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종교간 대화의 토대 – 중국 유학자들과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 (예수회) Antonio Spadaro S.I.,
안토니오 데 카로 Antonio De Caro 공동 집필
이진현 (예수회) 번역

별표(*)는 역자 주, 이태리어보다 한문이 원문인 경우 한문 인용

“저에게 중국은 언제나 큰 관심사입니다.” 교황은 2016년 2월 2일 ‘아시아 타임즈’와 중국에 관한 대담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이 거대한 나라는 단순히 한 국가 차원을 넘어서 무진장한 지혜를 간직한 위대한 문화의 보고입니다. 어릴 적부터 읽곤 했던 중국에 관한 책들은 저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죠. 나중에 저는 마테오 리치의 삶을 배웠고 그 분과 똑같은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어떻게 이 거대한 문화, 오랜 세월의 지혜 속으로 들어가 대화를 시작하는데 성공했는지 존경심이 올라왔습니다.”[1]

1. 마테오 리치가 생각했던 문화적 친교의 이상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관한 지식과 문화간 대화에서 분기점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의 모범은 아득한 거리로 분리된 세계의 장벽을 허문 것으로, 영적이고 문화적인 그의 여정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민족들의 복음화를 이루고자 했다. 이 마체라타 출신 예수회원이 지녔던 기본 생각은 우정을 통한 선교 추구였는데, 이를 잘 드러내는 예로 1601년 북경에서 출간된 ‘교우론交友論’은[2] 중국의 지혜와 서양의 지혜가 서로 어우러져 리치가 마음에 간직했던 문화적 친교의 이상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 Matteo Ricci 利瑪竇 Li Madou, 1552년 이태리 마체라타 출생 – 1610년 북경에서 사망)

이 책이 불러일으킨 반향은 명나라 조정 관리들과 사대부들에게 위대한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보여준 것뿐만 아니라, 예수회 신부들에게도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접하고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사실,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쓴 구우편(逑友篇)[3]은 마테오 리치의 주제를 거듭 심화시켰다.

* Martino Martini 衛匡國 Wei Kuangguo, 1614년 트렌토 출생-1661년 항저우에서 사망.

위대한 이 두 가지 사례들로부터, 철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중국 문화와 풍습 및 그 용도를 이해하고, [마르티니의 경우에서처럼] 17세기 초부터 한세기 반 동안 벌어진 이른바 ‘중국 의례 논쟁’의 핵심이었던 제사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정의 개념이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리치의 부지런한 선교사업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의 편지 안에는 지독한 외로움과 명나라 학인들과 깊은 우정을 맺고자 하는 갈망 사이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내면적 대립은 이 마체라타 예수회원이 직면했던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도 벌어지는데, 우선 자신의 관습과 복장, 생활방식을 바꿔야 했고, 때로는 거대한 중국적 세계관에 대한 자신의 확신마저도 수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교우론은 단순히 중국인들의 복음화만을 지향한 이론적 개념을 넘어서, 예수회 선교 전략 안에서 자신이 염두에 둔 사람과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려는 실존적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마르티니는 이 리치의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옹호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방법이 용어 사용이나 순전히 이론에 국한된 질문의 수준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리치의 방식은 대화가 가지는 실존적 힘에 기반한 것으로, 비록 숱한 고난과 고독, 헌신을 요구하지만 사람의 영혼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2. 마테오 리치의 삶과 저작 속에 담긴 우정

