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근본주의와 가톨릭 통합주의
놀라운 에큐메니즘

놀라운 에큐메니즘

FONDAMENTALISMO EVANGELICALE
E INTEGRALISMO CATTOLICO*
Un sorprendente ecumenismo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 마르텔로 피구에로아**
임숙희 레지나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대학 신학원) 옮김

  미국 지폐에는 ‘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또한 미국의 국가 모토이기도 하다. 이것은 1864년 동전에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의회 결의안이 통과된 1956년에서야 공식화되었다. 이 말은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미국의 국가 창건의 뿌리에 해당하는 중요한 좌우명인데 여기에는 종교적 동기도 담겨있다. 많은 사람에게 이 말은 단순한 신앙 선언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종교와 국가 사이, 신앙과 정치 사이, 종교적 가치와 경제 사이에 이루어진 문제적인 융합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종교, 정치적 마니교(Manicheismo politico)1) 그리고 종말 숭배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어떤 정부들에서는 선거 과정과 정부의 결정 과정에서 종교가 반복해서 강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정할 때 윤리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정치와 윤리 그리고 종교가 상호 침투할 때 현실을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으로 구분하는 마니교적인 언어가 사용된다. 실제로 전 미국 대통령 부시(Bush)는 2001년 9월 11일에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대결해야 할 “악의 축”에 대해 말하며, “세상을 악에서 해방시킬” 책임을 상기시켰다. 그 후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나쁜(bad)” 집단 또는 “아주 나쁜(very bad)” 집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집단의 실체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가끔 그의 지지자들이 선거 운동에서 사용한 말들을 보면 우리가 “영웅서사시체”라고 부를 만한 어조의 특성을 띠고 있다.

  이런 태도들은 지난 세기 초 복음주의–그리스도교의 근본 원칙에 기초한다. 이 원칙은 점점 더 과격해졌다. 사실상 이 원칙은 “세상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였으며, 종교 윤리가 민주적인 과정 및 그 결과에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았다.

  “우파 복음주의” 또는 “신정(神政) 보수주의(teoconservatorismo)”2)로 이해할 수 있을 “복음주의적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1910년에서 1915년 무렵에 생겨났다. 당시 남부 캘리포니아 출신 백만장자 라이먼 스튜어트(Lyman Stewart)가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이라는 제목으로 책 열두 권을 출판하였다. 저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을 전개한 저자들의 사상을 요약하면서, 당시의 근대적 사고의 “위협”에 응답하였다. 스튜어트는 이런 방식으로 윤리, 사회, 집단, 개인의 측면에서 복음적 신앙을 예시하였다.  여러 정치 지도자들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조지 W. 부시(George W. Bush)같은 대통령들도 스튜어트 예찬자였다.

  스튜어트와 같은 저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회와 종교 집단은 미국을 하느님이 축복한 나라라고 여긴다. 그리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수용해서 자국의 경제성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적들이 이른바 “악마화”되었다는 낙인을 찍으면서 이런 생각은 계속 강화되었다.

  이런 사고의 추종자들은 미국적 생활양식을 의미하는 그들의 방식이 위협받는 세계에서 점차 공격 대상을 바꾼다. 처음에는 근대주의 정신을 비난했으나 점차 흑인 노예들의 권리, 히피 운동, 공산주의, 페미니즘 운동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민자들과 무슬림들에 이르기까지 시대마다 상대가 대체되었다. 이런 집단은 충돌과 갈등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사랑의 결정적이고 충만한 시선에 의해 인도되기보다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지켜내는 것에 관한 구약성경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이해하는 경향을 추구해왔다.

  그들이 하는 담화에는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선포되지 않는다. 자본과 이익 그리고 무기 판매 사이에 존재하는 은밀한 관계도 고려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전쟁 자체는 기드온과 다윗의 “만군의 하느님”이 정복하는 영웅적인 일과 유사한 것으로 미화된다. 따라서 이런 마니교적인 관점에서는 전쟁 무기들이 신학적인 근거로써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이런 목적으로 문맥과 상관없이 성경 구절을 이용하면서 성경적 토대를 찾는 목사들도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최남동부 지역에서 주로 백인들로 구성된 이런 종교 집단이 “피조물”과 갖는 관계이다. 이들은 환경 재난과 기후 변화로 생겨난 문제들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고백하는 “통치주의”는 창세기 창조 이야기의 문자적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이 읽는 창세기 이야기에서 인간은 피조물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며 피조물은 인간에게 굴복하고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이다.

