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착한 사마리아인 교회: 자비의 해를 마감하며

VATICANO II E CHIESA SAMARITANA. La Chiusura dell’Anno della Misericordia

산티아고 마드리갈 신부(예수회, 교황청립 코미야스 대학)
김희자 사베리아 수녀 옮김(성바오로딸수도회)

 

2015년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50주년 폐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선포한 자비의 해는 이날 시작되어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마감되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하느님 자비의 때를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반복하였다. 이로써 희년의 교회론적 의의와 그 중요성을 명백히 한 것이다. 우리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즉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쓴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하 MV)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자비를 관조하는 것은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신비를 성령의 선물과 함께 맛보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MV 4 참조) 희년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메시지를 따라 칙서를 재독함으로써 자비가 어떻게 하여 공의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두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는 ‘자비’라는 말로 잘 요약됩니다.”(MV 1)라고 선언한다. 기본적인 질문은 명백하다. “성경의 메시지인 자비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선언 및 특별 희년의 정신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의 첫 번째 답을 바로 이 칙서에서 찾으려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칙서의 서두에서 내린 교종의 긍정은 「자비의 얼굴」이 실마리가 되어 ‘교회에 관한 교회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비판적으로 읽도록 하며, 결국 공의회의 문헌과 가르침을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읽게 한다.

또한 이러한 고찰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또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위 문헌들과 함께 베르골료 교종의 다른 가르침들, 특히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하 EG)에서 볼 때 “섬기는 교회”의 모델, “착한 사마리아인 교회”의 모습은 각별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공의회의 수용

교종 프란치스코는 칙서에서 우리가 처음에 제기한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이 되는 특별 희년 선포의 동기를 발표하였다. “제가 12월 8일을 선택한 것은 이날이 교회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이 되는 이날 성문을 열 것입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성령강림 때처럼 공의회 교부들은 하느님을 동시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안온한 도성처럼 감싸주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MV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교회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공의회를 이끌었던 원동력, 곧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려는 선교적 열성을 생생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방어적인 자세를 지닌 아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오히려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저는 교회를 전투가 치러진 후의 야전 병원과 같다고 봅니다.”

「자비의 얼굴」 4항에서 우리는 자비의 메시지와 교종 성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가 실현하고자 했던 공의회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본다. “요한 23세 성인이 공의회를 시작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던 뜻깊은 말씀을 되새깁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이 아닌 자비의 영약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 가톨릭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신앙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사랑이 넘치는 모든 이의 어머니, 인자하고 인내하는 어머니, 갈라져 사는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자비로운 어머니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바오로 6세 복자는 공의회를 마치면서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공의회는 현대인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류는 완전히 거부되었습니다. 진리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도 오류를 거부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오류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공의회는 분명히 정신을 혼란시키는 질병을 깨닫고 위로가 가득한 구원의 영약을 가져다주었으며 불길한 징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 다음과 같은 것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 온갖 나약함을 지닌 인간, 갖가지 요구를 지닌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입니다.’”(MV 4)

교종 프란치스코와 바오로 6세의 이 두 문장 자체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 요한 23세의 공의회 개막 메시지와 복자 바오로 6세의 폐막 연설이 보여 준 바와 같이 자비는 공의회의 시작과 마침에서 표현되었다. 성 요한 23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 “어머니이신 교회가 기뻐합니다Gaudet Mater Ecclesia”(1962.10.11)에서 자비는 가톨릭 신앙 진리를 표현하는 근본 조건이며 따라서 사목적인 성격의 공의회를 가능케 하는 주요 테마라고 하였다. 또한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마지막 훈화에서 사목적 사랑의 종교적 차원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주요 노선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공의회의 영성을 한눈에 알려 주는 스케치와도 같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언행과 관련해서는 2014년 4월 27일의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그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교종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시성식이 거행되었는데,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설명한 것처럼 두 분은 공의회와 상징적으로 일치된 분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 교종의 성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묘사한 교회와 미래에 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관점과 잘 연결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대한 실행자인 두 분의 성덕을 선포함으로써 공의회를 21세기 가톨릭교회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는 사건으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자비는 칼 라너가 ‘근본적인 해석’이라고 칭한 역할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하게 된 듯하다. 이제부터 자비는, 내부를 향해서는 쇄신의 전망 그리고 밖을 향해서는 열린 시선을 갖고, “현재화aggiornamento” 및 사목적 애덕을 실행하는 모든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는 범주가 된 것이다. 이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갖는 항구적인 의미의 핵심이 바로 그 심오한 급진성과 질적인 신기원에 있음을 알게 된다.

