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토착화와 교회의 개혁

호세 마리오 C. 프란치스코(José Mario C. Francisco S.I.)
안봉환 신부 옮김 (전주교구, 광주 가톨릭 대학교 교수)

토착화와 개혁

  본 성찰은 복음화가 교회의 개혁을 통한 토착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본 다음, 특별하게 아시아 교회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쇄신(aggiornamento)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종교적 역동성과 관련하여 토착화에 대한 비판 범위는 동일하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심을 선포하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적 개별적인 삶으로 전개함은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에 따르면, «복음화와 토착화는 서로 자연적이고 내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토착화는 그 모든 차원에서 복음화의 전달자로서 교회의 본성과 실재와 사명을 다루며 단순하게 교회의 내부에서(in intra) 부차적인 임무로 간주될 수 없다.
이런 복음화를 이루는 토착화의 역동성이 «한 분이며 삼위이신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이해된 만남의 대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복음화 그 자체가 무엇보다 복음과 구체적인 실재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는 «어떤 상황에 미리 맞추어 놓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한 적용»이 아니다. 이런 보편적인 대화를 통해서 성령의 현존은 각각의 상황에서 규명되고 이로써 복음이 선포된 역사적인 형태들을 묻는다.
  이런 비판적인 만남은 «지역 교회 안에 말씀의 창조적인 육화»라는 결실을 맺는다. 그 창조적 육화는 고유한 물질적 문화적 원천에서 시작하여 명확해지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각 신자들에 의해 형태를 이루며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종교 행위로 나타내어 보편교회와 하나 되어 생생한 믿음을 지닌 자신의 전통을 이루게 한다.
  이처럼 토착화는 복음화와 지속적인 개혁이라는 교회 임무를 이행하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토착화에 전념하지 않는 교회는 자신의 복음화 사명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약화시킨다. 아시아 교회의 책임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교에게 중대한 새로운 사건은 아시아에 순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등장으로써 그들의 사고방식, 기도와 삶의 방식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아시아다운 그런 공동체여야 한다».

아시아 상황의 종교적 역동성 

  현대 아시아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는 아시아 지역의 성숙하는 지리정치학적, 인구통계학적 의미와 아시아가 본질주의적인 개념들에 맞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상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아시아는 역사이론을 뛰어넘어 형성된 어떤 것으로 바라봐야 하고 단순하게 «비서양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나아가 아시아의 수많은 상황을 서술할 때 신학적, 문화적 연구 결과에 따른 여러 동향이 뒤섞여 개입하고 있다.
  첫 번째 동향, 즉 «시대의 징표»로 나타내는 상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제4항에서 기원한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제4항은 상황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적 배경으로 나타내지만 더 구체적인 진술은 제공하지 않는다.
  두 번째 동향은 상황을 문화의 장소로서 소개한다. 이 동향은 이미 「사목헌장」 제58-59항에서 제시되었고, 문화를 «어떤 백성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신념과 행동, 지식과 처벌, 가치와 목적의 총체»로 바라보는 근대 인간학적 관점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문화가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 관계와 사회 구조와도 연계될 때부터 이런 경험적이고 실험적 차원으로 변화는 불완전함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상황을 사회 구조로 바라보는 세 번째 동향이 부각되었다. 비판 이데올르기의 서로 다른 형태들, 즉 후기 식민주의자, 여성해방론자, 자유해방주의자와 같은 몇몇 형태는 사회 구조에 집중되어 있다.
  끝으로 어떤 상황도 고립되지 않았고 그 상황에 관한 어떤 보고서도 철저하게 규명하지 못하거나 모든 일원들을 획일적인 방식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네 번째 동향, 즉 상황을 문화 간 대화로서 인정하기에 이른다. «다른 규율을 적용하는 식민지화를 멀리하면서 확실하게 통합적인 신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단편적인 것들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서로 다른 상황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 이런 특징에 따라 토착화의 목표는 아시아의 서로 다른 상황들에서 종교 전통들의 역동성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 공통 지리, 서로 연관된 민족성과 역사에 기인되는 «가정의 유사함»을 토대로 이런 역동성들의 내부에서 세 개의 사회 과정이 부각되지만 그들 각자 서로 다른 상황들에 그리고 서로 다른 단계들에 적용된다. 

