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함은 너의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 켄 로치 감독

«IO, DANIEL BLAKE», UN FILM DI KEN LOACH

비르질리오 판투치 S.J.
최현순 박사(서강대학교) 옮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영국 영화감독 켄 로치가 자신의 작품 인생 50주년에 만든 것으로 2016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한결같은 진보주의 작품 활동 때문에] 일명 “빨간 켄”이라고 불리는 감독은 사회현실 속에 온전히 빠져들어 영국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의와 그들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를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발 밑에 깔린 존엄성

영화의 제목(I, Daniel Blake)이기도 한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 댄(데이브 존스 분 Dave Johns)이라 불리는 쉰 아홉 살의 이 뉴캐슬 남성은 평생을 목수로 살아왔는데, 일생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마당에서 심정지를 겪은 댄이 의사를 찾아갔더니 더 이상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진단을 받고 국가는 그에게 질병수당을 지급하기로 결정한다.

댄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산 고독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후 혼자 살았는데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다. 댄은 공적 보조에 대한 새로운 금융제약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느 날 부당이익을 챙기는 이들을 줄이기 위해 정부보조금을 재조사하는 일을 맡은 사무소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조사원이 건강에 대해 일반적인 질문을 하자 그런 식의 질문의 요지에 익숙한 댄은 으레 단순하게 대답한다. [실업급여 신청자격을 판단하기 위한 5분 남짓의 이른바 ‘의료 전문’ 조사원 면담은 ‘양팔을 올려 혼자 모자를 쓸 수 있는지’, ‘50m 이상 혼자 걸을 수 있는지’ 등 댄의 심장상태와 상관없는 사항들만 묻는다.] 하지만 댄은 심장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지 괄약근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괄약근은 아주 잘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조사원들은 심각하게 반응한다. 지원수당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야 댄은 상황을 깨닫는다. 그는 해명을 듣고 싶다면 연락하라고 적혀 있는 콜센터에 전화를 걸지만, 답변을 듣기 위해 거의 두 시간이나 전화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굴욕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카프카적으로 부조리한 관료주의 덫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될지, 항소를 할 수 있을지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댄은 실업자 명부에 등록하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19세기 논리

댄은 기다리는 동안 두 아이 데이시(Briana Shann 분)와 딜런(Dylan McKiernan 분)을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Hayley Squires 분)를 도와주게 되는데 그녀 또한 댄 못지않게 굴욕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케이티에게 있어 런던의 비위생적인 여관방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런던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무명의 도시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댄이 겪는 미로같은 우여곡절 중에서 현실적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드러나는데, 정보시스템은 권력이 디지털 기술에 문외한인 노동자들을 저만치 따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진정한 대중 억압 도구로 작용한다. 웹도 모르고 마우스도 사용할 줄 모르는 댄에게 [컴퓨터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씁쓸한 유머가 스며든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비할 데 없는 채플린의 걸작 “모던 타임즈”(1936)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반어적 풍자에 간간히 빠져들기도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코미디가 아니다. 영화는 불합리하다 못해 종종 정도를 넘어선 국가의 [실업급여] 지원체계를 비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아픔에 질식된 절규가, 억제되면서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나타나는데, 그 분노는 무력감을 야기하는 만연한 무관심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폭발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한 이류배우의 탁월한 연기로 해석된 댄은 일종의 완고한 진심으로 영국 노동자계급의 전형적인 사례를 구체화시킨다. 정직하고 이타적인 한 남자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댄은 전화 자동 응답기처럼 감정 없는 어조로 자신을 대하는 이들과 충돌한다.

케이티와 아이들은 댄에게서 이상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이들은 디킨스적인 요소들을 영화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보다 감성적인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굶주림이 가장 사나운 맹수조차 길들일 수 있다는 19세기 논리로 돌아가는 것을 엄중하고 강력하게 고발한다.

불의가 사라질 때까지 불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한 켄 로치는 얼마 전 80세를 맞이했는데, 아직 영화촬영을 그만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약자들 편에 섰던 그는 이번에는 음식, 난방, 집과 같이 기본적 필수품마저 결핍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케이티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려 하지만 말 그대로 배고픔에 시달린다. 그녀는 댄과 함께 일명 ‘푸드 뱅크’에 들어가는데 그 곳은 자원봉사자가 운영하는 일종의 슈퍼마켓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과 그 밖의 일반 필수품을 나누어주는 곳이다. 케이티는 껍질 벗긴 토마토 통조림을 따서 손으로 먹는데 그러다 순간 자신이 한 행동에 수치심을 느껴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린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복지’라고 부른다.

댄은 자신에게 남아있은 마지막, 곧 자신의 존엄성을 빼앗으려고 하는 세력과 맞서 싸운다. 로치는 이렇게 말한다. “불행히도 유럽국가들은 사람들의 이익이 아니라 거대자본의 이익을 지키며, 점점 더 노동자들을 취약하고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일자리를 잃었다고? 그건 당신 탓이야!’ 그러나 진실은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비정규직 임시고용이 이제 규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회사에게는 이득이지만, 노동자 계급에게는 재앙이다.”

감독은 계속해서 말한다. “댄과 케이티는 나와 영화 각본 작가인 내 친구 폴 래버티(Paul Laverty)가 만났던 사람들을 종합한 인물이다. 그들은 새로운 빈곤계층, 실업자들, [집값 상승으로] 더 이상 런던같은 도시에 살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 끝없이 사회적 경제적 밑바닥으로 내던져지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면서 래버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에 가장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던 원천은 켄의 전화였는데, 그는 나에게 자신이 성장했던 넌이튼(Nuneaton)에 함께 가자고 요청했다. 켄은 노숙인들을 돌보는 한 자선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로 훌륭한 사회운동가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몇몇 청년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여행 중에 우리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무료급식소(푸드뱅크)들은 아주 귀중한 정보원이 되어 주었다. 점점 더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할수록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음식과 난방기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린 경우로, 우리는 또한 푸드뱅크 이용자들의 상당수가 실업자가 아니라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하지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시간 계약자들” (일명 ‘대기 노동자’)은 많은 경우 엉망진창이 되는데, 확실한 형태로 인생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검은 노동, 즉 음성적 노동에 방치되거나 [정부 복지] 지원체계의 복잡함 속에서 헤매게 된다.”

“댄과 케이티라는 인물은 우리가 만났던 어떤 특정 사람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 인물들은 푸드뱅크의 이야기들 혹은 고용사무소의 파일들을 그대로 복사해 영화 각본에 직접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이 두 인물은 우리와 아주 친밀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존엄성이 충만한 수백 명의 남녀 사람들과 아이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똑똑하고 능력 있던 사람들, 그 얼굴들이 떠오른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복잡한 시스템과 새로운 기술에 힘들어하는 나이든 사람들이다. 수많은 고용사무소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은 이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자신들의 상사들이 가로막았는데,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사람들이 자기네 사무소를 덜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리고 너무도 빨리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이 있었다. 몇몇 기억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요약하고자 했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른바 ‘복지’(웰빙)이라고 잘못 불려진 시스템의 덫에 걸려 오히려 연옥의 모든 우여곡절들을 겪고 있다.”

“물론,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 조금 이상한 문신을 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는 체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증오를 퍼뜨리고 무관심을 부추기는 개념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들을 향해 이 얘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