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이 바라는 주교의 모습

LA FIGURA DEL VESCOVO IN PAPA FRANCESCO

디에고 하비에르 파레스 신부(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 집필자)
김숙희 그라시아 수녀(성심수녀회) 옮김

제 68차 이탈리아 주교회의 정기 총회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주교들에게 단지 배를 이끄는 항해사가 되지 말고 진정한 목자가 되라고 부탁했다. 여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종은 “귀족처럼 군림하는 주교가 아니라, 목자인 주교”가 되기를 간곡히 말했다.
교종으로 선출되었을 때, 프란치스코 교종은 황태자가 아닌 목자라는 두 가지 단순한 제스처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 새로운 영적인 역동을 불러 일으키며, 교회와 바티칸이라는 거대한 전통을 대표하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제시하는 주교상인 목자로서의 이미지는 “양들의 냄새를 풍기는” 그런 목자를 말하는 것이다. 교종이 제시하는 다른 인물상들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이미지는 바로 목자인데, 모든 이들과 가까우며, 그의 백성과 함께 걷고, 친교를 사는 사람으로의 목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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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에 개최된 제 68차 이탈리아 주교회의 정기 총회 개회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주교들에게 단지 배를 이끄는 항해사가 되지 말고 진정한 목자가 되라고 부탁했다. 여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종은 과거 교구장으로 봉사했을 때 사용하던 이미지를 다시 언급하며, “귀족처럼 군림하는 주교가 아니라, 목자인 주교”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2006년, 교종으로 선출되기 전, 그는 스페인 주교들에게 피정을 주었는데, ‘마니피캇’에 대한 묵상을 안내하는 부분에서, “ 우리 자신을, 주인이 아니라 협조자로, 또 귀족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겸손한 종으로 놓고, 자신에 대해 느껴 보라”고 말했다. 피정 마무리에,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귀절에 대해 자신의 묵상을 나누며, “사람들은 목자를 원하지, 세상의 유행에 따르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세련된 그런 주교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목적인 선택은 단지 주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각각의 자신의 상태와 환경에 맞게 “선교사의 길을 가는 제자들” 모두에게 속한다. 교황 권고인 복음의 기쁨에서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명히 예수님은 주교님들이 다른 이들을 내려다 보는 고위층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종의 개인적 이상 만이 아니며, 또는 다른 많은 사목적 선택 사항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 담겨있는 명령이며, 너무나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를 도전하는 힘을 감소시킬 수 있는 어떤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교님들, 어떤 주석을 붙이지 말고 이 정신을 문자 그대로 살도록 하십시다.”
“귀족이 아닌 사목자”의 이미지가 미디아에서는 때로, 교종이 주교들이나 사제들에게 던지는 질책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비난의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고 그런 차원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닌 어떤 것이다. 이 이미지는 획기적인 변화를 식별하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더 중요한 의미로는 어떤 주교나, 어떤 사제도 사목자로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빼앗기도록 자신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불을 밝히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과 삶을 나누는 선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복음의 기쁨 271항)

