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이성: 가능한 대화

조반니 쿠치, S.I. 지음
윤주현 신부 옮김(가르멜 수도회)

대화 가운데 있는 감정과 이성

  예전에 소개된 공헌 가운데 이성과 감정(이 용어를 ‘열정’, ‘감정’, ‘애정’으로 불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세계로 간주하기로 하자.) 간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으며 그 둘은 서로 반대되는 용어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있다. 쾌락과 윤리적 선(善)은 이원론적인 윤리에서만 서로 대립될 뿐이다. 또한 그러한 윤리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실제로 근대 이전의 전망에서는 선(善)을 인식하고 완수하기 위해 열정과 이성 간의 관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에 따라,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방식에 따라 두 개의 방향으로 고려됐다.

  감수성에서부터 생겨나는 열정들은 지성과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지성적인 평가에 그 기원을 둔 또 다른 열정들이 있다. 이는 소위 ‘영혼의 열정들’이라 불리는 것으로, 분노는 그런 열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한 강조는 현대의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열정들은 그 자체로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열정들은 선(善)을 성취하기 위해 일치하거나 방해하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감정과 이성은 구조적인 면에서 서로 적대적이지 않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또한 서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은 의지의 결정을 보다 힘차고 강하게 함으로써 충만하고 통합적이며 항구한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善)을 성취하도록 난관과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준다. 이는 덕(德)이 지닌 전형적인 특징이다: “의지의 완전함에 있는 덕의 습성은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의지가 열정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민감한 본성에 있어서 완전한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열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로스미니(A. Rosmini)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했다: “정감적이지 않은 인식은 없다. 사랑은 인식을 완전하게 하며, 아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에게서 선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가능적인 행위를 통해 충만하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에게 있어서 이해는 정감적인 차원을 갖는다. 이는 토마스가 주목한 것에 상당히 근접하는 결론이다. 그에 따르면, 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선택적인 행위로서 시선은 마음을 사로잡은 것에 머문다: “사랑이 있는 곳에 눈길이 머문다”(Ubi amor, ibi oculus). 그는 감수성과 지성, 상상과 인식, 기억과 이해를 하나로 묶는 능력을 ‘사색적’(cogitativa)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정서(affettività)는 선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그 선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들에 주목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도우며 그들과 더불어 우정과 사랑의 삶을 살게 해준다. 어렵고 중대한 기로에서 생각만으로는 완수해야 할 선(善)을 분별하고 규명하거나 확신을 갖고 선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아우구스티노가 주목하듯이, 이런 중대 국면에 직면해서 열정들은 값진 도움을 준다. “이 현세 삶의 나약함을 간직한 한, 우리에게 어떠한 열정도 없다면 올바로 살아갈 수 없다.”

  감정의 중추인 뇌의 전두엽이 제거된 사람들의 경우를 연구해 보면, 그들에게는 인식 능력과 욕구 능력 위에 깊이 삽입된 정감적인 유산이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을 습득하지도 못하고 공표된 가치들과 함께 항구한 행동을 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정서적인 세계는 지성적인 차원을 풍요롭게 해준다. 지성적인 차원은 동기 유발, 흥미, 원의 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은 학습과 공부에 있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애정으로부터 분리된 지적인 삶에서 오는 결과는 참담하다: “독서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되며 단기간의 기억을 위해 장기간 저장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산만해지며 문법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생각을 체계화 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추상화 작용이 쇠퇴해지며 말을 하는데 있어 무능해지고 용어의 사용 또한 빈곤해진다.”

  한편, 감정의 밀도 그 자체만으로는 완결된 선택의 선성(善性)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찰, 판단을 통해 비교하는 가운데 해석된다. 단순히 감정이 동반된 행동은 나쁜 장난을 치는 것과 같다. 만일 감정이 성찰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막 타올랐다가 공허감과 욕구 불만만 남긴 채 쉽게 꺼질 수 있는 볏짚의 불과 같다. 이는 프로이드가 언급한 모순이다: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들 속에서 보다 적은 쾌락만을 얻을 뿐이다. 모든 면에서 분석해 볼 때 감정과 이성은 서로를 요청한다.

