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스」 감독 마틴 스콜세지와의 인터뷰

«SILENCE». INTERVISTA A MARTIN SCORSESE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예수회, 치빌타 카톨리카 이탈리아어판 편집장)
김숙희 그라시아 수녀 옮김(성심수녀회)

뉴욕에 있는 스콜세지 감독 집의 초인종을 울린 것은 3월 3일이었다. 춥지만 맑은 날이었다. 때는 오후 1시. 나는 가족처럼 부엌으로 맞아들여졌다. 맛있는 커피를 한잔하겠느냐고 했다. 정확히는 “이탈리아노 커피”였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몸이 추웠다. 사실 나는 이곳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집 주위를 돌며 기다렸던 것이다. 따뜻한 커피, 그것도 이탈리아 커피라니 마음에 당겼다. 나를 거실로 안내해 준 사람은 마틴 스콜세지의 아내 헬렌이었다. 집에 온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녀의 남편이 도착하기 전 우리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헬렌에게 프란치스코 교종께Dear Pope Francis라는 책을 선물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 30명이 교종께 보낸 질문과 교종의 답장을 모아 엮은 책이었다. 나는 그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이야기했다. 헬렌은 그 책을 훑어보며 감상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열일곱 살짜리 딸아이에 대해,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사일런스」란 영화가, 온 가족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가족이 함께 만든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콜세지 감독이 도착해서 환영의 미소를 머금고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의 대화는 우리의 공통 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 동향 사람이다. 내가 메시나 출신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폴리치 제네로사 사람이라고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그곳 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콜세지 감독도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확실했다. 폴리치 제네로사는 문학·정치 사상가 주세페 안토니오 보르제세, 교종 레오 13세 때의 교황청 국무장관이었으며 교종으로 선출될 뻔했던 마리아노 람폴라 델 틴다로 추기경을 배출한 곳이다. 스콜세지는 빈센트 쉬아벨리, 도메니코 돌체, 미켈레 세라와도 뿌리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을 상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뉴욕 어느 동네로 정착한 한 이민자의 아들인 스콜세지의 삶, 제대 복사였던 그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그 삶에서 혈연, 폭력, 거룩함의 혼합물이 나왔다. 성당 복사로서의 기억들이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한데 섞여,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살던 거리를 첫 영화 세트로 삼았다. 거기에는 그의 상상과 꿈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인터뷰라기보다 친근한 대화였다. 녹음을 해 놓지 않은 것이 지금 후회스럽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스콜세지에게 폭력과 거룩함이란, 하나이되 멀리 떨어진 뿌리에서 나왔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에게 종교란 천사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의 말에는 품위가 느껴졌고, 눈빛에서도 묻어났다. 그는 미소를 띠고 “나도 어떤 은총에 둘러싸여 있지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은총은 인간사의 허망함과 어두움이 없이는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리라. 그는 영화 스틸 컷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매우 아름다웠다.

이제 영화 「사일런스」에 관한 대화를 시작했다. 질문과 실마리가 나왔다. 이메일 교환, 스콜세지의 카랑카랑한 육성 녹음, 보조자의 꼼꼼한 녹취로 지난 8개월 동안 이어진 작업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라 하나의 양심성찰이었고, 의미의 탐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콜세지 감독 덕분이었다. 나는 구실이자, 효소 역할을 했음을 깨닫는다. 마틴 스콜세지가 로만칼라를 하고 있는 나에게서, 그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프린치페 신부를 느꼈을까 자문해 본다. 나는 오후 3시 30분에 스콜세지의 집을 떠났다. 밖은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보다 덜 추웠다. 센트럴 파크를 따라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11월 25일 로마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오후 5시쯤이었다. 나는 그가 묵은 호텔에 일찍 도착해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듯한 일몰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내가 호텔에 들어간 직후에 외출했던 헬렌도 돌아왔다. 그녀를 보니 마치 내내 함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앉아서 차를 마셨다. 더 정확히는 차는 내가 마셨고, 그녀는 물을 마셨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의 남편을 만나러 여기에 왔다는 사실도 거의 잊어버렸다. “남편이 오네요.”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누구요?”라고 했다. 나는 일어나서 스콜세지에게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어두운 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안경은 쓰지 않고 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악수는 미소만큼이나 따뜻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마침 빵, 스틱빵, 올리브 오일, 소금, 한 입 거리 간식들과 그가 마실 아메리카노도 우유와 함께 나왔다. 우리는 모두 요기하고는 우아하면서도 수수한 방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계속했다. 세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가족에 관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러고는 딸 이야기를 거쳤다. 그것을 보아도, 전에 생각했던 대로 「사일런스」는 실로 가족이 함께 만든 영화였다. 은총에 관해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의 작품들을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오코너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밀리지빌에 있는 작가의 농장에 세 번이나 가 봤다고도 말해 주었다. 그녀는 항상 “악마의 영역”에서 은총을 보았다. 나 역시도 그것을 보게 되었다. 스콜세지는 뉴욕타임즈에서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 폴 엘리도, 오코너의 작품을 읽어 보라고 추천했다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폴을 잘 알고 있기에 그도 스콜세지에게 오코너의 작품을 권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스콜세지는 얼마 전에 힘쓰는 자들이 차지한다The Violent Bear It Away를 읽었노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책은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곧바로 이야기 속에 몰입되었단다. 그는 “그리고 그 표현이라니!”라며 감탄했다. 그 언어는 미국 최남부의 언어였고, 상처를 찾아 칼집 삼는 칼 같았다. 나는 그에게 다른 작품들도 계속 읽어 보라고 했다. 어쩌면 오코너의 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코너의 서한집 존재의 습관The Habit of Being도 꼭 읽으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눈 수술을 받아서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노라 했다. 그래서 오디오북을 구해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들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얼마나 재미나게 읽었으며, 또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상상력 때문에 얼마나 고투를 벌였는가도 말했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종도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재미있군요, 어느 작품을 특히 좋아하실까요?”라고 내게 물었다. 교종이 알려 줬을 때 나도 놀랐노라고 하며,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라 했다고 말했다. 스콜세지는 움찔하며 “나도 그 책을 좋아해요!” 하고 소리쳤다. “「택시 드라이버」는 나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드라마의 중요성, 극적인 소설, 관념이 아닌 현실을 비추는 소설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식별은 관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013년의 인터뷰에서 교종도 똑같이 말씀했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화감독의 삶과 교종의 삶에 공통으로 영향을 준 문학적 지혜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거리에 대한 스콜세지의 기억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 거리에서 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를 찍으면서도 계속 본다. 그는 “이것조차 은총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요, 은총을 받는 것은 사물을 어떤 방식,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요.”라고 맞장구쳤다. “기적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때때로 인생의 당연한 현실의 모습을 띱니다. 그러나 기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해독하여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이지요.”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수년, 때로는 수십 년간 시선을 훈련할 필요가 있으리라….