자신의 백성을 지키는 사람들인 주교

당시 추기경이었던 베르골리오가 “주교” – 그리스어로 에피스코포스-라는 같은 제목 아래 표현하였던 던 것처럼, 2001년 시노드에서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묵상하였고,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종인 주교들”이라는 글로 주교에게 바친 글에는 주교들에게는 특별한 은사가 있다. 그 은사란 주교들의 특별한 사명인데, 그것은 바로 양들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말한 바의 전문을 읽을 필요가 있는데, “주교는 깨어 망을 보는 사람( keep watch)이며, 희망을 수호하며 자신의 백성을 지키는 사람이다. (1 베드로 5:2) 이 영신적 태도는 전체라는 관점을 염두에 두고, 양떼를 감독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주교는 양떼들이 전체적인 응집력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모든 것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의 강조점은 위험에 깨어있어야 (be vigilant)하는 필요성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주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관련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태도인, 깨어서 지키려는 태도로부터 그들의 힘의 전체성을 얻게 된다.
“이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에 하나는 탈출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구약성서에서는 과월절 밤, 혹은 깨어 지내는 밤이라 불리는 그 밤에 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켜 주겠노라고 말한다. (탈출기 12:42) 내가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은 일반적인 의미로 지키는 것, 혹은 더 특정한 대상을 감독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지켜 준다’ (keeping watch)는 것이 지니고 있는 심오한 성격이다. 감시는 교의나 관습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 반면, 지켜준다는 것은 신자들의 마음 안에 소금과 빛이 살아 있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깨어 있다 함은 임박한 위험 앞에서 준비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반면 지켜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끌고 가시는 그 과정을 인내롭게, 지속적으로 함께 함을 말한다. 깨어 있다 함은 (to be vigilant)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예리하고 재빠르면 된다. 반면 지켜 준다 함은 온유함과 인내, 그리고 애덕을 통해 증명이 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감시하고 깨어 있는 것은 일종의 통제에 관한 것이지만 지켜준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 즉 자녀들의 마음이 성장하고 있는 과정을 지켜 보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가 주는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지켜 주는 태도는 주교들의 개방적 담대함을 통해 드러나며 확고해 지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계약의 백성을 에집트로 부터 탈출시키는 여정을 지켜 보시는 야훼의 이미지와 함께, 더 친근한, 그렇지만 똑 같이 힘있는 이미지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성 요셉의 이미지이다. 성 요셉이야말로 태어날 아기와 그 어머니 마리아를, 꿈에서도 지켜 주신 분이다. 그분의 이 깊은 지켜봄으로부터 그의 작은 양떼를 소박한 방법으로 지켜 주는 것이 가능하게 한, 전체에 대한 침묵의 관조가 태어 났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아기를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깨어있는, 기민한 관조가 싹 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종종 잠을 자고 있는 성 요셉에게 그의 “기도의 지향”을 맡겨 드리는데, 요셉 성인이 그것을 꿈에서 보살펴 주시도록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 잠자는 요셉 성인의 이미지는 그의 백성을 지키는 목자의 모습, 바로 주교들의 모습이라 하겠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품는 주교

밑으로든 위로든 모두. 귀족이 아니라 목자로의 두 가지 단순한 움직임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종으로 선출된 직후, 하느님의 백성 안에 새로운 영적인 역동을 불러 일으키며, 교회의 전통과 바티칸 공의회의 전통 안에 자신을 맡겼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은 비우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파견되었던” 것처럼 교회도 같은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교회는 인간적인 고통으로 아픔을 겪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가난한 이들과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교회의 창립자인 예수를 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교회 헌장 8항)
교종이 하느님 백성의 강복을 받기 위해 머리를 숙였을 때, 그리고 교종 전용차에 올라타 성베드로 광장의 전체를 돌거나 자신이 방문할 나라를 정할 때마다, 그분의 행보는 우리로 하여금 주교가 그의 백성들과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모습을 그냥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주교나 교종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정답고 가깝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교종의 태도는 다양한 은사 가운데에서 성령의 조화로움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를 아는 사람의 태도이며, 교종으로 선출된 지 이틀 후에 그의 사제들, 추기경들에게 요구한 바와 같은 그런 태도인 것이다.
그분의 제스쳐뿐 아니라 그분의 교의에도, 자신을 낮추는 것과 영적인 세속화와 대조되는 모든 이를 품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것들은 “원래의 성명서”가 아니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단순한 방식으로 요구한 바이다. 즉 “따라서, 교회는, 비록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적 자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세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표양으로 겸손과 자기 희생을 추구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공의회 교회 헌장 8)
여론이나 미디어에서는 고위성직자가 귀족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엄중하게 비판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를 품는 사제나 주교와 같은 사목자에 대해 크게 개방적인 것도 사실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의 목자들 안에서 그리스도가 길을 인도한다고 느낀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더 이상 좋은 목자가 없거나, 부족하거나 혹은 주님의 자비가 그런 분들을 배출해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시오. 분명히 훌륭한 양들이 있을 때는 반드시 훌륭한 목자가 있는 것이다. 훌륭한 양들은 좋은 목자가 나오도록 길을 내어 준다. 그러나 모든 좋은 목자들은 한 분이신 착한 목자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일치를 이룬다. 주교들이 양들을 돌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 그리스도가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신랑의 친구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큰 기쁨을 느낀다. .”
2014년 주교들의 모임 마무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디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는가? 복음선포를 하는 주교, 기도의 사람, 사목자 …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선택되는가?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버려 두시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분들을 찾기 위해 들판으로 더 많이 나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사무엘 상 16:11)라고 한 사무엘의 경고가 우리에게도 적절한지 모르겠다. 바로 이러한 거룩한 조바심을 여기 이 주교들의 모임이 실제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주교들