현상학의 기여

  이렇듯 통일된 접근은 현대 철학의 영역에서 강하게 이루어졌다. 후설(E. Husserl)을 기점으로 지각(知覺)과 육체로부터 소여 된 느낌 사이의 자연적인 경로와 관련해서 현상학에 의해 이루어진 분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후설은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거리를 두는 가운데 육체를 ‘살아있다’고 신중하게 언급했다. 반면, 데카르트는 육체를 일종의 ‘그 무엇’, 즉 기계와 동일시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단순한 도구로 보았다.

  육체는 주체와의 근본적인 동일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주체로 축소되지 않는다.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은 주체와 육체 간의 관계에 대한 용어들이 서로 교환 가능한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상반 관계를 잘 규명했다: “나는 ~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 육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언명 가운데 어느 것도 육체성(肉體性)을 충분히 규명하진 못한다.

  폴 리쾨르(P. Ricoeur)는 육체가 지닌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을 주체적 육체, 고유한 육체, 체험된 육체, 객체적 육체와 같은 용어로 규정지었다: “의미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객체적 육체는 체험된 육체, 고유한 육체, 나의 육체(나는 이를 바탕으로 말한다), 너의 육체(나는 이 육체를 향한다), 그의 육체(나는 그 또는 그녀에 대한 역사를 말한다)에 반대된다. 이처럼 육체는 대화에서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객체로서의 육체이며 다른 한 번은 주체로서의 육체 또는 고유한 육체이다.”

  문법적으로 표현된 이 이중성은 육체가 지닌 물질성과 비교해서 인격이 내포한 ‘더욱 더’(di più)를 암시하고 있다. 클로드 브뤼에(C. Bruaire)는 이러한 ‘환원 불가성’을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언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나는 나의 육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 안에는 육체가 표현하는 것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더욱 더’ 안에 초월에 대한 체험을 비롯해 이 세상의 한계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운데 자신을 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높은 곳에서부터’ 세상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자리한다. 이는 양심에 속한 고유한 요소이다. 그럼으로써 육체는 순수 사물화(事物化) 되는 접근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직면한 세계를 펼쳐낸다. 우리는 손을 쥐는 단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손은 ‘만지는 주체’이자 동시에 ‘만져지는 객체’이다.

  이 경우 주체는 “자신을 객관적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실재처럼 객체화 될 수 없는 자아로 경험한다. 반면, 세계 전체는 경험의 규범화 속에 있다는 의미에서 시공적인 형태들과 더불어 나의 경험 세계에서 드러나는 대상이 된다.” 나는 육체인 한에서 타인들을 알고 느낄 수 있으며 그들과 친교를 나누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측면들이지만 동시에 인격이 지닌 고유성과 더불어 그 인격을 드러낸다. “화를 내는 얼굴 또는 녹초가 된 얼굴에서 나는 분노나 평온함에 대한 징후나 조짐이 아닌 분노와 평온함 그 자체를 비록 그것을 전체적으로 감지하거나 그 뿌리를 알지 못한다 해도 포착한다. 어떠한 경우든, 또한 여기서, 인간의 심오한 단일함과 양심적인 존재됨은 상호 인격적 관계의 영역을 통해 살아있는 육체의 내밀함 가운데 드러난다.”

  

인간적 허약함의 장소

  물론, 육체는 허약함, 수동성, 폭력, 고통의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것은 사상사(思想史)를 통해 악(惡)이나 장애물 또는 쓸모없는 짐처럼 자주 부정적인 용어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고통 받는 허약함의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인간은 이러한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가능한 결과에 대해 알도록 인도된다. 열정은 이성을 지배할 수 있고 노예로 만들 수 있으며 “해를 입힐 수도 있다”(칸트는 두려움 가운데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은 열정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열정으로 하여금 정신이 추구하는 계획에 간섭하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하루키 무라카미(Haruki Murakami) 같은 일본 작가는 아픔(dolore)과 고통(sofferenza)을 적절히 구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구분을 경주(競走)에 적용했지만, 이는 모든 인간적 체험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픔은 즉각적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주체의 내적인 비판에 따라, 그가 지닌 가치와 동기 부여가 무엇인가에 따라 다르게 체험될 수 있다. 동일한 고통스러운 일(두통, 다리골절)이라 하더라도, 이를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상이한 아픔을 유발한다. 이와 관련해서 무라카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달리며 이렇게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너무 힘들다.’ 여기서 힘든 상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속한다. 반면, 더 힘들거나 덜 힘든 것은 각 개인의 재량에 달린 문제이다.”