어떻게 「사일런스」라는 영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나요? 감독님이 여러 해 동안… 20년, 30년 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1988년에 받았습니다. 그걸 다 읽은 것은 1989년 8월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에서 제가 반 고흐로 나오는 장면의 촬영을 마친 다음,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급행열차 안에서였습니다. 그 시점에는 과연 내가 그 책을 영화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마음을 너무 산란하게 하였고, 또 너무 깊어서 영화화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시도해야 해.”라고 계속 말을 걸어 왔어요. 1990-1991년 즈음에 영화화하기 위한 판권을 획득했습니다. 약 1년 후에 친구이자 공동 각본가인 케이 콕스와 나는 초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2006년 12월에 정말로 영화에 적합한 각본이 처음 나오기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내가 그 영화를 만들게 되리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주제넘게 느껴졌을 겁니다. 나는 작품 주제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몰랐어요. 게다가 각본을 완성했을 때 이 프로젝트를 실행하기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너무나 많은 법적, 재정적 문제들이 여러 해에 걸쳐 발생하고, 상황은 점점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혔어요. 전부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들였습니다. 그 후에는 캐스팅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 들면서도 흥행이 보장되는 배우들을 찾았고, 그들도 출연 제안에 응했는데, 시간이 흘러 이제는 흥행을 보장할 수 없거나 너무 나이가 들거나, 또는 흥행도 안 되고 나이도 들어 버린 경우가 생겼습니다. 영화 제작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배우들, 이 영화의 배역을 정말로 맡기 원하는 배우들을 찾아야 했습니다. 무척, 무척 길고도 긴 세월이었어요. 정확히는 19년이었지요. 그동안 작업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습니다.

돌아보면, 이 오랜 잉태 과정은 이 영화의 스토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그 스토리를 둘러싸고 ‘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된 것 같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생각들을 둘러싸고 산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생각들은 신앙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도록 저를 촉발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 과정 전체가 일종의 순례였던 것으로 기억 속에서 통합됩니다. 그렇게 느껴져요. 지금, 삶의 이 시점에 이 영화를 만들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갈망이 마음속에서 어떻게 움직였습니까? 나중에 언젠가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나요, 아니면 그 갈망이 근래 몇 년의 작업에 어떤 영감을 주었나요?