마테오 리치는 [마체라타에 있는 동생] 오라죠 리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다른 형제들은 바다와 강에서 난파되어 실종되었고 나도 죽을 뻔했다. 다른 이들은 십자가 형으로, 추위로,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살아남은 우리는 항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수백만 명의 이방인들 한가운데 모두가 우리를 적대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지옥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한 것이리라 [믿고 있는데],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심판이 될 지 모른 채 매일 슬퍼하고 수없이 눈물 흘리고 있다.”[4]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리치는 온갖 장애물들과 모진 고난들을 헤쳐가며 두려움 속에서 그러나 종종 깊은 신뢰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학자들과의 우정을 가꾸어나갔다. 리치에게 이 난파 사건은 자신의 실존에 있어서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고 유학자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꿨다. 이 모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리치는 우정이야말로 중국고전 연구와 더불어 작은 고을뿐만 아니라 중화제국 전체를 개종시킬 수 있는 핵심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1595년 8월 29일자 두라테 데 산데*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치는 강렬한 어조로 자신의 난파 체험과 더불어 더 나아가 그전에 명조 유학자 사대부들과의 관계를 자꾸만 꼬이게 했던 의복을 바꾸기로 한 결심에 대해 얘기한다. 리치가 중국 관리들과 베이징으로 향하는 강을 따라 올라가는 여정 중에, 배가 침몰하여 리치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그전에 쑤저우韶州에서부터 동행했던 젊은 예수회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물에 빠진] 저는 물위에 떠오른 책궤와 침상을 보고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끌어당겨 힘껏 붙들었습니다. 마침내 선원들이 뒤집힌 배까지 헤엄쳐와서 저를 구해주고 뭍에 오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후앙 바라다스 João Barradas는 급류에 휩쓸려 사라져버렸고 더 이상 물위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계속 수색했지만 결국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5]

* 두라테 데 산데Duarte de Sande, 예수회 중국 선교사, 1547포르투갈 브라가 Braga 출생 – 1599년 마카오에서 사망

그러나 리치는 [난파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중국 선교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고 죽음에 대한 번민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땅에 들어선지 12년만에 – 정확히는 1583년 광동성 자오칭肇慶에 도착, 1595년 강서성 난창南昌에 진출 – 이 마체라타 예수회원은 옷차림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전혀 다른 용모를 갖추게 되었다. “저희는 중국인들이 천하게 여겼던 불교 승려의 이름을 버리고 유학자의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후 순찰사 신부(발리냐노)*에게 허락을 얻고 나서 턱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도 귀에 닿도록 길렀습니다. 옷차림도 더 이상 이전의 승려행색을 하지 않고 유학자들이 방문하는 때에 맞게 갖춰 입었습니다.”[6]

* 발리냐노 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 Fan Lian, 1539–1606) 이탈리아, 일본 선교 후 마카오에 머물며 예수회 아시아 담당 순찰사(Visitor)로 적응주의 선교 정책 추진.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원들은 초기에 불교승려 행색과 이름을 쓰기로 했었다(아마도 중국어로 ‘따오런’ 道人이 수도자에 해당한다고 여긴 것 같은데 사실 이 단어는 주로 도교 수도승(도사)을 일컫는데 쓰였다). 나중에 리치는 유학자들의 신뢰를 얻고 그들과 우정을 쌓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그들처럼 유학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탁월한 학자이자 리치 전기를 쓴 줄리오 알레니 Giulio Aleni*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은 1592년 이미 시작된 유교 경전에 대한 집중 연구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리치 신부님은 사서四書의 유럽어 번역을 시도했고 번역본을 본국에 보냈습니다. 동료들이 이 경전들을 읽고 높이 평가했는데 중국 고전이 지엄하신 주님에 대해 오해하지 않고도 스스로 위대한 기원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리치 신부님 덕분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먼 나라들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7]

* Giulio Aleni 艾儒略 Ai Rulue, 1582년 이태리 브레샤 Brescia 출생 – 1649년 푸젠성福建省 얀핑延平에서 사망.

