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의 국제 정치의 의미

IL SIGNIFICATO DELLA POLITICA

INTERNAZIONALE DI FRANCESCO*

호세 루이스 나르바하 신부 (예수회)**

최원오 빈첸시오 교수 (대구가톨릭대학교) 옮김

교종의 정치 세계지도(地圖)를 그려내고 그 국제 정치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단순화를 피하면서 해석의 올바른 열쇠를 찾아야 한다.1) 교종의 생애와 문화적 뿌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갈 필요도 있다. 교종의 어젠다는 모든 경우에 열려 있고, 이러한 개방성이 교종 정치의 독특한 형식이라는 점을 늘 생각해야 한다.

교종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즉 복음 선포적 특성, 전체와 일치를 향한 방향성, 정치의 출발점인 식별,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념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정치

프란치스코의 《정치》는 복음 선포이다. 케리그마(kerygma)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뜻이다.2)프란치스코 교종에게 복음 선포는 정치와 어우러진다. 정치적 임무는 어떤 이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비롯한다.3)

이 케리그마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란 ‘도시’(polis)를 건설하는 기술이다. 이를테면 그 ‘내적’ 관계에서는 (내부 정치로써) 질서를 부여하고, 그와 동시에 ‘외적’ 관계에서는 (외부 정치로써)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다.4)

현대의 정치 개념은 고대의 정치 개념과 다르다. 오늘날 흔히 ‘가능성의 기술’로 이해되는 정치는 ‘정당(政黨)’의 기술, 당파(黨派)의 기술이 되어, 한 인간을 문제 삼기도 하고 한 정당이나 한 국가를 다루기도 한다. 그래서 정치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자기 편 사람들에게만 쓸모 있는 기술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교종의 전망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도구적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호르헤 베르골료는 1987년 논문에서 어떤 구체적 사건이 하느님 백성에게 메시지와 현실적 의미를 전해줄 때 ‘정치적 가치’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정치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5) 교종 프란치스코의 정치 메시지는 케리그마, 곧 이념이 아닌 복음 선포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교종의 정치 메시지는 특별한 이권을 앞세우는 일부 사람이나 정당뿐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백성에게 유효하다.

‘영적 겉치레’6)가 아닌 포괄 정치

바로 이 지점에서 교종 정치의 두 번째 특징이 드러난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전망에 따라 정치를 이야기할 때, 폴리스(polis)는 ‘세상 전체’라고 이해해야 한다. 교종에게 모든 정치는 언제나 ‘내부 정치(politica interna)’이다. 교종은 세상을 단일 도시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는 것이 단일 정치(politica unitaria)이다. 이러한 전망은 살아 있는 존재들의 긴장 자체를 유지하면서도,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삼는다.7)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공동선과 사회 평화”(217-237항)를 이루기 위하여 네 가지 원리, 즉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222-225항), “일치는 갈등을 이긴다”(226-230항), “실재는 관념보다 중요하다”(231-233항), 그리고 “전체는 부분보다 위대하다”(234-237항)를 제시한다.

먼저, “전체는 부분보다 위대하다”를 보자. 공동선과 도시(polis)의 평화는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특정 부분이 아니라 모든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 교종의 메시지는 포괄적이어서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향한다. 전체와 부분 사이의 긴장은 갈등을 일으키고, 한쪽 편을 들면 일치를 위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갈등을 분석해보면 정치적 행위의 의도가 명백해진다. 곧, 그것이 공동선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한편의 이익을 노리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교종은 모든 갈등은 더 높은 수준에서 해소되어야 하고, 일치, 곧 전체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는 부분보다 위대하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은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일치를 유지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늘 “실재는 관념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차이를 억제하면서, 추상적 관념에서 어떠한 해법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런 것은 영적 겉치레(gattopardismo)일 따름이다. 곧, 이상적 해법이랍시고 전문용어들을 끼워 맞춰 놓았을 뿐, 실존적 갈등의 근원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대안을 내놓을 따름이다.

이러한 역동성이 실현되려면 거기에 걸리는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선은 열망의 대상이 되어야지 강요될 수는 없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진리가 빛날 시간이 필요하고, 폭력에 기대지 않고서도 진리가 스스로 존중받게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과 도시 생활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수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 시간의 역동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성장, 대화, 성찰, 회심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원칙은 모두 함께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파괴적 관계를 빚어내게 된다. ‘쓰고 버리는’ 문화는 시간을 존중하지 않고, 나아갈 여지를 주지 않은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된 자들’이나 ‘깨끗한 자들’의 말장난[修辭]을 피해야 한다. 엘리트(élite) 계몽주의와 도덕주의 형식들을 강화하는 모든 정치적 말장난은 몇몇 지도자들이나 특수 집단과 뒤엉켜 농단을 부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찰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정치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부분들의 조화를 뒷받침하는 정치이며, 특수성을 파괴하지도 않지만 차이를 내세우지도 않는 정치이다. 그러한 차이에서 출발하여 대화하는 법과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법을 배우면서 더 높은 일치를 건설하는 것이다.