종교적 사회적 전통들의 상호작용

  아시아의 상황들은 다양한 색깔의 수많은 형태, 새롭고 오래된 형태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형태의 헤아릴 수 없는 종교 전통들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나아가 이런 종교 전통들은 그들 간에 그리고 전통적인 지역 관습들과 상호작용한다. 예를 들면 아시아를 개관할 때 유교와 도교와 같은 민족 전통, 그리고 샤머니즘과 토속 전통들과 같은 지역 관습과 상호작용하는 불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그리스도교로 이루어진 수많은 형태를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종교 전통들은 공통적으로 사회학과 신학적 대화들 안에서 «종교»와 «세계 종교»로 숙고되는 것을 뛰어넘는다. 그런 범주들은 비서양적 종교들, 특히 «개인이 “소속”»된 서양의 종교 단체로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또는 주장하는 교리와 가르치는 윤리가 접목된 시스템으로 특징을 이루었던 종교들에 합당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제2-4항)조차 이른바 «전통 종교들», 즉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종교들과 그리스도교 종교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이를 묵시적으로 활용한다. 나아가 교황 바오로 6세의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제53항)는 비그리스도교 종교를 그리스도교와 비교되는 «자연 종교의 표현들»로 언급하면서 그 종교들의 순수하게 인간적인 기원을 섬세한 방식으로 나타낸다. 그런 대화는 «종교»의 지배적인 개념을 따르지 않는 아시아의 상황들 안에서 종교 전통들을 왜곡하여 이해할 위험이 있다. 

국가와 신앙인들의 관계

  아시아의 상황들은 지배적인 종교 전통들로 형태를 이루었고 계속해서 심오한 형태를 이룬다. 인도에서는 힌두교, 서아시아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에서는 이슬람교, 스리랑카과 중국, 일본과 한국,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는 불교, 필리핀과 동티모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종교 전통들을 이룬다. 국가와 내적으로 연계된 이 종교적 역동성은 모든 상황의 중심에서 인구의 사회 윤리(ethos)로 그리고 특히 국가주의와 정부-국가의 등장을 통해 정치와 신앙인들의 통합으로 곧장 드러나는 것을 제외하면 역사 관계로도 종종 보여 주었다.
  특수한 상황들 안에서 지배적인 사회 윤리(ethos)는 개인과 사회 실체의 많은 단면을 내포하고 종교 전통과 다른 사회적 전통들 사이의 경계선에 많은 틈새를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종교들 또는 종교 전통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교와 다르지 않게, 삶의 방식들이 다양하고 그런 의미에서 문화와 구별될 수 없고 적어도 문화와 떼어놓을 수도 없다».
  나아가 이런 지배적인 종교 전통들은 국가를 «고안된 정치 공동체»로 이해하였든, «특정한 국가, 즉 국가 정체성이 제대로 갖춰졌다고 보는 것에 대해 어떤 단체가 갖는 고유한 관점»으로 이해하였든 간에 아시아의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될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와 신앙인들의 관계와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자주 발생되는 통합은 다른 정체성과 종교 소속의 일치를 전제하는 사회 논리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면, thai라는 것은 불교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때 이 두 번째 역동성은 세속성에 관한 근대적 대화, 특히 종교 차원에게서 다양한 사회 영역의 분리를 문제로 삼는다. 아시아의 상황들에서 종교 행위는 관습, 제의식과 전통 행위 안에서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종종 이루어지며 서방 사회에서 강조된 만큼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속화에 관한 이런 주장이 «이전에 갖고 있던 확신을 더 이상 고취시켜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정치”와 “종교”의 범주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하게 서로 타협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발견으로써 근대의 정부-국가의 권력들에 대한 우리의 성숙한 이해를 동반하였다. 세속성의 개념은 종교의 개념 없이 작용할 수 없지만» 그들 관계가 모순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시아의 많은 상황들 안에서 이런 역동적인 사회화 과정은 개인과 공동체의 «전반적이거나 복잡한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많은 지역들 안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 전통들이 접근하며 다소 유동적인 만남을 오랫동안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역동성 안에는 종교들끼리 뿐만 아니라 문화 전통들끼리- 또는 “종교”는 문화와 백성의 특징들과 동떨어진, 유동하는 실체로서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문화적 원형들의 중심에서 종교들끼리-도 때때로 이데올르기의 대립, 정치 종교적인 정복, 식민주의 등과 같이 너무 달갑지 않는 여정을 통한 만남이 많았다».
  실제로 아시아에서 대립과 종교 폭력이 종종 발생되었던 배경에는 «권력의 연계선상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민족과 종교, 민족종교 그리고 민족국가주의, 계급제도, 사회경제 및 정치 계층의 정체성을 지닌 특수 집단에 소속된 다양한 단체들»이 작용한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서» 종교 행위