자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수용하게 하는 일종의 아르키메데스 점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칙서에서 제시되는 자비에 관한 네 가지 정의(MV 2 참조)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개의 헌장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로,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DV)의 핵심인 “자비는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둘째,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C)의 성사적인 특성으로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 셋째,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S)의 인간학적인 열쇠로서 “자비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근본 법칙입니다.” 넷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G)의 친교적 특성을 지닌 개념과 함께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우리는 교종의 가르침에 따라 “언제나 자비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MV 2) 이제 칙서의 주제가 제시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MV 1)라는 해석의 열쇠를 따라 지금 살펴본 형상적인 관계를 좀 더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공의회를 수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성령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사건을 통해 교회에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의 빛으로 본문을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자비로운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면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MV 8) 교회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이해에서 무엇보다도 새로운 점은 삼위일체적 측면임을 잊지 않고 자비의 얼굴의 비추임을 받아 교회의 신비를 관조하기로 한다. 이것과 함께 교회론을 다룬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론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하느님의 자비

교종 프란치스코의 칙서는 명상의 문체를 가진 지혜로운 신학자 마리 조제프 르기유Marie-Joseph Le Guillou(1920-90)의 『부활하신 분의 얼굴』을 상기시킨다. 도미니코회원이며 공의회 전문가인 그는 저서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설득력 있게 요약하였다. 본래 이 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예언적, 영적이고 교의적이며, 사목적이고 선교적인 위대함”이라는 부제로 1967년에 출판되었다. 이 공의회의 해석에 대한 우리의 당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성찰들이 중요하다. 저자가 처음에 의도한 제목은 “사건으로 본 공의회”인데, “공의회 문헌들의 단순한 분석을 넘어 공의회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전체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규명하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공의회 사건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고 고백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라는 또 다른 제목도 생각했었다. 아무튼 우리는 르기유 자신도 인정하였듯이 책 제목을 평범하지 않게 선택한 그의 최종 결정을 이미 알고 있다. 공의회에 대한 연구 결과를 『부활하신 분의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 작품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 그리스도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신학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반적인 이 요약은 성 요한 23세가 1962년 9월 11일에 행한 라디오 훈화의 몇 가지 내용에서 시발된다. 그 훈화에서 교종은 이 보편 공의회를 일컬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과 교회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훈화에서 요한 23세는 교회를 그리스도 신비의 밝은 빛으로 언급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빛, 그리스도의 교회, 인류의 빛이라고 선언하는데, 그 표현은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서두에서 나오는 바를 반영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시기에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마르 16,15 참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LG 1)

그런데 공의회가 진행되는 녹록치 않은 여정에서 요한 23세의 그리스도론적 전망이 시험을 받게 되고, 계시에 관한 두 가지 원천이 거부당하면서 역설적으로 다시 그리스도 신비의 빛으로 옮아가는 데 이바지하게 되었다. 공의회장 토론에 이은 1962년 11월 20일의 결정투표에서 새로운 헌장인 「계시 헌장Dei Verbum」을 작성하기로 하여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한 계시자로 소개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의식 없이는 교회 자신과 그 신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교종 프란치스코는 칙서의 서두에서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DV 4)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십니다.”(MV 1)라고 썼다.

성경과 성전은 교회가 주님의 얼굴을 관조하는 거울이다.(DV 7) 신학은 그 충만함에 이른 그리스도의 신비를 소재로 삼는다.(DV 24) 아버지의 얼굴인 그리스도는 성경에 현존하시며 숨어계신다. 한편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전례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 교회의 진정한 본성”(SC 2)을 표현하고 드러나게 해 준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세상에서 복음 선포와 애덕의 실천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시적이게 한다.