오늘날 주님께서 하느님 백성에게 기름을 부어 성화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 쓰시려고 하는 주교의 모습이라고 교종이 제시하는 주교의 특징은 어떠할 필요가 있는가?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탈리아 주교회의의 주교들에게 주교의 영성은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 가는 것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점을 상기시켰다. 그분은 우리 주교들을 “교회의 목자” 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교회는 무엇보다 부활하신 분의 공동체인 것이다. 교종은 그보다 몇 달 전 주교들의 모임에서도 같은 말씀을 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여기로부터 우리가 보고 싶은 주교의 얼굴을 묘사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기준이 나온다.“
여기에는 교종이 말하는 “주교-증거자” 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 그는 예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오늘날과 어떻게 유의미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교들은 고립된 증거자가 아니라 교회와 함께 하는 사람” 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주교회의 총회에서, 교종은 “주교들이 그리스도 지체인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속함”을 강조하며 말한다.
이러한 특징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할 필요가 있다. 모든 주교들이 다 교종과 같은 스타일을 닮을 필요는 없다. 그 반대이다. 교종은 은사의 다양성을 선호한다. “모든 교회에 다 적용되는 목자로서의 규격화된 모델 같은 것은 없다. 그리스도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필요에 응답할 필요가 있으며 그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이 임무라는 면에서 주교들의 특수성을 아신다. 우리의 도전은 특정 교회가 지닌 특수성을 보면서도 그리스도가 보는 그 관점에 시선을 두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늘날에도 의미 있기 위해서는 각자가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처지에 자신을 두어야 하지만, 그 자신의 증언이 다른 이들의 증언과 조화를 이루면서, 기본적인 것에 충실한 것이다.
기본적인 것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제일 먼저 주교들에게 말한 바를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Urbi et Orbi’라고 하는 로마와 전 세계에 전하는 말씀과 축복에서, 그는 주교들에 관해 네 번이나 기본에 대해 언급한다. 교종 선출 기간인 콘클라베의 임무는 로마 교회에 주교를 내는 것이다.”라든지, 로마 교구 공동체에게 자신에게 보여준 환대에 감사를 하며 “로마는 자신의 주교를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또 그 공동체에, 우리의 명예 주교인 베테딕토 16세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교종 방문과 관련하여서는 “지금, 우리는 이 여정을 시작한다. 주교로서 그리고 하느님 백성으로.”라고 하며 “그들의 주교”인, 본인을 위해 축복을 청하며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교종은 추기경들과 가진 미사 강론에서 “목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 말하며 주교의 모습에 대해 언급하였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 없이 길을 가고, 십자가 없이 집을 지으며, 또한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단지 주교, 사제, 추기경이나 교종일 뿐 주님의 제자들은 아니다. “ 공의회 교회 헌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의 십자가와 죽음을 선포하며 세상의 박해와 주님의 위로 가운데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고 전 11:26) (교회 헌장 8, 3, 42항 참조)
이와 똑 같이 중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추기경들을 알현하는 가운데 전 교종의 모습을 묘사하는 방법이었다. “ 베네딕토 교종은 베드로를 잇는 사도직을 전적인 헌신으로 수행했는데, 늘 성체 안에 현존하고 살아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시신을 고정하고 현명하고 겸손하게 해석한 분이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품으며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는 것, 이것이 교종께서 주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하느님 백성의 목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데에 필요한 세 가지 움직임이었다.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 다른 이들을 축성을 하기 위해 축성 받은 자

