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향하여

젊은이, 신앙 그리고 성소 식별
VERSO IL XV SINODO DEI VESCOVI

Giovani, fede e discernimento vocazionale

죠반니 쿠치(예수회)
이정주 신부 옮김

2018년 10월에 있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의 예비 문서가 2017년 1월 13일에 공개되었다. 이 회의에서 다루어질 주제는 어렵고도 복합적이지만, 우리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성소를 좀 더 효과적으로 동반하기 위해 바라본 젊은이들 세대(‘젊은이’라는 단어는 대략 16세에서 29세 사이의 연령대를 의미한다.)의 신앙생활이다.1) 이 문서는 3장으로 이루어졌고, 마지막에 지역에 따라 달리 구성된 질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먼저 젊은이들의 상황을 일반화하여 말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인정한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차이가 너무나 크고, 연령대가 그 자체로 매우 유동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찾느냐?”

이 문서는 이 연구를 명확히 해 주는 하나의 질문이 신앙 여정의 바탕에 있음을 기억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께 자신들을 소개한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으로 매우 일반적인 질문이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이는 정화되고, 보완되고, 다듬어져야 할 질문이지만, 현재로서는 이 연구의 지침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요구가 예수님과의 만남 시작 부분에 자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사도는 그 사건에 연관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데, 주님과의 그 첫 번째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해 낸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대화를 정확하게 기억하여, 그 정확한 시간까지 제시할 정도이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이 일화가 지니는 맥락은 눈에 띄는 몇 가지 점들을 명백히 한다. 무엇보다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점이다. 그분께서 멈춰 서시고, 돌아서시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질문하시며, 그들이 의도를 명확히 밝히도록 초대하신다. 그들의 답변은 비록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이나 그들의 원의는 더 심화되어야 한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그 질문은 좀 더 명확한 형태로 복음서의 마지막에 반복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레나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무엇’에 대한 질문이, ‘누구’에 대한, 곧 어떤 사람에 대한 질문이 된다. 두 질문은 자신과 예수님의 인격을 인식해 나가는 여정에서 조화를 이룬다. 두 상황에서 모두 명백한 확실성은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어느 정도 어두움과 두려움, 혼란이 감지된다. 이 모든 것은 장애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가는 여정의 일부분이다.