  이런 신학적 비전 안에서 자연 재해, 극적인 기후 변화 및 지구 전체의 생태 위기는 자신들의 도그마를 점검하게 하는 경고로 인식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묵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장면들에 대한 그들의 비(非)-알레고리적인 개념과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확인해주는 표징이 된다.

  이들의 예언 공식은 미국적 그리스도교 가치를 위협하는 것과 싸우고,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최종 결산의 결과인 아마겟돈이라는 임박한 정의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 대화 등등의) 온갖 “절차”는 종말, 적과 싸우는 최후 전투의 긴박감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 신앙(faith) 공동체는 전투(fight) 공동체가 된다. 이와 유사한 독단적인 성경 독서는 양심을 마비시키거나 더욱 비인간적이고 극적인 상황, 곧 세상이 “언약의 땅”의 경계 밖에 사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끔 이끈다.

  루서스 존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 1916-2001)3) 목사는 이른바 “그리스도교 재건”(또는 “지배 신학”)의 아버지인데, 그는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의 신정적 관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러쉬두니의 이론은 국가정책위원회(Council for National Policy)와 같은 정치 기관과 네크워크 그리고 트럼프 정부의 현직 백악관 수석이자 전략가, 묵시적 지정학(una geopolitica apocalittica) 지지자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처럼, 그들의 노선에 맞는 전문가의 사고를 육성하는 교리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 교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유형의 표현에 담긴 실질적 의미는 정치, 의회, 법과 교육의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공 규범을 종교 윤리에 종속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러쉬두니의 이론은 실제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고무시키는 논리와 다르지 않은 논리로 국가를 성경에 종속시켜야한다는 신정주의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결국, 지하디스트(jihadisti)와 신(新) 십자군(neo-crociati)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허구의 공포는 그 원천이 서로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에스(IS)의 신정 정치 선동도 가능한 한 빨리 다가가야 할 세상 종말 숭배라는 동일한 방식에 기초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오사마 빈 라덴이 조지 부시를 “거대한 십자군”으로 인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번영 신학과 종교 자유의 수사학

  정치적 마니교와 관련된 다른 현상은 원래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 바탕을 둔 청교도 경건주의에서 “번영 신학”으로의 이행이다. 이 “번영 신학”은 강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가진 백만장자 목회자와 언론, 선교 단체가 제안한 것이다. 그들은 “번영의 복음”을 선포한다. 하느님은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며, 개인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선거 운동 메시지들과 정치 구호에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에 대한 언급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정치 지도자들이 성경을 손에 들고 승리를 자신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들 수 있다.4)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같은 미국 대통령들에게 영감을 준 핵심 인물은 현재 대통령 트럼프의 첫 번째 결혼식과 그 부모의 장례식을 주례한 바 있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 목사이다. 그는 미국에서 성공한 설교자이며 그가 쓴 『긍정적 사고의 힘』(1952)이라는 책은 수백 만 부 판매되었다. 이 책은 “당신이 무언가를 믿으면, 당신은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누가 나를 대적할까?’라는 말을 반복하면, 어떤 것도 당신을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속에 당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간직하면 당신은 성공할 것입니다.”와 같은 문구로 가득하다. 번영을 설파하는 수많은 텔레비전 설교자들이 구원이나 영원한 삶보다는 개인적인 성공에 더 중점을 두면서 마케팅과 전략 방향 그리고 설교를 뒤섞는다. 

  마니교와 번영 복음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세 번째 요소는 특정한 형태의 “종교의 자유” 수호 선언이다. 종교의 자유가 침해받는 것은 만연한 세속주의에 도사리고 있는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이 근본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자유로운 종교”라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세속 국가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인 도전으로 인식된다.

근본주의 에큐메니즘

  근본주의의 가치를 지렛대로 삼아, 정치 영역에 종교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뜻을 함께하며 결속된 복음적 근본주의자들과 통합주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놀라운 에큐메니즘이 이상한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때때로, 가톨릭 신자임을 공언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전통에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복음주의자들의 어조에 훨씬 더 가까운 형태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한다. 대규모 선거 유치 측면에서, 이 유권자들은 가치 투표자(Value voters, 도덕적 이슈를 중시하여 투표하고자 하는 유권자 ― 편집자 주)라고 불린다. 이들은 에큐메니즘을 수용하는데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 속한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다른 경쟁 종파들과는 구별된다. 이런 모임에서는 낙태, 동성간 결혼, 학교 종교교육 및 일반적으로 도덕적 가치 또는 가치와 관련된 것으로 간주하는 문제 등을 공통 주제로 삼는다. 복음주의자든지 통합주의 가톨릭 신자든지 모두 전통적인 에큐메니즘을 비난하면서도 신정 국가에 대한 향수를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결합시켜주는 갈등의 에큐메니즘을 촉진시킨다.