할리우드식 정치가 아닌 식별의 정치

정치는 대화와 식별을 통해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과정이다. 일치를 향한 길을 이해하고 찾아 나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정치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징표를 발견하게 해주는 역사와 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하느님과 대화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역사의 흐름을 인도하시는 분은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말하듯 ‘영들의 식별’이 필요하다. 영들의 식별은 관계와 행동을 규정한다. 이것이 교종 프란치스코 정치의 세 번째 특징이다.

세계 정치가 ‘내부 정치(politica interna)’라면, 외부 세력의 사리사욕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기술을 바오로의 다음 말씀에 따라 ‘외부 정치(politica esterna)’라고 묘사하는 것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입니다.”(에페 6,12)

도시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시민 사회의 일치를 거스르는 날카로운 공격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두 도성의 특성을 기억하는 것으로 넉넉하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만들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하는 자기 사랑[自己愛]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기까지 하는 하느님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8)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는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위협한다. 이기주의는 모든 이의 선을 거부하거나, 자기애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까지 한다. 정치는 투쟁이다. 그러나 몸으로 맞붙는 싸움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 맞서 벌이는 인간끼리의 싸움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정녕 식별을 무기로 삼아 벌이는 영적 전투라 하겠다.

몸은 전체로서 건강하거나 전체로서 아프다. 한 부분만 병들었거나 추스를 수 없을 뿐 나머지 몸은 아주 건강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착각이다. 일치를 지키는 길을 찾지 못한 채 한 부분만 득을 본다면,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나머지 부분은 전체의 한 부분이 되는 권리를 잃게 되고,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삶터마저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도시는 ‘세상의’ 적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 적들은 ‘깨끗함’이라는 권리와 이름을 지닌 집단에 어느 모로든 대비되는 ‘더러운 이들’을 만들어낸다. 이제 정치적 투쟁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깨끗한 이들과 더러운 이들의 싸움이 된다. 정치적 적수(敵手)는 온갖 문제의 소굴쯤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다른 이를 내치고 배제하는 당파성으로 이해되는 ‘부분의’ 정치이다. 그렇게 되면 부분들 사이의 대화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도시의 일치를 거스르는 이러한 위협은 매우 교묘한데,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식별을 통한 통찰력이 필수적이다.

고도의 정치 형식인 사랑

프란치스코 교종의 정치에 관한 네 번째 견해는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는 단순한 그 무엇을 일깨워준다. 곧,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요한 13,34 참조), 이 사랑은 섬김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요한 13,14 참조). 자신이 교종에 선출되기 나흘 전인 2013년 3월 9일 총회에서 베르골료 추기경은 미래의 교종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연설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함으로써 교회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변두리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며, ‘달콤하고도 위로를 주는 복음화의 기쁨’을 살아가는 풍요로운 어머니가 되도록 도와주는 사람.”

추기경으로서 제안했던 것을 지금 교종으로서 실현하고 있다. 인간관계는 그리스도와 맺는 이 인격적 관계에서 출발하여 빛나게 된다. 역사와 마음들의 주인이신 분과 나누는 지속적인 대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나누는 대화인 기도는 예언적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에 관하여 하느님께 말씀드리고, 하느님의 정치적이고 실재적인 구원 메시지를 인간들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문, 만남, 이동, 전화, 침묵은 언제나 인간 상황에 대한 관심의 열매이다. 교종은 숱한 얼굴들을 마음에 품고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오스트리아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히어(Friedrich Heer, 1916-1983)는 교회가 허약해지고 세상 안에서 의미를 잃은 까닭은 교회가 더 이상 사랑을 가르치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9) 이 성찰은 단순한 만큼이나 강렬하고도 명쾌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여기서 출발하여 자신의 몸짓과 권고와 침묵으로 사랑을 자기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았다. 사랑이신 분께서 살아계시고 사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이 정치적 메시지는 복음 선포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지닌 이 역동성은 혼인과 부부관계에서 시작한다.10)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의 방식은 부부의 친밀한 삶, 아내가 가정에서 수행하는 역할, 여성과 어머니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첫 세계주교대의원회에서 가정을 의제로 삼기를 원했다. 우리가 살펴본 프란치스코의 포괄적 ‘정치적’ 전망을 이 시노드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종은 끈기 있게 아래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더 폭넓은 일치는 언제나 거기서 시작하고 자라난다. 사랑 안에서 갈등을 극복하는 법을 가정에서 배운다(그렇지 않으면 이혼과 같은 가족 분열의 오류에 이르고 만다). 과정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도 가정에서 배운다(그렇지 않으면 ‘쓰고 버리는’ 사회,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외아들들’만의 사회를 만들게 된다).