다양한 수준의 불확실성

문서의 제1장에서는 예수님의 질문을 현실화하려 노력하면서, 젊은이의 상태에 대한 분석을 개괄적으로 제시한다. 서구권에서는 특히 젊은이의 상태를 특징지으면서 동시에 앞선 세대들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극단적인 불확실성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직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들 수 있다. 힘들게 학위를 받고 나서도 자신이 취득한 자격에 합당한 직업을 갖기는커녕, 때로는 아무런 직업조차 보장받지 못한다.2)
또한, 몇 가지 연구들은 – 이탈리아에서도 그렇지만, 또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선택권도 없고 전망도 없이 일종의 ‘림보’(저승)에 머무는 젊은이들/성인들에 대한 걱정이 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3) 이런 상황에 연관된 연령대는 계속 넓어지고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이제는 하나의 사회학적 범주로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세대’(la generazione né-né)로 분류될 정도이며, 이 문서에서는 이를 함축적인 약자 ‘NEET’4)로 표시한다(예비 문서, 제1장, 2 참조).
덧붙여서, 일반적인 불확실성의 문화적 경향이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영원’의 개념 속에 담아내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아울러 정신이 순간에만 집중되어, 종교적인 차원을 언제나 더욱 적대시한다. 이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지닌 적대감은 아니지만, 신성한 것에 대한 불쾌감과 혐오감이라는 측면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신성함은 이제는 지나가 버린 시대의 유물로 여겨 버리게 한다.
동시에, 대체적으로 혼돈스러운 풍토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여러 제안들의 강한 다문화적 경향과 다양성을 대면하면서 “무엇을 찾느냐?” 하신 예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더욱 어렵게 된다. 여기에서 안정성을 제공해줄 수 있고, 공동체적인 감각과 지지를 보장해 주는 ‘강한’ 소속감 욕구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경제적, 직업적, 문화적 불확실성과 함께, 가족의 불확실성 또한 그만큼 두드러진다. 가족의 위기가 가져오는 불확실성으로서, 가족은, 비록 개인적 사회적 삶과 성장을 위해 불가결한 기준으로 남아 있으나, 위에서 강조된 동일한 취약성과 분열의 표징들을 보여 준다. 그러한 방식으로, 젊은이들이 느끼는 고독함과 당혹감은 성인들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를 통해서도 강조된다. 이 위기는 일반적으로 가족관계 기록 서류에서 드러나는 것만 아니라, 그들이 돌보아야 하는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모와 가정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때로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기성세대는 종종 젊은이들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나약함을 강조하며 그들의 요구를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부모와 성인 교육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실수를 알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종종 그들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집중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 두 가지 가장 공통된 반응은 포기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젊은이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무관심하거나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은 그 자녀들이 삶을 직면할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하게 하고, 내재된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하거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든다”(예비 문서, 제1장).
이런 상황은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현재 세상에서 제때에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성숙함, 선택의 안정성, 권위, 제도적인 소속감 등의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정렬시키는 어른들의 의도에 대한 불신감을 표현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젊은이 안에 혼자 버리진 것 같은 느낌을 자라게 하고, 특히 어떠한 공헌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커지게 하고, 자존감과 자기 삶의 가치에 문제 에 있어서도 걱정스러운 결과도 함께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불확실성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결합되어, 결코 도전하지 않도록 조언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과 자원들을 그렇게 사장시켜 버린다.
이러한 점들이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 유럽의 특수한 상황에 할애된 질문들에서, 최종적으로 강조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능한 모든 위험 상황을 대비한 안전 보장에 대한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 맥락에서, 온전하게 자신을 바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이런 자기 봉헌은 각자의 자유와 책임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문과 반론에 대한 대책을 세우거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보장받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 문서를 소개하는 서한에서, 위험과 도전의 차원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필수 불가결한 것인지를 언급하시며,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셨던 첫 말씀들을 인용하신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 말씀은 지금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는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밖으로 나아가 미지의 미래를 향하여 떠날 것을 권유하십니다. 그 미래는 실현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몸소 여러분을 동행하여 주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령의 숨결로써 여러분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권유합니다.”5)
이미 다른 기회를 통해 교황께서는 충만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삶의 질적 도약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쓸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셨다. 사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두려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긴 안목으로 선택하고, 교육적이고 애정 어린 도전들에 직면하기 위한 마음의 열정을 가질 위대함과 용기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위험을 무릅써 보십시오! 위험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이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실수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오, 주님! 만일 제자리에 남아 있으면 더 큰 실수를 할 것입니다.”6)