유학자와의 친교를 보여주는 명확한 예가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서광계*와의 우정이다. 리치의 편지에서 언급된 그와의 우정에 관한 여러 사례들 중 하나를 보면 이 마체라타 예수회원에 대한 서광계의 지대한 관심과 중국에 있는 모든 예수회 공동체들에 대한 그의 문화적인 조언이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저희 바오로(서광계) 선생은 자기 지역의 풍습에 따라 부친 레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유클리드 기하원본 첫6권(幾何原本, 1607)을 발간했습니다. 저와 수년 동안(1600-1607)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놀랍게도 이 중국 땅에서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걸작으로 명확하게 검증하고 증명하는 법을 담았습니다.”[8]

* 서광계 徐光启 Xu Guangqi (1562년 상하이 출생, 1633 베이징에서 사망).

더욱이, 1608년 리치의 편지를 보면*, 서광계 부친의 장례예식이 북경 조정을 몹시 놀라게 했다. “모범적인 신자 바오로(서광계) 선생의 부친은 작년(1607년) 74세에 ‘레오’라는 세례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서광계는 조정의 고위관리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어떤 이교적 예식도 거행하지 않고 엄숙히 부친의 장례 예절을 지켰기 때문에 더더욱 황궁에서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아직 자질이 부족한 다른 신자들에게 크나큰 모범이 되었습니다.”[9]

* 리치는 1601년부터 1610년 사망할 때까지 북경에 머물렀다.

리치에게 서광계와의 인연은 결정적인 것으로, 북경 조정 안에서 자신의 명성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정이라는 정서 자체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했다. 이 우정은 자신의 영적 상태가 무척 슬프다고 표명했던 외로움이란 감정을 해소시켰는데, 이에 대해서는 예수회원들과 가족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거의 매번 언급된다.

이미 1595년 11월 4일자 편지에서 리치는 난창에서 자신의 명성이 알려지게 된 계기들 중 하나로 유학자들과의 만남 및 그들의 철학과 마주한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그 책들(유교경전)과 비교하고자 했을 때, 지난 몇 년간 사서四書 외에 육경六經* 전반에 정통한 좋은 스승들을 알게 되었고 그 모든 경전들 속에서 우리 신앙과 통하는 수많은 구절들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유학자들과 얘기할 때 그 경전의 교리가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통해 제가 논증하려는 것을 제시하곤 했습니다.”[10]

* 육경六經: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예기禮記와 악경樂經. 송대宋代 (960-1279) 이후에는 악경 대신 주례周禮를 넣었다.

바로 이 유학자(신유학자)들 세계와의 어울림과 긴밀한 유대의 자세야말로 리치가 교우론을 쓴 동기인데 이는 우정이 얼마나 개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유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요소인가를 보여준다.

3. 교우론: 실존과 교리 사이에서

“저 마테오는 아주 먼 서쪽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대명국 천자의 고귀한 덕과 옛 선왕들이 남긴 가르침을 경애하기 위해 중국에 왔습니다. 영표嶺表* 지방에 머문 이후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竇也 自太西航海入中華 仰大明天子之文德 古先王之遺敎. 卜室嶺表 星霜亦屢易矣).[11] 리치가 언급했듯이 교우론은 무엇보다도 우정을 주제로 얘기하는 서양 선비의 어록을 담고 있다. 또한 종교간 철학적 대화에 바탕을 둔 실존적 만남의 장에서 독특한 시선을 보여준다. 사실, 알레니가 ‘리치 전기’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마테오 리치의 책을 읽으면 마치 리치를 직접 만나는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12]

* 영표嶺表: 영남嶺南, 오령五嶺산맥 남쪽 일대의 땅. 오령五嶺 또는 남령산맥은 중국 남부의 산맥으로 광시 좡족 자치구, 광둥성, 후난성, 장시성에 걸쳐있다.