  이 이상한 에큐메니즘에서 더욱 위험한 시각은 외국인과 이슬람 혐오증이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정화를 이유로 사람들을 강제로 추방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에큐메니즘”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증오의 에큐메니즘”으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불관용은 순수주의의 천상 표지이며, 축소주의는 주석학적 방법, 극단적인 문자주의는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

  이런 개념들과, 다른 그리스도교 신앙 및 포괄, 평화, 만남, 교류의 노선을 함께하는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들과 더불어, 프란치스코 교종이 장려하는 에큐메니즘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서로 반대되는 에큐메니즘, 곧 신앙과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대립된 개념을 가진 상황에서 종교는 서로 타협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확산되는 통합적 근본주의의 가장 극적인 양상에 해당할 것이다. 바로 이런 단계에서 ‘장벽들’과 온갖 형태의 ‘종교 전쟁’에 반대하는 교종이 해야 할 임무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전쟁”의 유혹

  종교적인 요소는 정치적 요소와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인 권력과 현세적인 권력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서로를 노예화하는 것과 같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지리정치학의 명확한 특성은 싸워야 할 내부와 외부의 적을 순종시키거나 발견하기 위해 권력에 신학적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치 권력에 하느님을 투사하는, 간접적이고 ‘에큐메니즘적인’ 유혹을 피해야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종말과 ‘최후의 결전’5)을 준비하는 천년왕국 종파와 ‘통치주의’라는 내러티브 머신(la macchina narrative: 사회적인 상호 반응의 보이지 않는 네크워크 ― 역자 주)을 내부에서부터 치워버린다. 하느님의 근본적인 속성으로서 자비에 대한 강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문화, 정치, 제도와 교회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깨고자 한다. 영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때문에 정부나 군부와 연결될 수 없다. 종교들은 어떤 사람들은 저주받은 원수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친구로 간주할 수 없다. 종교는 지배 계급들을 안전하게 보장해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 영역 안에 자신의 법과 논리를 부과하려는 유혹은 바로 그럴싸한 거짓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역동성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성공적인 디지털 플랫폼인 처치 밀리턴트(Church Militant)의 여론 주도층이 사용하는 특정 수사학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표방하며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상징을 이용한다. 이런 도구화가 ‘진정한 그리스도교’라고 정의된다. 이 단체는 자신의 선호도를 표현하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와 콘스탄티누스, 힐러리 클린턴과 디오클레아누스 사이에 명확한 유비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선거는 ‘영적 전쟁’6)에 해당한다.

  이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접근은 특정 관객에게는 결정적으로 매력적이고 호소력 있게 보인다. 무엇보다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마센치오와의 대결에서 이겨 로마 제국 전체를 장악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를 하느님이 “in hoc signo vinces”라고 하시며 개입하신 결과로 여긴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치 밀리턴트는 트럼프의 승리가 미국인들의 기도 덕분일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바란다. 그들이 새로운 콘스탄티누스 트럼프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단체임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직접적인 메시지로 ‘신적인’ 선거의 특성들을 함축하면서 대통령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in hoc signo vinces7)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권력은 자신의 탐욕스러운 신앙 고백의 옷을 벗고, 그의 가슴막이, 그의 녹슨 갑옷의 힘을 빼내어야 한다. 근본주의자들의 신정 정치 체제는 지금 여기에 하느님의 왕국을 설립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권력에 하느님을 이상적으로 투사한다. 이 비전은 정복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정(神政) 구도는 종말론적이다. 즉,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의 역사를 정의와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방향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각이 생성하는 통합 과정은 그 누구에게도 ‘하느님 섭리의 인간’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외교술과 더불어 전개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교황청은 동맹이나 기존의 영향력이 있는 네트워크에 진입하지 않으면서 강대국들과 원만하고 직접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를 원한다. 이런 기조에서 교종은 갈등의 뿌리에 항상 권력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지나 반대를 선언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덕적 이유 또는 더 나쁘게는 영적인 이유로 교종의 “군사대오 형성”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성로마제국 및 이와 유사한 모든 정치 형태들과 기구들 그리고 ‘정당(政黨)’이라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 토대에 놓여 있는,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한다는 발상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런 발상에 따른다면, ‘선출된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복잡하게 얽힌 종교와 정치의 음모에 빠진 채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멀리 있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그리스도교적 뿌리는 민족 분리주의적 방식으로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와 새로운 이교도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뿌리’와 ‘정체성’의 개념이 지닌 내용이 같지 않다. 오만과 복수의 승리주의자적 인종주의는 그리스도교 정신과 반대된다. 교종은 5월 9일 프랑스 일간지 「라 크루아(La Croix)」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럽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에 물을 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발을 씻어준 것처럼 봉사의 정신 안에서 그것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을 위해 해야 하는 의무는 그런 봉사이다.” 교종은 계속 해서 말한다.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여는 그리스도가 발을 씻어준 것, 곧 생명의 봉사와 선물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기여가 아니다.”