아까 말한 대로, 그 갈망은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나는 그 갈망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모든 일에 영향을 줬을 겁니다. 내가 택한 결정들에 말이지요. 최근 몇 년 동안 작업한 다른 영화들에서 어떤 아이디어나 장면에 접근한 방식들도 그렇고요. 즉, 한편에서는 영화 제작을 실행에 옮기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엔도 슈사쿠의 원작 소설, 그 이야기가 자극제가 되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지요. 신앙에 관해, 인생에 관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은총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결국에는 다 똑같아질 수 있는지에 관해. 내 생각에는 이런 과정이 내가 이 영화를 찍는 구체적인 작업에 접근하는 데 더 큰 힘과 명확성을 주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가톨릭 신자인 것이 별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맞게 이해했나요? 그 두 가지가 별개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흥미가 있습니다.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서라고 할까. 그곳에 도달하는 길은 많은데 어느 문화에 속했는가에 따라 선택하는 길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나의 길은 과거에도 지금도 가톨릭입니다. 몇 년 동안 다른 길들을 생각하며 여기저기 잠깐씩 발을 들여 봤지만, 가톨릭 신자인 것이 가장 편안합니다. 나는 가톨릭 교리를 믿습니다. 나는 교회 박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를 논할 수 있는 신학자도 아닙니다. 교회 조직의 정책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개념, 강생이라는 개념, 그 연민과 사랑의 강렬한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성사를 받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느님과 가까이 머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자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나는 실천하는 신자a practicing Catholic인가? 이 말이 ‘성당에 꼬박꼬박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실천이라는 것이 성별된 건물에서 하루 중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예식에서만 일어나지 않음을 어린 나이에 믿게 되었습니다. 실천이란 바깥에서 항상 벌어지는 것입니다. 실로, 선하든 악하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 행동들을 성찰하는 것이 실천입니다. 그것은 투쟁입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가톨릭에서 느낀 편안함과 심오한 인상은… 언제라도 되살려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번 영화라든지, 침묵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택했다는 점 등은 그리스도교 영성과 가톨릭적 상상력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베르나노스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교 영성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베르나노스와 비교하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영성의 근원은 은총의 문제에까지 닿습니다. 은총이란 전 생애를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기하지 않았던 순간에 옵니다. 나는 지금 전쟁이나 고문, 점령을 당해 보지 않은 입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시험을 당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시험을 당한 자크 뤼세랑 같은 사람들도 있지요. 뤼세랑은 시각장애인인 동시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리더였고, 부켄발트 수용소로 끌려가서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레지스탕스 정신을 생생히 지켜 줬습니다. 사실, 그의 회고록 그리고 빛이 있었다And There Was Light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몇 년째 애쓰고 있습니다. 또, 디트리히 본회퍼 같은 사람도 있었지요. 엘리 위젤과 프리모 레비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수백만 명이 조직적으로 학살될 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는 물음에 그들의 예가 뚜렷한 답이 된다는 의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엄청난 용기와 연민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어둠 속의 빛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하여 볼 수 없고 오직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일본인 엔도가 쓴 소설에 공감했습니다. 베르나노스의 소설에서는 느낀 적이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베르나노스의 작품에는 왠지 너무 딱딱한 무언가, 가차 없이 혹독한 뭔가가 있습니다. 반면 엔도의 작품에는 언제나 부드러움과 연민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부드러움과 연민을 알아보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봅니다.

감독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벌을 주고 혼란을 주는 분입니까, 기쁨과 조화의 근원입니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을 자비라고 말합니다. 교종은 고문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몰아내고 없애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벌을 주는 분일 수도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로베르 브레송과 그가 각색해 만든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거쳐 베르나노스로 돌아갸야겠군요. 나는 60년대 중반에 처음 이 영화를 봤습니다.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고, 아이 때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에 대한 생각을 넘어서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나는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엄격한 면이 버거웠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하시는 하느님, 폭풍과 번개의 하느님 말이죠. 제임스 조이스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이것을 다뤘는데, 이 소설도 그 당시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때는 국가적으로 매우 극적인 시기였습니다. 베트남전이 확대되고 있었고, 막 ‘성전(聖戰)’으로 선포되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나 많은 다른 사람에게나 많은 혼란과 의심과 슬픔이 일상 현실의 일부로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나는 브레송 감독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았는데 그 영화는 내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아마도 노사제를 제외하고요,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물이 벌을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그들 대부분은 서로에게 벌을 안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제가 본당 신자 한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데 그녀에게 “하느님은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에게 자비롭기를 바라실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벌을 주시고 괴롭히고 계신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성찰할 시간과 공간을 주기만 하면 우리 자신이야말로 괴롭히고 있으며, 우리야말로 자신과 서로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브레송 감독님을 파리에서 한 번 만났게 됐었는데, 그때 그 영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내가 「성난 황소」를 찍은 뒤에, 지금 막 만든 작품이 그 깨달음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에 관한 영화였던 것입니다. 「성난 황소」를 만들 때 주제를 특정해 두고서 제작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었습니다. 제이크는 주변 모든 사람들을 벌주지만, 그가 진정으로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감수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을 참으며 그들의 선함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워질지도 모르지요.

