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진정제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총장들과의 대화
프란치스코
교종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옮김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대전 가톨릭 대학 교수)

“교종께서 늦으십니다.” 2016년11월 25일, 바오로 6세 홀 입구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다.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가 열리는 장소인 그 안에는 제88차 총회(USG, 총장 연합회)를 마치며 모인 남자 수도회 총장들 14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조금 내렸다. “가서 열매를 맺어라. 예언의 비옥함.” 이것이 로마 살레시아눔에서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총회의 주제였다.

교종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10시 15분, 사진사들이 도착했고 이어서 교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셨다. 환영의 박수 후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시작하셨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삶은 그렇지요, 뜻밖의 일들로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뜻밖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뜻밖의 일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어서, 그가 늦게 온 것이 함께 지내기로 정해진 시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서 모임은 어쨌든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13시 15분경에 끝났다.

모임 중간에 30분 정도 쉬는 시간이 있었다. 교종을 위해 따로 마련된 작은 방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교종은 말씀하셨다. “왜 제가 혼자 있게 하고 싶어하십니까?” 그래서 쉬는 시간에 교종은 총장들 사이에서 기쁘게 커피와 간식을 들며 사람들에게 인사하셨다.

수도자들 편에서나 교종 편에서나, 미리 준비된 담화는 없었다. 바티칸 방송국의 텔레비전 카메라는 첫 인사만을 찍고는 떠났다. 만남은 자유롭고 형제적으로, 걸러지지 않은 질문과 대답들로 이루어져야 했다. 교종은 그 질문들을 미리 읽으려 하지 않았다. 카푸친회 총장이며 USG 의장인 마우로 외리(Mauro Jöhri) 신부와 총무인 콤보니 선교회 데이빗 글렌데이(David Glenday) 신부의 짧은 인사 후에 교종님은 회의의 질문들을 들으셨다.

비판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종은 말씀하신다. “비판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는 언제나 그것이 좋습니다. 삶은 오해와 긴장으로도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하게 하는 비판들이라면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하는 것은 수도자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입니다. 젊은이들이 당신을 곤란하게 합니다. 네, 그들이 그렇습니다. 청소년 주일이나 다른 기회에 젊은이들과 하는 점심 식사, 이런 상황들이 저를 곤란하게 합니다. 젊은이들은 대담하고 솔직하며, 당신에게 가장 어려운 것들을 묻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하십시오.”

                            안토니오 스파다로(Antonio Spadaro) S.I.

* * *

교종 성하,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말을 하고 그들을 복음을 위해 불타게 하시는 교종님의 능력을 알아봅니다. 또한 우리는 젊은이들을 교회에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한 교종님의 노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님은 청소년, 신앙, 그리고 성소 식별에 대한 다음 주교 대의원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젊은이들에 대한 주교 대의원 회의를 소집하게 된 동기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도록 어떤 제안들을 저희에게 해 주시겠습니까? 

지난 번 주교 대의원 회의를 마치면서, 모든 참가자들이 다음에 다루어야 할 주제에 관하여 세 가지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그 다음에 주교회의들의 자문을 구했습니다. 의견들은 청소년, 사제 양성, 종교간 대화, 평화와 같은 주요 주제들로 수렴되었습니다. 대의원 회의 이후의 첫 평의회에서는 훌륭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저도 참석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거기에 가지만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저에게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제가 듣는 것은 중요하지만, 저는 그들이 자유롭게 일하도록 둡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문제점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제안들과 난점들이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청소년이라는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사제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식별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폴란드에서 그리고 총회에서,  여러 차례 그것을 예수회원들에게 권고했었습니다. 식별은 젊은이들을 삶으로 양성하는 문제의 공통 요소입니다. 모든 젊은이들, 특히 신학생들과 미래의 사묵자들의 양성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제직을 향해 양성하고 동반하는 데에는 식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것은 우리가 사제 양성에서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양성에서 정해진 양식들에, 흑과 백에 익숙해져 있지만 삶의 회색인 부분들에는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이지 양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식별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흑백 논리는 결의론적인 추상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의 회색 속에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전히 고정된 추상적 가르침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참된 가르침에 따라 찾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양성과 신학생 양성에 관해 생각하면서 저는 마지막 주제를 전달된 바와 같이 결정했습니다. “청소년, 신앙, 성소 식별.”

