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은 보편 성소에 참여하는 것

LA VITA RELIGIOSA: PARTECIPAZIONE A UNA CHIAMATA UNIVERSALE

도날드 말다리 신부(예수회)
심애정 젬마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옮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신학자들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인 삶의 가치를 경시하지 않으면서, 가톨릭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수도생활 또는 축성 봉헌 생활”이라 알려진 삶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수도자(religioso)”와 “축성 봉헌 생활자(consacrato)”란 용어는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 특정 생활양식을 한 그룹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양식이 가진 수도적 특성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의문들을 제기한다.
수도생활 신학의 발전은 “수도자(religioso)”와 “종교(religione 경건함)”에 대한 현대적 개념의 발전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현실의 내재적 차원을 초월적 차원과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위험을 내포한다. 이 경우, 내재적 차원을 ‘불경스러운’ 또는 ‘세속적인’ 것으로, 초월적 차원은 ‘성별된’ 것으로 정의하면서 종교를 후자의 차원과만 연결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religione 경건함)”와 “수도자(religioso)”란 용어가 유용할 수 있으려면, 궁극의 초월적 진리라고 확신하는 인간 믿음의 기능 안에서 발전하는 내면적 문화를 포함해야 한다.

종교에 대한 후기 계몽주의 개념 비판

  브렌트 농브리(Brent Nongbri)는 종교 개념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 종교개혁으로 인해 사람들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사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계몽주의는 그 관계를 “세속 문화”1라 불리는 것과 구분했다. 18세기 후에 일반신자들은 종교를 문화의 하위에 있는 선택적이고 사적인 범주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서, 자신들이 영성적이지만 종교적이진 않다는 주장이 퍼져 나갔다. 종교적이진 않지만 영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영성을 자신과 하느님의 사적인 관계라고 해석하며, 이 관계가 자신들의 세속 일상의 삶에 개입하거나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프랑스 혁명 후 세속성(laicità)의 발전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2014년에 프랑스 총리실이 발간한 문서는 이러한 관점을 시사한다. 이 문서는 세속화로 나타났던, ‘근대성’이라 불리는 것 안에서 세속성이 결실을 맺었다고 설명한다. 즉, 18세기 말 계몽주의, 각 개인에게 인정된 자율성, 양심의 자유, 지식의 진보와 사회 진보와 더불어 세속성이 형성되었다.”2
거의 같은 시기에 신학은 수도승 생활과 관련해서, 요한계 문헌이 해석했던 ‘세상’이란 용어에 따라, ‘세상에서 물러남(fuga mundi)’을, 더 이상 단순히 죄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신학은 세속화된 세상을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경멸하고, 거룩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도자가 아닌 사람들은 교구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현세적 차원에 관심을 기울였다. 수도생활은 분명히 완덕의 삶이었고 비수도생활에는 명확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
계몽주의 이후 서양 문화에서 세속 종교란 범주들이 생겨났고 그 결과 (복수의) 종교들은 신앙이 인간 삶 전체에 미치는 역할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 범주들은 신앙 행위로부터 영향을 받는 문화의 한 요소만 분리시킬 것을 요구한다. 후기 계몽주의 사조는 이를 ‘성스러움(il sacro)’이라 부르지만 ‘초월 진리(verità trascendente)’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사실 인간 문화의 모든 측면은 특정초월 진리에 대한 믿음에 따라 형성된다.
