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토’ 같은 교종

‘작은 돌의 철학’과 ‘건전한 광기’
IL PAPA COME IL «MATTO»
La «filosofia del sassolino» e la «sana pazzia»[i]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 이탈리아어판 편집장)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 수도회, 대전 가톨릭 대학교) 옮김

부활절 아침 신문 기자실 게시판은 아주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교종께서는 강론을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절 메시지와 더불어 ‘Urbi et Orbi’ 축복이 미사 후에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몇 마디 말씀을 하기로 하셨다. 교종께서는 팔짱을 낀 채 여러 가지 생각과 말에 대해 묵상하면서 천천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신자들로 가득 찬 광장 앞에서 하는 강론이라기보다 일대일로 대면해서 하는 개인적인 고해성사와 비슷하게 이루어졌다.

“땅의 작은 돌들인 우리들은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된 이 지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함께 수많은 불행 속에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더 이상 장벽은 없습니다. 지평선이 펼쳐져 있고, 생명과 기쁨이 있습니다. 양면성을 지닌 십자가가 여기 있습니다. 앞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닫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대, 작은 돌이여, 당신은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죄의 사악함이 내던져버린 바로 이 돌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는 수많은 비극 앞에서 뭐라 말합니까? 이는 단순합니다. 버려진 돌이 정말 그렇게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그 돌을 믿고 그 돌에 붙어 있는 작은 돌들은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으며 교회는 이러한 의미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교종 성하의 말씀이다.

교종: “그대, 작은 돌이여, 당신은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종은 찢어지고 상처 입은 세상에 대해 전하며 큰 음성으로 묵상했다. 그분은 이후 “Urbi et Orbi” 축복에서 상처 받은 나라들을 열거하면서 이에 대해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 강론에서 당신께서 전화상으로 대화를 나눈 어느 청년의 이야기에 머무셨다: “어제 저는 중병에 걸린 어느 청년(교양 있는 엔지니어)에게 전화를 해서 신앙의 징표를 전해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에게도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밖에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제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하지만 하느님은 성자께 물어보셨고, 성자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걸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대는 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준비가 되었습니까?’ 십자가가 앞서 나가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내려 옵니다.”

교종 성하께서는 이런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그 청년의 편에 서서 그의 입장이 되어 주었다. 그가 쉬운 대답을 제시하진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징표’를 제공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은 비극 앞에서 예수님이 엠마우스의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그렇게 했다: 그는 원칙적 설명으로 도피하지 않고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의 경험을 받아들였다. 그의 동반자가 되어 주고 그와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다.

교종 성하는 자신의 믿음과 더불어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멈춰 서십시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비참한 일들과 세상의 드라마 앞에서 우리에게 멈춰서라고 부탁한다. 왜냐하면 버려진 돌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죽음의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무덤을 넘어서는 그 무엇, 의미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란 말이 간직한 두 가지 의미를 대면하게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무덤의 치워진 돌, 내려버진 돌, 그 돌은 돌아가신 예수님으로서 이제 생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교종 성하는 팔짱을 끼고 말씀하는 가운데 방금 사용한 비유에 의해 눈에 보이듯 이해된 것처럼 자연스레 땅에 있는 작은 돌 같은 우리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 돌들은 비록 고통과 불행 가운데 있어도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대, 작은 돌이여, 당신은 삶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적인 순결함과 더불어 그렇게 말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이신 바로 그 돌, 그 바위에 달라 붙어있는 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의 바위에 달라 붙어있는 작은 돌들인 우리 앞에는 ‘장벽’이 아닌 ‘지평선’이 펼쳐져 있다.

마토: “이 돌은 뭔가를 위해 필요하다”

“- 저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를 믿기 어렵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뭔가를 위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보십시오. 예컨대, 저기 있는 돌을 집어보세요.

– 어떤 돌이요?

– 이 돌 말입니다… 어떤 것이든… 이것 역시 뭔가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작은 돌도 그렇습니다.

– 어디에 필요한가요?

– 어디에 필요한가 하면…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만일 그걸 알았다면, 제가 누가 되는지 아세요?

– 누구요?

–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겠죠: 그분은 당신이 언제 태어나는지, 또 언제 죽을지 다 알고 계십니다. 도대체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이 돌이 어디에 필요한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 뭔가를 위해 필요할 겁니다. 만일 이게 무익하다면, 모든 것 역시 무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별들마저 그럴 겁니다. 당신 또한 그렇습니다. 당신도 그 아둔한 머리와 함께 뭔가를 위해 소용될 겁니다.”