이러한 이유로 “교우론”은 단지 서양 고전의 지혜들을 담은 금언집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명나라 유교 문화에 대한 리치의 태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 사례이다. “벗을 자기 자신처럼 여길 때 멀리 있는 이도 가까이 느껴지고, 약한 이도 강하게 되며, 불행한 이도 행복하게 되고, 아픈 이도 치유가 된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죽은 이도 산 것처럼 느껴진다.”(親友如己者, 則遐者邇, 弱者强, 患者幸, 病者愈, 何必多言耶? 死者猶生也).[13]

동시에 교우론의 주제는 유교에서도 근본적인 것으로, 공자에 따르면 타인과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더불어 굳건하고 영속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가장 확고한 토대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리치는 자신이 이해한 유교 지식을 유럽 철학의 진수와 능숙하게 버무려 자신의 의도에 맞게 명대 유학자들에게 보여준다.

공자 어록인 논어는 이웃과의 관계, 벗을 향한 진실성에 대해 증자曾子의 입을 빌어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나 자신을 반성해본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면서 충실하지 않았는지, 친구와 교제하면서 미덥지 않았는지,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면서 스스로 익숙하지 않았는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14]

그러므로 교우론은 또한 유교의 기본 주제들과 가까워지고 대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즉 우정에 관한 구절을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맺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에서부터 공동 토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했듯이, 마테오 리치는 교우론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펼치고 다듬어서 유학자들로 하여금 그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사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의 주제들을 거듭 언급하며[15] “우정에 관한 것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友之物皆與共)[16]고 얘기한다. 따라서 리치의 철학적 기반은 교우론 전반에 걸쳐 언뜻 보기에 전혀 별개로 보이는 두 가지 측면을 혼합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리치 특유의 접근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데, 명나라에서의 그의 삶은 항상 자신의 사유를 수반하여 실존적 측면과 이론적 측면을 융합시켰다. 이런 토착화 방식은 전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우정의 정서가 타인들을 개종시킬 가능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고, 동시에 진심으로 순수하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늘 크나큰 곤경들 와중에 이루어졌는데 알레니는 이렇게 전한다. “리치 신부님은 항상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자신이 머물던 곳이 외국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경멸을 감내해야 했지만 리치 신부님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17] 이런 일은 그의 신앙뿐만 아니라 유학자들과의 현명하고 사려깊은 우정이 그리스도교와 유교 사이 대화의 핵심 열쇠라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신부는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전환되는 격변하는 중국의 역사적인 순간에 리치의 방식을 옹호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 선교방침의 대강을 제시한 리치가 자신의 유산을 후임 선교사들에게 남긴 덕분에 마르티니는 왕조전환기의 참혹한 전쟁부터 제사에 관한 이론적 충돌까지 당시 중국의 상황을 그려낼 수 있었다.

4.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우정 연구

“어떤 서양 선교사도 마르티니만큼 유럽에 중국 지식을 소개하는데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리치가 처음으로 유럽 문물을 중국에 소개한 사람이라면 마르티니는 중국의 현실을 처음으로 그리고 상세히 유럽의 독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 하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1655년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된 중국 지도 Novus Atlas Sinensis 였습니다. 이 작품은 17개 채색 지도들로 구성된 중국의 지리 형태를 처음으로 유럽독자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최초의 라틴어 표기로 만여 곳 이상의 지명들이 정확히 표시되어 15 개 성의 중국 지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첨부되었습니다.” [18]

1614년 트렌토에서 태어난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모험은 여러 차례 바다를 헤친 끝에 중국 항저우 杭州에 도착했고, 거기서 1661년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거대한 시도들을 감행했다. 마테오 리치처럼 쥬세페 롱고 Giuseppe Longo가 요약한 인물평에 따르면 마르티니는 훌륭한 수학자이자 천문학 애호가였지만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가장 고전적인 그리스와 라틴 고전들에 대한 저명 작가들의 발췌문을 한문으로 번역했다.[19]