  문화에 대한 연구들은 현대 아시아의 상황들을 대부분의 현재와 과거 사회보다 더 불완전한 상황으로 진술하며 새로운 공간-시간 형태를 만드는 신속하고 포괄적이며 심오한 유동성이라는 용어들로 진술한다. «여기와 저기 사이에서»로 서술된 이런 형태는 강화되었지만 인구와 자원과 정보의 총체적인 변동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았고 상징적인 자료와 정부-국가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뛰어넘어 서로 다른 공간-시간적 장소에서 파생된 의미의 순환으로 이루어졌다.
  공간과 시간 안에서 움직임은 일방선상의 여정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순환하는 유동으로 바라보았다. 국가를 통해서 그리고 국가의 중심에서 공동체와 개인은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특징을 이루는 매개 상황에서 살고 있다. 이민자들이 큰 틀을 이루고 그들 출신지와 목적지에 동시에 소속된다. 생활권이 생계농업과 도시빈민 사이에 놓여 있고 그 지역의 사람은 지구의 다른 편에 있는 가족과 홍보매체 기술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런 유동성의 굴레에 사로잡힌 아시아는 과거에 «기술이 그려놓은 온순하고 동요가 없는 장소로» 보았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아시아의 상황 안에서 새로운 홍보수단이 사회화 과정을 민주화하고 나아가 여성과 노인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는 잠재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의 종교 행위는 이런 점에서 면제를 받지 못하였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에서 «(…) 대단히 중요한 모든 역사의 발전은 종교의 변화들을 거쳐 이루어졌다».
  인구 변동은 그들 각자의 집과 손님을 맞이하는 공동체들 안에서 종교 행위를 바꾸어 놓았다. 종교 기관과 단체는 소셜 미디어에 웹사이트와 주소를 만들었지만 블로그가 종교 문제를 토론할 수 있고 공식 정보를 바꾸기까지도 하면서 종교 행위를 감독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약화되었음을 의식한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영적 동반과 묵상 형태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국제화와 문화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현 시대에 어느 누구도 문화나 종교를 세밀하게 다루지 않고 어떤 상징체계도 종종 신뢰하던 독점 권리를 확실하게 요구할 수 없다고 본다». 현대의 유동성은 아시아의 서로 다른 상황들 안에서 공동체와 백성의 사회-종교적 정체성의 독특한 절충을 약화시키는 대신 오히려 이를 강화시켰다.

아시아 토착화를 위한 비판 범위

  그리스도교는 아시아를 개관할 때 그리스도교를 외국인과 소수자로 바라보는 판에 박은 전파로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근원은 예수님을 추종하고 오늘날 이 땅에 이런 종교 전통을 아주 빠르게 성장하게 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세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은 삼중 대화의 상징적인 용어를 통해 아시아의 복음화 과제를 문화와 종교와 백성, 특히 가난한 이들과 접목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에 피조물과 나누는 대화를 덧붙인다. 나아가 이 복음화 과제는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대한 통합적이지만 논리적이고 보완적인 차원들»로서 선포 및 대화를 포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아시아의 교회는 토착화, 즉 새로운 공간-시간적 형태들 안에서 종교 사회적 전통들 사이에서 맺은 절충으로 특징을 이룬 서로 다른 상황들에서 복음화의 일부분으로 바라보는 토착화를 추진하였다.
  나아가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의 각 부서들은 관련 부처들을 위한 세부지침을 마련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따르는 토착화는 일정한 비판 범위 안에서 공간을 확보하였으나 여전히 심호흡을 깊게 내쉬며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판 범위는 삼중 대화, 즉 문화와 종교와 백성과 나누는 대화가 각자 따로따로 이루어질 수 없고 토착화에 통합된 접근을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행위의 언어와 전달