로마의 주교로서 가진 첫 성유 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근본적으로 주교들의 삶에 따르는 긴장을 사는 사목자들에 대해 성찰 한 바를 나누며, 주교들은 그들이 봉사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기름 바르기 위해 기름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공의회는 “주님이 그의 백성인 양떼에게 투신한 그 의무는 참된 봉사이다. 성서에는 이를 디아코니아, 직무라는 중요한 호칭으로 부른다. (교회 헌장 24) “훌륭한 사제는 그의 백성이 어떻게 축성되느냐에 따라 알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분명한 증거가 된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주교들이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데, 교종은 자신만이 그 정신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고, 다른 주교, 사제, 평신도들과 함께 그 정신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와 함께 선교의 제자로 선교를 기쁘게 수행하는 것이다.
축성의 관계적인 성격과 역동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첫 번 강론 때 하신 단순한 한 마디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즉 교종은 주교와 하느님 백성은 함께 여정을 가는데 그 여정 안에서 “거룩한 분에 의해 도유를 받은 것처럼 서로를 거룩하게 하는 전체 신자 공동체는 신앙을 드러내는 일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교회 헌장 12)
이렇게 함께 걸은 여정이 “시노드”이며 그 말 안에는 바티칸 공의회의 시노드 정신이 숨쉬고 있다. “초세기 교회부터 주교, 사제들은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공동선과 개별 교회의 복지를 위해 공동으로 내어 놓았다. 따라서 지역 공의회와 전체 공의회인 시노드가 생긴 것이다. 거룩한 보편 공의회는 시노드와 공의회라고 하는 공경할만한 제도가 신선한 활력을 가지고 커져 나가기를 갈망한다. (CD 36)
프란치스코 교종과 베네딕트 교종 사이의 연계성에 관해 말하자면, 베네딕트 교종이 2009년 아르헨티나 주교들에게 말한 바 안에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그때베네딕트 교종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가운데에” 그리스도와 같은 목자가 되게 하는 “사제를 축성하는 성유”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 때, 전 교종은 주교, 사제들에게 그들 각자는 “ 명예를 구하지 않고 온유와 자비로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사람으로 신자들 가운데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교회 헌장 27 참조)고 말했다. 이 주교상에 대해 베네딕트 교종이 아르헨티나 주교들에게 제시한 바를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역사의 시점에 그것을 더 충일되게 살도록 주교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

