국가적 조직으로서, 22개의 국가 주교회의를 포함하며 아시아에서 서쪽으로는 파키스탄부터 동쪽으로는 필리핀까지, 북쪽으로는 한국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까지를 포함한다.

  2015년 말에 아시아 주교회의의 문서들은 147개에 이르렀으며, 이는 상당한 집단적인 교회론적, 신학적 건설의 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4) 그 동안에 계속된 아시아 주교회의의 신학 회의들은 상당히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도전들을 겪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 깊이 있는 공유와 합의를 얻기 위한 인내로운 연구를 도와주었다. 1980년대는 신학계에 풍요로운 시기였다. 몇몇 신학자들이 아시아의 조화의 신학을 구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어느 한 사람이 이를 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특수한 신학적 과제는 누구의 특권도 아니다. 그 구성 과정에는 그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들에 따라 그것이 지지하는 가치와 방법들이 반영되어 있다. “방법은 목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도달해야 할 완전성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이다.”5)

  대화와 합의에 기초한 조화의 신학은 그 동일한 가치들을 극단까지 촉진한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의 대화적 구상을 강하게 공유하며, “대화는 아시아에서 선교를 행하는 방법이다.”라고 규정한다.6) 1974년의 첫 번째 만남에서부터 아시아 주교회의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통합적 해방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그들의 문화와의 대화(토착화), 그들의 종교 및 철학 전통과의 대화(종교간 대화)”7)라는 삼중의 대화를 실천하는 복음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함을 천명했다.

  이 세 가지 대화가 만들어진 문서들 대부분에 영감을 주었다. 조화의 신학의 기본 개념을 제시하는 아시아 주교회의 문서들은 대화적이고 “아시아적인” 신학 방식을 발전시켰다.

  라이몬 파니카르(Raimon Panikkar)는 이미 그러한 접근의 인식론적 기초들을 지적했다. “변증법이 사물들의 질서, 이성의 가치, 설득력 있는 논거들을 신뢰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듯이, 대화는 타자를 신뢰하면서 진리를 찾는다. 변증법은 이성을 좇는다. 대화는 감성을 좇는다. 변증법은 개념들의 객관적 일관성에 힘입어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화는 대화하는 이들의 주관적 일관성에 힘입어 진리를 향한 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대화는 duo-logo, 곧 두 개의 말들(logoi)이 되지 않으려 한다. 그 말들은 변증법적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dia-logos, 곧 그것을 초월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로고스의 길을 만드는 것이 되고자 한다.”8)

  인도의 살레시오회 신학자인 호세 쿠티얀마타틸(Jose Kuttianimattathil)은 인도/아시아적 방식의 대화의 특징들을 체계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대화법의 진행 방식은 누군가가 습득한 다른 종교의 지식과 체험이 연구, 숙고, 기도, 관상을 통하여 자신의 공동체의 신앙 진술과 상호 작용을 하게끔 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바로잡고 풍요롭게 하고 변화를 일으키며, 또한 다른 이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다. […] 신학의 모든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대화적 방법도 그것의 기원이 되는 신학으로부터만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이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산을 일관되게 기술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 기술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 때에 그 방법은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9)

상징과 이야기

  조화의 신학에 고유한 “신학적 방식”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미지와 은유, 시와 이야기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특권적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오셨다.

  인도 신학자 프랜시스 곤살베스(Francis Gonsalves)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가 성/속, 내부/외부 등으로 공간들을 설정하는 범주들 전체를 전복시키는 “반(反)-공간”의 표상으로 나타내었다.10) 이러한 맥락 안에서 그는 조화 자체를, 배우와 관객을 분리하지 않고 마을 전체가 춤을 추게 하는 공동체적인 춤으로 나타낸다. 타내었다. “그것은 춤 안에서 해석된 삶이다. 그리고 삶은 연대성과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춤이다.”11)

  이러한 은유는 삼위일체의 움직임을 관상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춤의 역동은 다수의 표현들이 단 하나의 움직임으로 융합되는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12) 삶의 체험에 기초한 은유들은 인간적 실재들과 신적 실재들이 결합되는 공간을 열어 놓는다.