어릴 때, 프린치페라는 훌륭한 사제를 만날 수 있던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중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자비도 포함됩니다. 물론 그분도 때때로 엄격한 도덕 교사의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럴 때도 그분의 표양은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이분은 진정한 안내자였습니다. 거칠게 말할 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무엇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끄시고, 조언하시고, 구슬려 설득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비상한 사랑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한 평론가가 “영(성)적인 것에 대한 스콜세지의 집착”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이 삶의 영적인 차원에 대해 집착한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메릴린 로빈슨이 건망증Absence of Mind에 쓴 내용 가운데 이 질문의 핵심에 적확한 답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을 설명하는 데 ‘영장류’라는 분류면 충분할 것 같지만, 우리 본성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들, 예를 들면 인간이 놀랍도록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놀랍도록 파괴적이라는 것, 그런 점들은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한다.” 로빈슨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볼 때,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사실 상당히 나이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곳에 존재한다는 신비, 살고 죽는다는 위대하고 압도적인 신비를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 생각해 보면, 과학을 통해 그 신비의 바탕에 도달한다는 발상은 핵심을 잘못 짚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빈슨이 에세이와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과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에게는 바로 진정한 가톨릭 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정말로 마음과 영혼입니다. 선한 것과 해악, 전부입니다. 그것은 넓게 말하면 타인들과, 구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겪는 힘든 시도입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겪는 내적 투쟁은 내 일에 대한 몰두, 자기 몰두를 끝내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현존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것,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를 전부 영화에 표현합니다. 평판과 명성, 야망과 경쟁의 세계에 사는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투쟁입니다. 그런데 물론, 그런 세계에 속했을 때에도, 나도 어느 정도는 거기 속해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요, 그에 대한 영화도 몇 편 만들었습니다만, 아무튼, 그럴 때조차 거기에도, 말하자면 삶의 영성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칼 융은 스위스에 있는 자기 집 현관에 라틴어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Vocatus atque non vocatus deus aderit.” 부르든 부르지 않든, 하느님께서는 오실 것이다. 더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감독님은 천식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교종도 폐에 문제가 있는 분입니다. 감독님은 숨이 가빠지면 더 예민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숨이 가쁜 것에서 뭔가 배운 것이 있습니까?

천식에 관해 첫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천식이 심해지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 지금 죽음으로 넘어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숨을 쉬지 못하고, 쌕쌕거림도 너무 심하고 폐도 막혀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이제는 좀 평화롭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로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어렸을 때, 50년대에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이 의사를 대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었고, 다른 의사의 소견을 구하지 않았어요. 다른 의사를 찾아보고 싶었더라도 그럴 만한 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천식을 다루는 방법이 있었지요. 약이나 치료법을 처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특정한 생활 방식을 지시했습니다. 어떤 운동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힘쓰는 일도 해서는 안 됐습니다. 심지어 심하게 웃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동물, 나무, 풀 등 주위의 모든 것에 알러지가 있었기 때문에 시골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외따로 떨어진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어른들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는 이야기도 되는데, 그 덕분에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깊은 이해를 얻었습니다. 인생의 리듬, 어른들의 관심사, 옳고 그름에 관한 논의, 상대방에 대한 의무 등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주변 상황에 더욱 밝아졌습니다. 사람들의 감정, 그들의 보디랭귀지, 거기 덧붙여 말과 행동의 차이, 그들의 민감성을 더욱 잘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의 민감성도 키우게 되었고요. 말하자면, 예리해졌습니다.

그리고 내 창문으로 세상을 봤지요…. 거리를 내려다보던 기억, 그렇게 아주 많은 것을 보던 기억, 어떤 것은 아름다웠고, 어떤 것은 무시무시했고, 어떤 것은 형언할 수도 없었어요, 그런 것들의 기억이 나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외따로 떨어진 생활의 다른 측면은 작업할 때의 강도 높은 집중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한 일에 주의를 쏟는 것이지요. 분리, 고독, 인지를 통해 부차적인 것에는 관심을 끊는 결단과 능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 이런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집중함으로써 민감성을 보호하고, 그 결과 어떤 면에는 무뎌진다는 점이 역설적이지요.

감독님은 파멸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거의 바닥을 쳤다고 했습니다. 감독님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파멸에는 기만이 있습니다. 파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만과 자만이 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나의 경우, 어쩌다가 자기 파멸의 순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런 순간에 닿았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나는 복사였고, 장례미사나 토요일 장엄위령미사 때 섰습니다. 또, 아버지가 장의사인 친구도 있었고요. 세기가 바뀔 때 시칠리아에서 건너온 전 세대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는 것도 보았는데, 나에게 아주 깊은 체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죽음뿐 아니라 죽음mortality 자체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이런 생각이 나 자신에게 약간 악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상태를 벗어났는데,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가 「성난 황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다른 측면은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다루었네요.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감수하며 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힘이 되는 것. 구원을 그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구원은 가족, 친구, 소중한 사람 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며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 되고자 하지요.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또한 다른 것을 배우기도 합니다. 샘 페킨파 감독의 「대평원Ride the High Country」에서 주정뱅이 목사로 나온 에드거 뷰캐넌이 매리엇 하틀리와 그 약혼자의 결혼식을 주례할 때 “여러분은 결혼에 관해 뭔가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변한다는 점이다.”라고 합니다. 이 사실은 모든 관계에 적용되고 협력에도 적용됩니다. 당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들, 당신이 아주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필요가 생길 수 있고, 다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기에 당신은 그것을 인정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그들이 변화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최선을 끌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게다가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방식을 찾아 떠나야 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배신이 아니라 단지 변화였던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만약 의식이 있다면 자신이 구원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알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가능한 한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뻔하지만, 이게 진리입니다. 나에게는 밤이고 낮이고 기복이 있습니다. 들뜬 마음이 지속되기도 하고 어둠도 있으며 불안한 마음이 자기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것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성난 황소」 제작 후 감독님은 로마로 가서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을 했습니다. 맞습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입니다. 1980년인가 1981년에, 「성난 황소」 제작을 막 마쳤는데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 영화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베르톨루치나 타비아니 형제 등이 이탈리아 국영 방송(RAI)에서 만든 영화들, 그리고 특히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사극들을 보면서 텔레비전이 영화 장르의 미래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낫겠군요. 텔레비전이 시네마와 혼합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락적이지만 오락물의 요소보다 더 깊이가 있으면서도, 어떤 가르침을 주는 영화인 것이죠. 다시 말하지만, 이런 생각은 로셀리니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그러한 영화들을 ‘교훈적인 영화’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나는 RAI가 나를 항상 쫓아다니는 질문, ‘성인은 누구인가?’를 탐구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생각은 여러 성인들에 관한 영화를 시리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놓은 성인들 가운데 몇몇은 아예 실존 인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민화의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은 어디서 온 걸까? 그걸 알려면 유다-그리스도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 인물들의 중재가 왜 필요했을까? 여행자의 수호성인 크리스토폴은 결국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드러났지요. 어째서 그런 성인이 필요했을까? 여행 중에 위험에 처하면 우리를 보호할 사물이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실재했던 성인들은 어떨까요? 일반적으로나 영성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사람들과 연관될까? 그들의 일상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 이 질문은 프린치페 신부님이 우리에게 주었던 어떤 책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작가이자 영화 및 TV 제작자인 마일스 코널리의 미스터 블루라는 작품으로, 현대판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책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도 잘 살 수 있음을, 물질적으로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와 같이, 그리고 그녀가 ‘가톨릭 일꾼’ 운동으로 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프린치페 신부님은 상급생 조찬 모임에 도로시 데이를 강연자로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떠날 무렵,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았습니다.