성소와 식별

문서의 제2장에서는 젊은이들이 신앙의 경험과 자신의 성소 선택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목 여정을 서술한다. 이는 하나의 절대적인 우선권이고, 교회에게는 분명한 의무이다. 교회의 직무는 이 땅의 모든 남녀를 동반하는 것이고, 이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창조주, 구원자의 모상이요 닮은꼴로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가진 위대함과 가치를 인식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 조건들이 명확히 제시되었다. 먼저, 신앙의 경험은 기쁨에 대한 부르심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는 불행하게도 사목 안에서 전혀 견고해지지 못한 측면이다. 이 기쁨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특징짓는 아름다움과 함께 하지 못하고, 빈번하게 주의주의(主意主義)와 과거에 죄에 대한 걱정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키는 데에만 열정을 쏟았던 설교에 억눌려 왔다. 마르티니 추기경의 사목 방문 때에, 한 젊은이가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많은 측면에서 배부르고, 무기력하고, 실망한 우리 서양의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사랑의 어리석음과 의인의 기쁨이 부족합니다. […] 말들과 회의들은 넘쳐나지만, 열정과 책임은 줄어들고 있습니다.”7)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으로(요한 2,1-11 참조),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풍부한 상징적 가치가 있고, 모두 생명과 연결된 수많은 의미들을 갖는다. 축제, 나눔, 친교, 타인에 대한 관심, 사랑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충만한 표현으로서의 혼인 등이다. 신랑의 존재는, 신랑이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는 이들의 삶에서, 기쁨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포도주는 하느님의 기쁨, 감격, 넘쳐흐르는 생명력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러니까 포도주는 슬픔, 매일의 평범한 삶, 반복, 지루함에 반대되는 것이다.”8)
그뿐만 아니라, 이 문서는 자신의 진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제기되는 어려움(혼란, 무질서한 집착들, 두려움들) 앞에서 명확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제시하는데, 이 도움이 바로 식별이다.9)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51-52항)을 인용하면서, 이를 특징짓는 세 개의 동사를 강조하는데, ‘인식하다’, ‘해석하다’, ‘선택하다’이다.
1) 인식하다. 인식은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의 세계, 특히 애정의 세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인데, 이는 평가와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분별하는 데 큰 어려움들을 겪고 있다. 이는 단지 부족한 종교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삶 안의 의미 있는 사건들 앞에서,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여기에 이름을 부여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깨에 고상한 문화적,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애정적 문맹 상태라는 비참한 지경에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는 가족 치료의 연구 센터들이 제시하는 사례들 가운데에서 점점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는 현상이다.10)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가치, 양성 그리고 삶의 변화를 실현할 능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음의 성찰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자신의 가치 체계에 따라 살려는 매일의 투쟁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의 삶의 근본적 선택에 일치하는 선택들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단계의 교육이나 삶의 경험, 또는 가치의 선포조차도 개인의 정체성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신뢰는 특정한 사람이 살아 온 현실로부터 온다.”11)
정서 교육은 올바른 식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고, 문서가 강력히 추천하는 측면이다. 사상과 추론의 측면에서 보면, 많은 가능성들을 제공해 주는데, 이들은 얼핏 보기에는 같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정의 차원과 의미 제공 차원에서 매우 다른 울림들을 제공해 주는 것들이다. “‘인식하기’는 이러한 풍성한 감정을 밝혀내고, 이러한 감정들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또한 경험한 것과 깊은 내면의 일치 또는 불일치가 남기는 ‘맛’을 알아차리도록 요구한다. […] ‘인식하기’의 단계에서는 침묵의 노고를 기울이기를 피하지 않으면서 경청하는 능력과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예비 문서, 제2장, 2).
이 모든 것은 신앙의 체험에서 심오한 울림들을 갖는다.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고전적인 저자가 로욜라의 이냐시오이다. 그는 첫 근본적인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다양한 내적 움직임들과 사상들이 그의 정신과 마음에 갖는 영향을 알아차린다. 이것을 읽어 냄으로써 솟아오르는 정서적인 반향들을 들으면서, 이상한 비대칭적 특성들을 포착하게 된다. 곧 세상의 생각들 쉽게 동화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입에 쓴맛을 남긴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들은 어떤 어려움들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내적인 투쟁을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들어가면, 비록 어렵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단식, 보속, 금욕적 생활)과 관련된다 하더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심오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12)

2) 해석하다. 식별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특성은 일어난 일들을 읽는 능력이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이다. 같은 관심과 같은 지성을 가졌다고 해도 선택적이다. 우리에게 드러난 것은 결코 동일한 평면 위에 놓이지 않고, 어느 정도 가치들의 위계를 구성하게 한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위계는 정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 안에서 흥미, 조절, 편견 등이 떠오르기에 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원하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된다. 우리에게 드러난 것들을 비판적인 방법으로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평가의 기준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인식하는 기준들이고 또한 수정되어야 할 기준들인데, 사물들의 심오함과 진실은 그들의 외관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선택하다. 마지막에는 선택의 영역이 있다. 여기에는 의지와 행동할 능력뿐만 아니라 비록 자극적이고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개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경향이나 사상들과 맞설 수 있는 능력도 개입된다. 외형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식별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결정이 갖는 선(善)은 그 다음 시기에 확답을 얻는다고 문서는 지적한다. “시간은 어떤 결정의 유효성을 확인하는 데 근본적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장이 가르치듯이, 모든 성소는 두려워하면서 맡았던 열정적으로 맡았던 간에 사명을 향해 나아간다”(예비 문서, 제2장, 3).
오직 하느님만이 시간의 주인이시며, 그분만이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는 지속적인 평화를 주실 수 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속이실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들의 의미 추구에 충만함을 부여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서, 신뢰심을 가지고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거나 익명의 존재가 아니십니다.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평온함과 평화의 원천이십니다. 우리 구원의 바위이시고,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이는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함정에 숨어 있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시고, 계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아버지이시지만, 우리가 늘 그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선포하셨던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친구들이나 친구라고 믿었던 많은 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킬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13)
복음은 존재의 근본적인 역설을 기억한다. 주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참조). 우리는 자기실현 기치를 지니고 실존과 인격의 관점의 대척점들에 서 있다.