  조화란 무엇인가? ‘조화’는 지극히 포괄적인 단어이고, 그 의미는 때로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한 보고서에서는 이 단어를 ‘기술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세계와 영적 세계를 보여주기 위하여 활짝 열리는 문으로 접근하려 한다. “현실에 대한 아시아적 접근이 있다. 현실에 대한 아시아적 이해는 매우 유기적이다. 그 세계관 안에서는 전체, 일체가 관계망의 총합이고 여러 부분들 서로간의 상호 작용이다. 다른 모든 부분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부분은 없다. 그리고 모든 부분들이 함께 전체를 구성한다. 부분들은 그들 상호간의 의존성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된다. 부조화에서 벗어나고 충만한 삶을 촉진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들은 우리의 아시아적인 문화적, 종교적 자원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과 공명할 것이며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13)

  다른 문헌들은 이 단어가 내포하는 것에 대한 더 계획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조화는 무엇보다 먼저 생태학적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이상이다. 둘째로는 사회적 관계들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없이는 조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화는 다원성을 살기 위한 한 방법인데, 이는 종교간 대화라는 특수한 과제를 내포한다.

  여러 아시아 신학자들은 이 마지막 과제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만물을 일치시키고” “만물을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깊은 만남과 조화에 이르게 하는 문화들 및 종교들 사이의 만남이 정상적이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를 대화의 새로운 차원들로 이끌 수 있어야 하리라고 여긴다.14)

  예수회원과 지식인들이 서로의 문헌 전통을 발견하던 시대부터 고전을 대하는 전문가였던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유교의 가르침과 성경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매우 뛰어났다. 공자의 『논어(論語)』를 고찰하던 중에, 중국 예수회 신학자인 마크 팡 지롱(Mark Fang Chih-jung, 房志榮)은  ― 공자와 그 제자들 사이의 대화의 생생한 기록인 ― 이 특별한 고전 본문이 독자에게 가르침과 배움의 기쁨을 보여 주는 “교육학적 세계”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는 그의 공생활에서 구체적이고 때로는 역설적인 배움의 체험을 통해서 제자들을 계시로 이끌었다. 두 경우 모두 세계와 인류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 탐구를 하느님 신비의 충만한 계시에까지 확장시킨다. 공자의 『논어』나 요한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길과 문이라는 은유는 단순히 제자가 걸어갈 길이 될 만큼 겸손한 스승의 태도를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해 준다.

  중국의 맥락에서 공자는 스승의 모델이 된다. 스승은 내적 자유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는 영적 진보를 향하여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다. 공자의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길이 사물과 인류의 본성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성령께서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행하시는 일에 경탄할 수 있다.15)

조화, 정의, 생태

  조화를 ‘춤’으로 파악하는 것은 조화가 또한 어떤 면에서는 ‘투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펠릭스 윌프레드(Felix Wilfred)는 사회 문제와 생태학적 정의에 연관된 주제들에 적용된 조화 개념에 대한 아시아적 접근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16) 조화는 유기적인 연대성에 관련되지만, 그러한 개념과 가치를 지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분열을 일으키는 선택과 투쟁에 투신하기를 요구한다. 모든 투쟁이 사회적, 우주적인 연대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결코 본래의 전망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이 긴장은 창조적 역동 안에서 전개된다.

  조화의 신학은 교회론적인 방식이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넘어선다. 그 신학은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머무시면서 당신께서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우리를 당신의 최종적인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방식들을 통찰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통찰들은 고대의 경험으로부터 또는 지역적으로 근거를 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증언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체험들에서 나온다.