  무라카미는 동기 유발을 비롯해 선과 악에 있어서 모두 이념적이고 문화적인 체계에 대한 수용이 내포한 근본적인 차원이 생물학적 자극에 비해 우세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인간 존재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이나 기관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 니이체(F. Nietzsche)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가 만일 삶의 ‘이유’를 갖는다면, ‘방식’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체로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빅터 프랭클(V. Frankl)이 자신의 작품 죽음의 수용소에서 전한 자전적(自傳的) 체험에서 드러나는 생존을 위한 근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는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체격이나 건장함 또는 가용 가능한 힘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 있음을 주목했다. 그러한 능력은 가장 혹독한 시험까지도 대면하게 하는 희망을 성장시켜 준다.

감정에 대한 이성의 영향

  그러므로 이성과 숙고는 감정의 가치를 바꾸는 가운데 그 안에 개입되어 들어올 수 있다. 예컨대, 긴장과 흥분 상태에서 제반 사물들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이미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됐다. 다니엘 골먼(D. Goleman)에 의해 이루어진 실험에서 행위자는 지원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난폭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지원자들은 즉시 행위자에 대한 평가를 했으며 그들 중에 대부분은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그러나 동일한 실험에서 어느 순간 다른 조수가 방으로 들어와 구실을 늘어놓으며 거기서 행위자를 나가도록 초대했다. 혼자 남게 된 조수는 행위자의 행동에 대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스트레스, 즉각적이고 위중한 결격 사유, 학위를 얻기 위한 몇몇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갖는 어려움)를 들어 그러한 그의 행위에 대해 지원자들에게 사과했다. 이 실험에서 지원자들이 제시한 평가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드러난다. 두 번째 실험에서 ‘정보 제공자’ 그룹은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었으며 행위자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경험하고 그를 돕기 위한 원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이 받은 정보는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강조하거나 또 다른 부분을 강조할 수 있다.

  시간을 갖고 자연과 접촉하는 능력은 감정과 관련해서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본적인 도움들이다. 예컨대 다음의 증언을 통해 소개된 격노의 경우가 그러하다: “언젠가 13살이던 무렵,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소리 지르며 집을 나갔다. 아주 아름다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가출한 나는 매혹적인 가로수 길을 따라 걸었다. 나를 둘러싼 평온함과 아름다움이 점차 나를 진정시키고 위로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는 온화하게 변해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 때부터 나는 화가 날 때마다 가능한 한 언제나 그렇게 했다. 나는 이게 가장 좋은 치유제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흄(Hume)의 가정과 달리, 이성은 단순히 “열정의 노예”(이 주장은 언제나 성찰의 중심에 있었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성은 열정 속에서 강력한 도움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열정을 변화시키고 열정과 함께 연대해서 열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성 아우구스티노가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고 부르는 영역에 도달함으로써 덕스러운 사람의 고유한 특징인 통합과 일치 그리고 평화로 나아간다. 이 질서는 순환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즉, 동시에 사랑의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여기에는 인격 전체가 어우러져 들어가는 능력이 있다. 원의(desiderio)는 이 만남의 완성된 표현으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덕행의 바탕으로서 선(善)을 인정하고 완수하기 위한 안정된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리적인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은 예측할 수 없으며 잠시 지나가는 불안정한 상태를 멈추고 사고(思考)를 위해, 결정을 위해, 그리고 관계를 위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고, 복음서가 상기하듯이, 명령에 의해 사랑이 위임될 수도 있다(참조. 요한 13,31-35). 사랑은 명령형의 사용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나를 사랑하시오!”). 그것은 평가와 감정에 연관된 명령형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 하에 있는 것을 하도록, 결코 율법에 의해서는 명해질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밀어붙인다.

  이는 프란츠 로젠츠바이그(Franz Rosenzweig)가 구체적으로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을 명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명령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를 사랑하시오’ 라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말한다. 그에게 있어 이 사랑의 명령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음성 그 자체로 드러난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나를 사랑하시오’ 하는 명령을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이 말은 사랑에 대해 전하는 완벽한 표현이자 지극히 순수한 언어이다.” 이는 분명 잠시 지나가는 감정이나 단순한 의지의 행위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은 통합된 사랑을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까지 평가, 애정, 결정 간의 일치를 드러내는 더욱 아름답고 안정된 표현이다.