계몽주의 이후에 파악된 “종교성”과 “종교들”의 범주는, 후기 계몽주의 우주론이 “세속성(ilsecolare)”이라고 일컫는 신앙의 범주를 통합시키지 못하지만 ‘현실의 내재적 차원’이라고 더 나은 정의를 내렸다. 이런 범주의 사용은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 활동을 진정한 성취라고 인식하는 것을 별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런 분리는 무엇이 이른바 “비종교적 혹은 세속적인 활동”을 일으키고 부추기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티모티 피츠제럴드(Timothy Fitzgerald),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미셸 데플랑(Michel Despland), 윌리엄 카바노프(William Cavanaugh), 브렌트 농브리(Brent Nongbri), 다니엘 두뷔송(Daniel Dubuisson)3 등 수많은 종교 관련 학자들은 근대적 ‘종교’ 개념이 유용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서양 문화가 (복수의) ‘종교들’이란 개념에 이어 ‘종교’란 범주를 만들어냈고,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포함된 이들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큰 맥락에서 볼 때, 이 개념들은 다음과 같이 발전했다. (1) 장엄한 예식으로 표현되고 한 사람 삶의 일상 활동에 영감을 주는 깊은 내적 태도로서의 종교에서부터, (2) 한 개인의 문화 안에 있는 수많은 범주들 중 하나로 그 사람 ‘외부의 무엇인가’로써의 종교로, (3) 사람들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그룹의 지성적인 확신과 예식을 구성하는 ‘신념체계’(-ism)로서, 복수의 ‘종교들’에 대한 구분에 이르기까지 발전했다.
티모티 피츠제럴드는 ‘종교’란 단어가 너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연구할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구체적인 것을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4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종교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으며, 그보다는 사람들이 ‘영적인 통치구조’(regimispirituali)에 자신들을 내맡겨 이른바 ‘인간적 기법’(antropotecniche)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5
브렌트 농브리는 ‘경건성’(religioso)과 ‘세속성’(secolare)’의 범주에 대한 근대적인 이해로의 발전은 최근의 현상임을 보여준다. 그는 계몽주의 이전의 텍스트를 읽는 이들이 ‘종교’란 단어에 후기 계몽주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그릇된 해석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는 완전히 다른 뜻을 지닌 외국어 표현에 종종 ‘종교’란 단어를 쓰는 번역물에도 해당된다.6 예를 들어, 가장 많이 통용되는 영어 번역인 개정 표준판(Revised Standard Version) 성경은 제 2경전에만 나오는 네 가지 상이한 그리스어 단어들을 모두 ‘종교(religione)’란 단어로 열두 번 번역한다. 이 중 어떤 것도 후기 계몽주의가 의미하는 종교를 뜻하지 않는다.
번역자들은 또한 순전히 후기 계몽주의 용어인 서구의 ‘종교(religione)’란 단어를 그에 상응하는 비서구의 용어로 번역하느라 고생한다. 비서구 언어들에는 서구의 “종교(religione)”란 단어에 해당하는 토착 용어가 없다. 예를 들어 인도의 헌법은 영어로 종교(religion)로 번역되는 다르마(dharma)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믿음, 정의, 일상의 의무 [본성, 본체, 법, 계율, 부처의 가르침]’을 내포하는 ‘다르마’(dharma)란 용어가 지닌 풍요로운 의미를 포착하기 어렵다.
농브리의 지적은 계몽주의 우주론의 렌즈로 바라본 비계몽주의 문화 해석과 상충된다. 그래서 피렌체 대성당의 1300년대 양식 종탑 외벽에 직물나 약초 등의 작품으로 묘사된 벽돌들은 용어의 현대적 의미에서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장면의 묘사만큼 종교성을 지닌다.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암시적이고 매우 표현력이 풍부한 그의 전형적인 언어로 이렇게 말했다. “이 지상에서 볼 줄 아는 이에게는 그 어느 것도 세속적이지 않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 안에서 완성의 여정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력에 끌리도록 선택된 입자를 간파해낼 줄 아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성스럽다.”7 그의 우주론은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를 향해 주저 없이 말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Gaudium spes, GS)에 반영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 83항, 주53)에서 테이야르 신부의 공헌을 언급한다.

이 세계 여정의 목적은 하느님의 충만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충만은 모든 보편적 성숙의 중심이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스미스(Smith)와 두뷔송(Dubuisson)은 종교(religione)와 종교적인 것(religioso 수도자)의 범주를 폐기하자고 제안한다. 이 용어들에 호의적인 학자들마저도 이 용어들이 모호하다는 것을 인정한다.9 카바노프(Cavanaugh)와 데플랑(Despland), 두뷔송(Dubuisson), 농브리(Nongbri), 슬로터다이크(Sloterdijk), 스미스(Smith), 테야르(Teilhard)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종교(religione)란 개념은 사실상 인간 문화 전체와 관련돼 있으며, 그 총체성은 개개인의 근본적인 고뇌이자 궁극의 관심사인 하느님께 대한 긴장감에 의해 인도된다.”