「성난 황소」 영화를 제작할 때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커지고 있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대규모 예산으로 제작하는 영화로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그 당시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영화가 또 한 편 있었는데, 그것도 로셀리니 작품이었습니다. 바로 「유로파Europa’51」입니다. 나는 이것을 짧은 버전으로 보았습니다. 로셀리니는 현대 사회에서 성인처럼 산다는 것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그 영화에는 프란치스코, 가타리나, 리지외의 데레사와 같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알랭 카발리에는 그중 데레사 성녀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지요.) 이들은 제가 ‘활동가 성인’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상의 비오 신부 같은 인물과는 전혀 다릅니다. 연민, 사랑,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과 같은 참된 정수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문제를 이 영화에서 로셀리니가 다룹니다. 나는 로셀리니가 시몬 베유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시몬 베유는 자신에게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지요. 아무튼, 「유로파」의 끝부분에 이렌은 자신에게 깊은 평화를 느끼며, 자신이 크게 도움이 되는 면이 있음을 봅니다. 그 영화는 내게 무척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로셀리니 감독의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본 성인을 다룬 영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흔히 그렇듯이, 제 생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갔습니다. 나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코미디의 왕」을 다시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만들려고 하다가 무산되었습니다. 영화 산업계가 변해 있었고, 성인들의 삶을 다룬 이런 영화, 이런 ‘연구’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려는 인물들에게 관심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주제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몇 년 뒤 마침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작업하게 되었을 때 그동안의 에너지와 토론들이 영화에 녹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미 이야기했듯이, 「사일런스」와 함께 산 오랜 기간 동안에도 그것은 계속되고 발전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에서 감독님이 가장 끌렸던 인물은 누구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젊었을 때는 사제가 되는 것에 관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나 자신도 프린치페 신부님의 발자취를 뒤따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사제가 되고 싶었던 거죠. 소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첫 해에 나왔습니다. 성소란 아주 특별한 것이고, 내 힘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다른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열다섯 살에 깨달았습니다. 참다운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다음에 자신의 교만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만일 내가 성변화가 일어나는 예식을 집전할 수 있다면, 맞아요. 나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것도 갖춰야 합니다. 내가 보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좋은 사제는 그러한 재능과 능력을 가진 것 외에도 항상 자기 본당 신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게 든 질문은 ‘좋은 사제는 어떻게 자신의 에고를 넘어서고, 교만을 극복하는가?’였습니다.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60년이 지나 「사일런스」 작업을 하던 중에 이 영화가 바로 그 질문을 다룬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로드리게스는 그 문제를 직접 겪으며 고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랍고 흥미로운 인물은 기치지로입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때때로 ‘이 사람도 예수님일지 몰라’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당신을 거부한 사람을 길에서 마주쳤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물론, 기치지로는 계속 약해지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가족을 포함한 다른 많은 이들에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누가 로드리게스와 함께 있었습니까? 기치지로입니다. 그가 로드리게스의 위대한 스승, 말하자면 멘토요, 구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로드리게스가 그에게 고마워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영화들과 비교하면, 사람들은 기치지로가 「비열한 거리」의 ‘자니 보이’ 같다고 합니다. 하비 카이텔이 연기한 찰리라는 인물은 자신의 교만을 겪어 내야 했습니다. 그는 영성과 실천은 교회 건물 안에 국한되지 않고 바깥 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자신의 보속을 직접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속죄 행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구석에서 옵니다. 그래서 자니 보이와 기치지로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그 둘에게서 파멸도 오지만 동시에 구원도 옵니다. 이런 것들의 많은 부분이 내가 어릴 때 관찰한 것에서 옵니다. 특히 우리 아버지 찰리와 조 삼촌 사이에 벌어지던 일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와 페레이라 신부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인물들입니까? 아니면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동전입니까?