  그리스도교 행위의 언어와 전달은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토착화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교 행위의 언어는 일반 사람들이 삶과 역사 안에서 사용하는 순수 언어에 더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다. 또한 그 언어는 아시아의 수많은 토속어뿐만 아니라 의미, 즉 그것이 물질적, 동사적, 신체적, 상징적 것이든 어떤 정해진 상황에서 한 백성의 윤리(ethos)를 전달해주는 무엇이든 의미를 형성하고 전달해주는 모든 수단들도 사용하도록 한다. 이런 홍보 네트워크에 뿌리를 내린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행위만이 그런 상황에서 신앙 자체를 왜곡할 위험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고 표현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한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는 다음과 같이 이중적이다. «토착화는 문화 미디어를 통해서 복음과 신앙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를 체험하고 이해하며 한 백성의 문화 수단을 통해 순응하는 것도 내포한다».
  첫 번째로 교회는 아시아의 서로 다른 상황들 안에서 그 신앙을 토착하기 위한 이런 모든 홍보수단을 파악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이런 모든 홍보수단이 종종 다른 종교적, 문화적 전통들의 흔적을 남기더라도 교회는 백성의 윤리(ethos)의 중요한 부분인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관용구, 공경의 자세, 다른 종교들의 예식 행위와 기도문들, 자녀 공경과 대중적인 지혜를 갖춘 전통 양식과 같은 의미심장한 주제들이 백성의 윤리에 속한다. 교회가 그런 홍보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혼합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복음과 상황 사이에서 나누는 비판적인 대화 과정의 통합 부분에 속한다.
  두 번째로 언어를 통한 토착화는 교회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다른 상황들에서 나눈 대화들과 그리스도교 행위를 대중적인 순수 언어로 옮기는 것도 요구한다. 이런 작업은 원문 번역과 해석 그리고 중심 본문들의 요약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들에서 그리스도교 행위를 아시아의 특수 환경에 속하는 순수 언어로 해석해주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이런 대중적인 순수 언어로 옮기는 과정은 복음과 상황을 포용하여 다방면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인 것이다. 현대 이론과 실천이 나타내는 것처럼 번역은 서로 다른 언어들 안에서 같은 말과 표현을 찾는 것 이상으로 본래의 세계와 새로운 상황의 세계를 서로 연결해주는 매개이다. 이런 경우 번역은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종교 영성적 세계와 아시아의 특수한 상황들에 놓인 세계를 서로 연결해주는 매개인 것이다. 옮기는 과정에서 두 개의 세계 모두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항상 고정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된다.
  나아가 토착화된 그리스도교 종교 행위는 사목 신학적인 성찰뿐만 아니라 전달하기에 적합한 방식들도 요구한다. 사목 신학적인 성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어떤 특수 상황에 놓인 언어들과 접목되어야 한다. 이런 성찰에서 생겨나는 표상들과 주제들은 더욱 토착화된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여 다른 상황들에 놓여있는 신학들과 더 풍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다.
 “교리교육”이라는 개념 아래 숙고된 그리스도교 종교 행위를 전달하는 방식은 적합한 방법론뿐만 아니라 토착화된 방법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아시아에서 종교 행위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사회화와 형성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전통적인 교리교육은 종종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된 교육을 목표로 삼았다. 아시아의 상황들 안에서 그리스도교 행위를 전달할 때 역사와 상징과 제의식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상 안에서 책임

  세상에 교회의 존재라는 토착화는 아시아의 민족들, 특히 소외된 이들과 젊은이들(두 그룹 모두 상당한 수를 헤아린다)의 열망과 교회의 연대, 나아가 공동선을 추구할 때 다른 유기적인 실재들을 통한 교회의 책임을 수반한다. 그들의 종교 소속과 무관하게, 소외된 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사회적 임무를 이행할 때 아시아 교회의 오랜 전통은 이런 연대를 드러내 보여주는 적절한 표징이었다.
  그리하여 아시아 교회의 사명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교(missio inter gentes)로 정의되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선교(missio ad gentes)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서로 다른 다원주의적인 삶의 자리(Sitzen-im-Leben)에서 아시아 백성들의 연대와 조화를 강조하고 «세상 안에서, 세계의 대종교들 안에서, 토속 종교들과 세속 종교 안에서 하느님의 선재적인 현존과 활동»을 염두에 둔 것이다.
  종종 소수자라는 교회의 상태(status)와 그리스도교를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표상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노력은 잠잠해지면서 교회를 세상 안에서, 특히 정치 세력과 다른 형태에 속하는 세력들이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에 무관심한 그런 상황들에서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각 개인은 그들의 적은 숫자에 전념하는 대신 교회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하느님 나라의 가치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심오한 열망에 부합하는 많은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결합할 수 있다.
  인간의 전반적인 발전과 영적 의미를 도모할 때 이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지배적인 사회 세력, 특히 경제 정치적 신자유주의가 사회적인 변화를 막을 때 현대 아시아의 상황들 안에서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이런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 교회는 매우 폭넓은 사회 종교적 움직임을 형성하는 다른 사회, 종교, 시민 그리고 정치적 실재들과 협력을 강화한다. 그 실재들은 환경보호의 공동작업과 서로 다른 종교 전통들에 속한 사람들이 공경하는 거룩한 장소들을 찾는 그런 순례를 포함하여 많은 대중적인 세속 종교적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한 참여와 정의를 위한 활동»에 바탕을 둔 «삶의 대화»라고 정의되었던 이런 협력에서 교회는 이미 준비된 대답을 내놓는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종종 공동선을 분별하기 힘들 때 동일한 입장에 처한 참여자로 놓인다. 즉 «전통과 문화 그리고 살아있는 종교,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들의 삶에 관련된 모든 실재와 지속적이고 겸손하며 애정이 담긴 대화를 나누는 하나의 교회»를 말한다.
  나아가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재화를 식탁 위에 놓는 것처럼 교회는 자신의 유산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서로 나누어야 하고 이로써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교회가 공적으로 내는 소리는 권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엘리트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상이점이 생기겠지만 협력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을 항상 추구하도록 전념해야 한다.