주교의 사목자 이미지

“양떼의 냄새가 나는 목자”라는 사목적인 전체 분위기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에 따르는 주교 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프란치스코 교종이 독창적으로 말하는 어떤 방식이라고 받아들이기 보다 교종이 제시하는 다른 이미지들 모두를 엮어 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서 양떼의 냄새가 나고 아버지의 미소를 진 목자의 이미지는 이것이 마치 하나의 큰 “별-목자”인 것처럼, 다른 이미지들을 하나의 별자리 안으로 함께 끌어들인다.
이 목자라는 관점이 어떤 면에서 주교상을 말하는데 열쇠가 되는가? 2009년 베르골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공의회나 아빠레시다 남미 주교회의에 나타난 언어에는 ‘사목적’이란 개념이 ‘교의적’이라는 말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목적이라 함은 단지 ‘신학에 대한 실제적, 우발적인 적용’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계시 그 자체나 모든 신학은 사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이 구원에 관한 말씀, 세상의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크리스피노 발렌찌아노가 말한 바와 같이, ‘ 이것은 우리가 사목적인 것을 교의적인 것에 적용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다. 교의로부터 원래 있었던 사목적인 인장을 없애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의심이나 혼란 없이 신학이 추종하고 있는 “인류학적인 루트”는 ‘사목적’ 교의와 평행으로 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우리와 본성을 나누어 가지시고, 자신의 양들 하나 하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다는 점을 인식하는 계시와 구원을 받았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교의와 사목이라는 통합된 개념은 사제 양성이라는 교령에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영구적인 교의가 담긴 ‘헌장’이라 불리는 문서가 탄생했는데, 헌장은 교회헌장과 같이 교의적인 문서이기도 하고, 사목헌장과 같이 사목적인 문서이기도 하다.)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에는 이 통합된 개념이 반영되었어 있다. 이 교령은 영혼들을 돌보는 사목자들을 양성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데, 목자들은 한 분이신 선하고 아름다운 목자와 일치하여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매력을 통해서 이끈다는 의미) 양들을 돌보는 사람인 것이다. 실제로 착한 목자의 이미지는 모든 양성 가운데 으뜸이 되는 덕이다.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목적인 목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바티칸 공의회나 남미 주교회의의 문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목적’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양성의 다른 측면과 대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사랑은 모든 덕의 형태이다.’ 라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듯이, 선한 목자의 사랑 안에 모두가 포함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교회와 주교들의 삼중 사명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베네딕트 16세 교종의 생각을 인용하는데, 전 교종은 새로운 강조점을 두며 다음과 같이 목자의 삼중의 책무에 대해 말했다.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은 그 세 가지 책무 안에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 (케리그마)하고, 성사를 거행하며 (전례) 자비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그것이다. (봉사) 이 의무들은 하나 하나 서로를 전제로 하며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 베네딕트 교종이 이런 가르침을 말할 때는 선포-순교 (케리그마-마르티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프란치스코 교종도 말씀을 선포하고 부활하신 분의 증인으로서 주교들을 말할 때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베네딕트 교종이 지도, 안내하는 사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랑에 찬 봉사 –디아코니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프란치스코 교종도 그것을 우선으로 둔다. 디아코니아의 이런 측면은 다른 두 요소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베네딕트 교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에 대해 말하자면, 자선은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넘길 수 있는 일종의 사회복지적이 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성의 일부이며, 교회의 존재를 표현하는데 불가결의 요소이다.” 베네딕트 교종이 교서를 쓰는 데에 있어 식별의 기준은 세상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이해에 근거한다. 그리고 사랑은 “양들의 냄새”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양들의 냄새를 풍기며 아버지의 미소를 지닌 목자

프란치스코 교종은 “죄책감”이 사라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자신을 포함하여 바티칸 꾸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죄인인 목자들” 임을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에 관해 말하는 그의 가장 전형적인 문구인 이 말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문구이다. 그런데 죄인이란 개념은 구속을 하고 윤리도덕적이라기보다 저항할 수 없이 매력적이고 심미적인 어떤 것이다. 그 유명한 표현인 “양들의 냄새를 풍기고”와 “ 아버지의 미소”를 지닌 목자에 대해 성목요일에 부연하여 말했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종이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주교들에게 바라는 모습인 것이다. 주교뿐 아니라 사제, 추기경, 그리고 교종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목자가 양들의 가죽만 입고 있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을 열정적으로 섬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교의 모습 이상으로, 향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강한 냄새는 여러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석없이 읽혀져야 하는데 주교들에게는 양들의 냄새가 나야 하며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모습인 것이다.
“양떼의 냄새를 풍기는 목자”의 모습과 함께 착한 목자의 비유는 자주 듣기는 해도 그다지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데, 이 비유는 신선한 미풍과 같은 힘을 가지고 이념적인 몽상이나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깨어나게 촉구하며, 복음의 열정으로 우리의 여정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목자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있을 때 양들의 냄새에 자신을 흠뻑 적신다. 이 냄새는 실험실에서 만들어 낼 수가 없으며 또한 목자는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함께 있을 때 이 냄새에 감염이 되지 않는다. 양들 중 하나인 자신의 냄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보는 백성은 그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신의 백성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양떼의 냄새”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기름 바름과 관련한 주제인, 견실한 교의로 양들을 돌보고, 안전하게 지키고, 식별하는 것, 적으로부터 보호하게 하는 것들과 연결시켜 준다. 양의 겉옷을 두르고 있어도 “이리의 냄새”를 감출 수 없듯이 그렇게 양들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면에서, 냄새라는 영적인 의미는 주교들로 하여금 영성적으로 세속화되고 현학적인 향수를 뿌리는 것의 진실을 파헤치고 유혹을 뿌리치도록 해 주는데, 양떼의 냄새는 주교들에게 감별을 할 수 있는 “후각”적인 기준을 제공함으로 그 양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자신을 배출한 바로 그 양떼 안에 머무르게 하고 양들이 그를 알아 보게 한다.