우리는 실존 인물 페레이라 신부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엔도의 소설에서는 사실상 신앙을 잃은 것처럼 나옵니다. 달리 보자면, 자신이 신앙을 버렸다는 수치심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말이지요.

반면에 로드리게스는 신앙을 버렸다가 그럼으로써 신앙을 되찾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로드리게스는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페레이라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감독님은 언젠가 아버지를 회고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감독님에게 무슨 이야기할 때에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한쪽에는 선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악한 사람들이 있다 등, 언제나 도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요. 그러면 여기서는 누가 좋은 사람들이고 누가 나쁜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대가족 출신입니다. 아버지 형제는 네 명이 있었는데 조 삼촌이 막내였습니다. 조 삼촌은 엘리자베스 가에서 숙모, 사촌들과 함께 우리 아랫집에 살았습니다. 조부모님, 그러니까 아버지의 부모님은 두 집 건너 사셨고, 저희 아버지는 매일 밤 두 분을 뵈러 갔습니다. 그분들은 집안일이라든가, 스코르세제 가문의 이름이라든가, 가문의 명예라든가,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옛 세계의 일들이었고,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아무튼 그분들은 무난하게 살려고 하는 점잖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조직범죄가 존재했고 사람들은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범죄자 편이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등을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삼촌은 그들 편에 가까웠습니다. 자니 보이처럼 항상 시시껄렁했고, 항상 문제에 휘말려 감옥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고, 항상 악덕 사채업자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언제라도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런 것을 저희 아버지가 떠안았습니다. 나는 매일 그 집에서 아버지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을 봤습니다. 올바른 방식으로 당신의 동생을 다루는 것을 말이지요.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전부 떠안았습니다. 때때로 어머니는 너무나 답답해하면서 “당신 형제들이 좀 도와줄 수 없대요?”라고 하셨어요. 다른 삼촌들도 어느 정도는 도왔지요. 하지만 다들 그 동네를 떠나 이사했습니다. 아버지와 조 삼촌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혼자 전부 감당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면에서 감당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협상하고, 중재하고, 삼촌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았나 확인하고, 때로는 삼촌에게 돈을 주면서 말입니다. 정말로 아버지는 당신을 삼촌 때문에 위태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의무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동생을 돌볼 의무 말이지요. 다른 가족들은 포기하거나, 이사를 가 버렸기 때문에 온통 우리 몫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조 삼촌을 좋아했지만 삼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am I my brother’s keeper?’ 이런 심정을 「비열한 거리」에 담았습니다.

「사일런스」는 그리스도의 얼굴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으니, 바로 그 이유로 로드리게스에게 당신을 밟고 지나가라고 청하시는 듯한 그리스도 말입니다. 감독님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은 무엇입니까? 엔도가 묘사한 것과 같이 발에 밟히는 이콘인 ‘후미에’입니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왕의 얼굴입니까?

나는 엘 그레코가 그린 그리스도의 얼굴을 택했습니다. 그 그림이 인간과 같이 아파하는 자비로운compassionate 모습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가 그린 것보다 더 잘 표현했으니까요. 내가 자랄 때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은 언제나 위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제외하고 영화사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얼굴을 가장 잘 묘사한 영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생각하기로 그리스도에 관한 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은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인 것 같아요. 젊었을 때 나는 뉴욕 도심의 공동주택과 거리를 배경으로 현대판 그리스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고는 그런 영화가 이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하느님이 침묵하시지만, 그래도 가까이 계신다고 느꼈던 상황이 있었나요?

어려서 미사 복사를 할 때,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어요. 이 느낌을 「사일런스」에서 고토의 농가에서 미사를 드리는 장면으로 전달하고자 했지요. 아무튼, 미사가 끝나고 거리에 나와 궁금해 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삶이 계속되지? 어째서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았지? 어째서 세상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거지? 아주 어릴 때 하느님의 현존을 그런 식으로 경험했습니다.

1983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촬영지를 물색하느라 이스라엘에 있을 때였습니다. 단발 엔진 소형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고 있었어요.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소형 비행기는 더욱 그렇지요. 그래서 나는 여러 해 전에 어머니가 주신 자잘한 성물들을 꼭 쥐고 있었지요. 나는 아주 긴장해서 굳어 있었습니다. 텔아비브에서 갈릴래아로, 베싸이다로, 엘랏으로 오갔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예루살렘 성묘성당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제작자 로버트 차토프와 함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죠. 밖으로 나왔을 때 로버트가 뭔가 달라진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이 장소의 지리적 특성과 이 성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온갖 수도회들 때문에 압도되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텔아비브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비행기에 탔고, 나는 다시 무척 긴장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성물들을 전부 손에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행 중에 문득, 그렇게 성물들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품는 사랑을 느꼈고,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때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범상하지 않은 체험이었어요. 내 생에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을 경험한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딸 프란체스카가 태어난 이야기도 하고 싶네요. 프란체스카는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어요. 나도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의료진이 갑자기 나더러 나가라고 하더군요. 옆방에서 네모난 유리창을 통해 출산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나는 긴급한, 심지어 정신없는 움직임들을 봤습니다. 그러다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몸이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간호사가 나와서 울면서 말했어요. “그녀는 해낼 거예요.” 그리고 간호사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아내 이야기인지, 아기 이야기인지 몰랐어요. 그다음에 의사가 나왔습니다. 벽에 등을 대고 섰다가 스르르 주저앉아 웅크리고는 말했습니다. “아무리 계획을 거듭 세워도, 모든 게 틀어지는 공포스러운 20초의 순간이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해냈습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잃을 뻔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내 손에 그 작은 뭉치를 안겨 준 것입니다. 내가 아기의 얼굴을 보자 아기가 눈을 떴습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바뀌었어요.