교회는 젊은이들이 성숙을 향해 걸어갈 때에 그들을 동반해야 하고, 추상이 아니라 식별로써만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의 계획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삶 안에 식별을 더 강하게 끌어들이기 위하여 이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어느날 우리는 주교 대의원 회의 이후의 두 번째 회의를 가졌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상당히 잘 토론했습니다. 그들은 곧 주교회의들에 보내야 할 의제 개요(Lineamenta)의 초고를 준비했습니다. 수도자들도 작업을 했습니다. 잘 준비된 초고가 나왔습니다.

삶이 그렇듯이 언제나 역동적인 것인 식별,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적인 것은,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회의를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오늘날은 회의처럼 정적인 것은 잘 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과는 무엇인가를 하면서, 일을 하면서, 대중 선교와 사회 활동을 하면서, 매주 노숙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러 가면서 작업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행위 안에서 주님을 발견합니다. 다음으로, 활동 다음에는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성찰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에 그칩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로, 경청과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경청하도록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그 젊은이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리고 주교 대의원 회의를 준비하면서 수도자들의 현존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도자들이 젊은이들과 많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교 대의원 회의를 준비하면서 수도 생활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서방에서 수도 생활의 힘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다음 주교 대의원 회의에 어떤 희망을 갖고 계십니까? 

분명 서방에서 수도 생활의 힘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 문제와 분명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때로 성소 사목이 젊은이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음 주교 대의원 회의는 우리에게 아이디어들을 줄 것입니다. 서양에서 수도 생활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저에게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 우려를 갖게 하는 몇몇 새로운 수도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수도회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일부 수도회들은 매우 새롭게 보이고, 커다란 사도적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고, 많은 이들을 이끌어들이고… 그리고는 실패합니다. 때로는 그 안에서 스캔들이 되는 일들이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정말로 좋고 진지하게 이루어지는 작고 새로운 설립들도 있습니다. 때로 이 좋은 설립들 뒤에는 이들을 동반하고 그 성장을 보장하는 주교들의 집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성령의 카리스마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카리스마로부터, 자신의 인간적 매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적인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들은 “복고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안전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엄격함만을 줍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많은 성소자들이 있는 수도회가 있다고 말하면, 고백하건대 저는 염려가 됩니다. 성령은 인간적 성공의 논리로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에게, 모든 결단을 하고 많이 기도하는, 지극히 충실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주님이신지 아닌지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펠라지오주의자들입니다. 수덕으로 돌아가려 하고, 고행을 하고, 신앙과 도덕을 옹호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려는 군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는 설립자의 스캔들이 터집니다… 알고 있지요, 그렇지요? 예수님의 방식은 그와 달랐습니다. 성령은 성령 강림 날에 소리를 내셨습니다. 그것은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렇게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성령은 개선주의자가 아니십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주님께서 “되었다”고 하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개선주의는  축성 생활과 조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수도회들이 갑자기 크게 번성하는 데에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의 겸손한 길을, 복음적 증거의 길을 찾으십시오. 베네딕토 16세는 우리에게 아주 잘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개종 강요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합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 대회 때까지 세 번의 청소년 주일 주제를 성모님과 관련된 주제로 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 번의 청소년 주일을 위한 성모님에 관련된 주제들, 그것은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성모님을 강조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가 성모 신심이 깊다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저에게도 매우 좋게 생각되었습니다. 다른 의견들은 없었고 저는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모님이어야 합니다! “내 아들들아, 이것을 하여라. 그리고 그 다음날은 저것을 하여라.”라고 말하며 매일 서로 다른 편지를 보내는 우체국장 성모님은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진정한 성모님은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을 낳으시는 성모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수퍼스타 성모님, 당신 자신을 중심에 세우는 주인공 같은 성모님은 가톨릭 성모님이 아닙니다. 

교종 성하, 교회 안에서 교종님의 사명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도전과 긴장, 압박 속에서도 교종님은 우리에게 평온한 사람, 평화의 사람의 증거를 보이십니다. 그런 평온함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교종님을 감도하는 신뢰는 어디서 나오며, 무엇이 우리의 사명도 지탱해줄 수 있는 것입니까? 종교 지도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우리에게, 우리의 임무를 책임감과 평화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의견을 주시겠습니까? 