자기 백성과 함께 기도하는 주교들

프란치스코 교종의 생각에는 목자의 개인 기도와 전례적인 기도는, 기름 바름과 같이, 자신의 향기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퍼져나가 변방에 다다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마치 아아론의 수염에서그 옷자락까지 기름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교종이 위에서 언급한 사목자의 기도는 항상 사람들의 얼굴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의 소진”은 하늘로 조용히 오르는 유향과 같고… 아버지의 마음에 직접 도달하는 유향과 같다.” 고 하며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근 성유미사에서 사용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 기도는 사제들을 안으시는 하느님의 포옹과 같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기도하는 주교의 이미지는 그가 자신의 시간을 그의 백성에 대한 봉사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지를 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주교들이 하느님과, 자신의 성화와 개인 기도에 열려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같은 말씀을 설교하는 데에 기울이는 데에 드는 같은 인내와 진솔함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이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12년 전에 그의 교황 교서 “나는 당신들에게 목자를 보냅니다.”에서 사목자들에게 촉구한 구체적 사목적 행동들을 풀어 주는 영성이다. 요한 바오로 교종은 “오늘날 교구 사제들의 영성”에 관해 이미 주어졌던 강론들을 찾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본당 사제의 (주교는 더더군다나) “사목적 존재 이유”에 대해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즉 사제가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지 못한다면, 분명히 그는 자신을 사목적인 삶의 합당한 표양이 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사목이라 함은 바로 같은 공동체의 대인 관계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으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교서 “당신들에게 목자를 보냅니다.” 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범적인 주교의 모습으로 성 가를로 보로메오를 제시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는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영성을 좋아하였다. 영신수련은 사목자들에게 피터 파브르 성인이 의도했던 바와 같이 관상과 활동을 통합할 필요에 대해 제안한다. 파브르 성인은, “훌륭한 일 안에서 하느님을 영신적으로 찾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 좋은 일들을 하지 않는다 해도, 더 잘 영신적으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며 활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성인은 이러한 권고를 했다. “무엇보다 당신들이 하는 좋은 일이라는 보물을 향해 기도가 가도록 명령한다면, 그 반대인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본 다음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우리의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은혜를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보로메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교회의 사람들에게, 모든 활동에 앞서고, 함께하고, 뒤따르는 묵상과 기도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예언자들이 말하기를 “나는 노래부르며 묵상하리라. (시편 100:1참조)”라고 하였다. 여러분이 성사를 거행하려면, 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묵상하시오. 미사성제를 거행하려면, 봉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시오. 성가대에서 시편을 노래하려면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말씀드리는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영혼들을 안내하려면 누구의 피로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들 가운데에서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행해지도록 하시오. (전 고린토 16:14).”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끊임없이 말하는 자신을 초월함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하느님과 성인들, 기도 안에서이며, 둘째는 이웃과, 하느님 백성을 향한 것이다. 멕시코 주교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기도는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중재를 하는 것이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백성들과 가까이 있음이다.”
따라서 양들의 냄새는 실제 양의 냄새뿐 아니라 이미 하늘의 주님의 목장에 있는 사람들의 냄새이기도 하다. 이 냄새는 기도 안에서 또 성인의 삶을 읽음으로써, 하늘의 성인들과 가까이 함으로서 나는 거룩한 양들의 기분 좋은 향기이다. 교종이 마음에 두고 있는 주교의 모습에는, 성인들의 표양, 특히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끈 위대한 복음 전파자들의 모습이 기본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소위 말하는 “동일한 방법론”으로 시성하고 있는 성인들은 “위대한 복음전파자이고, 복음의 기쁨에 깔린 영성과 신학과 조화를 이루는 인물들이다. 바로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이러한 사례들을 선택했다. “ 그들은 복음을 토착화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그 문화에 토착화 되었던 사람들로 그들의 백성에게 사랑받은 복음 전파자들인 것이다. 복음을 토착화하고자 하는 갈망은 주교 복음 전파자들이나 사목자들의 기도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베르골리오는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 성인들에게 기도했던 주교였는데 유년 시절부터 그에게 성인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기도 행렬에 그를 데리고 다니셨던 할머니 로사의 영향으로 민중 신심에 기울어져 있었다. 교종이 주교들에게 제시하는 바인,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주교들의 초월의 모습은, 신자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는 모습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교종은 하느님 백성과 함께 기도하는 주교들을 바라는데, 그들의 기도는 영성과 민중적인 신비주의의 향기를 지닌 기도인 것이다.