그 체험은, 「사일런스」를 만드는 동안 읽은 메릴린 로빈슨의 소설 길리아드의 놀라운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죽음을 앞둔 목사가 자기 딸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경이감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세상을 곧 떠나게 된 지금, 인간의 얼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건 강생과 관련이 있어. 아이를 안고 그 얼굴을 보면 아이에 대한 의무를 느끼지. 어떤 인간의 얼굴이든 우리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어. 그 얼굴의 유일성, 그 얼굴의 용기와 외로움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갓난아기의 얼굴을 볼 때 가장 그렇지. 아기 얼굴은 계시vision 같아. 다른 어떤 신비한 계시만큼이나 신비로워mystic.” 직접 겪은 체험에서 말하건대 이 구절은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연민compassion은 본능입니까, 사랑입니까?

내 생각에 핵심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비열한 거리」에서 찰리가 빠진 함정이 자니 보이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구원과 영성적 효용을 위한 보속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자기 에고는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제가 아는 훌륭한 사제들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일단 자기 에고를 옆으로 밀어 놓고 나면, 타인의 필요만이 남습니다. 그러면 보속을 고른다거나, 연민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은 무의미해집니다.

침묵에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폭력이 표상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감독님이 만든 영화들에도 폭력이 많이 나옵니다. 이 영화의 폭력은 어떻게 다릅니까?

신부님이 앞서 주신 질문을 다시 언급하자면, 나는 영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인지의 문제에 천착합니다. 그 문제에 집착한다는 것은 인간을, 선과 악을, 가까이 들여다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선을 잘 키워 미래 언젠가는 인류의 진화 가운데 폭력이 사라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폭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폭력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폭력적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당연히 나는 그런 짓은 절대 못하지.’라고 생각하는 실수를요. 사실은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폭력성에 충격을 받고, 나아가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폭력은 실재하는 표현 형식이고, 절박한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재미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친구들」을 재미있는 영화라고 합니다. 사람이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폭력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폭력과 멀리 떨어진 문화 또는 하위문화를 배경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폭력이 생활의 일부였던 곳, 폭력이 나에게 너무나 가까웠던 곳에서 자랐습니다.

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베트남전이 끝나가던 시기를 살았고, 구시대 할리우드의 전형에서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리고 「와일드 번치」로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우리게 말을 거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폭력이란 인간의 일부입니다. 내 영화에서 유머는 사람들과 그들의 논리적인 사고 과정, 또는 그 사고 과정의 부재에서 옵니다. 폭력, 그리고 삶의 불경함입니다. 점잖게 표현하자면 세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불경도 외설도 실제 존재합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내재적으로 외설스럽고 불경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 존재 양식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람직한 가능성은 아니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있습니다.

감독님에게 영화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촬영 방식이나 이미지들에는 확정된 가치가 있습니다. 촬영 기법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보게 해 줍니까?

이미지를 통해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낯섦을 느낄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간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영화를 볼 때 추정할 수 있는 이미지, 생각, 감정들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말로 딱히 표현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영화를 만들 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함께 편집하면, 전혀 다른 제3의 이미지, 감각, 인상, 생각을 머릿속에 얻습니다. 그런데 환경을 만드는 것은 이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촬영 기법과 관계가 있지요. 영화가 당신의 관심을 끌고 말을 거는 것은 그 이미지들을 조합할 때입니다. 그것이 편집이고 영화 제작의 실행입니다. 

「사일런스」 촬영은 어디서 이루어졌습니까? 대만이라고 들었는데요. 이 곳을 택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사일런스」를 완성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촬영지를 대만으로 낙점하기까지 세계 여러 장소를 둘러봤습니다. 엔도 슈사쿠 소설의 배경이 된 실제 일본 지역들부터 시작했지요. 나가사키, 소토메, 운젠 온천 등이요. 하지만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일본에서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단테 페라티가 일본 외에도 뉴질랜드, 밴쿠버, 북부 캘리포니아를 알아보다가 마침내 대만을 찾았습니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멋진 풍경과 해변이 있는 곳입니다. 소설 속의 장소들과도 모습이 비슷했고요. 바로 이곳이 영화를 찍을 곳임을 즉시 알았습니다. 