제 평온함의 원천이 무엇이냐고요? 아니, 진정제를 먹는 것은 아닙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은 의견을 주지요.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건전한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제가 살고 있는 것이 제게 전혀 새로운 체험이라는 것을 문제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더 초조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더 긴장을 느꼈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때는 지금같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제가 선출된 순간부터 깊은 평화라는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저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평화 안에 살고 있습니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콘클라베에 대해서, 사람들은 런던에서의 도박에서 제가 42번째 또는 46번째였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전혀 예상을 못했습니다. 저는 성목요일 강론도 준비해 두었었습니다. 신문들에서는 제가 킹 메이커(king maker)라고 말했지만 교종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출되었을 때 저는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저는 평화를 느꼈고, 그 평화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수도회 총회들에서는 바티칸의 문제들에 대해 말을 했었고 개혁에 대해 말했었습니다. 모든 총회들이 개혁을 바랐습니다. 바티칸에는 부패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평화롭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저는 성 요셉에게 쪽지 편지를 쓰고 그것을 제 방에 있는 성상 아래에 둡니다. 그것은 잠든 성 요셉 상입니다. 벌써 그 성 요셉은 쪽지더미 밑에서 잡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는 잘 잡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저는 언제나 여섯 시간을 잡니다.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제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성무일도는 아주 제 마음에 들고, 결코 빠뜨리지 않습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고, 묵주 기도… 기도 할 때에 저는 언제나 성경을 갖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평화가 더 커집니다. 이것이 비결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평화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저에게서 그것을 거두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자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선택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쨌든, 평화를 잃는 것은 고통을 겪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장상들은 고통을 겪기를 배워야 하지만, 아빠처럼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매우 겸손하게 고통을 겪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평화로 갈 수 있습니다. 결코 문제들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평온히 머물기 위하여 손을 씻는 본시오 빌라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씻는 장상은 아버지가 아니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하, 교종님께서는 연설들에서 자주 수도 생활을 특징짓는 것은 예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언에 철저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벗어나도록 부름받은 “안전과 위안의 지역”은 무엇입니까? 관상 수녀들에게는 “예언적이고 신빙성 있는 수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수덕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축성 생활은 어떻게 “자비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까?

예언에서의 철저함. 저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엘 3장을 “아이콘”으로 택하겠습니다. 그것은 자주 제 머릿속에 떠오르고, 저는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압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이 절은 세대들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예언에서의 철저함은 유명한 sine glossa(군말 없음)입니다. 군말 없는 규칙, 군말 없는 복음, 다시 말하면 진정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정제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설립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예언에서의 철저함은 우리의 설립자들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위안과 안전의 지역 밖으로 나가도록,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나가도록 부름받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생활 방식에서도 그렇지만, 또한 우리 수도회들을 위한 새로운 길들을 생각하는 데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새로운 길들은 설립 카리스마 안에서 그리고 처음의 예언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우리가 어떤 점에서 세속적인지 인정해야 합니다.

수덕까지도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덕은 예언적이어야 합니다. 제가 예수회 수련소에 들어갔을 때, 저에게 고행대를 주었었습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이로써 내가 얼마나 용감하고 강한가를 보여주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고행은 나를 더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단식은 지금도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단식을 합니까? 단순히 먹지 않는 것입니까? 성녀 소화 데레사는 다른 식으로도 단식을 했습니다. 어떤 것이 마음에 드는지를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코 불평하지 않았고 주는 것을 다 먹었습니다. 끊임없는 희생이 되는 매일의 작은 수덕이 있습니다.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되도록 도움이 되는 성 이냐시오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것에서의 희생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하십시오, 고행대라도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강하다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도움이 될 때에만 하십시오. 