수도생활을 정의하는 어려움

공의회는 수도 생활을 비수도 생활과 대립되는 완덕의 삶으로 묘사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결정을 했고, ‘거룩함으로의 보편적인 부르심’을 확언하고자 노력했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LG)은 보편적 성화 성소에 할애된 장 뒤에 의도적으로 축성 봉헌된 수도생활에 관한 장을 배치했다. 그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똑같은 충만함으로 성화의 소명을 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공의회와 후속 신학은 보편적 성화 성소의 맥락 안에서 축성 봉헌된 수도생활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노력했다.10 공의회의 난관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중 수도생활에 관한 장에서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성사에서 죄에 죽고 하느님께 축성 봉헌되는 것이 근본적임을 인정한다. 그 다음 어떤 사람들은 “세례 은총의 더욱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복음적 권고들을 서원한다”고 가르친다. 복음적 권고를 서원함으로써 신자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더욱 깊이 봉헌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견
고하고 더욱 확고한 유대를 통하여, 신부인 교회와 불가분의 유대로 결합되신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낼수록 이 봉헌은 그만큼 더 완전해질 것이다. (LG 44).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공의회 교령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 PC)은 이 개념들을 거듭 강조한다. 이 교령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서원함으로써 하느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자신들의 의향을 선언한다. 그들은 세례의 축성에 깊이 뿌리를 내려 이를 더욱 충만하게 표현하는 어떤 특별한 축성”(PC 5)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온 삶을 바친다. 수도자들은 오로지 필요한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루카 10,42; 마태 19,21 참조).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사도 권고 ‘봉헌 생활’(Vita consecrata)에서 이 개념을 다시 언급하는데, 축성 봉헌 생활은 “객관적 탁월성”(VC 18, 32)을 지니고 있다고 확인한다.
수도생활을 특별한 봉헌의 성격으로 간주하여 묘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입문의 가치에 관한 의문을 일으킨다. “수도생활이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기 위한 하나의 방식 혹은 더 긴밀한 봉헌으로 복음적 철저함을 사는 것이라고 묘사한다면 무엇보다 더 낫다는 것인가?”(다른 생활양식은 더 못하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수도회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과 대비시킨다면 이런 비교는 그리스도교 입문의 가치를 축소하는 것처럼 보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일부는 다른 이들보다 더 충만한 성화로 부르심을 받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문헌들에서 이루어진 비교가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면 선익을 얻는데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면, 공의회 문헌들은 권고의 실천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선사하는 가치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헌장 ‘인류의 빛’(LG)은 43항에서 복음적 권고가 특별히 각 사람 안에서 대신덕(virtustheologica)이 성장하도록 이바지하는데 효과적임을 인정한다. 그런데 수도생활 교령 ‘완전한 사랑’이 명시한 바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복음 권고 서원을 통해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자발적인 의향을 선언한다.” 이것은 앞서 해석한 공의회의 사상을 그런대로 잘(verosimilmente) 표현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질문이 남는다. 그러면 수도생활을 하지 않는 이에게는 ?
복음 권고를 서원하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봉헌이라는 주장은 특정 삶의 양식, 곧 특정 영성에서 영감을 받고 또 때로는 특정한 활동들로 이루어진 봉헌의 삶을 현실에서 실현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12
수도생활 고유의 요소들을 그 상징적 가치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은 앞서 기술했던 특별한 축성 봉헌에 근거한 시도들과 똑같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이 제시하는 상징들 중에는 종말론적 표징과 예언적 표징, 교회 자체의 상징,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의 혼인이라는 상징이 있다.14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11월 남자 수도회 총원장들에게 한 권고에서 이 딜레마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깨우십시오!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증인들이 되십시오.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전망, 곧 이 지상에서 육화된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아니, 저는 ‘철저하게’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적 철저함은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됩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곧 예언자적인 방식으로 주님을 따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이 증거입니다. 수도자들은 세상을 깨울 수 있는 남성들과 여성들이어야 합니다.15
교황은 복음적 철저함이 수도생활을 돋보이게 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수도자란 특별한 방식으로 예언자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교황이 특징지은 것은 ‘특출함’보다는 ‘설명적”으로 더 잘 정의한 것이다. 이는 도로시 데이와 마르틴 루터 킹처럼, 수도자는 아니지만 교황의 마음 가까이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16  교황의 권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얘기이다. 사실, 수도자들의 삶을 포함해 모든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통적으로 축성 봉헌된 수도생활에 부여되었던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수도회들은 종말론적 표징과 교회의 상징으로서 봉사하지만, 수도회와 평신도의 상징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수도회에 우선적으로 이들 가치를 부여하는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 않다. 결정적으로 성경은 혼인성사가 메시아적인 종말론적 만찬이란 상징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상징함으로써 적어도 수도생활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과 속의 구분에서 자유로운 가톨릭의 이해는 공의회의 딜레마를 해결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입문성사로 한 분이자 삼위이신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들 문화의 전형을 형성하는 데에 철저히 매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돌보는 것에 있어 하느님과 협력하고자 노력한다. 그 돌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자의 육화를 통해 처음부터 이미 실현된 구원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노력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 생활양식과 특정 영성에서 영감을 받은 성소를 택하고 취한다.