  정감적 차원과 평가적인 차원 간의 이러한 통합은 삶에 대한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충실성과 깊이 어우러지는 능력, 특히 실행된 선택이 예측할 수 없고 왜곡되며 모순되고 힘겨운 것이 되는 상황을 대면하는 가운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 위한 근본적인 바탕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자유의 가장 고상한 표현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자신 안에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무상성(無償性) 뿐만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이기에 사랑할 수 있는 ‘헌신적 사랑’을 말한다. 사실상 주체는 이를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감정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즉각적이고 우연적인 호의를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수준에서 우정, 결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에 대한 선택처럼 정서적으로 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거나 피상적인 호감이라는 즉각적인 사실을 넘어서는 충실함이 드러난다. 그럼으로써 열정 또는 단순한 감정적 만족을 넘어서 시간의 지속과 소모를 대면하는 가운데 항구할 수 있다.

감정과 이성 간의 성공적인 만남의 예: 예술

  감정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또 다른 반론을 부정하게 한다. 그것은 감정이 삶의 행위와 상황을 평가하는데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피상적이며 지나치게 순간적인 상황 또는 대중의 사회적 맥락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그러한 차이들이 감정을 이해함에 있어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대화에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라고 언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영역에서 인간의 재능이 가장 고상하게 표현된다.

  모든 시대를 통해 드러나는 여러 걸작들이 지극히 서로 다른 분야들, 예컨대 철학, 심리 분석학, 역사학,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프로이드(G. Freud)와 융(K. Jung)을 비롯해 그 이전 시대의 여러 시인들과 문학가들에 의해 제시된 소포클레스(Sophocles)와 에우리피데스(Euriphides)의 비극에 대한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이런 일련의 작품을 통해 모든 시대의 상황과 사회적 조건을 알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체험과 그의 부재(不在)로 인해 야기된 가혹하리만치 처절한 그리움, 응답 받지 못한 사랑, 사랑에 대한 배반, 정의에 대한 원의는 여러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나며 모든 시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는 관객들 역시 쉽게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오늘날 조이스(Joyce), 카프카(Kafka), 프루스트(Proust) 같은 저술가들에 대해 쓴 어느 비평가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평가와 철학자의 관찰은 시대의 차이와 문화의 연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서로 다른 분야를 일반화 하면서 동시에 어느 때에는 명확히 구분하게 해준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내적인 불편함과 고통의 상황을 치유한다는 치료의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애정적인 공유(共有)를 최종적으로 추인하게 해준다. 이는 독자들과 청중들이 그러한 텍스트들을 통해 자신의 성공과 실패를 다시 발견하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장벽을 침착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특히 어떤 경우에는 세련된 교육 수준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불편함과 고통을 대면하는 가능한 방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데는 전쟁의 외상(外傷)으로 인해 고통 받던 베트남 전쟁의 퇴역 군인들을 치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왜냐하면 거기에 담긴 폭력과 두려움의 역사는 문화적인 차이를 넘어 모두에게 공감되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예술에 의해 촉발된 매력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조지 슈타이너(G. Steiner)에 따르면, “음악은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영적이며” 최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감사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감정을 소통하고 음악을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비(非)언어적인 요소에 힘입어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 “음악은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인 정의를 나에게 도발하는 사실적인 현존, ‘여기-존재’의 실재를 보여준다.”

  장 브릭스(J. Briggs)는 특별히 에스키모 부족의 서정 작품들을 들려주면서 음악을 통해 전달된 감정이 내포한 보편성에 대한 연구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깊이 공연에 참여했으며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주제페 베르디의 일트로바테로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음악”이라 정의한 바 있다.