이 트렌토 예수회원은 정밀한 지도에 그려진 중국의 미학으로 유럽의 시선을 끌었는데, 지리적 관점에서도 동아시아를 알리는데 유용했다. 그의 정확성은 또한 명조에서 청조로 넘어가는 어려운 시기에 직면했던 매우 선명한 인식과, 동시에 중국에 진출했던 첫 예수회원들이 이루어놓은 초기 선교사업들의 보호와도 관련된 것으로, 이는 위대한 종교적 열정과 중화제국에서 설교하는 어려움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마르티니는 경계선들을 긋고 중국의 모든 개별 도시들을 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록 전쟁과 유혈충돌로 가득 찬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소명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마르티니의 선교는 사실, 마테오 리치가 자신의 저작, 특히 ‘천주실의’[20]에서 설명했던 철학적 신학적 입장 모두에 대한 깊은 옹호를 특징으로 한다. 이 트렌토 예수회원은 1654년에 탁발 수도회, 특히 도미니코 회원들과 프란체스코 회원들이 중국 전통제사에 대해 리치가 용인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 이 제사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이에 관해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이 문제를 검사성성(檢邪聖省, 신앙교리성)에 맡겼는데, 여기에 마르티니가 보고서를 보냈다. 롱고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심의에서 마르티니는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예수회원들의 사목적인 상황을 변호했는데, 그들이 제사를 용인한 것은 주의깊고 온건한 자세로 그리스도교 교리의 신비를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을 당황케 하지 않기 위함이었고, 마르티니도 리치의 선례를 따라 전혀 다른 전통에 있는 사람들이 수많은 신앙의 계명들을 바로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점진주의와 신중함을 채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21]

* 알렉산더 7세 (1599년 시에나 출생–1667년 로마에서 사망), 재위 (1655-1667), 1656년 예수회 적응주의 방침 허용; 이후 1715년 교황 글레멘스 11세와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조상제사 금지 교서 발표.

하지만 제사논쟁은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유교 가르침과도 관련돼 있기 때문에, 공자를 경배하는 것이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교 교리와 상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마르티니는 유교 학설이 공자 경배와 마찬가지로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탁발수도회들이 주장하는 신적 숭배가 아니라고 단호히 논박했다. 사실 공자가 어느 만큼 삶과 도덕행위의 스승이었는지,[22] 명나라 때 어느 정도로 유교가 국가 종교라기보다 삶의 철학을 대표했는지, 또는 공자가 성자라기보다는 현자였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우노키치 하토리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상반된 설명은 ‘聖(shèng, 성스러움, 성인)’이란 단어에 대한 다양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공자는 살아생전 여러 사람들에게 성자로 존경 받았고 그가 죽은 후에도 곧바로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성인’이란 단어는 공자만을 지칭했었고 나중에는 공자라 불리기보다 단순히 ‘성자’로 불렸다. 어떤 이들은 성인, 특히 공자같은 성인을 특별한 하늘의 선물로 여겼다.[23]

이 지점에서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의 연속선 상에 있는 마르티니의 ‘구우편逑友篇’ Trattato sull’Amicizia 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트렌토 예수회원에게도 우정은 종교간 철학적 대화의 핵심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저작은 유교와 유럽 철학의 고전들이 어우러져 공자의 성스러움보다는 공자의 지혜를 보여준다.

5. 다양한 사유들을 연결시킨 ‘구우편逑友篇’

“우정은 사랑의 바다이다. 항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파도가 잔잔할 때에는 배들이 조용히 전진하지만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면 수많은 배들이 뒤집히고 비참하게 가라앉는다. 바다의 모습은 한결같지 않다. 항해하는 이들은 그래서 조심스럽고 주의 깊고 신중하다. 사랑의 바다를 건너는 이도 마찬가지이다.”(友者愛之海, 最難遊也. 浪恬按平, 舟怡然入海洋; 倏狂風快起, 拱濤浦浩, 多覆溺憂. 海性無恒,航海者固兢兢戒謹也. 渡愛海者亦然.)[24]

마르티니가 우정이란 주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의 저작에서 처음부터 ‘바다, 항해, 난파’의 은유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은유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특징짓는 고통의 깊이를 내포한다. 이것은 또한 리치가 겪은 난파와 난관들, 그 와중에서도 견지했던 중국 선교에 대한 그의 깊은 확신을 상기시킨다. 결국 마르티니는 이 은유에 담긴 우정의 본질을 유학자들에게 예리하지만 침착한 어조로 호소하고 있다. 즉 짧은 구절을 통해 그가 중국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든 동료들을 잃고 여정의 단계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고통을 회상하고 있다.