“종말론적인 향기”를 지닌 주교들

양떼의 냄새를 풍기는 목자의 모습은 상징적인 것이다. 과르디니가 큰 힘을 불러 일으키는 “원초적인 “ 이미지 중의 하나라도 묘사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될 정도로 인용되고 사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짧은 신학적 성찰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초안이며 프란치스코 교종의 신학적, 인류학적, 존재론적 차원을 지닌 밀도 있는 언어로 들어 가기 위한 초대인 것이다.
우선 교종이 사용한 이 비유에 적절한 무게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런 언어가 교종의 발언으로 거칠게 느껴지고, 심지어 신학적 내용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비유는 매우 특별하며,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지식인들은 그 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민중은 그를 “이해한다”. 어떤 사람은 교종의 민중의 마음을 건드리려고 하는 갈망은 인기에 편승하는 포퓰리즘에 불과하지 않냐고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참된 믿음의 계시는 교육받은 사람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계시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겸손한 이들에게 안다는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만드는 선물이 주어진 것이다. (마태 11:25-27; 요한 2:26-27) 교종의 비유는 있는 그대로 가치 있게 봐야 한다. 오늘날 언어의 홍수 속에서 그 이미지들은 목자의 휘파람과 같은 것이다. 양들은 그 소리를 잘 알고 거기에 따라 길을 인도받는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언어는 남미의 언어로서 독창적일 뿐 아니라, 분명하고, 또한 진실되며 우리 마음에 좋은 것을 불러 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비유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고도 지성의 한 표시인 것이다.
우리가 양들의 냄새를 풍기는 목자라는 이미지를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묵상하거나, 인간의 속성을 삼위 중에 한 분의 속성으로 연결시킨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같이 교부들의 전통을 자유로이 따라 묵상한다, 양들의 냄새는 그리스도께 고유한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적인 향기이며, 육화와 수난의 냄새이며 속박과 피의 냄새이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었고 군중에 둘러 싸여 있었던 분의 땀의 냄새이다. 또한 발을 씻어 준 냄새이며 나자로의 붕대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이다. 이 냄새는 또한 여성스런 향기이기도 한데, 집을 가득 채웠던 마리아의 향유, 들판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백합의 향기이며, 베드로에게 배를 저으라고 예수님이 말했을 때의 그 호수의 냄새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말씀은 이를 확인해 준다. “ 깊이 있게 숙고된 사목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은 그 사목의 삼위일체론적인 기초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그리스도의 삶은 삼위일체적이었다. 그는 성부의 영원한, 외아들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보내졌다. 성부와 함께 교회에 성령을 보낸다. 이 삼위일체론적 차원은 그리스도의 삶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드러나는데 주교들의 삶과 활동의 모습을 만드는데 영향을 준다. 시노드 주교들은 분명하게 주교들의 삶과 활동을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의 빛 안에서 설명했는데 이는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도 담겨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인간론에 빛을 주며, 출발점으로 삼은 그의 선택을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바로, 교의론적인 정의에 관한 담론과 비실용적인 도덕적 권고에 절어 있는 오늘날 양떼들이 들을 필요가 있는 바에 대한 식별이다.
아름다운 것과 함께, 공정함, 선함도 함께 들어가는데 이 각자는 진리를 진정으로 갈망하게 된다. 이것이 목자의 교육방법론이다. 이것이 만일 철학적 용어로 된 생각이라며, 양들의 냄새는 공정함과 관계가 된다. 목자에게 양떼의 냄새가 불쾌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명백한 그리스도교적 공정함으로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영광이 과장없이, 다른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종의 네가지 원리를 마음에 두고 이것들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양떼의 냄새에 후각적인 이미지는 최고의 원칙에 해당한다. 양떼들의 냄새는 기름 바르는 성유의 냄새이며, 이는 “ 거룩하고 믿음에 있어 오류가 없는 “ (복음의 기쁨 119) 하느님 백성의 전체성을 가리킨다. 강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맵고, 음식이 상했을 때 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상쾌한 향수와 같이 강한 이끌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냄새는 “목자가 양들과 가까이 있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모두에게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병들고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원리가 있다. 그 두 가지 원리는 오직 가까이 있음으로만 세워진다. 하나는 일치의 원리인데 이는 대립보다 우월하며 (왜냐하면 대립의 바로 그 성격은 분리하고 대조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의 원리인데, 이는 이상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실에 뛰어 들고, 열린 상처에 손을 대고 이웃의 일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야 체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양들과 함께 길을 가는 목자의 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이미지, 즉 “교회의 모든 사목에 대한 파라다임” (복음의 기쁨 15, 17, 20 참조)의 변화가 떠오르고,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시간은 공간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길은 스스로를 대립에 의해 막혀 버리게 허용하지 않고, 또 공간들을 장악하지 않으며 거슬러 가거나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쁨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공간을 소유하기 보다 어떤 과정을 시작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복음의 기쁨 223)