르기유는 이를 전제로 하여 교의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종합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은 경이롭게도 헌장, 교령, 선언으로 구성되어 그 내적인 논리를 보여준다. 입문의 경로는 모름지기 계시 헌장과 전례 헌장이다. 두 가지 헌장 덕분에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과 그 밖의 모든 문헌들의 참된 의미,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흐름은 계시에서 시작하여 세상으로 나아간다.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구조와 교회의 신비,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의 성전을 규정하고,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 안에 존재한다. 공의회에서 교회는 주님을 관조하고자 했는데 이로써 자신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반사하고 성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의회의 역동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조하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비추시는 그분의 움직임으로 요약된다.

「자비의 얼굴」 칙서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첫 번째 것을 성서의 영감을 다루는 부분에서 요약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기본 자료와 시편의 ‘인내롭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제시한 다음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행하신 모든 기적은 자비를 보여 줍니다.”(MV 8) 자비에 관한 비유를 숙고한 다음 교종은 우리에게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MV 9)라고 말한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로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위를 반영하고 나타낼 차례가 되었다.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MV 9)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조함으로써 우리는 교회의 신비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또 한 분의 공의회 교종인 바오로 6세가 지닌 신념으로, 그는 회칙 「주님의 교회Ecclesiam Suam」(이하 ES)에서 이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그리고 몬티니를 지극히 경애하는 프란치스코 교종은 바로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그것을 실현 가능한 모습으로 제시하였다. “교회가 통찰력을 가지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교회 자체의 신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 이러한 교회의 분명하고 활발한 자기 인식은 거룩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이상적인 교회상과(에페 5,27 참조) 현대 세계에 제시되는 실질적인 교회상을 비교해 보도록 이끌기 마련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는 쇄신을 위하여, 곧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성찰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들로 말미암은 결함들을 지적하고 단죄함으로써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과감하고 열정적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EG 26; ES 10 참조)

그리스도께 충실하기 위한 교회의 이러한 쇄신의 갈망에는 ‘회심으로서의 사목’이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기에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선교를 위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고에서는 사명과 교회 개혁의 이러한 연결성이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그의 사도적 권고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하기 위해 항상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UR)의 방향으로 분명하게 나아간다. “교회의 모든 쇄신은 본질적으로 교회 소명에 대한 충실성의 증대에 있다. … 나그넷길에 있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또 인간적인 지상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개혁을 끊임없이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고 있다.”(EG 26; UR 6 참조) 달리 말해 역사 안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의 얼굴에 관한 표현들은 교회 개혁의 확실한 계획을 이끈다.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모상을 따르는 가난한 섬김의 교회

르기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을 부각시킴으로써 공의회 문헌을 재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관심은 훨씬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공의회 문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비의 얼굴의 근본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교회는 자신의 개혁과 회심을 통하여 어떤 측면을 재현하도록 불리는가? 이제 본질적인 구절 몇 개를 상기하고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성 요한 23세의 담화에는 예언적인 말씀들이 내포되어 있다. “저개발국가들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모든 이들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로 보이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요한 23세 교종의 염려가 맨 먼저 호응을 받은 것은 교회의 청빈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대한 숙고를 위해 모인 로마의 콜레조 벨가(벨기에인 사제 신학생 기숙사) 사제 그룹에서였다. 첫 회기 말미에 교회론에 관한 논의를 하는 동안 그 모임에 함께했던 레르카로Lercaro 추기경이 공의회 첫 회기 폐막 전야인 1962년 12월 6일의 유명한 담화를 하여 그 기획의 첫째가는 수호자가 되었다.