이는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길’(La strada)에서 ‘마토’(Matto)로 분장한 배우 리차드 베이스하트가 (잊을 수 없는 줄리에타 마시나가 연기한) 젤소미나에게 한 말이다.[ii]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잠파노라는 방랑자는 지방의 여러 장터에서 불을 먹는 묘기를 보여주는 건장한 남자였다. 어느 날 그는 장터에서 10,000리라를 주고 젤소미나를 사게 된다. 온순한 그녀는 가난하고 못 생긴데다 무식했다. 이 불쌍한 여인은 그를 위해 하녀, 요리사, 연인이 되어 주었다. 섬세하고 신비스러움이 감도는 젤소미나와 폭력과 잔인함의 상징인 잠파노는 더할 나위 없이 대조되어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삶 속에 광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마토라는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이 곡예사는 교묘하게 잠파노를 자극하는 가운데 아이러니하면서도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그를 놀려댔다. 반면, 젤소미나에게는 삶의 가치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이에 화가 난 잠파노는 우발적으로 마토의 머리를 세게 후려친 후 그가 풀밭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둔다. 결국 젤소미나는 미쳐버리고 잠파노는 그런 그녀를 자신의 운명에 맡긴 채 떠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곳으로 돌아온 잠파노는 우연한 기회에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술주정뱅이였던 그는 해변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음과 고독 그리고 우주의 거대함을 깨우치며 울기 시작했다. 지독하기 그지없던 잠파노는 해변에서 자연과 생명의 신비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의 울음은 마치 새로운 탄생, 부활을 알리는 듯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좋아한 영화, ‘길’

프란치스코 교종은 펠리니의 영화를 잘 알고 있다. 2013년 9월호 「치빌타 카톨리카」에 개제된 인터뷰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펠리니의 영화 ‘길’은 아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 영화와 저를 동일시하곤 하는데, 그 영화에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언급이 암묵적으로 담겨 있습니다.”[iii]

그러나 교종은 특히 마토가 고백한 ‘작은 돌의 철학’이라 부르는 철학을 좋아한다. 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2013년 11월 교종 성하가 피노 솔라나스(Pino Solanas)라는 아르헨티나 영화감독을 만나 대화하는 중에 펠리니의 이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종은 분명 마토의 입장이 되어, 음울한 트럼펫 연주자인 마토가 젤소미나를 잠파노의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했던 ‘작은 돌’에 대한 담화를 신자들에게 했다. 펠리니 영화가 간직한 진정한 의미는 – 정의된 바와 같이 – 마토가 젤소미나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밤의 설교’에 있다: 어떤 생물이든 아주 분명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어떠한 고통도 헛되지 않다. 만일 작은 돌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iv]

‘광대’ 너머에 있는 마토

그러므로 교종 프란치스코는 마토처럼 하고자 했다. 더욱이 그는 2013년 5월 16일 마르타의 집에서 한 강론에서 하느님에 대한 광기(狂氣)에 대해 언급했다. “사도적 열정은 광기와 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광기, 건전한 광기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이런 건강한 광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기를 구현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의 사람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또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1코린 4,10).[v]

‘하느님께 미친 자’는 그 자체로 생명의 의미와 고통의 땅이 지닌 의미를 간직한 메시지를 수호하는 자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라는 돌 곁에 있는 ‘작은 돌’이 바로 메시지가 된다. ‘돌’과 ‘작은 돌’ 사이에는 연대감과 상호 귀속 그리고 깊은 동반이 존재한다. 이 ‘돌’은 버려진 돌이자 바위로서 우리에게 의미를 계시하고 우리를 살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을 없애주진 못한다.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왜 이렇듯 많은 불행, 병고, 인신매매, 전쟁, 파괴, 훼손, 복수, 증오가 생겨납니까? 주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또한 교종은 “슬픔, 패배의 슬픔으로 닫힌 마음”을 비극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젤소미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젠 사는 게 피곤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교종은 젤소미나의 목소리와 그의 고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해답을 전하는 설교가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탄식하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 단순히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슬픈 리타니를 읊조리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 각자는 매일의 문제와 우리 또는 우리 친척 가운데 그 누가 겪었을 병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전쟁과 인간적인 비참함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그러나 교종은 바로 이 슬픈 리타니 앞에서 “단순하게 겸손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게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장담합니다.” 부활에 대한 선포가 조난의 한 복판에서 조난자에 의해 선사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완벽하게 마토의 입장이 되어 구현한 그리스도교적인 역설이다.