  예술은 지극히 다른 문화들이 서로 교류하게 하면서 성찰과 감정을 하나로 모으는 능력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예술은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내적 경험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뱅퇴이유(Vinteuil) 소나타가 스완(Swann)의 영혼에 일으킨 결과와 관련해서 마르셀 프루스트(M. Proust)가 설명한 유명한 소절 하나를 음미해 보기로 하자: “음악가의 개방된 영역은 일곱 개의 음표로 이루어진 가난한 건반이다. 그러나 그 건반은 전체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짙은 어두움으로 인해 여기 저기 나눠진 헤아릴 수 없는 건반이기도 하다. 수많은 애정, 열정, 용기, 고요함으로 이루어진 건반 중에는 하나의 우주가 또 다른 우주와 다르듯이 그렇게 여러 건반과 서로 다르다. 이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우리 안에서 발견된 주제에 적합한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으며 우리 영혼이 겪는 이해할 수 없고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미지의 밤 우리는 이를 공허함이나 무(無)로 바꿔버린다 이 우리에게 숨기는 풍요로움과 다양함을 보여주었다. 뱅퇴이유는 이런 음악가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음악은 비(非)-언어를 포착하며 표현되지 않은 감정을 밝히 보여준다. 또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을 전율케 한다. 위대한 작가는 비-언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거역하지 않고 오히려 음악이 일으킨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그것을 다른 음역에서 표현할 수 있다. 스완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이 순간 그것은 진정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는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질 수 없고 단지 일시적인 단편만을 엿볼 수 있는 충만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프루스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묻곤 했다: “진정 음악이 영혼들 간의 친교를 어휘를 발명하지도 않고 말을 만들지도 않으며 관념을 분석하지도 않은 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실례(實例)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통의 보편성은 중개에 대한 문화적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에스키모 사냥꾼들의 단순한 삶의 세계는 분명 베르디에 의해 이태리화 된 스페인의 신화적인 삶의 세계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픔과 그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그 어떤 사회에서도 이질적이지 않다… 언어와 문화가 지극히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음악은 보편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자동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배제됐다는 의미에서 음악은 보편적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이러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경청해야 하는 수고, 인식과 해석을 위한 인내를 요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입증된 것에 충만함을 부여하고 그것을 체험된 상황 속에서 인정하게 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현존 없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열망과 원의 없이, 그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를 소유하겠다는 열망과 원의 없이 사랑은 감지될 수 없다… 실제적인 역사적 내용이 없는 감정(열정, 애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는다.”

절대자를 향한 길

  그러므로 감정은 단순한 생물학적 자료도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쓸모없는 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프루스트가 기꺼이 생각해 냈듯이, 회상에 의해, 기억에 대한 각성에 의해 표현된) 지극히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차원을 갖는다. 따라서 마음에 있는 것을 그 안에서 인정하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리고 수많은 경험을 비롯해 자신에게 열려진 가능성 가운데 실제로 찾는 것을 받아들이며, 여러 이야기에 힘입어 그러한 감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알릴 수 있는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시간과 영원 사이의 만남을 위한 믿을 만한 장소로 감지할 수 있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노, 이냐시오, 에디트 슈타인이 언급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들은 텍스트가 자신 안에서 일으키는 애정적인 반향들을 보여주는 강독에 직면해서 철저한 삶의 전환을 이룰 줄 알았다. 우리는 이들을 비롯해 수십 명의 인물들 안에서 동일한 신선한 향수(鄕愁)와 더불어 그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프루스트가 말한 아름다움의 특징인 “영혼들의 친교”를 다시 발견한다. 그 친교는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허물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은 아름다움에 직면해서 단순한 이성적 음미(吟味)가 막아서는 가치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에밀 초란(Emil Cioran) 같은 작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의 작품은 절망적인 허무주의와 철저한 비관주의로 점철됐다. 그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바하(J.S. Bach)의 음악을 통해 일어난 아름다움에 정복됐다. 그는 다른 길들을 통해 헛되이 찾았던 것을 바로 거기서 발견하고 받아들였다: “바하의 음악을 듣게 되거든, 여러분은 하느님이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라토리오, 칸타타 또는 수난곡이 연주된 다음, 그분은 존재하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모든 작품은 가혹하기 그지없는 환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유일한 이 사실을 망각한 채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밤낮으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아름다움은 마음에 말을 건네며 더할 나위 없이 생각을 자극한다. 그것은 마음이 배제된 이성만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이유들’을 상기시켜 준다: “비록 예술이 종교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진정한 예술은 절대자를 향한 일종의 회귀이다. 심지어 영혼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이나 악의 가장 놀라운 측면들을 알아본다 할지라도, 어떤 면에서 예술가는 구원에 대한 기다림의 음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