사목적인 몇 가지 지침

문서의 제3장에서는, 젊은이들의 여정과 신앙 추구에서 그들을 도와줄 구체적인 가능성들에 대해서 다룬다.
이 분야에서도 세 개의 동사가 제시되는데, ‘나가다’, ‘보다’, ‘부르다’이다. 이 동사들은 회개의 방식과 성령께서 일하시는 데 대한 순종의 방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성령께서는 각각의 시대와 나이와 조건의 남녀들에게 늘 새롭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말씀할 줄 아신다. 이 동사들은 구체적인 사람들, 곧 젊은이들과 특히 우리 시대에 소중하고 필수적인 이들인 양성자들과 교육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부르심은 일상생활 안에서 닥쳐오는 만남으로부터 태어난다. 이러한 일화들을 단순하게 나누는 것이 벌써 성령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한 보배로운 행보이다. 문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성소 사목자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의미심장한 구절을 떠올린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성소와 사제성소에 관한 주요 책임자들이며, 이 일을 관료적 사무실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제들, 곧 본당 신부, 고해 사제, 영성 지도자의 도움으로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여 인생이 바뀐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나가서,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고,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14)

들음이라는 기초에서

이 문서는 가정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때와 유사하게 질문지로 마무리되는데, 이 질문지는 그것이 전달되는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달리 작성되었다. 답변들은 이런 방식으로 의안집의 작성을 위한 자료의 출발점을 제공할 것이다.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이미 열매를 맺은 시도들의 풍성함을 나누는 것은, 창의성을 위한 자극이 될 뿐만 아니라, 전통이 발자국을 남긴 그 길 위를 계속 걸어가라는 초대이기도 한다.
중세 사람들은 “선은 자신을 널리 펼친다.”(Bonum est diffusivum sui.)고 말했다. 선의 고유한 특징은 무상으로 특정한 목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존재 이유인 것처럼 자신을 알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소통한다. 협력은 창조성을 북돋우고, 서로를 부유하게 하며, 기대하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보여 준다. 빵을 많게 하신 일화가 상기시키는 것처럼, 진짜 기적은 나눔이다. 이것이 신앙 경험의 공동체적 차원이 갖는 필수적이고 보석 같은 면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이다.
주님께서 하신 첫 질문(“무엇을 찾느냐?”)은 서로 다른 동기들 – 원의, 불안, 일반적인 불만, 의미 추구 –에서 나올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질문 안에 현존하는 자신과 주님에 대한 인식의 여정에서 그 출발점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문서와 함께 보내신 서한에서, 직접 젊은이들을 향하여,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충만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가 다시 울려 퍼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소인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그들을 초대하신다. “비록 소음과 혼돈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러한 부르심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울려 여러분이 온전한 기쁨에 마음을 열게 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경험 있는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아서라도, 하느님께서 여러분 삶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을 찾는 식별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 여정이 불확실하여 여러분이 넘어지게 되어도 자비로 넘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팔을 뻗어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15)