죄렌 키에르케고르에서부터 이미 신학은 신학자가 광대와 같이 여겨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정말로 불이 난 것을 보며 “불이야!” 하고 외치는 가운데 단지 목격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웃음을 자극하는 광대나 다름없는 신학자의 슬픈 모습을 담고 있다. 결국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강론과 더불어 광대는 이제 미친 곡예사에게 걸음을 양보한다. 그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하고 납득할 만한 사람이다. 잊을 수 없는 ‘바보’ 미쉬킨 왕자의 모습을 찬찬히 읽어보기로 하자. 베르골료 교종은 아름다우면서도 비참한 이 왕자와 돈키호테를 많이 좋아했다. 펠리니의 영화에 등장하는 마토라는 인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수렴되어 드러난다: 그에게는 순결함과 비참함, 아름다움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

광대는 복음을 설파하면서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마토는 스스로의 자유를 해방시키고 모든 가면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암호를 만들어내고 있다.

* * *

‘마토’는 곡예사이다: 그가 대면하는 창공의 팽팽한 줄로 대변되듯이, 삶의 의미는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꿈을 꾸는 사람이다. 잠파노의 폭력을 헤아릴 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무력화 할 줄은 알았다. 우리 안에서 신비에 대한 의미를 흔들어 깨우려면 ‘마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활에의 믿음을 일깨우기 위하여서도 그러하다.

[i] La Civiltà Cattolica 2017 II 209-214 | 4005 (6/20 maggio 2017)

[ii] 이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준비되어 있다. 인용된 것을 보고자 하는 이는 이를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s://youtu.be/EXRvLWozlo4/ 이 점과 관련해서 본 잡지에 실린 위대한 영화감독에 대한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 V. Fantuzzi, “ai raggi X”, in Civ. Catt. 1990 I 58-71. 여기서 인용된 영화와 관련해서 ‘기초적인 그리스도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p. 64).

[iii] A. Spadaro, “Intervista a Papa Francesco”, in Civ. Catt. 2013 III 472. 이어서 교종 성하는 2016년 6월 16일에 있었던 ‘Giubileo dello Spettacolo Viaggiante’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담화에서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대해 의미 있는 언급을 했다.

[iv] 최근 본지의 작가인 비르질리오 판투치(Virgilio Fantuzzi) 신부에 의해 밝혀진 영화의 배경이 의미심장하다: 젤소미나와 마토 사이의 대화는 영화감독과 함께 영화의 전문가로 익히 알려진 예수회원, 에우제니오 부르노(Eugenio Bruno) 신부에 의해 정확히 삽입되었다. 이는 로마의 Via degli Astalli에 있는 예수회 제수 공동체에서 둘 사이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2016년 9월 24일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성 안셀모 교회에서 판투치 신부에 의해 거행된 잔 루이지 론디(Gian Ruigi Rondi)의 장례식에서 비롯되었다.

[v] 이미 베르골료 신부는 자신의 어느 글에서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의 『교리서』를 인용하는 가운데 이를 상기한 바 있다. 참조. J.M. Bergoglio, Nel cuore di ogni padre. Alle radici della mia spiritualità, Milano, Rizzoli, 2014, 305. 베르골료는 교종좌에 오른 후부터 인간을 악으로 밀어붙이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광기를 경계하는 가운데 ‘건전한 광기’에 호소했다. 그는 2013년 7월 28일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귀환하는 비행기에서 안전에 대한 주제와 관련해서 기자들에게 말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교와 하느님 백성 사이에 두터운 공간을 만드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광기를 선호합니다: 바깥에서 다른 광기의 모험을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광기를 좋아합니다: 바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습니다.” 교종 성하는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일화를 다시 상기하는 가운데 이 ‘광기’를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적이면서도 위대한 신앙 행위로 밀어붙이는 상태로 규정했다: 일곱 살 난 여자 아이가 병에 걸렸는데 의사들은 그 아이에게 약간의 생명만을 연장해 줄 뿐이었다. 결국 전기기사인 그 아이의 아버지는 “미치광이가 되어 그 광기 속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70km나 떨어진 루한의 성모 성지로 은총을 청하기 위해 갔다(참조. 마르타의 집에서 한 강론, 2013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