공의회의 구심점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도 탁월하게 주장하였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러하였고, 오늘날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교회가, 교종 요한 23세께서 말씀하시듯이 모든 이의 교회라면, 오늘날 특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만일 우리가 교리를 가르치는 일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새롭게 하는 일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고,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공의회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공의회의 주제는 교회 특히 가난한 이들의 교회입니다.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개인들과 집단적으로 가난한 온 세상의 가난한 백성들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가난에 관한 신학적 차원과, 가난하며 가난한 이들의 종인 교회에 관한 성찰의 예고편으로써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장 8항에서 읽을 수 있다. 공의회가 강생하신 말씀이라는 비유에 비추어 교회의 신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할 때에 다음의 성찰을 추가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필리 2,6-7), 우리를 위하여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셨다.’(2코린 8,9) 이렇게 교회는, 그 사명을 수행하려면 인간적인 힘이 필요하겠지만, 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찢긴 마음을 싸매 주며’(루카 4,18 참조),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루카 19,10)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 이와 같이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LG 8)

본문은 교회와 가난 사이에 성경에 바탕을 둔 고유한 관계, 불가결한 관계가 있으며, 레르카로 추기경의 구도에서 가난을 교회 정체성 문제를 설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 보았듯이 뚜렷하게 그리스도론적 바탕이 있음을 강조한다. 계시의 증언에 의하면 가난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는 근원적인 관계가 있다. 그것은 케노시스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느님의 강생 계획에 있어서 우연적인 방식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방식이기 때문이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이어 가도록 불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 교회의 가난에 대한 소명이 솟아난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하신 것처럼 교회도 가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여정을 일러 주신다.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자비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교회는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하고 비추어야 한다.

공의회의 마지막 날 인준을 받은 「교회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AG)도 같은 것을 가르친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에서 성삼위의 사명이 교회의 기초를 이룬다고 하면(LG 2-4 참조) 이 교령은 교회 사명의 마지막 기초가 된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AG 2) “선교 활동은… 구원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를 현존하시게 한다.”(AG 9)

이 교령을 「교회 헌장」에서 표현한 교회론적 노선과 같은 맥락에서 읽어 보자. “이러한 사명은 계속되며 또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 나가야 한다. 곧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또 죽음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그 죽음에서 승리자가 되셨다.”(AG 5)

구원을 주는 자비의 성사인 교회

「사목헌장」(GS)은 인간 역사를 시대의 징표에 비추어 보는 신앙의 독서이다. 이 헌장을 준비한 부서는 1962년 10월 20일자 “모든 이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정신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현존하는 불균형, 사회 계층 간 발전의 격차,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에 관해 서술한다. “굶주림에 짓눌린 사람들이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GS 9) “하나인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나 민족들 사이의 지나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추문을 일으키고, 사회 정의, 평등, 인간 존엄성은 물론 사회적 국제적 평화에 배치되기 때문이다.”(GS 29)

「사목 헌장」에서 “가난의 정신과 애덕이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이며 증거”(GS 88)라고 단언할 때 복자 바오로 6세가 첫 번째 회칙에서 밝힌 근본적인 영감을 다시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자비 활동의 예를 들면서 가난의 복음적 정신에 관한 영감이 서술된 「사목 헌장」에서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다. “특히 현대에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든, 피난민이든, 불법적인 결합으로 태어나 자기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어린이든, 그리고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 말씀을 상기시키며 우리 양심에 호소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GS 27)

다시금 그리스도론적 동기가 부각된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현존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애덕에서 특전적인 사람들이다. 사실 「사목 헌장」 제1부의 모든 인간학적 성찰에는 그리스도론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예비안의 최종 선언문에서 시작하여 각 장의 결론 부분에 요약되어 있다.(GS 22; 32; 38; 45 참조)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의 빛 아래에서 공의회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에 협력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GS 10)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 인간 역사의 열쇠이며 중심이고 결론”으로 신앙의 목표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그리스도론적 신경”은 인간학적 노선으로 발전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GS 22) 그리고 동시대 세상에서 교회가 짊어지는 과제를 다루는 제4장에서 성사-교회론적 노선으로 제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GS 42; LG 1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지상 순례 시간에 인류 가족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선익은 교회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실천하는 ‘구원의 보편 성사’라는 바로 이 사실에서 흘러나온다.”(GS 45; LG 48 참조)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자비의 성사가 되라고 부름받았다. 르기유가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하느님의 성사이신 것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자비의 신비는 이러한 성사적 차원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역사적인 방식의 한 차원이다.