이처럼 가정과 가족 관계는 도시 관계와 정치 기술의 특성을 결정한다. 그래서 가정에 대한 교종의 염려와 상처 입은 가정들에 교종의 책임의식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상처입고 낙인찍힌 가정들이 또다시 단죄 받지 않으면서 치유되고 회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개인과 가정의 회심 여정은 언제나 사회적 회심의 여정이고, 인내가 도시 곧 세상을 변화시키리라는 사실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정치’의 역설을 극복하기

평화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전체를 생각하고 존중하며, 다양성과 차이 안에서도 전체를 받아들이고 지키려한다. 이것은 식별에서 시작되며, 성령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심연을 살피시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친교를 이루신다(1코린 2,10 참조).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의 어젠다는 열려 있다.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활짝 열려 있다.

이러한 ‘포괄 정치(politica inclusiva)’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시고자 시간 속에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신 영원한 영(요한 4,24 참조)이신 ‘하느님의 정치’이기도 하다. 이것이 세상을 겁내지 않고 유혹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 정치이다. 유혹을 받은 이들과 걸려 넘어진 이들까지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들도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유혹 받고 걸려 넘어진 이들 안에서 하느님 몸소 일구시는 희망이 이 포괄성에서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열려 있는 여정 가운데 활력을 불어넣고 권고하고 동행해야 한다.

마치 저주 받은 자처럼 거룩한 도시의 성문 밖에서 돌아가신 예수님(히브 13,12 참조), 겉보기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당한 자처럼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모든 인간적 특권을 물리치는 ‘포괄 정치’가 바로 이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희망 안으로 새로운 도시를 초대하는 정치이다. 거기서 성숙한 신앙이 탄생할 수 있다. 이는 ‘어린 양’의 정치이다. 바로 거기서,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 죄를 몸소 짊어지시는 놀라운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 ‘선인들’을 다른 ‘악당들’, 더러운 놈들,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과 구별하는 할리우드식 윤리와는 전혀 다른 정치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종은 ‘그리스도교 정치’의 역설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교종은 특정 부분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를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명백히 세속적인 정치의 첫 번째 의미를 부정해버렸기 때문이다.11) 그리스도교 정치는 인간 도시 전체의 정치이다. 그러한 정치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 안에 깃들 수 있도록 인간적인 모든 것을 증진시킨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도록(묵시 21,5 참조) 인간의 삶을 증진시킨다.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정치는 사랑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다. 정치적이지 않은 사랑은 한낱 자기애(自己愛)일 따름이다.


*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I 16-28|4009 (1/15 luglio 2017)
** José Luis Narvaja S.I.
1) A. Spadaro, 《La diplomazia di Francesco. La misericordia come processo politico》, in Civ. Catt. 2016 I, 209-226 참조. 지난 2017년 5월 20일에 《교종 프란치스코의 지도地圖(L’atlante di papa Francesco)》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치빌타 카톨리카』 본관에서 열렸다. 언론인들과 전문가들의 학술발표회에 이어진 이 토론회는 안토니오 스파다로 편집장이 이끌었다(https://livestream.com/lacivitacattolica 참조).
2) H. Rahner, Teologia e kerygma, Brescia, Morcelliana, 1958, 18-23 참조.
3) D.J. Fares, 《L’antropologia politica di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4 I, 345-360; Id., 《Papa Francesco la politica》, ivi 2016 I, 373-385 참조.
4) E. Przywara, L’idea d’Europa. La crisi di ogni politica cristiana, Trapani, Il Pozzo di Giacobbe, 2013, 83; J.L. Narvaja, 《La crisi di ogni politica cristiana. Erich Przywara e la “idea di Europa”》, in Civ. Catt. 2016 I, 437-448 참조.
5) J. Bergoglio, «¿Una significación con significado político?», in Revista del V Centenario del descubrimiento y de la Evangelización de América, Buenos Aires, Universidad del Salvador, 1992, 47-49 참조.
6) 교종 프란치스코는 2016년 12월 22일 교황청 성탄 인사에서 개혁에 저항하는 세 가지 부류를 설명한 바 있다. 첫째는 선의와 대화에 뿌리를 둔 열린 저항, 둘째는 숨은 저항, 셋째는 악의적 저항이다. 말로는 변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숨은 저항은 공허한 말잔치인 ‘영적 겉치레’gattopardismo spirituale에서 비롯한다고 비판했는데, gattopardismo는 이탈리아 람페두사의 소설가 주세페 토마시(Giuseppe Tomasi, 1896-1957)의 작품 『표범(Gattopardo)』에서 따온 말이다. ― 역자 주
7) R. Guardini, L’opposizione polare. Saggio per una filosofia del concreto vivente, Brescia, Morcelliana, 1997 참조.
8)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De civitate Dei)』 14,28.
9) 히어의 말은 직설적이고 예언적이다: “우리는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사랑도, 사랑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빛나는 공간도 믿지 않고, 자유의 공간과 자유의 시간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겁먹은 이들과 위협하는 이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끔찍한 기업주들과 장사꾼들에게 우리는 이용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들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이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다”(F. Heer, Ehe in der Welt, Nürnberg, Glock und Lutz, 1955, 8 이하).
10) 같은 곳 15 참조.
11) J.L. Narvaja, 《La crisi di ogni politica cristiana. Erich Przywara e l’“idea di Europa”》, in Civ. Catt. 2016 I 437-44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