두려움을 거슬러

  정치와 종교적 근본주의 사이의 거짓 동맹이라는 설득력 있는 유혹이 일으키는 것은 어떤 정서인가? 그것은 안정된 질서의 파탄과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지된 혼란 때문에 작동한다. 성공을 위한 정치 전략은 갈등의 어조를 고조시키고, 무질서를 과장하며, 온갖 현실주의를 넘어 혼란스런 시나리오를 투영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종교는 질서의 보증인이 되고, 어떤 정당은 그 필요성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종말에 대한 호소는 신이 원하거나 신과 결탁하는 권력을 정당화한다. 근본주의는 종교 체험의 산물이 아니라 종교 체험에 대한 빈약하고 기능적인 개념이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두려움의 내러티브에 대해 체계적으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불안과 불확실의 시기가 조장하는 음모를 거슬러 싸워야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용감하게도 이슬람을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축소하는 것을 피하면서 테러주의자들에게 어떤 신학적-정치적 정당화도 제공하지 않는다. 교종은 심지어 ‘성전(聖戰)’을 요구하고 원하는 사람들 또는 철조망을 구축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철조망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머리에 쓰고 있는 가시관이다.8)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105-113|4010 (15 lug/5-19 ago 2017)
** Antonio Spadaro S.I. – Marcelo Figueroa
1) 마니교는 3세기에 번영한 페르시아 종교로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대립시킨다. ― 역자 주
2) 이 말은 접두어 “Teo”(고대 그리스어 테오스 Theòs에서 파생된 말로 하느님을 의미)와 conservatorismo을 결합한 것으로 종교적 보수주의를 뜻한다. ― 역자 주
3) 칼빈주의 계열의 철학자요, 역사가, 그리고 신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스도교 재건 운동의 원조이자 현재 홈스쿨링 운동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1965년 비영리 기독교 교육기관인 칼케돈 재단을 창설한 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가치관 확장을 위해 연구, 교육, 출판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다. ― 역자 주
4)배넌은 윌리엄 스트라우스(William Strauss)와 네일 호웨(Neil Howe)가 그들의 책(The Fourth Turning: What Cycles of History Tell Us About America’s Next Rendezvous with Destiny)에서 이론화한 묵시문학적 비전을 믿는다. N. Howe, «Where did Steve Bannon get his worldview? From my book», in The Washington Post, 24 febbraio 2017도 참조. (트럼프가 당선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스티브 배넌은 2017년 8월 20일 해임되었다. ― 역자 주)
5) A. Aresu, «Pope Francis against the Apocalypse», in Macrogeo (www. macrogeo.global/analysis/pope-francis-against-the-apocalypse), 2017.6.9. 참조.
6) 참조. «Donald “Constantine” Trump? Could Heaven be intervening directly in the election?», in Church Militant (www.churchmilitant.com/video/episode/vortex-donald-constantine-trump).
7) 해석하면 ‘이 표지에 의하여 그대는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뜻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쓴 좌우명으로, 그가 전쟁에 임하기 전 이 말씀이 새겨진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 역자 주
8) 이 성찰을 심화하려면, D. J. Fares, «L’antropologia politica di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4 I 345-360; A. Spadaro, «La diplomazia di Francesco. La misericordia come processo politico», ivi 2016 I 209-226; D. J. Fares, «Papa Francesco e la politica», ivi 2016 I 373-385; J. L. Narvaja, «La crisi di ogni politica cristiana. Erich Przywara e l’“idea di Europa”», ivi 2016 I 437-448; Id., «Il significato della politica internazionale di Francesco», ivi 2017 III 8-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