  종교간 대화를 행하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신학자들은 근래에, 조화의 신학이 지니고 있는 증언적 차원을 강조했다. “제자들의 공동체인 우리는, 서로 연관된 세 가지 방식으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사랑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예수를 증언한다. 그것은 침묵, 현존, 이야기이다. 실존적 침묵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깊은 곳에서 판단 없이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깊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의 현존을 의식한다. 그분은 우리의 종교간 대화의 여정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행동을 감도하신다. 또한 개인으로서나 공동체로서나 예수를 통하여 변모된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세계화된 무관심과 소비주의 문화를 연대성과 공유의 복음적 문화로 변모시킬 수 있다.”17)

  침묵과 말씀 사이의 관계는 아시아 신학자들이 좋아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대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는 이 주제에 대해 자주 고찰했다. “말씀과 침묵 사이의 조화는 아시아적인 진정성의 증거이다. 그것은 참으로 모든 말이 침묵으로부터 솟아나오고 침묵으로 이끌게 하는 영원한 에너지인 성령이시다. 성령은 모든 투신이 포기로부터, 모든 전투가 평온함으로부터, 모든 자유가 엄격한 규율로부터, 모든 행위가 고요함으로부터, 모든 ‘진보’가 초탈로부터, 모든 얻음이 비-의존으로부터 생겨나게 하신다. […] 예식에서든 봉사에서든 대화에서든 우리의 말과 우리의 침묵 사이에 조화가 있다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이다.”18)

  침묵과 말이 서로에게서 나오는 것을 관상하면서 아시아 신학자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은유를 사용하게 된다. 펠릭스 윌프레드는 인도 음악의 전형적 양식에 대해 고찰하면서 또한 영원성이 한 순간에 체험되는 방식을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순전히 직선적인 것으로 머무는 시간적 접근과 의식의 고유한 한계들을 극복한다. “[인도 음악에는]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수 없는,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영원하고 조화로운 가락이 있다. 그 가락은 ‘지금’으로 체험되는 끝없는 영원성을 느끼게 한다. 유기적 시각은 실재 전체의 상호 연관을 깨닫는 것에 근거하므로, 그 체험은 일차적으로 시간의 관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한 사람이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서 전체를, 그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온전히 지닌 전체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 내부에서 많은 것들이 동시에 현존하게 될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다.”19)

  다른 문화적 맥락 안에서, 한국계 미국인 신학자인 이정용(Jung Young Lee)은 음양의 철학 체계 안에서 해석된 중국의 조화 개념을 그와 연관된 (양자택일이 아닌) “…도 …도”의 세계관과 함께 사용하여 삼위일체의 신비를 고찰한다.20)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 김흡영(Heup Young Kim)은 로고스프락시스 대신 ‘다오’(道, 생활 방식)를 신학적 및 종교간 대화의 담론을 위한 대안적인 기본 은유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테오-로고스theo-logos(전통적 신학)와 테오-프락시스theo-praxis(해방 신학)를 대신하여 그는 이 패러다임을 테오-다오theo-dao라고 부른다. 그는 로고스프락시스라는 두 가지 은유가 오직 앎과 행함 가운데 한 차원만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오(道)’는 중국 철학자 왕양명이 주장했듯이 앎과 행함의 결합을 포함한다.21)

  외부 세계와 자신의 내적 실재를 체험하는 이 모든 접근 방식에서, 외부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과 자신의 내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유일한 과정으로 통합시키는 작용들이다. 중국의 옛 스승은 이를 이미 설명했다. “만물이 내 안에서 온전하다. 나 자신을 살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성실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나의 행실에서 내가 이타심을 열심히 발휘한다면, 인(仁)은 찾으러 갈 필요 없이 내 안에 있다.”22)

  중국 고대 철학자들의 글에 표현된 것과 같이 내적 조화를 찾는 데에 기초한 이와 같은 신학적 여정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현인”23)으로 보는 특수한 그리스도론적 방식에 이르게 한다. 예수는 육화로부터 케노시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성부와 이루고 있는 깊은 일치가 외부 세계와 상호 작용하고 또 그 세계에 작용하는 장소가 되게 한다. 우리를 이끄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와 생명을 결합시킴으로써, 길은 결국 “조화의 원천”이 된다.24)

질문과 전망

  조화라는 주제는 널리 확산되었지만, 아시아 신학의 다양함과 미묘한 차이들을 파악하기에는 아직 충분치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대만의 개신교 신학자들에게서 발전된 “애국” 신학25)들은 전통적인 문화적 개념들에 비해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며, 이들은 지역적이거나 주변적인 감정들과 그 전복적인 잠재력을 부당하게 약화하거나 부인할 수 있다.