공동체 생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예언을 수호하기 위한 장상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수도자들은 교회의 구조와 사고방식을 쇄신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하여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공동체 생활이라고요? 어떤 성인들은 그것을 지속적인 참회로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껍질을 벗기고 깃털을 뽑는 공동체들도 있습니다! 공동체에 자비가 들어가지 않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수도자들에게 용서의 능력은 흔히 공동체 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언적입니다. 언제나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이가 다른 이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 준다고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장상 편에서도 들음과 설득이 필요합니다. 장상이 계속해서 꾸짖는다면, 수도 생활의 철저한 예언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수도자들이 교회의 구조와 사고 방식을 쇄신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구의 사제 평의회에서 수도자들은 여정을 도와 줍니다.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들 안에는 세속적이고 군주적인 분위기가 스며들고, 공동체들은 이러한 불길한 분위기를 물리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추기경이 되어야 자신이 군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직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조직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나쁜 것입니다. 수도자들은 더 겸손한 형제애의 증언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거꾸로 된 빙산의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꼭지점인 그 정상이 거꾸로 아래에 있는 빙산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교종 성하, 우리는 교종님의 인도로 축성 생활과 개별 교회 안에 더 좋은 관계들이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개별 교회 안에서 우리의 카리스마들을 충만하게 표현하고 때로 주교들이나 교구 성직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어떤 제안을 해 주시겠습니까? 수도 생활과 주교들의 대화는, 그리고 지역 교회와의 협력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오래 전부터 주교들과 수도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1978년에서 수도자성과 주교성이 「상호 관계(Mutuae relationes)」에서 설장한 기준들을 재고하기를 바라는 요청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1994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도 이에 대하여 말했었습니다. 그 문헌은 한 시대에 상응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리 시의적절하지 않습니다. 개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온전히 교구 교회 안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일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오해들이 많이 있고, 문제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재정 평의회, 사제 평의회 등 지역 교회의 통치 구조들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수도자들은 사제 평의회에서 그들을 대표할 이들을 선출했었습니다. 교구 구조들 안에서 일은 함께 나누어져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교구의 통치 구조들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고립되어 있어서는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많은 성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교들도 조금은 군주와 같이 되려는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성은 확산되고 공유되어야 하고, 수도자들은 강한 영성 조류들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어떤 교구들에서는 교구의 재속 성직자들이 프란치스칸 영성, 가르멜 영성 들의 집단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활 방식이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부 교구 사제들은 그들이 홀로 있지 않기 위하여 함께 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더 공동체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예를 들어 수도자들이 맡고 있는 본당에서 좋은 증거들을 보여줄 때에  생겨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협력의 차원이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영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오해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재고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본당 신부의 재임 기간 문제도 있습니다. 저는 그 기간이 짧다고 생각하고, 너무 쉽게 본당 신부들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경제 문제와 관련된 세 번째 차원에서 다른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주머니를 건드리면 문제들이 생깁니다! 재산 양도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산 문제에서 매우 민감해야 합니다. 청빈은 교회의 삶에서 골수와 같습니다. 청빈을 준수할 때에도 그렇고, 준수하지 않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 결과들은 언제나 강력합니다. 

교종 성하, 교회와 마찬가지로 수도 생활도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과 재정적 남용의 상황에 투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반-증거이고 추문을 불러 일으키며, 성소 사목과 은인들의 도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수도회들 안에서 이러한 추문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어떤 조처들을 제의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자세한 대답을 할 시간은 없을 것이고, 여러분의 지혜에 의탁합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께서는 수도자들이 가난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말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을 때에 주님은 수도회를 파산하게 하는 재정 담당을 보내십니다! 때로 수도회들에는 “친구”로 여기는 관리자가 있고, 후에 그가 수도회를 망하게 합니다. 하여튼, 재정 담당에게 근본적인 기준은 개인적으로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재정 담당 수녀가 실신하자, 다른 수녀가 그를 도우려던 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코 밑에 통장을 갖다 대면 분명히 정신을 차릴 거예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성찰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은행들이 돈을 어떻게 투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군수 물자에 투자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안 됩니다.성폭행에 관하여, 그런 일을 하는 이들 4명 가운데 2명은 그들 자신도 성폭행을 당했던 이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미래에 성폭행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파괴적입니다. 신부들이나 수도자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선포해야 하는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일을 망치는 악마의 현존이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합시다. 이것은 병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병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성 과정에서 그들의 적절한 감정적 성숙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후보자들을 수도 생활에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에를 들어, 다른 신학교나 수도회에서 거부된 후보자들을 수도 생활이나 교구에 받아들일 때에는 그를 내보낸 이유에 대해 분명하고 상세한 정보를 구하지 않고서는 결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종 성하, 수도 생활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교종님은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는 교회가 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교종님의 관점에서, 세상의 여러 곳에서 수도 생활은 이러한 회심을 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교회는 밖으로 나가면서 태어났습니다. 다락방 안에 갇혀 있다가 나중에는 나갔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계속 나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다락방에 문을 닫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밖”은 제가 실존적, 사회적인 주변부라고 부르는 곳들입니다. 실존적인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인 가난한 이들은 교회를 자신들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주민과 난민 문제에 관련된 형태의 가난을 생각해 봅시다. 국제 협약보다 그 사람들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애덕의 봉사는 종교 일치 대화를 위한 가장 좋은 땅이 되기도 합니다. 분열된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열려 있는 도전들입니다.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은 나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교종 권고로 돌아가 다시 성찰하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와 아파레시다에서 이루어진 작업에 비추어 성숙된 것으로, 폭넓은 교회적 숙고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비는 밖으로 나가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십니다. 여러분도 밖으로 나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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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경 감사의 말씀들과 긴 박수로 만남이 끝났다. 이미 서 계셨던 교종은 홀을 떠나기 전에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셨다. “용기를 가지고, 잘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결코 잘못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잘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여러분의 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6세 홀을 나가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인사하기를 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