자비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교회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철저하게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제 칙서의 교회론 부분을 정확히 이해할 틀을 갖게 되었다. 칙서는 교회가 양심성찰을 하듯이 “자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길이 잊히고 있고 교회가 용서에 관한 경험이 사라진 세상에 살면서 정의와 율법주의에 첫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비는 교회생활의 토대”라고 간결하게 말한다.(MV 10) 이처럼 복음선포와 증거는 온유함과 연민과 자비로 감싸져야 한다.

더 근원적인 숙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이하 DM)(1980)에서 유래한다. 그분의 기획적인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에서 보이티아 교종이 「사목 헌장」의 핵심 메시지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궁극적인 실제와 소명을 드러내심을 강조했다면(GS 22 참조) 두 번째 회칙은 이러한 인간학적 전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는 전망으로, 곧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아버지의 관점에서 완성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구약 성경과 예언자들의 설교에서 “자비란 죄와 선택된 백성의 불충실보다 더 우세한 사랑의 특별한 힘이라는 의미다.”(DM 4) 신약성경에서 하느님 자비의 진수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표현되어 있다.(루카 15,11-32) 이제 하느님 자비의 근원적인 계시의 절정은 파스카적 신비이다.(DM 7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계획은 당신 백성, 교회를 위한 계획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하느님의 자비는 “세세 대대로”(루카 1,50) 교회의 사명 안에서 빛난다. 그러므로 자비가 인간 중심적이 될수록 더욱 하느님 중심의 방식으로 실현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께 향해야 한다.

여기서 하느님 자비를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하도록 교회에 맡겨진 임무가 유래한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받습니다. …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MV 12) 프란치스코 교종이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20; 46)에서 특별히 제안하였듯이 “우리 시대의 세계가 종종 비참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성년에 우리는 마음을 여는 체험을 하도록”(MV 15) 초대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육체적 자비의 활동(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를 입히고,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고, 아픈 이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일)을 재발견하도록 격려하며, (의심스러운 사람을 권고하고,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죄인들을 충고하며, 괴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모욕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성가신 사람을 인내로 견디며,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영적 자비의 활동을 격려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얼굴을 한 교회

앞에서 말했듯이 프란치스코 교종은 공의회 이후의 교회가 ‘자비의 때’를 살고 있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교종이 인용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이웃에 대한 최대의 외적 표현이 자비라고 했다. “자비는 그 자체로 가장 큰 덕입니다. 자비에서 다른 덕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비는 다른 덕의 부족함을 채워 줍니다. 이는 가장 높으신 분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속성이며, 여기서 하느님의 전능이 잘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추상적인 대화 형태를 넘어 교회 공동체, 본당, 협회, 운동, 복음화와 선교 활동의 주체인 현대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재현하고 ‘자비의 오아시스’를 일으키도록 부름 받았다. 교종은 사도적 권고에서 다섯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복음화하는 공동체’를 묘사하였다. “‘출발’하는 교회는 선교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고, 기뻐합니다.”(EG 24)

첫째, 복음화하는 공동체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 신조어(primerear)로 교종은 우리를 앞서시고, 만나러 오시며, 그 만남을 주도하시는 하느님의 활동 방식을 설명한다. 이것이 은총의 주도권 원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성사로 파견하셨다.”(EG 112) 복음화하는 공동체가 주도권을 갖는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그 무한한 힘을 경험하였기에 자비를 베풀려는 끝없는 열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EG 24)

둘째, 그 결과로 복음화하는 공동체는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뛰어든다.’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굴욕을 당하기까지 낮추며, 필요하다면 “백성 안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진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들은 “양의 냄새”를 풍긴다.

셋째, 복음화하는 공동체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인내하며 오래 기다리면서 “함께 간다.” 그래서 구체적인 환경에 말씀이 육화하게 하면서 생활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복음화하는 공동체는 “기뻐할 줄” 알며 온갖 사소한 승리와 복음화의 자잘한 진전을 두고 새롭게 분발하고 헌신하게 하는 아름다운 전례와 함께 즐긴다.

이러한 모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성사인 교회를 밝혀주기를 바랐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순수한 영성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얼굴을 안겨줄 이상적인 상태를 그린 것이다.