  중국의 맥락에서, 스스로 “중국 그리스도교 신학”이라고 정의하는 학파는 이와 다른 전제들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이 처음에 하고자 했던 것은, 전문 신학자이든 아니든 여러 개별 주체들의 전형적인 체험과 모국어에 연결된 많은 단면들로부터 신학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흔히 중국 정부가 좋아하는 “조화”에 관한 담론의 정치적 용법을 신뢰하지 않는 이 학자들에게 “개별성”과 “근대성”은 조화보다도 더 중요한 개념들이다.26)

  인도의 맥락에서는 달리트(dalit, 지배체제가 ‘불가촉천민’으로 취급하는 카스트 계급 제도의 최하층민을 뜻하는 말) 신학자들의 전형적 신학 방식은 인도의 다른 신학자들이 추진했던 토착화의 시도들과 직접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달리 억압적인 종교적, 문화적 체제 안에 내포된 구조적 죄와 기만이라는 현실이 더 강조된다.27)

  조화의 신학을 제안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 단어가 수반하는 잠재적 위험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조화의 신학에 관한 [담론은] […] 지금 진행 중인 실제 상황을 감추고 피해를 입은 이들을 투쟁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평화’, ‘조화’ 등의 언어를 좋아하고 갈등과 투쟁의 언어는 좋아하지 않는, 세상에서 힘과 특권을 지닌 이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28)

  조화의 신학의 지속 가능성과 내적 창조성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대화(dialogue)라는 것이 계속해서 중단되고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어 왔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중단, 폭력, 몰이해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우리의 대화 시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직선적이지 않은 연속을 이루게 된다. 그 연속은 최초의 대화와 지속적인 대화 안에서의 모든 대화 시도들을 잇는 것이다. 대화는 정확한 출발점도, 심지어 정해진 기간도 없이 오히려 일련의 불완전한 이야기들을 잇는 연속으로 나타난다. 때로 그러한 이야기들은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부처의 제자들을 대화하는 하나의 몸으로 통합시킬 수도 있다.

  결국 그 대화하는 몸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된다. 개별적인 대화의 시도들은 이미 앞서 ― 그리고 지금도 ― “지역적” 공동체들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들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동시에, 그 대화적 기원으로 인하여 더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대화를 시도할 때 생기기 마련인 중단, 다시 시작, 그리고 놀라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아시아의 조화 신학이 언제나 새로운 모험을 떠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창조성과 새로움의 잠재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신학자들의 공동체적 의무들에 속한다. “모든 신학자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쪼개지고 거룩한’, ‘거룩하고 쪼개진’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성을 표현해야 한다.”29)