교회의 협력 문화

  교회의 협력 문화의 토착화는 위계 구조와 제도적 임무를 논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과 그룹이 각자의 고유한 위계적, 제도적 본성이 부여된 다음 세상 안에서 그들 간에 그리고 다른 이들과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협력하는 방식에 전념한다. 이런 부문이 중요한 것은 개인들이 맺는 관계의 문화적인 문제들과 통치 스타일 그리고 일반적인 역할들을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아의 교회는 동일한 품위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의 가치, 능동적인 참여와 개인 간 공동체뿐만 아니라 건전한 제도적인 관행을 도모해야 하는 협력 문화를 발전시키고 양육하도록 불림을 받았지만 아시아 상황에 맞는 방식들을 통해 항상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것 가운데서 이런 방식들은 환대와 개인 관계들의 조화,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였다. 이런 몇몇의 가치들이 교회의 종교적 본성에 바탕을 둔 관계들을 받쳐주는 보루가 되더라도 다른 가치들은 평신도와 여성의 신장을 약화시키고 투명성과 책임을 가로막는 교회의 성직자 문화로서 진술되었던 바를 강화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교회는 종종 두드러지게 차별되고 폐쇄된 제도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제도로서 교회는 그 식민지 기원에서 외국인으로 인식되었던 반면, 다른 세계 종교들은 (…)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교회가 때때로 국가통합과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에 장애나 위협이 되는 것으로도 보였다».
  나아가 교회는 아시아의 가장 먼 사각지역에도 도달한 동시연결의 세계 네트워크에서 토착화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와 공동체의 관계는 무엇보다 지형, 즉 기초 교회 공동체와 본당과 교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의 서로 다른 형태를 통해서 전례 없는 인구 변동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공동체가 생겨났다. 본당 간 종교 단체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 웹사이트가 상호작용하고 소셜 미디어가 토론 그룹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 종교 행위도 이제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홍보로 수월해졌다. 영적 동반, 묵상과 피정 지도는 이제 사이버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다른 나라에 머물면서 고인을 위해 바치는 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 교회는 대체로 새로운 형태의 테크놀로지를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메시지를 널리 선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결론 

  자기 쇄신의 정신으로 아시아 교회는 이런 중요한 범위에서 토착화의 사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시아 교회는 계속해서 결단력 있게 이런 쇄신을 추구해야 한다. 토착화의 사명은 획일성을 보편성과 동일시하거나 종교 제도들과 다른 제도들 간의 차이점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내적이고 외적인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나아가 이런 영역들에서 보여주는 외적 노력은 교회론적 성찰의 진보와 교회 통치구조에 대한 분별을 통해서 교회의 가장 폭넓은 쇄신으로 양육되고 그런 쇄신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와 유사한 활동은 복음화와 토착화의 완전한 일치에 따르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신자들과 책임자들-의 지속적인 양성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화를 통한 이런 쇄신은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이 «교회라는 새로운 방식, 즉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믿음과 사랑으로 증언하면서 (…) 모든 이들을 완전한 해방으로 이끌어주는 활기찬 대화로 다른 믿음과 신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놓는 (…) 공동체의 친교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하였던 바를 요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이런 현세의 건너편에서 여전히 다가올 천상 왕국을 감히 목표로 삼는 예언적 표징으로 사용되는 누룩이다».
  이런 공동체의 친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요청하는 새로운 복음화를 아시아 상황에 맞게 옮겨놓은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