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과 콜롬비아 예수회원들의 사적인 만남

«LA GRAZIA NON È UNA IDEOLOGIA»

 Un incontro privato del Papa con alcuni gesuiti colombiani

20회를 맞이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도적 순방이 2017년 9월 6일에서 11일까지의 일정으로 콜롬비아에서 이루어졌다. 이 일정에는 9월 10일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Cartagena de Indias)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콜롬비아 북쪽의 카리브 해에 접해 있는 볼리바르 지역의 주도이다. 교종은 먼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광장에 들렀고, 이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유해를 모신 성지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삼종기도를 바친 후, 교종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성인의 유해를 모신 제대 앞에 두 명의 어린이들에게 받은 꽃다발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 침묵 가운데 기도하였다. 예수회에서 사목하는 아프리카계 신자 공동체의 대표 300명도 자리를 함께했다. 교종은 성지 담당 신부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후, 안뜰로 들어간 교종은 그곳에서 65명의 예수회 공동체 대표들과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박수와 더불어 노랫소리가 프란치스코 교종을 맞이하였다. 자리에 앉은 교종은 이 만남의 자리가 마련된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예수회를 가리킨 듯 교종은 장난스럽게 “저는 이렇게 여러분을 따로 만나는 게 좋아요.” 라고 말해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콜롬비아에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합니다.” 라며 교황은 말을 이어나갔다. “어제 저는 메델린에서 알바로 레스트레포(Álvaro Restrepo)를 만나 무척 기뻤습니다. 그 양반은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죠.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그는 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제가 있던 대주교관에 오곤 했답니다… 정말 착하고 좋은, 훌륭한 사람이에요. 자, 이제 저는 여러분들 차지입니다.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궁금하거나 알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저에게 지금 물어보세요. 그게 더 낫겠죠. 저에게 자극을, 영감을 주세요!” 즉시 누군가가 강복을 청하였다. 하지만 교종은 이렇게 응수했다. “끝에 가서, 제가 마침 강복을 드릴 때, 여러분 모두를 축복해 드리겠습니다.”

콜롬비아 예수회 관구장인 카를로스 에두아르도 코레아(Carlos Eduardo Correa) 신부가 말을 받았다. “친애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저희들은 무척 행복합니다. 콜롬비아 방문 기간 동안 교황님이 주신 메시지가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투신하는 저희들을 격려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나라에서 복음 정신에 맞갖은 형제적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저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저희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일들을 계속해 나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를 격려해 주시고 저희의 믿음과 희망을 굳세게 해 주신 데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교황님께서 하시는 일을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고마움을 표시했다.

관구장 다음으로, 교황청립 하베리아나 대학교(Pontificia Università Javeriana) 총장인 호르헤 움베르토 펠라에스(Jorge Humberto Peláez) 신부가 나와서 말했다. “교황 성하, 교황님의 방문과 메시지가 절망의 상태로 빠져든 콜롬비아에 놀라운 선물이 되었습니다. 교황님의 방문으로 우리는 단지 한 걸음이 아니라 한참을 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베리아나 대학교뿐만 아니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일하는 예수회원들이 하고 있는 모든 교육 사도직과 사목활동에 기대를 거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교황 성하.”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 이탈리아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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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이반 모레노(Jorge Iván Moreno) 신부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친애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저는 성 리타(St. Rita) 본당의 주임신부입니다. 저희 본당 신자들은 교황님을 사랑하고 교황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며칠 전 교황님께 편지를 썼답니다. 교황님께서 산프란시스코(San Fransisco)의 피에 델라 포파(Pie de la Popa)에 있는 공동체에 들리셨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카르타헤나는 처음이실 것 같은데, 우리가 ‘또 다른’ 카타르헤나라고 부르는 그 지역에서 교황님은 무엇을 보셨는지요?”