1) Lorenzo Baldisseri 추기경은 이 문서를 소개하면서, 성소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고, 사랑의 기쁨 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위해 선물로 내어 주는 데서 오는 충만함 안에서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폭넓은 가능성 전체를 아우르는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젊은이들에 대한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 예비 문서를 소개하는 보도 자료, 2017년 1월 13일자).
2) F. Occhetta, «Italia sfiduciata, ma laboriosa»(“신뢰는 잃고 일만 하는 이탈리아”), in Civ. Catt. 2017 I 150 s 참조.
3) G. Cucci, La crisi dell’adulto. La sindrome di Peter Pan(『성인의 위기. 피터 팬 증후군』), Assisi (Pg), Cittadella, 2012, 15-21 참조.
4)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곧 학업에도, 노동에도, 직업 교육에도 참여하지 않는 젊은이들.
5) 프란치스코 교황, 젊은이들에 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예비 문서 발표에 즈음하여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서한, 2017년 1월 13일.
6) 프란치스코 교황, 나자렛의 집(Villa Nazareth) 방문 때에 한 훈화, 2016년 1월 18일.
7) C. M. Martini, La gioia del Vangelo(『복음의 기쁨』), Casale Monferrato (Al), Piemme, 1988, 58. 역사적인 단계에서는 다음 책의 분석을 참조할 수 있다. J. Delumeau, Il peccato e la paura. L’ idea di colpa in Occidente dal XIII al XVIII secolo(『죄와 두려움. 13세기부터 18세기의 서방에서 죄의 사상』), Bologna, il Mulino, 1987; 그리고 B. Sesboüé, Gesù Cristo l’unico mediatore. Saggio sulla redenzione e la salvezza(『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해방과 구원에 대한 현자』), vol. 1: Problematica e rilettura attuale(『현재의 문제제기와 다시 읽기』),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1991.
8) La gioia del Vangelo(『복음의 기쁨』), cit., 35.
9) 이를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는 P. Schiavone, Il discernimento. Teoria e prassi(『식별. 이론과 실습』), Milano, Paoline, 2009; D. Fares, «Aiuti per crescere nella capacità di discernere»(“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도움”), in Civ. Catt. 2017 I 377-389 참조.
10) 다음의 책들에서 토론된 경우들 참조: F. M. Dattilio (ed.), Case Studies in Couple and Family Therapy. Systemic and Cognitive Perspectives(부부와 가족 치료의 사례 연구들. 조직적이고 인식적인 전망들), New York – London, The Guilford Press, 1998; A. S. Gurman (ed.), Clinical Handbook of Couple Therapy(부부 치료의 의료 지침서), New York, The Guilford Press, 2008; S. Minuchin – M. P. Nichols – W. Lee, Famiglia: un’avventura da condividere. Valutazione familiare e terapia sistemica(가족: 공유할 모험. 가족적 평가와 조직적 치료), Torino, Bollati Boringhieri, 2009.
11) B. Dolphin – M. P. Garvin – C. O’Dwyer, «La leadership nella vita religiosa oggi»(“오늘날 종교 생활에서의 리더십”), in A. Manenti – S. Guarinelli – H. Zollner (eds), Persona e formazione. Riflessioni per la pratica educativa e psicoterapeutica(인격과 형성. 교육적이고 심리 치료적 실천을 위한 성찰), Bologna, Edb, 2007, 392.
12) “그러나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세상의 것들을 생각하면 큰 즐거움을 느꼈지만, 피곤해서 그 생각들을 그만두면 공허하고 실망스러운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맨발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 채식만 하는 것, 성인들이 습관적으로 행한 것으로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금욕 생활들을 실천하는 것 등은, 단지 그가 그것들을 멈추는 동안에만 그를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포기한 다음에도 그가 만족하게 했고, 기쁨에 충만하게 했다”(Ignazio di Loyola, s., Autobiografia(자서전), Milano, Tea, 1992, n. 8).
13) 프란치스코 교황, Angelus(삼종 기도), 2017년 2월 26일.
14)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청 성직자성이 주최한 성소 사목을 위한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하신 연설, 2016년 10월 21일.
15) 프란치스코 교황, 젊은이들에 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예비 문서 발표에 즈음하여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