결론

  우리는 다른 어떤 특수한 논거보다도 ‘마음의 낙관주의’를 아시아 신학자들이 현재 기울이고 있는 노력의 기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를 모색하면서, 조화의 신학은 우리가 우리를 모두 하나로 결합시키는 유기적 연대성을 체험하고 길러간다면 인간은 “하느님을 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조화를 추구하는 이 아시아적 자세는, 바로 그것이 대화를 토대로 하고 있고(dia-logica), 교회 문헌인 성경과 아시아 대륙의 살아있는 전통들로 감도되기 때문에, 또한 참으로 신학적(theo-logica)이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그리고 이야기, 상징, 개념들을 통한 담론들로 표현되는 나눔 속에서 나타나는 다함없는 하느님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발견으로 전개된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114-126|4010 (15 lug/5-19 ago 2017)
** Benoît Vermander S.I.
1) 이 용어는 18세기와 19세기에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신비적 성격의 여러 운동들을 지칭한다.
2) M. de Certeau, La debolezza del credere. Fratture e transiti del cristianesimo, Troina (En), Città Aperta, 2006 참조.
3) B. Vermander, «From Ethnography to Theology: Religious Communities in Contemporary Shanghai and the Tasks of East Asian Theology», in Korea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39 (2015) 7-35 참조.
4) 아시아 전문가들의 생각을 더 넓은 대중에게 전달하고 교회와 아시아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아시아 주교회의 문서들이 반드시 아시아 주교회의의 공식 입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5) A. Pieris, «The “Asian Sense” in Theology», in J. C. England (ed.), Living Theology in Asia, Maryknoll (NY), Orbis Books, 1982, 174.
6) X Assemblea Plenaria della Fabc (dicembre 2012), Fabc at Forty Years: Responding to the Challenges of Asia. A New Evangelization, n. 5.
7) 같은 곳.
8) R. Panikkar, Mito, Fede ed Ermeneutica. Il triplice velo della realtà, Milano, Jaca Book, 2000, 243.
9) J. Kuttianimattathil, Practice and Theology of Interreligious Dialogue, Bangalore, Kristu Jyoti Publications, 1995, 608-609.
10) F. Gonsalves, God of Our Soil. Towards Subaltern Trinitarian Theology, Delhi, ISPCK, 2010, 185-186s 참조.
11) 같은 책, 178.
12) M. Amaladoss, Preface to F. Gonsalves, God of Our Soil…, cit., XVI.
13) «Asian Christian Perspectives on Harmony», in Fabc Papers 75, nn. 3-4.
14) M. Amaladoss, «Syncretism and Harmony», in 같은 저자, Beyond Dialogue, Bangalore, Asian Trading Corporation, 2008, 153 참조.
15) M. Fang Chih-jung, «Jidutu kan Kongzi yu qi mendizi de guanxi» («공자와 그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조망»), in Daofeng (Logos and Pneuma) 8 (1998) 197-208 참조.
16) F. Wilfred, Margins: Site of Asian Theologies, Delhi, ISPCK, 2008 참조.
17) Sixth Bishops’ Institute for Interreligious Affairs (Bira VI), Asian Celebration of 50th Anniversary of «Nostra Aetate», Final Statement, november 2015, n. 8 참조.
18) A. Pieris, «The “Asian Sense” in Theology», cit., 175.
19) F. Wilfred, Margins: Site of Asian Theologies, cit., 131.
20) J. Young Lee, The Trinity in Asian Perspectiv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참조.
21) 특히, H. Young Kim, Christ and the Tao, Hong Kong,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2003.
22) 맹자, 7A4.
23) J. Tan Yun-Ka, «Jesus, the Crucified and Risen Sage: Constructing a Contemporary Confucian Christology», in R. Malek (ed.), The Chinese Face of Jesus-Christ, vol. 3b, Sankt Augustin, Nettetal, 2007, 1481-1513 참조. B. Vermander, «Jesus-Christ as Seen by Chinese Catholic Theologians Today», ivi, 1421-1430도 참조.
24) «Discovering the Face of Jesus in Asia Today: A Guide to Doing Mission in Asia», in Fabc Papers 84 (1999) 참조.
25) 이는 C. S. Soong에게서 시작되었다. (다음 각주의 참고문헌 참조)
26) “애국 신학”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발전된 신학들에 관하여, M. Nicolini-Zani, «The Development of Chinese Christian Theology in the Last Decades: Between Indigenization and Contextualization», in Tripod 39 (2009) 31-54 참조. 중국-그리스도교 신학에 관하여, Li Qiuling, «Historical Reflections on “Sino-Christian Theology”», in China Study Journal 22 (2007) 54-67; Y. Huilin – D. H. N. Yeung (eds), Sino-Christian Studies in China, Newcastle, Cambridge Scholars Press, 2006; S. Xiangchen, «The Possibility of Sino-Christian Theology: From “Cultural Christianity” to “Christian Scholars”», in China Study Journal 24 (2009) 35-44 참조.
27) 예를 들어, D. Rasquinha, «A Dalit Christian Critique of the Brahminic Ideology», in Journal of Indian Theology 8 (2015) 23-44 참조.
28) F. Wilfred, Margins: Site of Asian Theologies, cit., 121.
29) K. Koyama, Mount Fuji and Mount Sinai, A Critique of Idols, Maryknoll (NY), Orbis Books, 1984,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