이 영화는 적어도 일부분이라도 다른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았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정말로 나는 알아서 해야 했습니다.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대개는 많은 영화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아시아 영화들, 유럽 영화들, 미국 영화들 할 것 없이요. 나는 영화를 끼고 삽니다. 영화들은 나와 함께입니다. 그저 이 영화에서 또는 저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영화들은 여러 번 봤습니다. 예를 들면, 「수색자」, 「현기증」, 「8과 1/2」 같은 영화들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무방비 도시」, 「전화의 저편」, 「이탈리아 여행」 같은 로셀리니 영화들이 그렇죠. 반면에 「오데트Ordet」는 단 한 번 봤습니다. 그 영화는 다시 볼 수가 없어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매 장면에서 영적으로 감동하고 변화됩니다. 이 중에서 어떤 영화도 오락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감독님의 작품 가운데 「사일런스」와 나란히 놓을 영화가 있을까요? 「사일런스」와 의미가 비슷해서, 또는 정반대라서 견줄 만한 것 말입니다.

「성난 황소」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열한 거리」도 그렇고요. 「디파티드」가 「사일런스」와는 반대인 것 같습니다. 나는 빌 모나한의 각본에 끌렸습니다. 제가 자란 환경과는 사뭇 다른 보스턴 아일랜드계 가톨릭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이지요. 「디파티드」 결말부는 도덕적 그라운드 제로입니다. 갈 데까지 가서 더 내려갈 길이 없고 올라갈 일만 남죠. 그리고 인물들이 희생합니다. 특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빌리의 희생이 나옵니다. 로저 에버트는 빌리가 고해소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들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게 나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신부님.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게 잘못이라는 건 알았지만, 제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나에게는 그 영화가 9·11 사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우리 문화와 우리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비춰 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내가 볼 때는 그 순간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죠.

「성난 황소」에서 제이크는 언제 어디서나 싸웁니다. 링 위에서, 체육관에서, 거리에서, 침실에서, 거실에서… 어디에 있든지요. 어디서든 그는 자신을 벌하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곳에서, 언제나 그것을 풉니다. 기치지로 같아요. 차이라면 기치지로는 어쩔 수 없이 그러지만 제이크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감독님을 특별히 성찰하게 만든 상황이나 사건이 있었습니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오랫동안 이 영화와 함께 살았고, 여러 번 제작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저를 성찰시켰던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 조사하던 단계, 그리고 제작 단계에서 감독님을 곁에서 지원한 신자들이 있습니까?

이 모든 일은 성공회 뉴욕 대교구 폴 무어 대주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80년대에 그분이 성 요한 대성당에서 저에게 그 소설책을 주셨지요. 주교님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는 상태로 그분을 모시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시사회를 했었는데, 우리 둘은 그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교님은 떠나면서 나에게 책을 한 권 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침묵이었지요.

앤드류 가필드가 영신수련 피정을 하는 동안 동반한 예수회 제임스 마틴 신부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제작 과정에서는 타이페이에서 신부님 몇 분이 지원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중 많은 분이 영화의 기술 고문으로 앤드류 가필드와 아담 드라이버가 성사 집전 장면을 제대로 연기하는지 확인해 주셨습니다. 몇 분의 성함을 말씀드리면, 예수회 제리 마틴슨 신부님[광계사(光啟社)], 예수회 알베르토 누네스 오르티스 신부님[이 분은 푸젠(輔仁)대학을 통해 소개받았습니다], 폴 러셀 대주교, 타이페이 주재 교황청 대사관 이반 산투스 신부님 등입니다.

여러 역사 자문도 모셨는데 그 가운데는 조사 과정에 큰 도움을 주신 예수회 신부님 두 분이 계십니다. 조지타운 대학에 계신 사학자 데이비드 콜린스 신부님, 조치(上智)대학에 계신 가와무라 신조 신부님입니다.

브리검 영 대학의 일본 문학 교수 밴 제셀 박사님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거의 다 영어로 번역한 분입니다. 이 영화 제작에 든든한 지원이 되어 주셨고, 엔도와 우리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2011년에 처음 교수님에게 자문했습니다.

2009년에 나가사키 26인 순교자 박물관에 갔을 때 예수회 렌조 데 루카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영화에도 나오는 ‘눈의 성모님’ 두루마리를 구하는 데 기꺼이 도와주셨습니다. 영화 제작 초기에는 우리 조사원이 예수회 앤터니 유슬러 신부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2011년부터 참여한 주요 역사 고문 두 분은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자란 배경이 있습니다. 한 분은 근세기 일본사 권위자인 유르기스 엘리조나스로, 실존인물인 페레이라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고, 또 한 분은 17세기 선교사들과 그들의 아시아 활동을 주제로 저술 활동을 한 리암 브로키로, 현재 미국 가톨릭 역사학회 회장입니다.

***

위의 이름들, 친구들, 장소들의 목록과 함께 나의 인터뷰는 끝이 났다. 11월 28일,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나는 마틴 스콜세지와 부인 헬렌을 한 번 더 만났다. 그는 나에게 “내일 영화 시사회에서 예수회원들을 만나는데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 영화에 관한 경험들도 이야기하고, 그것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경험과 함께 느꼈던 감정들, 그것을 길어 올린 깊은 ‘우물’에 대해서도 나누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 대화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그 우물에 끌림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