이 질문을 한번 같이 봅시다. 저에게 무척 중요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군요. 제가 주목한 것, 그러니까 저에게 가장 감동을 준 것은 바로 자발성(spontaneità)이었습니다. 그곳의 하느님 백성들은 자신들의 열렬한 기쁨을 마음껏 드러냈습니다. 학자들이라면 이를 두고 천 가지의 해석을 내놓겠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그저 열린 마음으로 환영하는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런 모습이 이미 만들어 놓은 구호를 마련하여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각기 다른 곳, 즉 제가 방문하는 지역이 지닌 고유한 문화가 온전히 자유롭게 하느님을 찬양하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흔치 않은 광경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겠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복음화에 대한 자유주의적이며 계몽주의적인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확실히, 그러한 관점을 처음으로 거부한 것은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선언한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가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한다면 하느님 백성(il popolo di Dio)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백성, 즉 사람들, 민중이라… 오늘날 민중(popolo)을 이야기할 때면 주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네들은 결국 포퓰리즘으로 귀결될 것이오” 라며 이론을 날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민중’이라는 것이 논리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인 체계에 따라 민중을 논하고자 하면, 결국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아니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틀림없이… 어느 경우라도 그것은 민중을 이데올로기라는 도식에 가두어버리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민중은 설화적인 범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직접 그들 속으로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동반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거룩한 백성이자 순례자인 교회는 그저 이데올로기가 아닌, 민중의 현실에 자신을 내어놓는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바로 살아있는 현실 말입니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틀림없이 많은 신학자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은총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은총이란 포용이며, 보다 더 큰 그 무엇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카르타헤나 같은 곳에 오면, 저는 그들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미신을 믿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바오로 6세 교종의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48항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거기에는 그런 사람들의 위험성과 더불어 미덕 또한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6세는 대중신심이라는 것이, 그렇죠, 미신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중신심이 제대로 방향을 맞추어 잘 조직된다면, 풍부한 가치를 지니게 되며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드러내 준다고 바오로 6세는 말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지닌 감각은 탁월합니다. 그들이 때로는 잘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그들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제가 결코 틀린 적이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훌륭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목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그들 뒤에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합니다. 갈 길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앞장 서기도 하고, 가는 길을 알기 위해서 중간에도 있어야 하며, 아무도 뒤처지지 않도록 보살피는 동시에 무리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도록 뒤에서 따라가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양떼들은 좋은 풀밭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목자는 끊임없이 이 세 위치를 옮겨 다녀야 합니다. 자, 이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하여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교황 성하. 저는 저희 관구에서 젊은이 사도직을 맡고 있는 로돌포 아벨로(Rodolfo Abello)라고 합니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냐시오 영성으로써 우리 젊은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자 할 때, 어떤 전망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약간은 지성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젊은이들을 영신수련의 영성에 빠져들게 하십시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들을 행동하도록, 움직이도록 만들라는 말입니다. 소그룹으로 나뉘어 성찰만을 하도록 하는 젊은이 사도직은 오늘날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평온하게 있는 젊은이들에게 사목적으로 접근한다면 전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든 하지 않든 간에, 그들이 일어나 행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신자라면, 그들을 이끄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신자가 아니라면 자신들의 삶 그 자체에서 필요를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말입니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고, 자원봉사나 노인을 돕거나 글자를 가르치는 일 등에서 젊은이들에게 적합한 모든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하십시오. 우리가 젊은이 한 명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그 친구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동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혜로 굳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 후에 우리의 머리를 써서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어제 메델린에서 저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크라쿠프에 갔을 때, 세계청년대회에서는 항상 그런 점심시간을 갖는데, 전 세계에서 온 열 다섯 명의 젊은이들과 대주교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젊은이들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대화가 펼쳐졌습니다. 한 대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는 무신론자들이 있는데, 이 친구들을 설득하려면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저는 그 젊은이에게서 전투하는 교회(ecclesial militancy)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저에게 분명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할 것이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정말로 가장 나중에 할 일입니다. 행동으로 시작하세요. 그 친구를 초대하여, 그대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면 그 친구가 그대에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주인공이라고 느끼게 할 방법들을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영신수련」에서 내적 움직임을 살피는 순간처럼, 그들 스스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을 변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어떤 내적 움직임을 알아차렸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그들이 그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조금씩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제가 관구장이 되었을 때 존경하는 푸를롱(Furlong) 신부님이 알려주신 것으로, 여러분을 찾아와 질문을 던지는 젊은이들과 앉아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과 끝도 없이 토론하려는 친구들을 다루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토론을 좋아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것을 꽤나 피곤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어떤 방법으로든 청년들과 함께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수고를 지속적으로 감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핵심 포인트는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회 연학수사인 헤페르손 차베라(Jefferson Chaverra)가 교종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황 성하, 먼저, 저희를 찾아주신 데 대해, 그리고 콜롬비아에 와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는, 실제 질문을 드리기 보다는 모든 아프리카계 콜롬비아인들, 즉 콜롬비아에 있는 모든 흑인들을 대신하여 한 가지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우리의 어려움을 돕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음에 교황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동시에, 교황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 보편교회 전체를 향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콜롬비아에 있는 저희 흑인들에게는 교회의 동반과 교회의 참여가 더욱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흑인으로서 겪는 아픔과 고통이 계속해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습니다. 교황 성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모자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수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주교님들과의 자리에서 저도 수사님이 언급한 이 현실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콜롬비아 예수회원에게는 근본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 클라베르(Pedro Claver)라는 인물이지요. 저는 하느님께서 이 분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클라베르 성인은 그저 허약한 소년이었고, 양성 과정에 있는 어린 예수회원일 뿐이었지만, 연로한 문지기 수사님과 무척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노인이 그의 열망을 키워주었죠. 우리 예수회에서 연로한 회원들이 앞장서고 젊은 회원들이 그들을 따른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요.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예언을 하리라(i vecchi sogneranno e i giovani profetizzeranno.)” 하는 요엘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일 테지요. 그래서 예언도 해야 하지만 노인들과의 대화도 필요합니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 본당의 주임사제인 호르헤 알베르토 카마초(Jorge Alberto Camacho) 신부가 교종에게 말했다. “성하,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황님께서 저희 성지에 선물을 주셨기에, 그곳에 있는 저희들도 약소한 선물로나마 보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의 시성 절차에 관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이분을 성인으로 만든 모든 것, 교황님의 행보처럼 저희를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클라베르 성인의 업적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카르타헤나의 저희 공동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툴리오 아리스티사발(Tulio Aristizábal) 신부님은 96세이신데,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이 신부님이 교황님께 책을 드리겠습니다.” 툴리오 아리스티사발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장상 신부님이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의 시성 절차를 담은 이 책을 교황님께 선물로 드리자고 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에 관한 이야기로, 30여명의 노예들이 선서하고 한 진술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책이 성인에 관해 쓰인 가장 뛰어난 전기입니다. 이것을 교황님께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르헤 알베르토 카마초 신부가 이어서 말했다. “성하, 저희가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은 저희가 지난 세 달 동안 추진한 프로그램으로 제목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녹색 길(Ruta Verde di papa Francisco)’입니다. 이것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대중적인 영역으로 이어줍니다. 이 프로그램의 상징으로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활용했던 소책자와 녹색 길 티셔츠를 선물로 드리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황 성하께 녹색 길 프로그램의 이 물품과 묘목, 저희가 도시에 심어온 토종 과실수를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빈센테 두란 카사스(Vicente Durán Casas) 신부가 일어나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교황님,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수들까지도 대표해서,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보편 교회 안에서 철학적 신학적 성찰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성찰과 사유가 실험실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 우리는 훌륭하고 뛰어난 토마스 아퀴나스 학파의 스콜라철학자들이 몰락하여 생명력이 거세된 설명서식의 스콜라주의로, 즉 궤변론적인 사목적 제안으로 변질된 관념들로 변질되었을 때 어떤 폐해가 생겼는지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희 세대에서는 그렇게 양성 받았죠… 형이상학적 연속성(metaphysical continuity)을 설명하려고 저 위대한 철학자 로사다1)가 ‘풍타 인플라타(puncta inflata)’를 말한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어떤 관념들은 그것들을 증명하자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됩니다. 로사다는 훌륭한 철학자였죠. 하지만 타락했고, 유명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당대에는 훌륭한 인물이긴 했었지만요…