마르티니의 ‘구우편’에는 곳곳마다 우정의 미덕에 관한 깊은 확신이 나타난다. “영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 사랑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을 줄 알고 이 사랑을 받는 이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 그래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상황이 호의적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이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감행한다.”(愛旣全得於心, 無事複强也. 善奪愛者之心, 而獻之於己所愛焉. 故眞愛無懼, 不顧事勢難易, 莫不奮身以就所愛, 而拯其急也.)[25]

하지만 우정은 다른 무엇보다 탁월한 “덕과 정의로부터 기인하는 한계들을 지니고 있다.”(交有疆域, 惟德惟義. 求非義者, 越其界矣.)[26] 이런 의미에서 마르티니는 ‘덕’과 ‘한계’와 같은 고차원의 개념들을 유학자들에게 환기시켜 중용의 핵심 개념을 다시 불러낸다. 사실 류닝劉凝 (1620-1715)은 ‘교우론’ 재판 서문에서 유교 전통을 상기시킨다. “사실 우정은 단지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헌신과 관련된 것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똑같이 관련된 누군가와 의논할 수 있는 능력이고, 상대방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을 사귄다’라는 표현에 관해서는 ‘중용’ 구절을 보라.”[27] *

* 중용 13: “벗에게 구하는 바로써 먼저 벗에게 베풀지 못한다” (所求乎朋友 [以]先施之未能也 – 벗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그에게 베풀면 벗을 사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 하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與人, 논어)

따라서 전체 논의뿐만 아니라 인용문들과 은유들은 엄밀하게 종교적 의미에 국한되기보다는 더 넓은 방식으로, 유럽의 철학 사유들과 고대 유교 및 신유학 사유들 모두 아우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마르티니의 시선은 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유학자들을 포용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종교간 대화에 호의적인 토양을 마련한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사유의 경연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적 공연(볼거리)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마르티니가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저술 자체는 우정이란 주제에 관해 자신과 조정 관리 주시(祝石Zhu Shi)와 나눈 열띤 지적 토론에서 비롯된 것이다.[28]

따라서 그 대화는, 리치의 경우처럼, 예수회원들이 자신들의 선교 여정에서 체험했던 구체적인 사례들로부터 시작했고, 다음 단계에서는 이 사례들을 자신들의 철학 저술 안으로 능숙하게 옮겨갔다.

우정과 덕행의 연결은, 리치의 선례처럼, 명확히 유럽과 중국의 도덕체계를 이해하고 통합하려는 의지와 결합된 것으로, 제사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타자와의 대화능력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 결과 마르티니의 논지는 종종 혁신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어 그와 동시대 사람들, 특히 그의 후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주제와 관련해 마르티니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고 나의 벗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 육신을 사랑하지만 나의 벗은 내 영혼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정은 덕을 돕지 육신을 돕지 않는다.”(有愛我者, 有友我者. 愛我者, 好我之身; 友我者, 好我之心. 故友者, 德之助, 非身之助.)[29]

마르티니는 자신의 철학적 명료함으로 유교의 도덕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고찰들을 통해 성현(saggio 聖 shèng)으로서의 공자의 역할이 분명해지고 우정에 대한 그의 개념은 종교적 고려사항들이 제거된 의미로 전해졌다.

덕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우정은 항상 유교적 의미, 즉 깊은 주의력과 관련돼 이해된다. 앞서 은유법으로 돌아가서, 우정으로 물결치는 사랑의 바다는 장애물로 가득 차 있고, 홀로 덕행의 범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그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더 먼 항해로 이어진다. 우정은 길(道)을 비추는 거울이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며, 실존적 어려움에 직면하여, 이성에 의지하고, 신앙에 자신을 열게 된다.