영성의 역할

본인의 신앙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로 수도생활에서 비롯된 열정으로 자기 고유의 삶을 사는 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고 각자의 계획 안에서 자신을 인도하는 특별한 영성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요셉 수드브락(Josef Sudbrack)에 의하면, 영성이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생한 힘이다.17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생생한 힘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공관복음서들 중 가장 심화된 성령론을 담고 있는 루카 복음에서 성령은 공동체로 하여금 선교 활동 안에서 모든 인류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선물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성령을 받는 이들은 이미 새로 태어났고, 성령을 거부하는 이들은 이미 단죄 받았다. 바오로 서간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사람에게 성령의 새 생명을 선사하여(1코린 6,17 참조) 자신을 실현하도록 이끌어준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자체가 pneumatikos 즉 “영성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1코린 2,13-15는 영성적이지 않은 사람(psychikos)과 영성적인 사람(pneumatikos)을 대조시킨다. 바오로에게 영성적인 사람(pneumatikos)은 성령과 그 은사로 가득 채워져 그 선물로 살아간다. 현세적 인간(psychikos)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성령을 남용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어떻게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시선으로 영성을 증진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지닌 카리스마적인(은사를 받은) 인물들이 나타났다. 미셸 듀푸이(Michel Dupuy)는 그리스도교에 등장했던 다양한 영성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슬 방울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수많은색깔들을 발산하듯이 하느님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들은 하느님 선물의 풍성함을 세련되게 만든다.18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영성 생활은 우리를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이19 4세기에 시작된 수행 전통, 곧 그리스도교 남녀 수도승들이 스스로를 “경건한 이들”(religious)이라 부른 것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특정 영성으로 구현된 ‘거룩한 치유’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설명한다. 베네딕도회의 표어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이러한 개념의본보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도생활은 진정 성령의 영감을 받은 수많은 은사 활동들(카리스마 운동들)이다. 이 은사 활동들은 다양한 생활 양식들을 선사하여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피조물을 보살핀다.

이기주의를 능가하는 수덕주의 (금욕수행)