그래서 실험실이 아니라, 삶 속에 있는, 현실과 대화하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실과 대화할 때, 철학자들은 서로 일치를 이루는 세 가지 초월적 가치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런 경우 명성을 얻게 되겠죠.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을 떠올려보십시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줄 아름다움과 선, 그리고 진리에 대하여 성찰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종은 진리란 만남(encounter)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더 이상 분류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길이라는 것이죠. 철학이 수학인 양 로그표를 써서 할 수는 없으므로 항상 현실과 대화해야 합니다. 사실 로그표는 이제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요.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의 순수성을 훼손시키고 더럽히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신학은 가장 현실적이었습니다. 즉, 현실에서 출발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에서, 하나의 비유에서,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서 시작하였고 그것들을 설명해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이 있는 신학을 하고자 하셨죠. 위대한 현실은 바로 주님입니다. 제가 즐겨 하는 말이 있는데, 훌륭한 신학자가 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헌신적이며 깨어있어야 하며 현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이 모든 것들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신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걸어다니는 덴칭거2)가 될 수는 있겠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교의를 다 알 지라도 신학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개요서나 매뉴얼은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느님이 누구시라고 어떻게 말하는가, 어떻게 성령과 그리스도의 상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필리피서 2장 7절로 시작해서요… 어떻게 이러한 신비들을 설명할 것인가, 계속해서 설명해낼 것인가, 은총 그 자체인 하느님과의 마주침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서는 거기에 나오는 은총의 신비 전체를 설명하기 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정의에 따라, 그리고 또한 사랑에 입각하여 드려야 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저는 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로부터 나오는 의견이기에 존중해야겠지만, 사실 잘못된 의견들입니다.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봐야 합니다. 제1장에서 시작하여, 제2장과 그 다음 장… 그러고 나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노드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도 읽어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기쁨」에는 가톨릭 윤리(morality)가 깔려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적어도 확실한 윤리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사랑의 기쁨」에 담긴 윤리가 토미스트, 즉 저 위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라는 점을 되풀이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신학자이자 오늘날 최고의, 가장 성숙한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인 쇤보른(Schönborn) 추기경과 이것을 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윤리가 순전히 궤변론적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여러분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이들이 위대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자산을 풍부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항상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곳을 나서기 전, 교종은 예수회원들을 축복하며 자신을 위해 잊지 말고 기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인사를 나눈 후, 교종은 수행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던 모나스테로 디 산토(Monastero di Santo)로 향했다.

*박경웅 신부(예수회) 옮김


1) 루이스 데 로사다(Luis de Losada, 1681-1748)는 스페인의 예수회원으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가 살라망카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때는 스콜라주의가 위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2) 하인리히 덴칭거(Heinrich Denzinger, 1819-1883)는 독일의 신학자이며, 초기 교회 교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교도권에서 가르치고 발표한 모든 교의 문헌을 집대성한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의 저자이다. 그의 사후에도 이 책의 개정 및 보완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