이는 또한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강조한 것이다. “바른 길은 띠풀(장애물)들로 막혀 있지만, 나쁜 길은 넓게 열려 있다. 그런데 진실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르고 함부로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참된 길이 거짓처럼 보이고 거짓된 길이 진짜처럼 보이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잘못 선택해서는 안 된다. 수만 가지 행복(천당)을 찾다가 결국 수만 가지 고통(지옥)에 이르렀다면, 걸어온 그 길을 탓해야 할 것이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신중히 선택해야 할 것이다.”(正路茅塞, 邪路反闢, 固有不知其路, 而妄爲引者. 真似僞也,僞近真也,不可錯認也, 向萬福而卒至萬苦罪, 彼行路慎之哉!).[30]

도교와는 달리, 리치에게나 마르티니에게나 ‘목표’는 길(道)을 이해하는데 본질적인 것이었다. 우정은 거울의 방식으로 영혼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준다. 이는 곧 신앙과 개종을 향한 열린 통로이기도 하다.

여기서 뚜렷하게 주목되는 것은, 마르티니의 생각이 리치의 생각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둘 다 유학자들의 예법, 그들의 전통, 그들의 철학을 익혀야만 그들을 개종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

6. 중국 사유와의 현대적 대화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때, 마침내 저는 산다는 것의 의미, 쓴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통의 체험만큼 세상에서 사람들을 소통으로 이어주는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친밀한 접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국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제 고통에 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둘 다 같은 것입니다.”[31]

이태리어 어원 사전에 따르면,[32] “개종, 회심”을 뜻하는 이태리어 ‘conversione’은 “변환, 전환, 혁명”을 나타내는 라틴어 conversio에서 파생된 것이다. 때로는 비극적인 어조로, 때로는 장대하게 현대 중국의 발전을 묘사하고자 하는 유화余華(Yu Hua)의 체험에서, 고통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적인 변화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고통의 경험은 마테오 리치에게도 마르티노 마르티니에게도 자신의 삶 자체를 뒤엎고 뒤바꾸는(con-vertire) 것이면서 또한 유학자들의 마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예수회원들은 타인과의 화해와 대화의 태도를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 채 자신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뒤흔들고 바꾸어 가면서 중국인들의 전통을 향해서 자신을 돌려 세웠다.

마르티니와 리치는 중국과 유럽에 어떻게 우정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포용하며, 갈등 없이도 새로운 사회의 윤곽을 그려가는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토착화는 하나의 꿈이자 비전으로써, 여기에서 우정은 아득히 먼 세계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거니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주는 끈이 된다.

 