카리스마적 인물들이 선사한 영성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 중에 금욕 수행이 있다. 금욕주의는 분별 있는 긍정적인 솔선수범이다. 금욕 수행은 성령과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 은총은 사람들이 현세적 인간(psychikoi)에서 영성적인 인간(pneumatikoi)으로 변모하게해준다.
금욕 수행의 목적은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모든 ‘무질서한 경향’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영혼의 준비와 태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금욕 수행은 인간 존재가 은총을 받도록 준비시켜 준다. 즉 본인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함으로써, 피조물을 돌보는 일에서 하느님과 협력하여 구원을 향하도록 해준다. 이냐시오가 말하는 “무질서한 경향”은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을 방해하는 이기주의를 뜻한다.
각 수도회 고유의 영성에 따라, 특별히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여러 수도회 전통 속에 녹아있는 금욕주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한 지혜를 표현한다. 모든 이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성령의 힘을 이끌고 발전시키는 영성을 갖고 있다. 모든 이는 자신의 영성을 증진
시키도록 돕는 수단으로 금욕 수행에 정진한다.
그리스도교에서 금욕주의는 사람이 세상과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갖도록 돕는데 이바지한다.20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을 통해 허영심에서 벗어나 회심하도록 촉진한다.21 금욕 수행과 고해성사,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강화된 그리스도교 입문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사람이 이기주의에 죽고 성령께서 주신 은총의 삶으로 새로 태어남을 실현한다.
[교회] 전승은 대신덕(virtù teologali)을 통해 자비와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지지하는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과정에서 복음적 권고(consigli evangelici)가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순명은 은총의 선물인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진하는 수단이다. 청빈은 희망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촉진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정결은 애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구체화되도록 촉진하는 수단이다. 복음적 권고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만족적 독립과 교만, 이기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에 맞서 싸우도록 도와준다.22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무질서한 경향”이라 부르는 것은, 고생물학자이자 해부학자, 생물학자이면서 신학에도 흥미를 가진 대릴 돔닝(Daryl Domning)의 말대로, “원초적 이기주의(egoismooriginario)”라고 부를 수 있다.23 진화의 작용 원리인 자연선택 과정은 이기적인 행위를 발현시키는 그룹을 선호한다. 돔닝의 주장에 따르면, 신적 계시와 더불어 인간의 양심은 이기주의가 삼위일체의 무상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류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예정되었다. 루카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완전함과 자비의 관계로 표현했다면, 마태오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고 표현했다.
자비는 완전함을 촉진한다. 이 완전함은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을 포함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기적인 행동을 촉진하기 위해 발전시킨 일련의 정교한 기술 덕분에 자연 선택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든 인간 존재는 자기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기주의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이것은 바오로가 말했듯이 이타적인 사랑으로 이끄는 신적 부르심과 이기적이 되려 하는 진화적 본능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바오로의 외침에 동참하게 된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4). 돔닝도 바오로와 같은 대답을 한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생활양식과 특별한 일을 채택하는 것은 ‘거룩해지라’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부르심에 모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응답하는 방식이다. 수도생활은 이 부르심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다.