항해사인 주교가 아니라 친교의 사람인 주교

교종은 주교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수업을 하듯이 하지 않는다. 사목자에 대해 말할 때 교종이 한쪽 귀로는 복음에 귀 기울이고 또 다른 쪽은 신자들에 귀기울임을 주목한다. (복음의 기쁨 154) 그의 말, 멈춤, 그의 표양들, 미소와 제스쳐 등을 통하여, 우리는 주교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하고 통일된 이미지를 본다. 즉 주교는 예수님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자신의 백성과 하나 되어 사는, 친교의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2014년 5월에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행한 연설의 중심이 되는 주제이다. 그 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나의 중요한 제스처를 보여 주었는데, 바로 바오로 6세가 1964년 같은 주교회의 주교님들에게 “정신과 하는 일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활성화를 불러 일으키는, 쇄신된 일치의 정신”을 촉구한 말씀을, 주교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일치는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핵심 열쇠가 되며, 주교들로 하여금 “교회의 목자”가 되게 하며, “진실과 자비” 라는 웅변적인 제스처로 세상을 향해 나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기대와 약속”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친교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오늘날 로마의 주교이며 “모든 교회들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 교종에 의해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주교의 모습이다.
교종이 이탈리아 주교들에게 2015년 5월 18일에 황한 바와 같이 친교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교회론적인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친교는 항해사처럼 길을 이끄는 주교가 아니라 목자처럼 그의 양들과 함께 하는 주교들을 통한 성령의 일이다. 주교들은 온전히 “고유인 영역을 맡고 있는“ 평신도들과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주교들이 가진 교회적인 감수성은 “주교들 간의 일치와, 사제들과 주교와의 친교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물질적, 성소면에서 빈부차가 있는 교구들 간에, 그리고 중심부와 변방 간의 친교에 의해, 또 각 나라의 주교회의와 베드로의 후계자 사이의 친교”를 통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