[1] “교황, 세계가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장” F. Sisci, «Pope Francis urges world not to fear China’s rise», in Asia Times, 2 febbraio 2016 (in it.: «Incontro attraverso il dialogo», in Oss. Rom., 2 febbraio 2016).
[2] ‘교우론’交友論(1595) M. Ricci, Dell’ Amicizia, Macerata, Quodlibet, 2010.
[3] ‘구우편’逑友篇(우정에 관한 소고) M. Martini, Trattato sull’Amicizia, Trento, Centro Studi Martino Martini, 2008.
[4] ‘리치 서한집’(1605년 5월 12일, 북경), “To Orazio Ricci, Macerata” M. Ricci, Letters, Macerata (Quodlibet, 2010), 401쪽.
[5] ‘리치 서한집’(1595년 8월 29일, 난창), 208쪽 이하
[6] ‘리치 서한집’(1595년 8월 29일, 난창), 217쪽.
[7] 알레니, ‘서양 선비 마테오 리치의 생애’ G. Aleni, Vita del Maestro Ricci Xitai del Grande Occidente, Brescia, Fondazione Civiltà Bresciana, 2010, 45s.
[8] “예수회 총장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Claudio Acquaviva신부에게 보내는 편지”(1608년 8월 22일, 북경), 리치 서한집, 487쪽.
[9] “아쿠아비바 총장에게 보낸 편지”(1608년 3월 8일, 북경), 리치 서한집 468쪽.
[10] “아쿠아비바 총장에게 보낸 편지”(1595년 11월 4일, 난창), 리치 서한집, 315쪽.
[11] ‘교우론’ 서문 M. Ricci, Dell’ Amicizia, cit., 63.
[12] G. Aleni, Vita del Maestro Ricci Xitai del Grande Occidente, cit., 86 [알레니, “서양 선비 마테오 리치의 생애].
[13] ‘교우론’, 제43항 M. Ricci, Dell’ Amicizia, cit., 77.
[14] ‘논어’, 학이學而, 4절; Confucio, Dialoghi, Torino, Einaudi, 2006, 3.
[15] 리치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1170b 5-14절과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장 4-10절을 언급한 듯하다. Ricci probabilmente fa riferimento ad Aristotele (Etica Nicomachea, 1170b 5-14) e ad Agostino (Confessioni, IV, 4-10).
[16] ‘교우론’ 29항 M. Ricci, Dell’ Amicizia, cit., 73.
[17] G. Aleni, Vita del Maestro Ricci Xitai del Grande Occidente, cit., 41 [알레니, “서양 선비 마테오 리치의 생애].
[18] 마시니, “마르티노 마르티니: 유럽 속의 중국”, 파테르니코 편, ‘거인들의 세대: 마테오 리치의 발자취를 따른 예수회 과학자들과 선교사들 F. Masini, «Martino Martini: la Cina in Europa», in L. Paternicò (ed.), La Generazione dei Giganti. Gesuiti scienziati e missionari in Cina sulle orme di Matteo Ricci, Trento, Centro Studi Martino Martini, 2011, 77.
[19] ‘중국을 소개한 예수회원: 마르티노 마르티니의 생애와 저작’ G. O. Longo, Il gesuita che disegnò la Cina. La vita e le opere di Martino Martini, Milano, Springer, 2010.
[20] ‘천주실의’天主實義 M. Ricci, Catechismo. Il vero significato del «Signore del Cielo», Bologna, ESC, 2013.
[21] ‘중국을 소개한 예수회원’ G. O. Longo, Il gesuita che disegnò la Cina, cit., 107.
[22] ‘중국을 소개한 예수회원’ Ivi, 109.
[23] ‘공자의 천명에 대한 확신’ Unokichi Hattori, «Confucius’ Conviction of His Heavenly Mission»,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1 (1936) 97.
[24] ‘구우편’逑友篇 M. Martini, Trattato sull’Amicizia, cit., 9.
[25] ‘구우편’ Ivi, 19.
[26] ‘구우편’ Ivi, 21.
[27] ‘구우편’ Ivi, 68.
[28] ‘마르티노 마르티니: 유럽 속의 중국’; F. Masini, «Martino Martini: la Cina in Europa», cit., 71.
[29] ‘구우편’ M. Martini, Trattato sull’Amicizia, cit., 17.
[30] ‘천주실의’天主實義, 제6편 M. Ricci, Catechismo. Il vero significato del «Signore del Cielo», cit., 365.
[31] 유화, ‘열 가지 단어로 본 중국’ 余華, 十個詞彙裡的中國, Yu Hua, La Cina in dieci parole, Milano, Feltrinelli, 2010, 228 s. [China in Ten Words] * 人民 People, 領袖 Leader, 閱讀 Reading, 寫作 Writing, 魯迅 Lu Xun, 革命 Revolution, 差距 Disparity, 草根 Grassroots, 山寨 Copycat, 忽悠 Bamboozle.
[32] ‘이태리어 어원 사전’ O. Pianigiani, Vocabolario etimologico della lingua italiana, Roma, Dante Alighieri,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