1 참조: B. Nongbri, Before Religion. A History of a Modern Concep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3.
2 La laicité aujourd’hui. Note d’orientation, in www.gouvernement.fr
3 참조: W. Cantwell Smith, 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63; M. Despland,
La religion en Occident. Évolution des idées et du vécu, Montréal, Le Cerf et Fides, 1979; D. Dubuisson, L’
Occident et la religion. Mythes, science et idéologie, Bruxelles, Éditions Complexe, 1998; T. Fitzgerald, «A
Critique of Religion as a Cross-Cultural Category», in Method and Theory in the Study of Religion 9 (1997) 91-
110; Id., The Ideology of Religious Studi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Id., Discourse on Civility
and Barbarity. A Critical History of Religion and Related Categories, ivi, 2007; B. Nongbri, Before Religion…,
cit.
4 참조: T. Fitzgerald, «A Critique of Religion as a Cross-Cultural Category», cit.; Id., The Ideology of Religious
Studies, cit.; Id., Discourse on Civility and Barbarity…, cit.
5 P. Sloterdijk, Devi cambiare la tua vita, Milano, Raffaello Cortina, 2010.
6 참조: B. Nongbri, Before Religion…, cit., 3.
7 P. Teilhard de Chardin, L’ ambiente divino, Brescia, Queriniana, 1994, 41. Cfr A. Spadaro, «Il sacerdote e la
“maturazione universale”. Pierre Teilhard de Chardin su Eucaristia e cosmo», in Civ. Catt. 2016 III 226-238.
9 Cfr D. Dubuisson, Lle consideet la religion…, cit., 83 ss. Per le considerazioni di studiosi che sostengono cheal Category», cit, citgoria valida e utile, cfr tudiosi che sostengono che al Category», cit, cit Construction of Religion tudiosi che sostengono che al Category», cit, cit Klausner, ons Religion Universal? Problems of Definitionn Universal? he sostengono che al Category», cit, cit(1962) 25-35; F. Sch62) 25 Fiorenza, orenza, 5; F.Schonn Universal? he sostengono che al Category 83 ss. Per le considerazioni di studiosi che sostengon
10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31. 평신도의 본성과 사명: “여기에서는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평신도들에게는 세속적 성격이 고유하고 독특하다. 성품의 구성원들은 어떤 때에 세속에 살며 세속 직업까지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특수한 성소 때문에 주로 직무상 거룩한 교역에 임명되고, 수도자들은 참행복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 신분으로 빛나는 뛰어난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다. 평신도들의 임무는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세속 안에서, 곧 각각의 온갖 세상 직무와 일 가운데에서, 마치 그들의 삶이 짜이는 것 같은 일상의 가정생활과 사회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서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자기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며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하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자신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든 현세 사물을 조명하고 관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일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발전하여 창조주와 구세주께 찬미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12 참조: A. de Bonhome, «Estne consecratio per consilia nova consecratio?», in Periodica de re morali, canonica, liturgica 67 (1978) 373-390.
14 참조: J.-M. R. Tillard, Davanti a Dio e per il mondo, Alba (Cn), Paoline, 1974; L. Boff, Testimoni di Dio nel
cuore del mondo, Cinisello Balsamo (Mi), San Paolo, 1985; A. Sicari, «Inspiration and Genesis of the Evangelical “Counsels”», in Communio 9 (1982) 51-66; J. M. Lozano, Vita religiosa, parabola evangelica. Una reinterpretazione della vita religiosa, Milano, Àncora, 1994; S. Decloux, Inattualità della vita religiosa, Roma, Rogate, 1995.
15 Francesco, «Svegliate il mondo! Colloquio di Papa Francesco con i Superiori Generali», in Civ. Catt. 2014 I
5.
16 참조: 상동, «Discorso all’Assemblea plenaria del Congresso degli Stati Uniti d’America», 24 settembre 2015: 참조: www.vatican.va
17 참조: J. Sudbrack, «Spiritualità», in K. Rahner (ed.), Sacramentum mundi, vol. VIII, Brescia, Morcelliana, 1977, coll. 1-22.
18 M. Dupuy, «Spiritualité», in Dictionnaire de spiritualité ascétique et mystique, vol. 14, Parigi, Beauchesne,
1990, col. 1171.
19 상동, col. 1173.
20 참조: R. Darling Young, «Recent Interpretations of Early Christian Asceticism», in Thomist 54 (1990) 123-140.
21 이 kenosis(비움)은, 열역학 제2법칙을 유추해서 말하자면 에너지 기울기를 생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법칙은 생명을 포함한 모든 활동들을 높은 준위에서 낮은 준위의 시스템으로 흐르는 에너지 이동의 결과로 설명한다. 두 시스템 사이의 에너지의 양의 차이는 에너지의 기울기이다. 물리적 데이터는 우주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더 많은 응축 시스템에서 더 적은 응축 시스템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열역학 제2법칙은 결국 모든 에너지가 전체 우주에 고르게 분산되어 생명을 포함한 모든 운동 변화가 멈추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물리학에서는 무한한 에너지 원천의 가능성을 고려할 수 없지만, 신학에서는 성령을 원천으로 삼을 수 있다. 깨달음의 우주론과는 달리, 실재의 내재적인 차원과 초월적인 차원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인정하는 가톨릭의 통합적 우주론은 둘 사이의 시너지 효과(협력작용)를 인식한다.
22 참조: D. C. Maldari, «Asceticism at the Service of Grace», in Louvain Studies 28 (2003) 32-47. “금욕수행은 수도회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초월과 활력의 에너지, 곧 성령으로 가득 찬 변화의 생성을 촉진한다. 은총은 성령을 받아 영성적으로 사는 이들을 돕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한 방식으로 일상의 현존을 사는 것이다.”
23 참조: D. P. Domning – M. K. Hellwig, Original Selfishness: Original Sin and Evil in the Light of Evolution, Burlington, Ashgate,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